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의 무죄판결로 제가 당당해졌다는 게 아닙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는 몸으로 호텔에서 다른 여성과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큰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개그맨 권영찬 강간치상 긴급체포’란 보도만 기억하지 마시고, 제가 겪은 일에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팬 여러분, 네티즌 여러분의 무죄판결을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해 6월16일 개그맨 권영찬은 긴급체포됐다. 6월5일 새벽 5시 반부터 오전 8시 반까지 3시간을 한 호텔방에서 보낸 여성이 6월9일 오후 1시 경찰에 ‘강간치상’ 혐의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7월20일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한 달 이상 구치소에 감금돼 있었고, 지난해 9월5일 1심 유죄판결을 거쳐 올 6월8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현재는 1심과 2심 법정에서 말을 바꿔 진술한 상대 여성 Y씨를 위증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그리고 지난 11일 몇몇 언론은 “서울중앙지법, 개그맨 권영찬 ‘성폭행 위증’ 여성에 체포영장 발부”란 제목의 기사로 그의 결백이 입증됐음을 보도했다.
긴급체포, 수감, 유죄판결, 다시 무죄판결…. 드라마 같은 일련의 사건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무엇일까. 단편적 보도가 아니라 그의 입으로 ‘풀 스토리’를 들어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에서 지난 14일 권영찬을 만났다. 결론은 잠시 미뤄놓고 차근차근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긴급체포와 마약 검사
강간치상 혐의로 고소된 권영찬은 경찰에서 마약 검사까지 받았다. “4시간 동안 6번이나 강간당했다”는 상대 여성 Y씨 진술이 조사 과정에서 ‘마약을 복용한 상태였던 것 아니냐’는 추론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검사 결과 마약 복용 흔적은 없었지만 그는 긴급체포됐고 한 달 이상 구치소 생활을 해야 했다. 구속 영장이 발부된 가장 큰 이유는 주거 불명이었다. 권영찬은 당시 케이블 TV 등 5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었고, ‘개그개그 PC방’을 체인 형태로 운영하고 있었다.
권영찬은 어디에 사냐는 경찰 질문에 “잠원동에 삽니다. 그런데 PC방 체인점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어 오산 지점에 가면 근처 형님 댁에서 자고, 부천 지점에 가면 또 근처 형님 댁에서 잡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답변 때문에 주거불명자가 된 것 같다”며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었기에 답변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미처 몰랐다”고 했다.
유죄판결이 무죄판결로 바뀌기까지
“강간은 커녕 성관계도 갖지 않은 상대가, ‘(집에) 잘 들어갔노라’고 통화까지 한 상대가 며칠 지나 나를 ‘강간치상’으로 고소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진실은 밝혀지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고, 여자친구에게 너무 미안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1심 유죄판결을 받은 뒤부터 모든 시간은 Y씨 진술 하나하나가 사실이 아님을 밝혀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1. 연예인 지망생 Y씨에게 연예인 시켜주겠다며 유인했다?
Y씨는 ‘개그개그 PC방’ 모 지점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권영찬에 따르면, Y씨는 자신을 캐나다에서 한국문화를 배우러 온 대학생이라고 소개했고, 아는 사람이 없으니 한국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도록 파티나 모임이 있으면 초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권씨는 물론 여자친구에게 이런 사실과 Y씨 존재를 얘기했고, “도와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사건 이후 Y씨가 ‘방송 코디네이터’ ‘연예인 지망생’으로 보도돼 당황했다고 한다. Y씨가 근무했던 지점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법정에서 “Y씨가 처음 구직을 위해 지점을 방문했을 때 ‘여기가 개그맨 권영찬이 사장인 PC방이냐’고 물었다”고 진술하는 것을 듣고서야 접근이 의도적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권영찬은 “지금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재외동포의 도움 요청인지,의도적인 접근인지 분간하지 못한 잘못이 내게 있다. 그 때 아예 선을 그었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했다. 그는 “Y씨가 종종 전화를 걸어 ‘지금 어디냐’고 물었고,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답하면 ‘나를 초청해달라’고 청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에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번번이 거절하기도 미안해서, 사고 당일을 포함해 세 번 그녀에게 와도 좋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Y씨가 연예인 지망생임을 알았든 몰랐든, 그의 모임에 Y씨가 참석한 것만으로도 상황은 권영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연예인 시켜주겠다’며 유인하지 않았음이 의외의 증거자료로 증명됐다. Y씨는 “성폭행을 당한 뒤에는 너무 몸이 아파 움직일 수 없었고 그래서 고소가 늦어졌다. 대신 중간에 성폭행 상담소에 전화로 상담했다”고 주장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제출했다.
