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남자배우라면 꿈꿔볼 만한 배역"

빤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살갑게 느껴지고 새삼 존재를 깨닫게 되는 배우. 정재영이 그렇다. 화려하지 않지만 언제나 영화 속에서 펄펄 살아 있는 연기로 격정과 열정, 순박함과 순수함을 전한다.

사진을 찍으려고 옷을 '기껏' 갈아입었음에도 원래 입고 있던 트레이닝 바지와 협찬받은 수십만원짜리 청바지와의 차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할(협찬사에 미안한 발언!) 만큼 평범하고 털털한 얼굴과 외양이지만 일단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정재영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정작 본인은 "장진 감독의 여섯 작품 중 두 편째 주인공을 맡았을 뿐으로, 도대체 왜 '장진 사단'의 대표 배우라는 말을 듣는지 모르겠다"지만 정재영은 19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거룩한 계보'의 동치성을 통해 그 까닭을 확실히 보여준다. 장진 감독이 작심하고 새로운 유형의 '장진식 영화'를 만들겠다고 표방한 '거룩한 계보'에서 동치성 역의 정재영이 중심을 잡아주지 못했다면 이처럼 전혀 새로운 '조폭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들의 감성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깊숙이 들어가 있는 영화입니다. 나약한 조직폭력배 한 놈이 부모가 린치를 당한 후 화려한 복수를 꿈꾸는 그런 할리우드 스타일의 조폭 영화가 아니라 사람들의 '정'에 관한 영화죠."

그는 이 영화가 결코 '쇼생크 탈출'이 아니라고 말한다. 10년 동안 큰형님을 모시는 왼손잡이 칼잡이 동치성이 형님의 명에 따라 한 박사를 찌른 후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 죽마고우 순탄을 만나고 이들은 형님의 배신에 탈출을 감행한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 영화는 동치성을 중심으로 그의 오랜 친구 주중, 순탄과 함께 감옥에서 만난 이들이 한데 엮는 다양한 캐릭터의 이야기다.

장 감독의 전작보다 훨씬 진중함이 더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사와 상황 속에 기막힐 정도의 위트가 없는 건 아니다.

"예전 장 감독님 영화가 재치와 진중함 중 과다할 정도로 재치 쪽에 기울었다면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재미보다는 진중함 쪽에 무게를 뒀습니다. 특이한 소재와 줄거리가 아닌 일반적인 소재로도 장진식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던 거죠. 조폭 영화의 일반적 구도를 따라가면서도 그 안에 담고 있는 건 역시 장진식의 영화라는 겁니다.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을 내놓았을 때 너무나 잔인하다고 했던 관객이 잔혹함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올드보이'가 나올 때는 으레 그러려니 하며 접근하는 것 처럼 장감독 스타일 영화에 관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장 감독이 스타일을 변주할 때는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그게 정재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치성은 그냥 원래부터 그런 놈입니다. 정보와 형량을 교환하려는 검사에게 '검사님 저 잘 모르시죠'라고 말하고, 감옥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친구를 마치 웬수 만나듯 하는 놈입니다. 순박하고, 무식하고. 그렇지만 얼마나 멋져 보입니까. 남자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배역 아닌가요. 싸움 잘하고, 말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등 뒤에서 찌른 후배에게 '너 얼굴 못봤으니 얼렁 뽑고 가라잉'이라 말할 정도로 쿨하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동치성을 표현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를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그는 단순히 '장진 사단의 대표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다.

"장 감독님 영화에서 고려할 점은 항상 똑같아요. 리얼리티가 살아 있으면서 그 속에 함정이 있죠. 무거움과 코미디가 공존하는. 그냥저냥 연기하면 캐릭터가 망가집니다. 진지함과 코미디의 선을 잘 그어야 하는데 이번 동치성 같은 인물은 굉장히 '센 놈'이잖아요. 저렇게 센 놈이 하는 말이 유머로 느껴져야 하니, 그 극단의 선이 캐릭터 안에서만 놀아야 했습니다. 웃기든지 울리든지 심각하든지, 그 모든 것이 캐릭터와 상황으로만 설명돼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그는 관객을 웃기면서도 동치성의 캐릭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독방 장면을 예로 들었다. '빨갱이'와 '살인마'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형수 방 사이에 있게 된 동치성이 왔다갔다하며 그들의 말을 전하는 장면은 웃기면서도 애잔하다.

"그 장면에서 동치성의 순수함과 순박함이 느껴져야지, 코미디로 보이면 안 되는 거다"라고 말하며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영화가 '무간도'의 장진 버전이다. '친구'가 한국 조폭 영화의 한 획을 그었는데 비슷하게 하면 4~5년 전 이야기를 극복하지 못한다. '무간도'나 '친구'와는 전혀 다른 식의 접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말하는 '정'이란 뭘까.

"무뚝뚝함 속에 느껴지는 정이죠. 보통 '저 사람 무뚝뚝하다'는 건 '정이 없다'는 표현인데, 일상적인 정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무뚝뚝함 속에 그보다 더한 정이 있습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런 정도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또한 역설적으로 깡패는 깡패일 뿐이라는 것도 드러내죠. 아무리 속깊은 정이라 할지라도 깡패는 그냥 깡패일 뿐, 그 이상도 아니니 괜한 환상을 갖지 않게 합니다."

영화 '거룩한 계보'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배우라는 직업을 바라보는 정재영의 시각으로 마무리됐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의식한다 해서 의식한 대로 되는 것도 없더라"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정재영이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서 배우로서 치열한 고민과 뚜렷한 목표가 뚜렷하게 와닿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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