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최대 업적 중 하나가 화성 축성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화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다. 1794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묘를 양주에서 수원읍 현륭원(융건릉)으로 옮기고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과 민본사상 등이 접목한 계획도시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화성문화원과 화성시사편찬위원회가 주최한 화성시 고문서 전시회 ‘화성사람들, 정조를 만나다’는 정조대왕과 함께 화성을 건설한 주변 인물들을 조명한 전시.
12월 5일까지 경기문화재단 2층 전시실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화성시에 남아 있는 수많은 고문서들을 통해 화성을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한 화성사람들의 주체적 삶을 부각하기 위해 마련했다.
화성시사편찬위원회는 지난 2년여에 걸쳐 화성시내 고문헌을 조사했으며, 이 중 매송면 야목리의 풍양(들목) 조씨를 비롯 해풍 김씨, 연안 차씨, 단양 우씨 문중의 고문헌을 집중 전시하고 있다.
이들 집안은 정조와 화성축성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문신집안인 풍양 조씨의 세거지가 수원 신읍치에 자리잡게 된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정조다. 정조는 수원 신읍치에 사람을 모으기 위해 신읍치의 사대부를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했고 이에 중앙무대로 진출하고자 했던 풍양 조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
화성의 무신가문인 해풍 김씨는 화성축성의 감독관으로 활동했으며, 당시 정조친위부대인 장용외용에 대거 배속돼 정조의 수족으로 성장했다.
또 현륭원 인근에 거주하던 연안 차씨의 후손도 정조와 인연이 깊다. 정조는 차도항을 현륭원 어진봉안각 위장으로 임명한 이후 차씨들은 공신의 후예로 인정받아 사회적 지위 상승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실학자 우하영도 정조가 전국 사인에게 시무책을 구했을 때, 상소를 올려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인물.
조사에 참여한 김혁 정신문화연구원은 전시도록 서문에서 “화성시는 경기 일대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때 비교적 많은 양의 고문헌들이 소장돼 있으며, 특히 이 지역 집안들은 한결같이 정조의 화성경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전시와 함께 펴낸 도록은 컬러판에 지도와 도표, 가계도 등 다양한 자료가 체계적으로 잘 정리돼 있으며, 한글설명을 붙여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231-7228
/이형복기자 bok@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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