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 일어난 원전연주 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바로크 시대는 물론 초기 고전주의 이전 시대까지 일부 사조의 주도권을 원전 악기에 넘겨준 이후, 현대 악기 연주가들은 자신의 악기에 원전 연주법을 적용하며 타협점을 모색해 왔다.
바흐의 건반악기 작품들이 대부분 하프시코드라는 시대 악기로 녹음되는 상황에서, 그러나 안젤라 휴이트는 모던 피아노를 선택하여 11년간에 걸쳐 바흐 건반악기 전곡 시리즈(하이페리온사)를 완성했다.
이 11년의 세월 동안 18장의 음반이 출시됐으며, 그 중에서도 평균율(1997년)과 골드베르크 변주곡(1999년)은 악기와 상관없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녀를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각인시켰다.
지난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된 그녀의 첫 내한무대는 시기적으로 의미와 명분이 넘쳤다.
그녀의 바흐 전곡 시리즈가 완성된 것이 지난해였으며, 공연 바로 며칠 전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 잡지 '그라모폰'은 휴이트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녀를 '올해의 음악가'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애호가들은 연주곡목이 바흐로 점철되길 바랐으며 심지어 흔히 볼 수 없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전곡 연주회까지 욕심을 냈지만 프로그램은 베토벤과 바흐로 절반씩 구성되어 있었다.(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또한 그녀는 따로 전곡 녹음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휴이트의 바흐는 과연 소문대로였다. 1부에 연주된 영국 모음곡 6번이 아기자기한 색채감이 돋보이는 연주였다면 2부에 연주된 프랑스 모음곡 4번은 리듬감과 동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움직이는 영상과도 같았다.
영국 모음곡의 경우, 그녀는 다소 경직된 듯 처음 세 곡은 무미건조하게 흘려 보냈지만 네 번째 사라방드에서부터는 본연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아기자기하지만 일관된 프레이징이 유지되는 가운데 다양성을 끌어내는 그녀의 무기는 터치였다. 스타인웨이 대신 파치올리를 선택한 그녀는 이 새로운 악기에서 다양한 색깔과 톤을 끌어냈다.
오른손이 명징하게 왼손을 이끌어가는 가운데, 두 편의 가보트에서는 리듬에 생동감이 더해졌으며, 파치올리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음색 또한 적절하게 이에 부응했다.
프랑스 모음곡에서는 왼손의 약진이 돋보이는 가운데 양성부가 동등한 소리를 가지면서 대위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넘치는 리듬감과 유연한 프레이징, 생기 넘치는 터치로 각각의 모음곡들은 춤곡 본연의 탄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나중 앙코르로 연주된 프랑스 모음곡 5번 중 '지그'에서는 이러한 품위있는 역동성이 가장 효과적으로 연출됐다.
바흐와 달리 그녀의 베토벤은 호불호가 엇갈리는 연주였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은 1악장에서 템포의 변화가 극단적으로 시도됐다.
휴이트의 루바토는 느리고, 중후한 서주부와 그 뒤를 잇는 빠른 알레그로는 선명하게 대립관계를 이루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다이내믹한 감정이 이후 따르지 않았다.
단정하고 안정감 넘치는 정체성 속에서 템포의 극단적인 변형은 무리한 이질감을 초래했으며 결국 청춘의 격렬한 열정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마지막 프로그램이었던 피아노 소나타 3번은 그동안 베토벤 초기 소나타에서 간과되었던 바로크적인 특성이 엿보이는 연주였다.
수수하지만 절도있는 강약의 변화 속에, 거칠고 세찬 낮은 음역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높은 음역이 동등한 존재감으로 어우러져 균형감 있게 완성한 1악장은 특히 인상 깊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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