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에 따라, 연주 레퍼토리에 따라 소리와 연주에 많은 차이를 보이는 악단이다. 이는 음반 시리즈로 발매되고 있는 그들의 방송실황 음반에서 증명된다.
아드리안 볼트에서 시작해 피에르 불레즈, 루돌프 켐페 등 거장 급의 지휘자들이 여럿 거쳐 갔지만 그 명성이 여느 악단보다 크지 않은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그만큼 지휘자의 개성과 해석을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잘 길든 유연한 악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올해부터 새로이 BBC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지휘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는 국내 팬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주목받고 있던 중견 지휘자다.
1990년대 체코의 양대 오케스트라라 할 수 있는 프라하 심포니와 체코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한 그의 연주력은 샨도스 레이블에서 발매된 음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등장한 BBC 심포니의 사운드는 당연히 과거와 사뭇 달랐다.
한결 날렵해진 탄력성과 기민함은 10년 전 내한 당시 무색무취에 절도 부족으로 아쉬움을 남겼던 앤드루 데이비스 지휘 때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미덕이다. 이는 새로이 맞은 지휘자가 가진, 동구권 출신 특유의 독특한 리듬감에 연주자들이 반응한 결과였다.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후안'에서 제일 먼저 귀를 끌어당긴 것은 고음 현악 파트였다. 비교적 젊은 주자들이 포진해 있었던 바이올린 파트와 목관파트는 중견 이상으로 구성된 저음 현악부 및 금관 파트에 비해 음색이 투박하고 날카로웠다.
음색의 차이는 이질감을 유발했지만, 그만큼 작품 안에 녹아 있는 그들이 주관하는 다양한 테마들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피아니스트 임동혁과의 협연으로 관심을 모았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은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의 호흡이 돋보이는 호연이었다.
벨로흘라베크는 임동혁의 피아노 음색에 맞추어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조율하는 유연함을 과시했다. 슈트라우스에서 날카롭고 예민한 소리를 내뿜었던 현악 파트는 임동혁과의 연주에서는 보다 섬세하고 반짝거리는 사운드를 연출했다.
쇼팽이며 라흐마니노프 등 스케일 넘치는 레퍼토리에 치중하던 임동혁의 모차르트는 그의 또 다른 재능을 보여주는 호연이었다.
명료하면서도 안정적인 터치는 사운드나 감정의 과장을 억제하고 음표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으며, 여기에 그의 타고난 음색은 더할 나위 없이 찰떡궁합을 이루었다.
작곡가보다 연주자의 존재감과 개성이 더 뚜렷했던 과거 레퍼토리들에 비해 이번 연주는 작곡가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부각시키면서 연주자의 겸손함과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2부 순서로 연주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서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음향 효과가 탁월하게 살아났다.
한 치라도 어긋나갔다는 자칫 오합지졸이 되기 십상인 이 교향곡에서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들은 서로 오랜 호흡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앙상블을 이루어 나가면서도 각자의 독자적인 소리를 당당하게 내세웠다.
다만 기민하지 못했던 목관이 뒤로 처져 둔하게 반응했을 뿐 날카로운 고음 현악과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금관의 찬연한 음색이 작품의 카리스마를 살렸으며, 슈트라우스에서 머뭇거리던 아쉬움을 보여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는 힘차고 역동적으로 작품에 풍성한 무게감을 실었다.
연주의 전체적인 완성도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관객들을 기쁘게 했던 것은 연주에 임하는 단원 모두의 성실하고 열중하는 태도였다.
수십 년의 전통을 가지고 매해 100회가 넘는 콘서트를 주관하는 오케스트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너리즘을 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어린 청년 단원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장에 이르기까지 BBC 심포니의 연주자들은 지휘봉과 악보에 집중하며, 수십 번은 연주했을 작품들을 마치 처음 대하는 양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음악에 몰입했다. 그들의 치열한 모습은 관객들에게 흐뭇함을 안겼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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