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하겐 4중주단 내한공연

한국이 실내악의 불모지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어려운 4중주단은 특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일단 빠져들고 나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관객 또한 4중주단의 무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4중주단, 특히나 국제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해외 4중주단의 공연의 객석은 언제나 소수이지만 극단적인 추종자들로 들어차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하겐 4중주단은 독일의 알반 베르크 4중주단과 더불어 마니아 층을 가장 폭넓게 확보하고 있는 실내악단이다.

이제는 절판된 그들의 과거 음반이 골수 애호가들 사이에서 국제적인 거래망을 통해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과 DG와의 계약이 연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내악 층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1981년 하겐 가문 출신들의 남매들로 창단되어 1987년 제2바이올린만 라이너 슈미트로 바뀐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악단이다.

창단 당시 그들이 보여준 열정과 패기, 그리고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젊음의 미덕이 창단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3일 LG아트센터에서 펼쳐진 이들의 두 번째 내한 무대는 고전을 발판으로 세워진 세련된 모던함이 느껴지는 연주였다.

이날 프로그램은 하이든 Op.74의 3번 '기사'와 쇼스타코비치 3번 Op.72, 그리고 드보르자크 13번 Op.106으로 구성되었다.

하이든에서부터 엿보인 그들의 무기는 가공할 만큼 완벽한 호흡과 앙상블이었다. 바이올린 2대와 비올라, 첼로는 각기 자신의 등장시간에 맞추어 알아서 목소리를 높였고 이 모습은 의도된 연출이나 해석이라기 보다는 마치 재즈의 인터플레이를 연상케 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흔히 앙상블은 주도하는 리더의 카리스마가 돋보이게 마련이지만, 하겐 4중주단에는 각 단원의 비중이 매 작품, 매 악장, 매 프레이즈마다 시시각각 바뀌었다. 결국 네 대의 악기가 통으로 하나의 악기처럼 일사불란하게 곡을 따라 흘러갔다.

그렇게 연주한 하이든은 작곡가가 추구하던 고전주의를 대단히 명료하게 투영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고답적이지 않고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또한 현대적이었다.

1부 두번째 순서로 연주된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13번은 그러나 이처럼 선명했던 하이든이 단순한 워밍업에 지나지 않았다고 느껴질 만큼 빼어난 호연이었다.

하겐은 쇼스타코비치가 이 작품에 불어넣은 다채로운 음색과 표현과 효과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주로 기교와 음향효과에 치중한 탓에 대부분의 악단이 간과해 버리는-각 악장 별로 대립되는 다양한 정서와 정신성, 즉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냉소와 유머, 이러한 상반된 감성들의 충돌을 대단히 완벽하게 재현했다.

그들은 빠른 악장에서는 요철이 분명하게 드러날 만큼 탄력이 넘치고 재치있게 율동하면서도 느린 파사칼리아 악장에서는 반음계적으로 변이된 고전주의의 내면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관객들은 몰입했고, 무대 위의 단원들이 마지막 악장을 끝내고 활을 내려놓은 다음에도 한참 지나서야 박수가 나올 정도였다.

드보르자크의 현악 4중주 13번은 국내에서는 쉽게 연주되지 않는, 30분이 넘는 장시간의 러닝타임을 가진 대곡이다. 곡의 구성과 형식적인 측면, 그리고 작품 길이로 보아 실내악으로 압축된 교향곡이 연상될 만큼 탄탄한 층을 이룬 작품이었다.

1부의 쇼스타코비치에서 세밀화를 그리는 정교함의 수준을 뽐냈다면 드보르자크에서 하겐은 정반대로 음을 건축하는 거시적인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곡의 성격상 아기자기하거나 세세한 맛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지만, 통으로 그린 그들의 음악은 대담하고 또한 활력이 넘쳤으나 결코 엉성하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나라(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모차르트의 도시(잘츠부르크)의 대표 실내악단으로 활약하는 그들이 모차르트 서거 250주년인 올해 모차르트를 제시하지 않은 데는 일말의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앙코르를 통해 그들은 그런 아쉬움마저 말끔히 씻어 주었다.

그들이 앙코르로 연주해준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 D장조 K575의 1,2,4악장은 이날 공연을 잊지 못할 감동으로 각인시켰다.

고도의 집중력은 자연스럽게 감정적인 몰입으로 이어졌다. 특히 2악장은 눈물이 핑 돌 만큼 아름다운 연주였다. 무대 위의 홍일점인 베로니카 하겐(비올라) 또한 활을 내려놓은 뒤 눈가에 눈물이 약간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진행된 하겐의 사인회는 짧고 굵게 진행되었다. 늘어선 줄은 예의 슈퍼스타들보다는 짧았으나 팬 한 명 한 명이 들이댄 다량의 낡은 수집 음반들은 무궁무진했다.

그 폭은 넓지 않을지언정 소수이지만 진지한 사랑을 받고 있는 하겐 4중주단의 명성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실내악적 가치를 그 자체로서 상징하고 있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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