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경기/하류인생, 트로이, 더블루스-소울 오브 맨

■하류인생

암울한시대 헤쳐간 삼류群像들

‘국민감독’ 임권택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下流人生)’이 21일 관객에게 선을 보인다.

태흥영화사 대표 이태원과 촬영감독 정일성 등 ‘노장 트리오’가 손을 맞잡은 것은 예전과 다름이 없지만 ‘취화선’과 ‘춘향전’ 등 200∼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시대배경은 1960∼1970년대로 현대화됐다.

‘춘향뎐’에서 발탁한 조승우가 주연을 맡은 ‘하류인생’은 도도한 역사의 탁류를 온몸으로 자맥질하며 헤쳐온 한 사나이의 젊은 시절을 그린 것. 한국의 소리와 그림의 아름다움을 스크린에 되살려냈던 노장의 손길은 한국적 액션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한국인의 정한(情恨)과 예술혼에 주목하던 눈길은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 사내의 인생으로 옮겨갔다.

이야기는 1957년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 시작된다. 고교 3년생 태웅(조승우)은 친구의 복수를 위해 이웃 학교에 찾아가 매서운 주먹 솜씨를 보이나 학교의 체면이 구겨지는 것을 보다 못한 승문(유하준)의 칼을 맞는다.

태웅은 허벅지에 칼을 꽂은채 승문의 집으로 찾아가 승문에게 직접 칼을 뽑으라고 소리치고 이 일을 계기로 승문의 누나 혜옥(김민선)을 만나게 된다.

승문의 아버지 박일원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을 찾았다가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정치깡패가 난입해 아수라장이 되는데 혜옥까지 동대문파 소속의 살모사에게 봉변을 당하자 태웅은 그를 한방에 제압한다.

이 일로 명동파 중간보스로 영입된 태웅. 빚을 받아주는 해결사 노릇을 하며 생계를 잇던 그는 박일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혜옥과 결혼하고 4·19와 5·16으로 깡패조직이 와해됨에 따라 영화업에 뛰어든다.

제작자가 영화에 손을 떼면서 제작을 떠맡게 된 그는 여배우의 잦은 출연 펑크와 제작비 부족 등 온갖 어려움을 뚫고 첫 영화를 완성하나 공연윤리위원회의 가위질로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빚더미에 앉은 태웅은 깡패 선배였던 오상필(김학준)을 찾아가 군납 건설업자들의 담합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는 빼어난 일처리 솜씨로 승승장구하는데 역사의 격랑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시대배경과 줄거리는 흡사 ‘장군의 아들’과 ‘모래시계’를 합쳐놓은 듯하다. 꼼꼼한 세트와 소품은 ‘시간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을 준다.

영화 도입부부터 조병옥 대통령 후보의 시국강연을 고지하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이유없는 반항’, ‘마부’, ‘007 위기일발 소련에서의 탈출’, ‘증언’ 등 미도극장에 걸린 간판으로 당시의 흥행작을 짐작할 수 있다.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신중현의 ‘님은 먼 곳에’도 들을 수 있다.

임권택 감독은 미장센(화면 구성)이나 사실 고증만을 위해 역사를 재현한 것은 아니다. 가위와 자를 들고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 경찰관, 술김에 박정희 대통령을 욕했다는 이유로 택시 운전사의 신고를 받아 ‘빨갱이’로 몰리는 작가, 5·16 주동자들이 내건 ‘혁명 공약’을 다 외우면 훈방해주는 경찰서 등은 야만적이고 폭압적이었던 시대를 고발하는 외침이다.

겹치기 출연으로 제작자의 애를 먹이는 여배우나 공륜 심의에 잘려나간 필름 등임 감독의 뼈저린 경험에서 비롯된 일화들도 등장한다.

영화 곳곳에서 거장의 원숙함이 느껴지나 아쉬움도 발견된다.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수십 개의 에피소드로 토막내면서 특별한 극적 장치 없이 이어가다보니 이야기가 평면적으로 비친다. 조승우와 김민선은 적역이라고 평가할 만하지만 많은 신인배우들과 조연들의 연기는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어보이는 느낌도 준다.

‘하류인생’을 완성하면서 100번째 연출작을 눈앞에 둔 임권택. 한국영화의 기념비가 될 그의 차기작이 어떤 규모로 만들어질지는 이번 영화로 임권택 감독이 여전한 관객 동원력을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

■트로이

戰神의 부활 “오~ 브래드”

고대 그리스 시대는 신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시대였다. 그리스 신들은 유독 질투심이 많고 변덕이 심해 인간들은 신전을 지어놓고 모든 일을 빌어야 했다.

호머가 지은 ‘일리아드’에서도 그리스 동맹군과 트로이 간의 전쟁은 신들의 불화가 빚은 일로 그려진다. 황금 사과(세상을 바꾼 네개의 사과 중 두번째)가 여신들의 경쟁심을 유발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장수들의 운명이나 전투의 승패도 모두 신들의 파워 게임에 따라 결정된다.

