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비온다. 그거 알아? 나 집 나오던 날도 비가 왔는데…. 엄마가 해주던 부침개 그거 해보려했는데, 똑같은 맛이 안 나오네…."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를 보면 이 대사가 알알이 가슴에 박힌다. 더불어 이 대사를 내뱉는 철부지 다방 아가씨 '김 양'의 모습은 눈시울을 촉촉이 적신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라디오 스타'는 감동 속으로 질주한다.
'라디오 스타'에는 안성기와 박중훈만 있는 줄 알았던 관객에게 김 양은 이 부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자칫 스쳐지나갈 수 있었던 역할이 그로 인해 만개했다. 더불어 그의 명연기로 인해 '라디오 스타'만의 인간미는 비상하게 된다.
이처럼 막중한 역할을 해낸 이는 신예 한여운(본명 안미나ㆍ22)이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김삼순의 수제자로 출연했던 순박한 '촌닭'이었음을 알아챈다. 그런 그가 살을 빼고 요란한 분장을 통해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다방 아가씨로 변신한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부터 감격했고 오디션 때부터 북받쳐 울었어요. 저요? 저는 집 안 나왔어요.(웃음)"
사실 김 양 역을 못 맡을 뻔했다. 이준익 감독이 그를 보고 "너무 대학생 같다"고 지적한 것.
"감독님께 '다방 아가씨는 꼭 얼굴에 점이 있고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욕심을 부렸어요. 그간의 다방 아가씨 설정들이 너무 전형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없어서 염색은 못하고 파마만 했는데, 까만 머리가 오히려 더 촌스럽게 나왔다는 거예요.(웃음)"
다방 아가씨의 경력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재 연세대학교 철학ㆍ심리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한여운은 연기가 하고 싶어 고등학교 때 대학 입시공부를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걱정하셨고, '일단 대학에 들어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 역시 대학에 가서 내 마음대로 연기를 하자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뮤지컬과 연극에 뛰어들었구요."
뮤지컬 '피터팬', 악극 '미워도 다시 한번'을 통해 연기를 익힌 그는 드라마 데뷔작 '내 이름은 김삼순'이 빅히트하며 덩달아 얼굴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하기까지 수많은 오디션에서 미끄러졌어요. 그러다 그 드라마를 만났는데, 드라마가 방영 중일 때는 사람들이 종종 저를 알아봤고 저 역시 일이 좀 되는가 싶었어요. 그런데 드라마가 끝나고나니 거기서 끝났어요. 또 제자리걸음을 하는 게 아닌가, 평생 이렇게 작은 역만 하다가 마는 건가 싶은 생각에 많이 우울했습니다. 연기한다고 휴학을 덜컥했는데, 들어오는 역은 없고 집에서도 대학생이라고 학비는 고사하고 용돈도 안 주셨기 때문에 정말 막막했습니다.(웃음)"
해사한 얼굴에 티 없이 맑은 미소를 띠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한여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험난한 연예계에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 갈 필요없이 '라디오 스타'를 보면 그의 연기자로서의 가능성과 '끼', 자세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디오 스타'의 제작사 영화사아침의 정승혜 대표는 "'도마뱀' 때부터 여운이를 캐스팅하고 싶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아 안타까웠다. 그런데 이번에 적역에 기용해 정말 기분 좋다"면서 "지혜가 넘치는 신인 배우다. 이번 김양의 콘셉트 역시 본인이 다 잡아왔다. 조급한 마음만 먹지 않는다면 좋은 재원이 될 만한 신인"이라고 극찬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그러나 그 기회를 제 것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정 대표가 "'라디오 스타'가 건진 월척"이라는 표현까지 하는 것을 보면 한여운은 날아오는 공을 시원하게 받아쳤다. 한여운의 씩씩한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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