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부르는데는 사투리가 없다. 팔도사람이 불러도 노래를 부르는 말엔 사투리가 나오지 않는다. 또 노랫말은 모른채 외국노래의 곡만 들어도 노랫말의 정감을 안다.
노래는 기쁠때 많이 부르지만 슬플때도 부른다. 기쁠때 부르는 노래는 더욱 기쁘게 만들고 슬플때 부르는 노래는 슬픔을 달래준다.
유럽의 동화 가운데 이런게 있다. 어느나라 백성들이 싸움질을 잘했다. 사소한 다툼에도 곧잘 주먹다짐부터 벌이곤 하여 왕이 말을 금지시켰다. 모든 대화를 말대신에 노래로 불러 의사를 소통하도록 했다.
이러다보니 가령 저잣거리에서 발등을 밟혀도 전같으면 ‘왜 남의 발을 밟냐?’ ‘모르고 밟았기로소니 웬 시비조냐!’해서 나중에는 주먹다짐이 날판인데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노래로 말을 대신하다 보니 격했던 감정이 누그러져 결국은 웃음이 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동화이지만 이즈엄 세태에 뭔가 시사해주는 점이 있어 생각이 난다. 우리는 무척 급한 감정속에 살고 있다. 옛날 양반은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길던 옷고름이 짧아지고 그것도 단추로 바뀐 것은 동학란 이후 세상이 시끄러우면서 시작됐다. 그러다가 일본에 병탄되고 광복이 되고나서는 6·25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살기가 그저 바쁜 가운데 감정이 격해졌다.
정치 또한 마냥 불안하기만 했다. 이런 혼돈을 틈탄 벼락부자도 생기고 벼락출세도 만연했다.
만사가 급하다보니 감정에 여유가 있을리 없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래 한마디만 부를 여유를 가지면 누그러질 수 있는 감정을 주체치 못하고 쌈질을 일삼지 않는가 싶다. 심성이 척박해지는 것 같다.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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