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10시간30분! 2시간 안팎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괴물처럼 여겨질 영화가 있다. 지난 8일 개막한 서울영화제가 11일 상영한 영화 ‘필리핀 가족의 진화’(감독 라브 디아즈). 기획부터 완성까지 10년,촬영 기간만 8년이라는 점도 놀랍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630분에 달하는 상영시간이다. 이 영화를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쉬는 시간 포함해 12시간동안 내리 상영한다는 소식에 열 일 제쳐놓고 서울 종로 시네코아를 찾았다. 영화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과연 10시간 반동안 스크린에 집중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구심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극기훈련과 영화관람 사이=어찌보면 대단할 것도 없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 3편의 총 길이가 9시간27분이다. 20여부작 드라마를 DVD로 하루에 다봤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흑백 화면에 배경음악도 없이 진행되는 예술영화인 것. 게다가 필리핀의 1970년대 정치적 혼란을 배경으로 한다니 얼마나 공감이 갈지도 관건이었다.
아예 재미에 대한 기대는 접은 채 극기 체험 한다는 생각으로 들어선 상영관. 소리 안나는 주전부릿감도 든든히 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쉬는 시간까지 175분간은 고되기 그지 없었다. 영화제에 이 작품을 추천한 필리핀 영화평론가조차 “미숙한 오디오 서빙,서투른 핸드헬드 카메라 촬영 등 기술적으로 불완전한 부분이 많다”고 했을 정도.
거기다 아무리 예술영화에 ‘롱테이크’는 필수라지만 마당 쓰는 데 10분,장작 패는 데 10분,화면 저쪽에서 이쪽까지 걸어오는 데만 10분 이상 걸리다보니 솔직히 졸음도 왔다.
◇10시간30분의 위력=그런데 이 영화는 왜 이리 길까. 대하 소설처럼 수많은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농삿꾼인 갈라도 가족과 탄광 인부 페르난도 가족이 주요 인물의 전부고 각각의 삶도 상세하지 않다. 러닝타임 대부분은 일상을 가만히 지켜보는 ‘롱테이크’에 할애됐을 뿐이다.
치명적 사건들도 일어나긴 한다. 갈라도 가족의 길다가 도시의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아이 레이는 9살 때 어머니 길다를 욕보여 죽게 한 동네 청년들을 총으로 쏜 뒤 방황을 시작한다. 길다의 오빠 카죠는 민병대에 잘보이려 대신 군인을 살해하고 감옥에 간 후 범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카죠의 세 딸은 할머니와 함께 농사 품팔이로 힘겹게 살아간다.
또 청년이 된 레이를 양아들로 거둔 페르난도는 허황된 꿈에 금맥을 찾아 헤매다 아들이 살해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간다. 짧게 압축하면 1시간 안에도 그려낼 이 인물들은 그러나 마치 실제 일상인 듯 천천히 흐르며 10시간여 동안 진행된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뒤로 갈수록 인물들의 머릿 속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가 긴 이유=후반부,카죠가 칼을 맞고 걸어가는 장면은 30분이나 계속됐지만 그의 한많은 삶을 알기에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왜 이 영화가 이리도 길어야 했는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그의 비틀거림 속에는 상처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살아온 삶의 몽환과 현실이 그를 더 아프게 한다.
영화가 끝난 뒤 상영관을 나서는 몸은 찌뿌듯했다. 하지만 극기체험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동안 2시간여의 시간으로 다른 인생을 엿봤다 여겼던 오만도 되돌아보게 됐다. 다만 예술영화 환경이 날로 척박해지는 우리 현실에서 이 영화가 단관(單館) 개봉조차 안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만은 씁쓸함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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