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관록이 묻어난다. 그렇지만 멋진 스타일은 여전하다.
영화 '타짜'(감독 최동훈, 제작 싸이더스FNHㆍ영화사 참)의 정 마담은 그래서 김혜수가 딱이다. 허영만 만화 원작대로라면 정 마담은 좀 더 나이가 들고, 김혜수 표현대로라면 한층 '육적(肉的)'이지만 '범죄의 재구성'을 쓰고 연출한 최동훈 감독이 재탄생시킨 정 마담은 캐스팅 소식을 듣자마자 김혜수가 적역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정작 김혜수 본인은 한동안 고민했다. 웬만한 중견 배우 못지않은 연기 '구력'을 자랑하지만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갈수록 세련된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김혜수를 만나 '타짜'를 촬영하며 맞았던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들었다.
◇"난 고양이과가 아닌데…"
시나리오 속 정 마담은 만화 원작보다 훨씬 교활하고 귀여운 여자였다. 현대적 느낌 또한 강했다.
"아주 매혹적인 고양이가 연상됐어요. 사실 전 고양이과는 아니죠. 직설적이고, 내 판단에 대한 확신도 갖고 있고. 거기다 대중에게 드러난 배우로서 제 이미지 중 어떤 부분과 겹쳐 네거티브한 파장도 걱정됐습니다. 이미지만으로는 절대 영화 한 편을 끌고 갈 수 없어요. 배우가 연기하는 배역은 진짜 자기 모습에 있는 것을 뽑아낸다고 생각하는데 고양이과가 아닌 제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됐죠."
'분홍신'이 끝나고 난 후 여행에서 돌아올 즈음 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최동훈 감독 작품 시나리오가 들어왔다고. "너무 좋아, 너무 좋아"를 연발하며 귀국해 받은 시나리오였다.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이라는 말만 듣고 그토록 좋아했던 시나리오를 막상 받고 나서는 고심에 빠져든 것.
"도전도 하지 않고 포기해버리기엔 감독과 배우의 조합이 무척이나 매혹적이었어요. 최동훈 감독에 조승우, 백윤식, 유해진 등.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죠."
추석 시즌인 28일 개봉하는 바람에 '추석에 화투를 부추기는 영화 아니냐'는 농담을 지겹도록 들었지만 누가 뭐래도 '타짜'는 도박을 통해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이 나오며 그중 정 마담은 돈을 향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다.
"정 마담 같은 사람, 솔직히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게 교활한 사람은 아마 못 알아볼 거예요. 다만 내가 하는 역할이니까 좋다는 거고, 캐릭터로서 매력은 분명히 있죠."
예고편을 통해 드러난 김혜수의 정 마담은 농염하고, 화려하며 눈에 그득한 욕망을 담고 있다.
◇소름이 돋고 진정성이 충만한 연기
'타짜'는 만만찮은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들이 뿜어낼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김혜수는 진심으로 동료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했다.
우선 백윤식. "드라마를 하며 만나뵌 적 있지만, 그땐 별 이야기 못했죠. 방송국은 남녀 분장실이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영화하면서 좀 더 밀도가 생겼습니다. 한마디로 '경륜'이 느껴졌어요. 연기란 스킬(skill)로 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 '아우라'라는 단어가 이처럼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는 것, 인생과 연기란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선배님 보면서 느끼게 됐죠."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 등 대부분 젊은 사람들인 데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먼저 다가갔다고 한다.
"선배님이 스스로를 가볍게 보이시려 하는데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어요. 끊임없이 젊은 사람들에게 본인을 낮추셨죠. 역시 연기는 '진정성'을 갖춰야 된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그에게 충격을 안겨준 이들은 조승우와 김윤석의 연기. 조승우야 이제 연기 잘한다는 게 알려져 있지만,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김윤석은 영화 조역과 '있을 때 잘해' 등 몇몇 드라마를 통해 이제 얼굴을 알리고 있는 배우다. 고니 역의 조승우와 아귀 역의 김윤석이 맞붙는 장면을 찍는 걸 보면서 김혜수는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가장 하이라이트였죠. 전 그걸 지켜보고 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 장면을 찍는 3일 내내 두 사람의 연기를 봤는데,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예전에 한 연극에서 여배우의 연기를 보고 난 후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느낌."
도대체 어떤 점이 그를 이렇게까지 감탄하게 만들었을까.
"배우들이, 특히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더 드러내려고 해요. 본의 아니게 상대 배우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거죠. 그런데 두 사람은 자기 연기를 하면서도 서로를 배려해주고 있더군요. 바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런 이상적인 현장을 봤다는 게 정말 소중한 기억입니다."
이처럼 그에게 좋은 추억을 안겨준 현장.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최동훈 감독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그런 마음은 이 한마디로 정리될 듯.
"앞으로 누가 됐든 최동훈 감독과 작업하는 배우를 보면 무조건 부러워할 거예요. 어떤 감독인지 내가 겪어봤으니까요."
◇세월과 노력이 가져다준 성숙함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비록 백윤식만큼은 아니더라도 인생을 담아낼 줄 알고, 자기 삶을 사랑하며, 그래서 부단히 노력하는 김혜수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이를 한살 한살 더 먹으면서 생각도 조금씩 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개봉 후 관객의 '세속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장면을 찍으면서도 '지금 현재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했단다.
"장기적으로 미래를 가늠한다는 게 어렵더군요. 이젠 현재의 나에게 충실하자는 생각을 가져요. 내 판단대로 움직이고, 그 판단이 이성에 의한 것이든, 본능에 의한 것이든 한번 결정을 내리면 후회 없이 가자. 그래서 성공이든 실패든, 후에 있을 문제는 생각하지 말자구요."
올해 그는 참 바빴다. '타짜'를 찍기 직전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함께 하자는 제의가 와 '좋지 않은 가(家)'에 특별 출연했다. 여기서 그는 제대로 된 여자 '백수'의 모습을 보여줄 예정. 그리고 지금은 바람난 유부녀들을 내세운 '바람 피기 좋은 날'을 한창 촬영 중이다.
"연기라는 게 갑자기 느는 게 아니더군요. 어떤 상대를 만나 시너지를 발휘할 수도 있는 거고. 마음 가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살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모든 것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것 같고, 내 스스로에 대한 강박이 줄어듭니다."
늘 새롭고, 또한 늘 한결같은 배우를 볼 수 있는 즐거움을 김혜수가 주려고 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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