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창단은 다분히 이벤트성이 강했다.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야말로 음악성은 두 번째로 생각하고 만든 프로젝트였다"고 지휘자 정명훈 본인이 인정하였다시피 음악의 완성보다는 음악을 매개로 한 우정과 화합이라는 의미론적인 성향이 사람들에게 더욱 크게 호감을 샀다.
물론 유럽을 본토로 삼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아시아인들의 우수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도 다분했다.
이후 이어진 공연들이 국제통화기금(IMF) 환란 극복 음악회라든가, 2000년 맞이 밀레니엄 콘서트와 같은 정확한 목적을 띄고 있었던 것도 다분히 이러한 출생 배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1년에 한 번씩 공연을 가졌던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러나 2000년 밀레니엄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중단됐다.
8월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 공연은 6년 만에 그들이 부활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생존 신고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태동 당시와 비교할 때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모습은 좀 더 성격이 뚜렷해지고 성장한 모습도 엿보인다.
뮌헨 필, 시카고 심포니, 뉴욕 필과 같은 세계 정상의 악단을 포함한 세계 유수의 36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기량 뛰어난 아시아인들이 대거 초대됐다.
또한 서울시향과 도쿄 필 음악감독을 겸직하고 있는 정명훈으로서는 이미 호흡을 맞춰본 단원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던 터라, 마에스트로의 음악을 펼치기에 훨씬 쉬웠을 것이라 여겨진다.
첫 곡으로 연주된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정명훈 특유의 극적인 연출이 효과적으로 표현된 호연이었다.
'가면 무도회'와 '티볼트의 죽음'에서 팽배해진 긴장감과 감정의 폭발은 듣는 이로 하여금 통쾌한 몰입을 유도했다.
그러나 줄리엣과 관련된 테마가 부드럽지 못하고 다소 투박하게 이어진 것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악장의 리드에 따라 호쾌하게 지휘자의 지휘봉에 반응하는 현악 파트의 연주는 매우 유연하였으며,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개개인의 탁월한 기량을 확인시켜 주었다.
인터미션 이후 공연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교향 무곡은 번스타인의 천재적인 관현악 어법을 모처럼 라이브로 만끽할 수 있는 유쾌한 시간이었다.
특히 국내 퍼커션 주자들이 그처럼 대거 포진하여 맘보, 차차, 쿨 재즈 등 20세기 대중음악의 어법에 각자의 리듬감을 최대한 살리며 유쾌하게 음악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그리 흔히 볼 수 없는 기회였다.
탄탄한 현악 파트를 기반으로 금관이며 목관 또한 거리낌 없는 연주를 선보였다. 특히 플루트와 오보에 연주는 실연으로 듣기 힘든 탁월한 호연이었다.
'맘보'의 경우 두 번째 앙코르로 다시 연주되었는데, 훨씬 유연하고 빠른 템포로 본 공연에서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곡은 라벨의 '라 발스'는 왈츠의 리듬감은 살아났으나 전반적으로 저음이 시종 더욱 크게 강조되어 사운드의 불균형이 아쉬웠다.
각각의 악기 파트만으로 놓고 볼 때 매우 훌륭한 기량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역시 조화와 균형이라는 측면에서는 단발적으로 모여든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의 한계가 노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첫 번째 앙코르로 연주한 라벨의 '마 메르 루아'까지 포함해서, 이날 악단이 들려준 레퍼토리는 대체로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 낯선 곡목들이었다.
최근 서울시향과 행보를 통해 확보한 한층 대중적인 관객들을 겨냥한 의도가 다분히 엿보였다.
오케스트라의 기량에 따라 연주의 품질이 좌우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처음 듣는 이들에게조차도 전혀 부담없는 레퍼토리였다는 측면에서, 이번 공연은 관객들로서는 또 다른 차원의 오케스트라 세계를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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