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우 "영화 속 고니만큼 저도 컸지요"

연기 잘하는 배우를 스크린에서 만나는 건 큰 즐거움이다. 배우를 통해 허구의 인물은 옆에 서 있는 듯 친숙하며, 또 다른 나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스물여섯 살. 아직은 '어린' 나이임에도 '연기파'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조승우가 영화 '타짜'(감독 최동훈, 제작 싸이더스FNHㆍ영화사 참)를 통해 연기의 참 맛을 느끼게 했다.

2시간16분에 이르는 영화 전편을 책임지는 주인공으로서 조승우는 백윤식, 김혜수, 유해진, 김윤석 등 쟁쟁한 선배들과 견줘도 결코 기죽지 않았으며, 영화 '타짜'가 고니의 성장영화로서 원작과 차별화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동력을 발휘했다.

1999년 데뷔작 '춘향뎐' 이후 '와니와 준하' '후아유' '클래식' '말아톤' '도마뱀' 등 주로 감성적인 영화에 출연해왔던 그는 '타짜'를 통해 순진한 젊은 남자가 자신이 선택한 도박판이라는 길을 걸으며 깨지고 부딪히며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가 연기한 고니는 남성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이다.

◇"고니의 열정, 광기, 꿈을 관객이 느꼈으면"

시사회가 끝난 후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매번 첫 시사회 무대에 오르는 게 떨리지만 이번 작품에 특히 애정을 쏟았기 때문인가 보다"라는 그의 말.

고니는 시골의 한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순박한 청년이었다. 공장에서 벌어진 화투판에서 3년 동안 번 돈뿐 아니라 누나의 위자료까지 몽땅 잃고 난 후 타짜(전문도박사를 일컫는 은어)의 길로 들어선다.

"순진한 아이죠, 고니는. 그런 아이니까 도박에 빠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게임기를 쥐어준 것 같다고나 할까요. 도박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철없는 바보지만, 도박에서 사람을 망치는 게 '희망'이라고, 희망에 모든 걸 겁니다. 답답한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있었을 거예요."

고니를 시나리오로 처음 대할 때 사람들을 만나면서 고니가 변화해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도박판에서 내적으로 성숙해지기도 하고, 사는 법을 배워가는.

"고니는 상황에 따라 보호색을 띠는 남자예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대하는 게 스스럼없죠. 평경장을 대할 때 말로는 선생님이라고 그러면서 능글맞게 굴기도 합니다. 영리하고 상황 판단이 빠르기도 하고. 세상에 꿀릴 게 없으니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해방구를 찾고 싶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도박을 선택했을 겁니다."

영화는 평경장(백윤식)이 아귀(김윤석)한테 살해당했다고 믿는 고니가 아귀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도 있다. 그 길에서 숱한 인간군상을 만나는 것.

"아귀를 존경하면서도 붙어보고 싶은 '깡'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복수심과 함께 지존이라는 사람과 한 판 붙어보고 싶은 승부욕인거죠. 고니의 열정과 광기, 추구하는 목표를 일반 관객이 느꼈으면 합니다."

전쟁 같은 화투판에서 살아남는 고니는 절대 순진한 남자가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아귀를 만나기 위해서 치밀하게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야수성을 갖고 있다.

조승우의 여린 얼굴과 맑은 미소는 고니가 그럼에도 잃지 않는 순진함을, 크지 않은 눈에서 뿜어나오는 독기 어린 광채와 광기 어린 비릿한 비웃음은 고니의 야수성을 동시에 담아낸다.

◇"꿈을 이뤘고, 편하게 사는 법도 배워간다"

고니의 꿈은 돈이 아닌 진짜 타짜가 되는 것, 즉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서 지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승우의 꿈은 뭘까.

"2~3년 전만 해도 좋은 무대, 좋은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었어요. 그 꿈을 어느 정도 이룬 것 같네요. 지금요? 글쎄요. 뭘까. 그러고 보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러면서 전혀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전 로맨티스트가 아니지만, 꿈이란 게 있다면 '사랑' 같아요. 내가 챙겨줄 사람, 내 쉼터가 돼 줄 사람이 없다면 인생에 의미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젊었을 때는 일과 사랑을 동시에 잡을 수 있겠지만 어느 순간 일과 사랑 중 우선 순위가 있더군요. 제 답은 사랑일 것 같아요."

그 답을 하면서 영화 '타짜'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했다. 목표를 이룬 고니는 외국에서 자유롭게 떠돈다(마치 나이 들어 승부를 비롯한 모든 것에 초탈한 평경장처럼). 그때 생각나는 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며.

"남자에게 사랑은 뭔가 끈끈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고니의 진심, 의리가 화란에게로 향합니다. 대사에서 고니는 사랑을 의리라고 표현하죠."

지난 몇 년 간을 그는 쉼 없이 달려왔다. 계속해서 뮤지컬과 영화에 출연해왔다. 이젠 ('좋은 작품이 들어오기 전까지'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쉬면서 성악과 평소 다뤄보고 싶었던 악기를 배우며, 기회가 된다면 유럽 여행도 하고 싶단다.

"'타짜'를 관객 앞에 내놓으면서 꽁꽁 숨겨뒀던 쌈짓돈을 꺼내 쓴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주머니를 채워야죠. '타짜'와 고니를 한동안 음미하고 싶기도 하구요. 이전 작품까지는 한 작품 촬영이 끝나면 곧장 다음 작품 캐릭터를 연구해야 해 얼른 그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이번엔 아직 다음 작품이 결정되지 않았으니 오래도록 '고니'의 여운을 즐기고 싶네요."

아직 올해가 다 가지 않았지만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일본 공연과 앙코르 공연이 호평받은 데다 영화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해 알차게 보냈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이젠 편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뮤지컬 '헤드윅'을 연출했던 이지나 씨가 멜로 영화에서 감성적인 연기를 주로 해온 그를 두고 "너 왜 그렇게 사니? 깨버려. 쿨하게 해. 놀면서 할 수 있어. 젊은 애가 젊었을 때 젊게 해야지, 넌 너무 늙었어"라며 확 '깨는' 말을 했을 때 뭔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단다.

"진짜 그렇더라구요. 왜 그렇게 진지하게만 살려고 했는지. 전 제 작품에 대해 자부심이 컸어요. 내 작품은 최고는 아니지만 좋은 작품이라는 프라이드가 있었죠. 그런데 거기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더라구요. 내 나이에 맞춰 살아야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내 나이 이상인 배역을 연기하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젊을 때는 실수를 해도 괜찮다는 걸 몰랐어요."

생각을 바꾸고 나니 스스로 생각해도 딴 사람이 됐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편해졌고, 그토록 어려웠던 인터뷰도 이젠 편하게 응한다.

'성장'이란 단어가 이처럼 어울릴 수 있을까. 스물여섯의 조승우는 계속 성장중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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