잠자리에서 어머니로부터 ‘일리아드’를 듣고 자랐다는 독일의 부호 슐리만은 트로이 전쟁의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으리라 믿고 터키에서 발굴에 착수해 트로이 유적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슐리만이 고고학을 통해 신화를 역사로 만들었다면, 미국의 감독 볼프강 페터슨은 문학을 영화화하면서 전설을 생생한 실화로 꾸며냈다.

21일 개봉될 영화 ‘트로이’에서는 신들의 역할이 없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줄리 크리스티)가 아들 아킬레스(브래드 피트)를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저승의 강 스틱스에 몸을 적셨으나 붙잡고 있던 발뒤꿈치만이 젖지 않아 유일한 약점이 됐다는그 유명한 일화마저 등장하지 않는다.

신들의 신탁을 믿고 예언을 하는 제사장들은 웃음거리가 되고 이를 따르는 왕과 장수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는 당시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반도의 정세를 자막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미케네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고 있었고 바다 건너 트로이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리스 연맹에서 떨어져 나와 트로이와 동맹을 맺는다. 외교사절로 트로이를 찾은 스파르타의 왕자 파리스(올란도 블룸)는 트로이의 왕비 헬레네(다이앤 크루거)와 사랑에 빠져 함께 귀국한다.

격분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브렌든 글리슨)는 미케네의 왕이자 그리스 연맹의 맹주인 형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에게해의 패권을 노리던 아가멤논은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에 동원령을 내린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결투, 성을 둘러싼 일진일퇴의 공방전, 전리품으로 얻은 여사제 브리세이스(로즈 번)로 인한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불화, 아킬레스의 둘도 없는 친구(영화에서는 사촌) 파트로클루스(가렛 헤드런드)의 화랑관창과도 같은 활약, 오디세우스(숀 빈)의 계략으로 바닷가에 남겨진 거대한 목마 등의 이야기가 ‘일리아드’와 비슷하면서도 때로는 다른 줄기를 만들어내며 흘러간다.

화려한 배역과 함께 관객의 눈을 압도하는 것은 스펙터클한 화면. ‘라이언 일병구하기’의 도입부를 연상시키는 그리스 군의 상륙작전, ‘반지의 제왕’의 재현처럼 느껴지는 트로이 성 앞의 전투 등은 모처럼 서사 액션 블록버스터를 보는 재미를 준다.

2억 달러의 제작비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페터슨 감독은 신들의 이야기를 빼놓으면서도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와도 같은 해석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대신 극적인 재미를 위해 아가멤논의 야욕을 과장하고 아킬레스와 브리세이스의 사랑에 비중을 두어 서사 액션 블록버스터에 휴먼 멜로 드라마 성격을 가미했다.

호머의 서사시에서는 지성과 인내력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스 비극에서는 냉혹하고 교활한 인물로 그려지는 오디세우스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더블루스-소울 오브 맨

블루스 전설 담은 다큐 ‘부에나비스타…’ 빔 벤더스 감독

14일 개봉한 영화 ‘더 블루스-소울 오브 맨’(원제 The Blues-The Soul of A Man)은 우리에게는 ‘베를린 천사의 시’나 ‘파리 텍사스’ 등으로 알려진 독일 감독 빔 벤더스의 신작 다큐멘터리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으로 쿠바 뮤지션들을 조명했던 빔 벤더스 감독은 이번에는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블루스의 전설들을 찾아 나선다.

감독이 스크린을 통해 되살아나게 한 뮤지션은 스킵 제임스, 블라인드 윌리 존슨, J.B. 르누아르. 영화는 이 세 명의 뮤지션들에 대한 기록 영상과 재현화면, 이들 음악을 최근의 뮤지션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엮었다.

스킵 제임스가 세상에 내 놓은 앨범은 한 장뿐. 이후 30여년 만에 병원에서 발견된 그는 극적으로 역사적인 공연에 합류한다.

윌리 존슨은 평생 길거리 공연을 하며 살아갔으며 르누와르는 새로운 세대의 변화를 노래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그들의 노래는 내게 세계를 의미했다. 그 노래들에는 내가 미국에 관해 읽고봤던 그 어떤 책보다, 어떤 영화보다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단지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관객에게 블루스의 역사를 맛보게 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감독은 블루스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음악에 깊숙이 묻어있는 인간적 슬픔과 비참한 생활, 고뇌와 절망을 발견하기도 하고 신과 악마, 신성과 불경, 성스러움과 세속적임 사이에 놓인 블루스의 긴장감을 찾기도 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제작을 맡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이크 피기스 등 7편이 연출한 7편의 다큐멘터리 연작 ‘더 블루스’ 중 한 편으로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같은해 미국의 공영방송 PBS를 통해 방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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