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하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된 마당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몇 편에 밀려 기대작들조차 기를 못펴는 요즘 한국 영화계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에게도 이런 저력이 있다’고 내세울만한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제작 KnJ엔터테인먼트)를 손꼽아 기다려 왔던 영화팬들의 입장 또한 난감할 것 같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뽑아든 비장의 칼에 날이 서있지 않은 격이기 때문이다.
‘투캅스’ ‘공공의 적’ ‘실미도’ 등을 만들며 “내 영화에서 얻어갈 것은 없어도 재미는 있다”고 밝혀온 강우석 감독. 그는 “이 영화의 흥행에 실패하면 다시는 영화 못만들 것 같다”는 심정으로 배수의 진을 칠 만큼 ‘한반도’의 재미와 완성도를 공언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는 역사의식과 한반도 정세에 대한 문제의식 표출에는 나름대로 성공하고 있지만 재미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준다.
순제작비만 96억원을 들인 ‘한반도’는 단 한 장면 출연하는 조연까지도 중견 연기자를 세우는 호화 캐스팅과 대규모 스케일을 자랑한다. 고종(김상중)이 일제의 수탈을 막기 위해 가짜 국새를 만들었고 일본에 독살됐다는 설정은 다소간의 학문적 근거도 있어 ‘팩션’(팩트와 픽션의 합성어)감으로 손색 없다. 가까운 미래에 남북한 정상이 통일을 약속하고 경의선을 개통하려 하자 일본 정부에서 국새가 찍힌 문서를 들이대며 경의선의 권리를 주장하고,한국 대통령(안성기)이 진짜 국새를 발굴해 이를 막는다는 내용 역시 영화에서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문제는 영화의 전개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점이다. 영화 속 일본의 태도는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무섭게 드러내기보다는 어린애가 떼쓰는 것처럼만 비쳐 위기감을 조성하지 못한다. 민족 자존심을 위해 진짜 국새를 발굴하려는 대통령과 일본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총리(문성근)는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평면적 대사만 반복한다.
역사학자 민재(조재현)가 도굴꾼 유식(강신일)에게서 고종황제 내시의 일기를 건네받는 순간,국새가 묻힌 곳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질 것 같지만 곧 김이 빠진다. 민재가 ‘이미 다 찾아놨으니 땅만 파면 된다’고 나오기 때문. 유일하게 심리적 갈등을 겪는 인물인 국정원 서기관 상현(차인표)도 끝까지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심지어 국방부의 협조 속에 어렵게 찍은 군함과 전투기 장면마저 정적이다.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일본의 억지에 우리 정부가 꼼짝 못하는 이유가 일본에서 빌리려던 차관 157조원 때문이며 이것 없이는 한국 경제가 흔들린다는 내용이다. 외환보유액만 2000억 달러가 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영화 흐름에 동의할 수 없게 할뿐더러 역사적 자존심을 고취하려는 영화가 경제적 자존심을 이토록 깎아내리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 초반,백화점 문화센터 수강생들이 명성황후를 가볍게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민재가 ‘애새끼들에게 그따위로밖에 못가르칠 여편네들’이라는 폭언을 퍼붓는 장면. 강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마초이즘에 근거한 여성 비하적인 모습들은 ‘한반도’가 얼마나 앞뒤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달려가기만 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15세가. 1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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