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김대승 감독 “매번 발가벗겨지는 느낌”

개봉을 하루 앞둔 영화감독의 심정은 어떨까.

26일 개봉하는 ‘가을로’를 만든 김대승 감독을 25일 오후 서울 삼청동 라일라 카페에서 만났다.

‘가을로’는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영화화한 것으로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된 작품이다.

1995년 6월29일 무너진 삼풍백화점 사고로 약혼녀 민주(김지수 분)를 잃은 현우(유지태 분), 민주와 함께 매몰됐다가 혼자 살아남은 세진(엄지원 분)의 10년간 덮어두었던 상처가 민주가 남긴 여행일기를 매개로 치유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매번 발가벗겨지는 느낌”

“굉장히 긴장됩니다. ‘번지 점프를 하다’ ‘혈의 누’에 이어 세번째인데 매번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 혼자 만든 영화가 아니라 투자사 배급사 스탭들 모두 함께 만든 것이잖아요, 크게 욕심부릴 일은 아니고 그 분들께 손해 끼치지 않을 만큼만 흥행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신 관객분들이 ‘좋은 여행 다녀왔다’ 혹은 ‘마음이 따뜻해졌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오늘 잠자리에 들려구요.”

이어 관객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으면 하는 ‘따뜻함’에 대해 덧붙였다.

“영화 속에서 희망을 보셨으면 좋겠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언제 뭐가 터질 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 살면서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으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아프다고 덮어두지 말고 꺼내놓고 소통할 때 상처가 치유된다는 깨달음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고, 주변의 상처받은 분들께 ‘괜찮으신가요?’라고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여유와 따뜻함을 우리 모두가 갖게 됐으면 합니다.”

“덮어두지만 말고 소통하자”

김대승 감독은 ‘짧아서’ 더욱 아름다운 우리 땅의 가을 풍광에 ‘오래 함께 하지 못해서’ 더욱 가슴저린 현우와 민주의 사랑을 실어 ‘가을로’를 만들었다. 분명 눈이 시리게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지만, 영화에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상처와 그에 대한 치유법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10년간 입밖으로 내지 않고 가슴속에 묻어둔 통에 두 사람의 상처가 더욱 곪아버렸듯, 현대사의 아픈 굴곡들을 무작정 덮어버리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 현우와 세진이 민주에 대한 사랑의 기억과 상처를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 서로 나눔으로써 상처가 치유되었듯, 삼풍백화점을 비롯해 덮어버리고 잊어버리기에 급급했던 일들을 이제 수면 위로 끄집어 내 소통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곪은 상처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치유’의 과정을 상처받은 인간이나 역사보다 훨씬 큰 ‘대자연’이 함께 해주리라는 약속이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사건들이 우리 현대사에 많습니다. 삼풍백화점만 해도 살아남은 부상자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 마음 속에 남은 상처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렇지만 왜 멀쩡한 백화점이 순식간에 무너졌는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붕괴 원인을 살펴보면 부실공사를 비롯해 수많은 비리들이 뿌리 깊은 곳까지 얽히고 ?霞? 있을 테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잃고도 그 원인들이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아프다고 덮지만 말고 제대로 상처를 드러내고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멋진 그림들과 절제된 아픔. 가슴이 참 따뜻해졌습니다”

삼풍백화점, 나아가 현대사의 상처와 치유를 담아냈다고 해서 ‘가을로’가 어둡고 무거운 영화가 아닐까하는 추측은 금물. ‘삼풍’은 상처가 생기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일 뿐이다.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닙니다. 사회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 진단하는 영화를 만든 게 아닙니다. 다만 감독이라는 직업이 사회와 소통하고 관객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이다 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곳과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관심을, 관심을 갖다보니 마음 속에 움튼 분노를 소극적으로나마 영화 한켠에 표현해 낸 정도입니다. ‘가을로’는 멜로 영화이고 로드 무비입니다.”

각종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일반시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가을로’가 허전한 가슴이 따뜻해지는 멜로이고 눈이 즐거워지는 로드 무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 우리나라 정말 아름다워요(아이디 accent1414)” “아름다운 화면과 모든 배우들의 호연(bonguszzang98)” “정말 아름다운 영상미와 사랑이라는 정의를 깨닫게 해주는 영화예요(loversemin)” “마음이 저리는 영화. 하지만 보고 난 뒤엔 미소짓게 된다(drivingme)” “가을이 끝나기 전에 꼭 보는게 좋다. 너무 예쁘다. 한국의 가을!(first111)”“여행 끝에 가슴 속 울창한 숲이 생겼다. 위안이 되는 영화(brokenfinger)”“멋진 그림들과 절제된 아픔. 가슴이 참 따뜻해졌습니다(sunny0486)”

상업영화 감독의 ‘어떤’ 고민

일반 시사회에 참석한 관객들의 의견 중에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붕괴 장면에서 온몸의 전율과 슬픔이…. 그리고 찡한 여운….(oral23)”.

실제로 ‘가을로’에는 실감나는 삼풍백화점 붕괴 장면이 등장한다. 외벽이 무너지는 모습,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를 사실감 있게 재현해냈다. 김대승 감독은 우리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역사적 한 장면을 영화 화면으로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었을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무리 제가 상업영화 감독이지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그 순간을 ‘볼거리’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는 연출부, 촬영부, 미술부, 특수효과팀, 컴퓨터 그래픽팀, 무술부 등 많은 부서가 모여 회의를 합니다. 그 때 누차 강조했던 것이 볼거리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책임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공존합니다. 엄연히 존재했던 사건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영화에서 빼고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두 가지 원칙 사이에서 수많은 고민을 했고, 제가 내린 결론은 ‘리얼리티는 살리되 길고 장황하게 표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길어지면 볼거리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밖에서 한 번, 안에서 한 번 ‘짧게’ 두 번 넣었습니다.”

지난 10일 ‘가을로’의 주연 엄지원을 만났을 때 김대승 감독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강력한 신뢰를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촬영 현장에서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치열하게 일하는 감독님을 뵈면서 ‘이 분이라면, 우리의 노력을 합해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주시겠구나’하는 믿음이 생겼어요. 모두의 고생을 헛되지 않게 해주시리라 믿어요.”

어떤 질문을 들이밀어도, 차분하지만 분명한 톤으로 자신의 주관과 영화 철학을 드러내는 김대승 감독을 보며 ‘올곧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서두르지 않고, 길어야 3개월이면 끝나는 촬영 풍토 속에서 10개월을 찍어 만든 ‘웰 메이드’ 멜로 ‘가을로’는 26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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