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우 한 명 출연하지 않는다. 촬영지도 한국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영화란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영화의 피가 흐른다.
최근 들어 한국 영화의 경계선을 확장하는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방식의 수출과는 다른 형태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려는 움직임이 한국 영화계에서 활발히 진행 중인 것이다.
2006년 상반기 한국 영화의 수출 실적이 급감했다는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가 시사하듯, 수출에만 의존해서는 해외 시장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올해 제작편수가 사상 처음으로 100편을 웃돌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등 국내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른 현재, 새로운 수요 창출은 영화계의 미룰 수 없는 현안이 됐다.
다양한 형태의 합작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선 영화계의 움직임을 소개한다.
◇저예산 공포ㆍ액션 시장을 뚫어라
9월9일 일본 전역 70개 스크린에서 개봉하는 공포영화 '로프트'는 '강령', '도플갱어' 등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연출했고, '역도산'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나카타니 미키 등이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 미로비젼이 기획과 투자를 맡은 작품이다. 처음에는 미로비젼이 제작비를 모두 댔으나 이후 니혼TV 등이 관심을 보이면서 현재 투자비율은 한국과 일본이 4 대 6으로 역전됐다.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제작한 공포영화 '샘스 레이크(Sam's Lake)' 역시 미로비젼의 작품이다. 미로비젼의 주도하에 동명의 단편영화가 장편으로 옮겨졌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먼저 공개될 이 영화는 내년 초 미국에 개봉될 예정이다.
IHQ는 재미동포 감독 그레이스 리와 함께 '아메리칸 좀비'라는 영화의 촬영을 5월 초에 마쳤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본뜬 이 영화는 현재 편집 중이며 영화제를 통해 먼저 공개한 뒤 내년 초 미국 극장가에 선을 보인다.
또 LJ필름은 정두홍 무술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겨 미국에서 '컴백'이라는 액션 영화를 하반기에 찍을 예정이다. 현지 배우와 인력을 캐스팅, B급 액션 영화 시장을 겨냥한다.
이들 영화의 특징은 저예산이고 모두 현지 인력으로 제작돼 철저하게 현지 영화로 어필하고 있다는 점. 기본적으로 공포와 액션은 언어나 국가의 장벽을 넘는 데 수월하다는 이점이 있는데, 이들 프로젝트는 아예 현지화 방식을 택했다.
미로비젼의 채희승 대표는 "해외 큰 시장을 공략하려면 애매하게 다리를 걸치기보다는 확실하게 현지 시장에 침투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합작으로 규정되느냐 아니냐는 사실 크게 상관없다. 어떤 형태로든 해외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시도들이 계속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채 대표는 이어 "미국과 일본은 꼭 극장 개봉이 아니어도 비디오ㆍDVD 시장이 커 이를 통한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점이, 저예산 영화의 제작을 촉진한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마켓을 노린다
더욱 적극적으로 전세계 시장을 노리는 프로젝트들도 있다.
LJ필름은 조선 마지막 황세손 이구와 그의 미국인 부인 줄리아의 사랑과 삶을 다룬 '줄리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제작한 미국의 준메이저 영화사 포커스필름과 올 초 합작 계약을 맺고, 순제작비 2천500만 달러를 비롯해 모든 비용과 수익을 한국과 미국이 5 대 5로 나누기로 했다. 현재 미국인 감독까지 확정된 상태이며 줄리아 역에 스타급 할리우드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계획이다.
LJ필름이 소속된 프라임엔터테인먼트 해외 기획팀의 김소희 이사는 "굉장히 탄탄한 회사를 미국 쪽 파트너로 잡았다"며 "이는 미국에서의 제작과 투자는 물론, 전세계 배급망을 확보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LJ필름은 이밖에도 독일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윤이상 프로젝트'와 미국과 합작하는 '리심' 영화화 계획 등을 가동 중이다.
나우필름에서 진행하는 '네버 포에버(Never Forever)'는 7월24일 뉴욕에서 크랭크 인했다.
'그 집앞',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 등을 만들며 국내외에서 주목 받은 김진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미국의 박스3(VOX3)와 공동 제작한다. 내년 상반기 전세계 개봉이 목표. 하정우와 베라 파미가가 주연을 맡은 멜로로 100% 영어 대사이며 프라임엔터테인먼트가 투자를 맡았다.
또 14일 뉴욕에서 크랭크 인한 '웨스트 32번가'는 CJ엔터테인먼트가 미주 프로젝트 1호라 명명한 작품. 뉴욕 한인타운의 밤거리를 배경으로 한 느와르로 미국 내 아시아계 관객을 겨냥한 프로젝트다. 한국계 배우 존 조와 김준성, 정준호 등이 출연한다. 9월 하순까지 촬영을 마칠 예정이며, 내년 상반기 한미 양국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서상원 해외사업본부장은 "미국 사회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 관객의 감성을 파악함으로써 앞으로 미국 시장에서 통하는 한국 영화 제작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합작 통해 한국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그러나 이러한 프로젝트들이 결코 하루 아침에,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사들은 각기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하나하나씩 합작의 토대를 마련해나가고 있다.
프라임엔터테인먼트의 김소희 이사는 "해외 합작 프로젝트는 전인미답의 지역이다. 참고할 매뉴얼도 없고 사소한 것, 하다못해 송금하는 방식에서부터 배우고 있다. 특히 계약서는 한국과 달리 굉장히 복잡하다. 모든 단계가 학습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LJ필름은 지난해 세 편의 해외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기획했다가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중 '버터 냄새'는 아예 제작이 이뤄지지 못했고, '러브 하우스'는 제작이 거의 완료됐으나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현재 중단돼 있다. 나머지 '러브 토크'만이 올해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함으로써 세계 시장에 선보였다. 그러나 이 영화 역시 LA에서 촬영됐을 뿐 한국어 대사인 까닭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해외 시장을 겨냥한 프로젝트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미국 시스템 하에서 제작을 실험해 본 의미가 있다.
김 이사는 "지난해는 미국에서의 제작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두들겨 본 것이라면 올해는 현지 전문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본격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외 프로젝트의 의미는 무엇일까.
LJ필름의 이승재 대표는 "한국 영화 산업이 단기간 급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 시장 규모가 작고, 부가가치가 재생산이 안된다. 내부 발전도 중요하지만 외부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면서 "그런 점에서 특히 미국은 매우 중요한 시장이다. 모든 면에서 세계 시장을 커버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 이 시장에서 성공할 경우 한국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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