이 통화내역이 오히려 권영찬에게 유리한 증거가 됐다. 통화내역에 나타난 권영찬과 Y씨의 통화 기록을 보면 권영찬이 아닌 Y씨가 늘 먼저 전화한 것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권영찬이 연예인 시켜주겠다며 전화로 불러내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Y씨 진술은 거짓으로 판명됐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개그맨 이성미의 도움으로, Y씨가 현지 블렌치 맥도날드 패션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이 아니며 그녀가 졸업했다고 주장한 캐리브힐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음이 드러났다. Y씨는 1심에서 이 부분에 대해 위증한 사실을 2심 재판부가 추궁하자 “남들에게 창피해서 그렇게 말해왔고, 말해온 대로 진술했던 것”이라고 답했다.
2. 성진단 키트, 산부인과 진단서도 없이 ‘유죄’?
“아무리 술 취한 상태였다고 하지만, 순간의 유혹을 넘기지 못하고 다른 여성과 호텔에 함께 간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시 저는 탈모방지제를 복용하고 있었고 그 약이 너무 독해 성관계를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냥 함께 있다가 저는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깬 후 오전 8시30분쯤 함께 호텔을 나섰습니다. 제가 정말로 그녀가 주장하듯 4시간 동안 6번 강간을 했다면, 겁없이 경찰서 앞에 Y씨를 내려줬겠습니까. 집 근처라고 해서 청파경찰서 앞까지 차로 바래다 주었습니다.”
지난해 6월4일 밤, Y씨가 세번째로 권영찬의 모임에 참석했다. 그날도 그녀가 먼저 오겠다고 했고, 권영찬 일행이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찾아왔다. 이 날 행적은 권씨의 카드결제 기록이 말해준다. 이태원 나이크클럽에서 5일 새벽 5시3분 계산을 한 뒤, 5시38분 여의도 호텔에서 결제됐다. 그리고 8시30분 체크아웃했다.
권영찬에 따르면, Y씨는 지난해 6월9일 권영찬을 강간치상으로 고소할 때 날짜 및 시간과 관련해 모두 잘못 진술했다. 물론 나중에는 권씨의 진술에 맞춰 날짜와 시간을 변경해 진술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3시간 동안 강간이 발생하지 않았음은 어떻게 증명됐을까. Y씨는 지난해 6월9일 경찰에 고소한 뒤 경찰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산부인과, 정형외과 등에서 진단서를 끊고 성진단 키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산부인과 진단을 거부했다. 결국 특별한 외상이 없어 상해진단서 발급은 불가능했고, 산부인과 진단은 실시되지 않았으며, 범인의 DNA가 담긴 정액이 체취된 성진단 키트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DNA 확보는 피해여성에게도 아주 유리한 증거인데, 그 자체를 스스로 거부한 것이다.
권영찬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처녀막 손상이 확인됐다. 정액 체취도 끝났으니 유죄를 인정하라’는 수사관 말에, 권씨는 되레 기뻤다고 했다. 정말로 정액 체취를 했다면 자기 것일 리가 없고, Y씨가 정말 강간을 당했다면 범인이 다른 사람임이 밝혀지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검사 결과는 오지 않았다. 보내지도 않은 검사 결과를 기다린 것이다.
앞서 진단을 위해 병원에 갔던 Y씨는 목에 난 상처에 바를 연고를 하나 처방 받았다. 엉뚱하게도 이 연고는 Y씨가 반항하다 생긴 상처에 처방된 것으로 오인됐다. 권영찬은 이 연고가 금속류 목걸이를 착용했을 때 생기는 알레르기 처방이었음을 밝혀내야 했다.
3. 6번 성폭행 당한 후 동대문 쇼핑?
성폭행 했다는 증거도 없지만, 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는 상황. 이번에도 그녀의 거짓말이 권영찬의 결백을 증명해줬다. ‘6번 강간 당해 움직일 수조차 없어 이틀간 몸져 누워 있었다’고 주장한 Y씨는, 사건 당일 저녁 동대문에서 쇼핑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카드결제 내역으로 입증된 것. 밤 9시30분쯤 사용된 카드경제 내역이 증거로 제출되자, Y씨는 “자고 일어나 점심쯤에 남대문쪽에서 아버지를 만났고, 저녁에 아는 언니를 만나 동대문에서 쇼핑했다”고 말을 바꿨다.
또 권영찬이 구속된 뒤인 지난해 6월22일 Y씨는 자신의 온라인 미니홈피에 권영찬 모임에 두번째로 나갔던 날에 찍은 사진과 함께 ‘즐거웠던 날!’이라는 적은 글을 올렸다. 이 사진과 글을 찾아낸 사람은 바로 권영찬의 여자친구 김씨. Y씨가 가명을 써온 터라 비슷한 이름의 온갖 개인 홈페이지를 며칠 동안 확인한 끝에 본명으로 운영되고 있는 홈피를 발견한 것이다.
