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즌 독(Citizen Dog)’
이 영화,포스터부터 심상치 않다. 파란 하늘에서 빨간 헬멧이 꽃비처럼 내린다. 택시 운전사는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여자는 하얀 책을 소중히 안은 채 웃고 있다. 뒷자리에 앉은 곰인형은 담배를 피고 택시 위 도마뱀의 얼굴은 할머니다. 화려한 색채로 무장한 이 영화는 시공을 초월하는 판타지를 연상시킨다.
태국영화하면 ‘옹박’ 정도가 떠오르는 우리에게 ‘첨밀밀’처럼 간절한 러브스토리에 ‘아멜리에’같은 발랄한 상상력을 담은 독특한 영화 한 편이 찾아왔다. 칸,밴쿠버,부천영화제에 초청된 2000년작 ‘검은 호랑이의 눈물’로 알려진 위시트 사사나티앙 감독의 후속작. 과장된 색채 설계로 주목받았던 전작처럼 ‘시티즌 독’도 시각적 환상으로 넘쳐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같은 이 영화는 꽤 잘 만들어진 독립영화. 시골에서 대도시 방콕으로 온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흥겨운 음악과 함께 펼쳐 보인다.
물감을 흘려놓은 듯한 색채감
첫 장면. 하늘을 수놓은 빼어난 노을과 곡식이 알알이 영그는 시골의 가을 풍경.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화면이 눈을 사로잡는다. 가장 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온 위시트 감독은 우리나라 민화처럼 광고판 하나에도 20가지 이상의 색을 쓰는 태국의 전통에 착안했다. 이렇게 탄생한 화려한 미장센은 인물의 감정까지 담고 있다. 늘 꿈을 좇는 여주인공 진(상통 켓우통)은 푸른색 옷만 입고 다니며 하루 하루 되는대로 살아가는 남자 팟(마하스무트 분야락)은 늘 밤색 옷이다. 분홍의 느낌을 비틀어 우울함으로 표현한 진의 집이나 옛 극장의 입간판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그려진 남자의 집도 인상적이다.
현실에는 없을 것같은 인물들
많은 이들이 꿈을 안고 도시로 올라 오지만 도시에 오는 순간 익명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시티즌 독’은 도시에 익명으로 묻혀 사는 노동자 계층을 표현한 말. 꿈이 없는 남자와 꿈만을 좇는 여자,소음 중독에 걸린 여자아이,도시 한 가운데 불쑥 솟은 거대한 플라스틱 산 등. 영화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으나 상상력의 총집합이다. 공장에서 잘려나간 팟의 손가락은 만나자 마자 주인을 알아보고 곰인형이 말을 하고 담배까지 피운다. ‘매그놀리아’의 개구리 비를 패러디한 듯 하늘에게 헬멧비가 내리는 장면도 기발한 판타지.
행복은 가까이 있는 것
남자는 처음부터 여자를 알아본다. 자신이 찾던 반쪽이란 것을. 기분이 좋으면 오른쪽 다리를 달달 떨고 음식도 가려먹는다. 무엇보다 이상한 하얀 책에 코를 파묻고 자신만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녀가 너무 좋다. 붐비는 버스를 타면 발진이 생기는 여자를 위해 택시회사에 취직해 매일 출퇴근을 시켜주지만 그녀는 그에겐 도통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얀 책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길에서 우연히 스쳐간 외국인 남자를 찾는 게 다급하다. 어느덧 열렬한 환경운동가가 된 여자는 플라스틱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늘 새로운 것,자신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고 있는 여자는 남자를 떠나고 남자는 플라스틱 산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색다르면서도 작품성 있는 영화를 원하는 이들,특히 사랑하는 남녀나 삶의 무료함에 지친 이들이 보면 활력소가 될 만하다. 3월9일개봉. 15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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