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에 나타난 몇가지 불균형들

정조를 뮤지컬화한 대 실험작 ‘화성에서 꿈꾸다’가 선보였다. 우리 시대 일인자들인 음악의 김영동, 연출의 이윤택, 제작의 표재순이 모여 만든 작품인데다 자금 지원도 받아 이뤄진 실험작이어서 섣불리 판단할 일은 아니나 앞으로의 문화 발전을 위해 관람기를 적어본다.

먼저 국악과 오케스트라가 혼용된 새로운 시도를 이뤘고 정조가 이루려던 규장각, 실학 증진, 화성 건설, 붕당정치를 끝내려는 왕권의 강화, 아버지에 대한 효, 인간 정조의 모습 등을 짧은 시간 안에 구상해 연극적인 구성을 통해 잘 엮어냈다. 음악도 아름다워 앉아 있는 동안 즐거웠다. 그러나 장르면에서 뮤지컬이지만 노래는 오페라에 가깝고 음악은 오케스트라에 국악이 혼합됐으며 대사는 연극같이 구성된, 한마디로 음악총체극이 됐다. 장르에 관계없이 뮤지컬은 재미있고 감동을 받으면 되겠지만 관객들은 정해진 장르규칙에 맞춰 감상하다보면 어색한 분위기에 접어들 수도 있다. 연극을 보러 갔더니 재미있게 구성한 나머지 매직쇼가 된 연극을 본 느낌일 수도 있다.

정조의 실현되지 못한 꿈을 그렸지만 전체적인 진행에선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전반 1시간은 아버지 영조가 당파에 휘말려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줏대 없는 멍청하고 망령든 영조의 모습이다. 30분 정도 지나 영조가 심환지의 등에 업혀 나가며 “아이고, 오줌마려”란 대사는 영조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악몽을 꾸며 할아버지에 한을 품은 나약한 세자로 나타난다. 정조는 어찌하다 왕이 됐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해 “아버지 묘자리 밑으로 물길이 지나고 있다”며 명당자리를 찾아 화성을 추천받는다. 왕권 위상을 높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실학과 합리적인 정신을 받아들여 백성들에게 이로운 정치를 펼치려는 의도는 뒤로 숨는다. 북으로 개성, 서로 강화, 동으로 남한산성, 남으로 화성을 건설하려는 뜻도 숨는다. 중국에서 명과 청이 교체하는 시기 우리의 小中華, 즉 자존의 문화 정체성을 찾으려는 최초의 역사적 시도에 대한 해석도 뒤로 숨는다. 인물 표현에 대한 균형도 흐트러지는 느낌이다. 영조에 대한 비중이 너무 커 자칫 영조극인지 정조극인지 모를 정도다. 영조의 노망에 대비, 정조의 젊음을 강조한 면이 있으나 정조도 처음부터 끝까지 등창에다 몸이 아파 빌빌대는 허약한 임금으로 나타난다. 인물의 성격을 그리는데 내면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진정성이 채택된 것 같다. 임금도 평민처럼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은 좋지만 연극(뮤지컬)적이 아니라 소설적인 장면 같았다. 소설에선 왕이 여염집 여인을 사랑하듯 그런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했다는 은유가 가능해지지만 연극에선 그런 개인의 사랑이 백성에게까지 연장되는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뮤지컬은 대사 대신 사랑의 듀엣 정도로 처리될텐데 어색한 분위기의 삼자 구도 대화여서 보기 어색했다. 제2부 노량진장터 장면은 이 뮤지컬의 압권이지만 이외 다른 장면들에선 너무 쓸쓸하다. 한두명이 나오는 장면에선 연출상 뮤지컬이라면 어떤 배경 앞에 세우거나 아니면 핀 조명으로 그 배우에게 역동성을 주기 마련인데 밋밋하게 처리돼 뮤지컬 전반적인 진행 흐름에서 속도감을 죽이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극장 운영자에게 할 말이 있다. 이렇게 웅대한 뮤지컬을 만들었으니 관객들은 와 감상하고 가면 그만이라는 것일까. 공연 전이나 공연 중간 로비에 편히 먹고 마실 커피 한잔, 과자 한개 구하기 어려웠다. 이집트에 와서 피라미드를 봤으면 됐지 목마른 건 좀 참아도 된다는 걸까. 사람들은 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마시기도 하고 아는 사람을 만나 담소도 나누고 정신적 여유를 즐긴다. 뮤지컬이 끝나고 무대 인사가 몇분동안 지속될 때 누군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안내원이 만류한다. 외국에선 끝날 때만은 사진을 찍게 해주고 무대에 가 꽃다발도 전하게 해준다. 팬이 없는 연기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김광옥 수원대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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