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죄와 벌'

도마 위를 겁없이 기어가던 커다란 바퀴벌레 한마리가 단칼에 동강이 난다. 무표정한 얼굴의 한 사내가 벌레를 칼로 치워버린 뒤 다시 고깃덩어리를 들고 뼈와 살을 발라낸다. 갈고리에 걸려있는 수많은 고깃덩어리들과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시뻘건 피…

영화 ‘죄와 벌’의 첫 장면인 도축장의 광경은 이 작품에서 상징성을 갖는다.

핀란드 출신의 ‘괴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데뷔작인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 소설의 모티브를 현대의 핀란드로 옮겨왔다.

원작 ‘죄와 벌’에서 주인공이 ‘선택된 강자는 인류를 위해 사회의 도덕률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는 사상에 사로잡혀 ‘이(蝨)’같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는 것처럼, 영화에서는 ‘사회정의’인 법의 부조리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이 ‘벌레같은’ 남자를 죽임으로써 이 사회에 ‘본때’를 보여준다.

영화는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관해 다루지만 원작과 달리 살인에 동기를 부여하고, 신에 의한 구원은 배제함으로써 주인공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갖춰준다.

헬싱키에 사는 라이카이넨. 법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도축장에서 일하는 그는 일을 마친 뒤 혼카넨이라는 사람의 아파트로 찾아가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이 때 에바가 출장요리를 나왔다가 사건을 목격하지만 그를 모른 체해 준다.

숨진 혼카넨이 3년 전 라이카이넨의 애인을 뺑소니 사고로 죽인 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는 사실을 안 경찰은 복수극으로 판단, 라이카이넨의 행방을 쫓는다.

그러나 법을 공부한 그는 알리바이를 만들고, 노숙자에게 살인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경찰을 조롱한다. 하지만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그를 잡아들일 방법이 없다.

“그가 역겨워서 죽였어. 벌레를 죽였을뿐야. 내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원칙이야”

라이카이넨은 다시 말한다. “벌레를 죽여도 결국 벌레의 숫자는 줄지 않아”

복수를 하면 통쾌할 거라 믿었지만, 자기 역시 증거불충분으로 법망을 피해나가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그는 결국 자기도 죽은 혼카넨과 별반 다를 바없는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수함으로써 ‘사회와의 전쟁’을 끝낸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무미건조한 편이다. 마치 후반 작업을 거치지않은 것 같은 인상을 남길 정도다.

그러나 데뷔작으로 고전을 선택한 감독의 배짱과 고전을 독특하게 재해석해 보여준 감독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무미건조함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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