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이영미술관 ‘108번의 삶과 죽음전’을 보고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涅槃)’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은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하는데,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니르바나로 인해 맑은 고요(寂靜)의 상태에서 완전한 몸의 유희(安樂)가 실현된다. 그러나 열반에 이르는 길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의 혼란이요 온갖 번뇌가 들끓는 길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내고 박생광은 그가 성취한 독특한 회화세계를 통해 스스로 니르바나의 상태를 꿈꾼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마치 불화(佛畵)가 궁구(窮究)하고 있는 이상(理想)처럼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예술’적 위치에서 상승하여 민중적 신앙의지의 표출상태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미술관을 가득 메울 수 있는 대작들은 그 자체로 장엄(불교를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다란 뜻이 있음)세계를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와 전통, 샤먼의 세계에서 빚어 올린 처렴상정(處染常淨)의 연꽃향기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박생광의 예술적 성취를 최신의 영상 미디어 작가들의 작업으로 풀어 다시 연결해 보려는 시도가 이영미술관 기획전(8월3일까지)으로 열리고 있다. 다소 평이할 수 있는 ‘108번의 삶과 죽음’이라는 전시 제목은 오히려 난해한 전시의 첫 느낌을 훨씬 부드럽게 소화시킬 수 있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었던 ‘108번뇌’라는 말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본래의 자기인 일심(一心)을 잃는데서 온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우리의 감각 눈·귀·코·혀·몸·뜻(마음) 등 다섯 가지가 좋다(好), 나쁘다(惡), 그저 그렇다(平等)로 서로 나뉘게 되고(6×3=18), 또한 괴로움(苦), 즐거움(樂),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捨) 것들이 상호 연동되어 총 36가지의 번뇌가 생기고, 그 36가지의 번뇌가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갖기에 세 배수로 늘어나 108번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위의 108번뇌의 의미에서 보이듯 때로 개념의 풀이는 미디어적 속성의 작업에 훨씬 매력적일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손병돈의 ‘얼굴’작업은 감각의 요체로서의 얼굴이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혼이 깃드는 장소이자 수행의 터널’로서의 얼굴의 변화를 매우 생동감 있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관객을 압도하는 거대한 얼굴의 정면응시는 ‘대상’이 아닌 자아와의 맞대결로 밀고 온다.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이 뭐꼬!’의 화두처럼 얼굴은 ‘나’를 꿰뚫는다. 이한수의 작업은 21세기에 갑자기 스스로 출현한 문화재의 유형처럼 떠돈다. 이것은 예술의 발굴이 아니라 예술의 발견이며, 부표처럼 떠도는 탈정체성의 표상이다. 문경원의 작업은 인간 개체와 개체군이 만들어 내는 낱낱성과 그 낱낱의 소통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질서와 산재, 혹은 기호와 생성 등 현실세계의 이미지를 ‘인간 기호’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엮어내고 있다. 그외 이승준, 이진준의 작업도 매우 매력적이다. 박생광의 작업에서 실타래를 끄집어내어 유충이 집을 짓듯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전의 의미는 바로 그것, 선배 예술가를 화두로 놓고 각각의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어법으로 풀어 보려는 시도이다. 특히 전혀 새로운 형식실험의 작가들이 모여 선배에 대한 경외와 예술적 접촉을 펼친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이라 할만하다.

/김종길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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