이에 Y씨는 ‘사건 전에 미리 예약 등록을 해놓은 것이지 22일에 올린 것이 아니다. 비공개로 설정해 놓은 것이었는데, 고소 등의 절차를 밟느라 바빠서 관리를 못했더니 저절로 설정이 풀려 22일에 자동 등록됐다’고 주장했다. 권영찬은 미니 홈피를 운영하는 통신사에 질의를 넣었고, 해당 통신사는 서면 답변을 통해 Y씨가 주장한 것과 같은 일은 없으며 ‘처음 등록한 날짜대로 날짜가 표시된다’고 확인해줬다.
결국 Y씨는 6번 강간당했다고 주장한 당일 동대문 쇼핑을 하고, 한참 사건 조사가 진행 중인 22일 ‘가해자’ 권영찬과 있었던 일에 대해 ‘즐거웠다’는 심경을 표한 사실이 드러났다. 성폭행 당했다는 그녀의 주장은 이 때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다.
‘무죄 판결’ 그 후
“아무 준비 없이 그저 ‘나는 하지 않았으니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며 넋놓고 있다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대로 팬들 기억 속에 ‘강간치상범’으로 남을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떠나갈 줄 알았는데 나를 믿고 굳건히 곁에 있어주는 여자친구를 위해서도 강간범으로 남을 순 없었습니다. 강간범으로 낙인 찍힌 저 때문에 상처받은 부모님과 가족 걱정도 됐구요.”
어려울 때 친구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권영찬은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주변에 좋은 분이 많았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개그맨 이성미가 캐나다에서 발로 뛰어 주었고, 낙지를 비롯해 많은 개그맨 후배들이 자기 일처럼 앞장서 도왔다. 가족의 물심양면 도움도 고마울 따름이다. 무엇보다 이별을 고한대도 아무 변명 못하고 용서만 빌었을 텐데, 지금까지 곁을 지켜준 여자친구에게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감사하다고 말했다.
비슷한 사례인 ‘주병진 사건’을 맡았은 이재만 변호사 도움을 받은 것도 행운이었다. 이 변호사의 도움으로 그녀가 고소 당시부터 법정에서 한 말들이 거짓임을 하나하나 밝혀 나갔다. 그렇게 하나씩 진실을 밝혀내다 보니 ‘무죄 판결’에 도달했다.
“무죄판결도 받은 상태이고 위증한 Y씨에게 체포영장도 발부됐고…. 사실 조용히 있고 싶기도 했지만 인터뷰에 응한 것은 팬 여러분의 무죄판결을 받고 싶어서였습니다. 제가 호텔에 간 것은 꾸짖으시되 성폭행범이 아님을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팬 여러분의 용서와 믿음이 저와 제 여자친구, 제 가족이 지난 1년3개월간 겪은 고통을 치유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권영찬에게서 휴대전화가 오면 ‘다시 뛰자! 권영찬’이라는 문구가 뜬다. 그는 “사실 1년 넘게 재판을 하며 온몸의 기운이 빠졌습니다. 나를 위해서라면 지금 다시 뛸 힘이 솟지 않았을 겁니다.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억울함이 있고, 억울함과 답답함에 미쳐버릴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아닌, 나를 끝까지 믿어준 사람들을 위해 힘과 용기를 냈습니다”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무죄판결로도 보상되지 않고, 그를 울먹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권영찬은 자신이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어 언론 인터뷰가 불가능했음에도, 몇몇 언론사가 보도자료만 보고 마치 본인을 인터뷰한 것처럼 작성해 “권영찬, 합의 하에 성관계”라고 보도했던 것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차례 해당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요구했으나, 무죄판결만 보도됐을 뿐 정정보도는 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기사로 인해 저는 ‘합의 하에 성관계했다’고 주장했다가 ‘관계조차 없었다’고 말을 바꾼 사람이 됐습니다. 그리고 무죄판결을 받고도 ‘강간이 아닌 합의에 따른 성관계’였기에 무죄를 받은 것으로 오해될까 두렵습니다.”
다시 뛰기로 했기에 겉으론 씩씩한 모습이지만, 권영찬의 마음 속 상처는 아직 ‘날 것’인 듯했다. 사람들의 오해에 무척 민감해 했다. 그는 판사의 무죄판결보다 팬의 무죄판결을 받고 싶다는 말을 여러차례 되풀이했다.
끝으로 서울중앙지법이 위증 혐의를 인정, 지난 1일 Y씨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지만 Y씨는 영장 발부 한 달 전인 지난달 1일 캐나다로 이미 출국했다. 사건은 피의자의 소재불명으로 기소 중지된 상태다. 모든 먹구름이 걷히고 개그맨 권영찬이 다시 시청자들에게 밝은 웃음을 선사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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