지휘자 오타비오 마리노의 손끝에서 '돈 카를로'의 첫 악절이 흘러나오는 순간, 객석은 기대로 가득 찼다.
마리노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오늘의 연주가 만족스러우리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무대 오른쪽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테너 김재형이 '그녀를 잃었네(Io l'ho perduta)'를 부르기 시작하자, 그의 완벽에 가까운 가창 덕분에 공연에 거는 기대는 더욱 고조되었다.
예술의 전당이 기획, 제작한 베르디의 걸작 '돈 카를로(Don Carlo)'는 7일 첫 공연에서 이처럼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11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9일 공연 없음).
연출가 이소영은 16세기 스페인 왕실을 배경으로 진보와 보수가 대결하는 이 역사극을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으로 바꾸어놓았다.
따라서 장엄한 스펙터클이나 화려하고 고풍스런 궁정의상을 기대하며 오페라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라면, 어둡고 단조로운 무대나 흑백이 주조를 이루는 현대적인 의상에 어느 정도는 실망할 수도 있다.
각 장면에 숨겨져 있는 의미코드를 찾아내 연결하는 수고를 해야만 감동을 얻어낼 수 있는 이런 연출방식은 어찌 보면 불친절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돈 카를로'는 어차피 좌석에 편안하게 기대앉아 발장단을 맞추며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페라가 아니다.
독일의 문호 프리드리히 쉴러의 극본을 토대로 한 이 오페라의 대사는 마디마디 폐부를 찌르며,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베르디의 오케스트레이션은 강렬하고 중후하다.
그런 만큼,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장면들이 연출되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해석이 어려운 장면들의 이해를 돕는 연출노트가 프로그램 책자에 덧붙여지지 않는 것은 아쉽다.
1막에서 스페인 왕가의 묘실들을 배경으로 돈 카를로와 로드리고(바리톤 강형규)가 '우정의 이중창'을 부르자 흥분은 더욱 커졌다. 이만큼 만족스러운 '함께 살고 함께 죽으리라(Vivremo insiem e morremo insiem!)'를 실제 무대에서 체험하기란 쉽지 않다.
에볼리 공주가 궁정의 여인들과 함께 '사라센의 정원에서'를 노래하는 장면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이 오페라에서 유일하게 밝고 화사한 장면이다.
그러나 군중의 '정지동작'으로 시작된 이 장면은 밝은 조명과 다채로운 의상의 색채와 춤동작에도 불구하고 전혀 활기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귀족사회의 매너리즘과 경직성을 보여주려는 연출의 의도를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이 장면에서 베르디의 음악이 펼쳐놓는 분방한 활력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무대였다.
이제 이날 공연에서 전율을 불러일으켰던 장면이 전개된다. 연인을 아버지 필리포 왕의 왕비로 빼앗긴 카를로 왕자가 이제는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연인 엘리자베타와 이중창을 부르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뒷걸음으로 서로에게 다가서며 기쁨과 분노와 고통을 표현하는 이 대목의 절창은 분위기를 최고조로 뒷받침한 환상적인 조명(이우형)과 더불어 관객을 완전히 몰입시켰다.
무대 위의 두 사람은 마치 어두운 밤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섬처럼 보인다. 가슴속 처절한 고통을 섬세하면서도 생생하게 목소리에 담아낸 테너 김재형은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쓰다 드라마틱하게 폭발시키는 엘리자베타(소프라노 조경화)와 더불어 탁월한 장면을 연출했다.
에볼리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미리아나 니코릭의 진가는 뒤로 갈수록 빛을 말했다. 2막의 3중창 '조심해요, 가짜 아들(Trema per te, falso figliuolo)!'에서 보여준 분노에 찬 극적인 연기, 엘리자베타에게 죄를 고백하는 장면 및 '저주스런 나의 미모(O don fatale)'에서 들려준 강렬한 가창은 극의 재미와 활력을 한껏 살리는 데 기여했다.
필리포 2세를 연기한 베이스 엔리코 주세페 요리의 부드럽고 안정감 있는 음색은 독재자의 횡포를 표현하기에는 다소 유약한 감이 있었으나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Ella giammai m'amo)'에서 서정적이고 깊이 있는 그의 표현력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대심문관(베이스 임채준)과의 이중창에서는 두 가수 모두 최상의 연기력을 발휘했다.
언제나 연출가를 깊은 고민에 빠트리는 2막 2장 군중의 합창과 화형 장면. 역시 이소영의 선택은 밝고 생동감 있는 베르디 음악의 분위기를 여지없이 배신하는, 어둡고 분노에 찬 군중장면이었다.
검은 옷을 휘감은 격렬한 몸짓의 스페인 민중, 수탈과 학대로 끔찍하게 짓밟혀 죽어가는 흰옷의 플랑드르 백성들, 그리고 압제자 꼭두각시들의 춤은 관객에게 동학혁명과 광주민중항쟁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기법으로 연출되었다.
SF영화 등장인물 같은 대심문관과 성직자, 군인들의 분장은 권력을 희화화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이처럼 현재화시키는 방식은 대단히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도 어느 장소도 아닌 상징적인 시공간을 선택한 까닭에, 연출의도는 비교적 선명하게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의 효과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가슴에 와 닿는 호소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나의 통일된 맥락으로 관객에게 전달되기에는 의미코드 자체가 다소 모호했던 것이 아닐까. 이 장면의 연기와 춤이 왠지 어색해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로드리고 역의 강형규는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금빛 조명을 받으며 예상대로 가장 감동적인 가창을 들려주었다. '행복한 심정으로 죽어갑니다(Io morro, ma lieto in core)'를 노래할 때 주위의 관객들은 눈물을 보였다.
소프라노 조경화는 '당신은 세상의 허무함을 아시지요(Tu che le vanita)'와 마지막 카를로와의 이중창에서 여린 부분의 더욱 섬세한 표현이 아쉽긴 했지만 풍부한 성량과 표현력으로 최선의 기량을 과시했다.
젊은 시절보다 훨씬 풍요롭고 깊어진 베르디 최고의 음악을 정교한 지휘로 치밀하게 살려낸 지휘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세 시간 반 가량의 긴 공연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몰입할 수 있는 연주였다. 자막 번역이 보기 드물게 세심하고 유려해 관객들이 복잡한 극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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