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원,부산영화제 개막식서 왜 울었을까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가을로’의 주인공 엄지원이 개막식 무대인사에서 눈물을 흘렸다. 왜 울었을까.

엄지원은 16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당시 상황을 전했다.

제작진에 전하는 ‘감사’의 마음

“‘가을로’ 촬영에 10개월이 걸렸다. 보통 작품보다 긴 시간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 소감을 얘기하는데 그 10개월이 눈 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좋은 작품 만드느라 고생하신 스태프 얼굴도 차례로 떠올랐다. 정말 고생 많으셨다. 그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어 얘기를 꺼내는데, 함께 고생한 일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다. 큰 무대에 선 긴장이나 감격 때문이 아니었다.”

이어 “눈물이 금세 멈추지 않아 난감했는데, 안성기 선배께서 ‘엄지원씨 눈물 덕에 개막식이 좋게 마무리됐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했다”고 덧붙였다.

감성이 섬세한 배우의 ‘눈물’

엄지원의 눈물은 개막식 이틀 전인 10일에도 볼 수 있었다. 서울 삼청동 라일라 카페에서 오후 3시 그녀를 만났다.‘가을로’ 개봉에 즈음하여 비슷한 얘기를 많이 했을 것 같아 ‘가을로’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졌다. 엄지원이 스스로 꼽는 ‘베스트 장면 3’가 그것.

엄지원은 제일 먼저 정우성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똥개’의 한 장면을 선택했다. 철민(정우성 분)이 마당에서 발로 빨래하는 사이, 정애(엄지원 분)가 방 문턱에 걸터앉아 빨래를 개며 차 반장(김갑수 분) 집에 수양딸로 들어오게 된 사연과 자신의 가족사를 덤덤하게 말하는 장면이다.

“첫 번째 테이크에서 감정이 치올라 많이 울었어요. 곽경택 감독께서 차분하고 덤덤하게 하라고 주문하셔서 다시 찍었어요. 그래서 영화에서 보면 그저 덤덤하게 나오는데요. 영화를 찍는 동안 밀양에서 칩거하듯 2개월을 지냈는데, 그 신을 찍은 후에도 밤이면 정애의 인생살이가 가여워 마치 제 인생인양 서럽게 울었어요.”

3년 전 얘기를 하는 엄지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치 어제 일인 양, 또 자신의 일인 양 우는 그녀를 보며 역시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배우들은 감성이 섬세하고 감정이 예민할 거예요. 어떤 캐릭터를 맡았을 때 ‘이렇게 연기해야겠다’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해요. 아마 정애의 인생사에 대한 감정이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정애를 연기할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시 엄지원은 연기파 김갑수와 정우성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고 영화 속에서 정애를 부각시키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비극으로 끝났다면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몰라요”

두 번째는 ‘주홍글씨’에서 연습을 통해 첼로를 직접 연주한 장면, 세 번째는 ‘가을로’의 마지막 장면을 꼽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다룬 김대승 감독의 세번째 장편 ‘가을로’에서 엄지원은 민주(김지수 분)와 함께 매몰됐다가 혼자 살아남은 세진 역을 맡았다. ‘가을로’의 끝 장면은 세진과 현우(유지태 분)의 상처가 치유됐음을, 또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진은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과 매몰된 경험에서 오는 폐쇄공포증, 절망, 공포 등 네거티브한 감정의 결집체예요. 두려움에 잘 때도 불을 못 끄고 ‘쿵’ 소리만 들려도 히스테리를 일으키죠. 그래서 영화를 찍는 내내 마음이 어둡고 무거웠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잠시 동안이나마 그 인생 자체를 살려고 노력하는 게 제 연기 방식이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만일 마지막 장면이 없었다면, 영화가 비극으로 끝이 났다면 전 지금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요. 반쯤 미쳐서 어디로 사라지고 여기 없을지도 모르죠(웃음). 마지막 장면으로 저도 치유되고 희망을 얻은 느낌이에요.”

욕심은 금물…1년에 한 편씩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연기하지만, 엄지원은 다작 배우가 아니다.

영화만 보자면 2003년 ‘똥개’(곽경택 감독), 2004년 ‘주홍글씨’(변혁 감독), 2005년 ‘극장전’(홍상수 감독), 2006년 ‘가을로’(김대승 감독) 등 1년에 1편씩 출연해 왔다. 출연작 면면을 살펴보면, 가벼운 흥행 코드의 영화가 아닌 명성있는 감독의 완성도 있는 작품들이다.

“어느 배우나 그렇듯 사실 쉴 때 불안해요. 이러다 다시 작업 못하면 어쩌나. 그렇지만 다작 출연은 결국 저를 소모시키고 망가뜨리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작업이 엄지원이라는 배우를 성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일하고 싶은 욕심을 꾹꾹 누르며 시나리오들을 열심히 읽어요. 나중에 생각했을 때 ‘내가 이 작품에 출연한 게 영광이다’라고 생각될만한 영화를 선택하려 노력하구요.”

“제가 너무 ‘느낌론자’ 같은가요?”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할까.

“욕심을 절제하며 시나리오를 읽다보면 느낌이 와요. 그리고 감독님을 만났을 때 ‘이 분이랑 하면 되겠다’는 느낌이 오는 분이 계세요. 이번에 김대승 감독님 같은 경우도, ‘이 분이라면 좋은 작품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믿음을 주시더라구요. 저는 그런 ‘느낌’을 중시해요. 그리고 제가 원한다고 다 출연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행히 그동안은 감독님들도 제게서 영화나 캐릭터에 어울리는 어떤 느낌을 받으셔서 캐스팅해 주셨던 게 아닌가 해요. 너무 ‘느낌론자’ 같은 얘긴가요?”

영화계엔 때때로 밤하늘의 유성처럼 스타 배우가 급부상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엄지원은 스타라기 보다 차곡차곡 ‘한 번에 한 개씩’ 널찍한 돌을 쌓아가는 돌탑 같은 배우다. 지금은 4층 석탑이지만, 어디까지 성장해 갈지 끝이 보이지 않는 배우다.

나이 서른, 여배우로서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엄지원에게선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극장전’에서 열아홉살 검정고시 준비생과 한물 간 여배우 최영실을 오가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듯, 엄지원의 나이는 그녀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와 같을 뿐이다. 그녀가 다음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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