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요즘 KBS 1-TV 사극 ‘王과 妃’의 주역으로 나와서 생모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연산군(燕山君)은 조선의 제10대 왕이다. 성종의 뒤를 이어 1494년 12월 즉위하여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그해 11월 타계했다.

1498년의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고, 중전이던 생모가 폐비되고 사약을 받고 죽을 당시 성종의 후궁이었던 두 숙의(淑儀)를 타살했으며 할머니인 인수대비도 구타, 치사케 하는 등 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 생모를 폐비할 때 동조했던 윤필상·김굉필을 사형시키고, 한명회·정여창을 부관참시한 연산군을 사가들은 폭군으로 기록했다.

그러한 연산군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금전(金殿)에 아지랑이/둘러 떠 있네/잔치를 자주 여니/우애(友愛)좋은데/넌지시 사람 끄는 고운 얼굴/그 몇이뇨”

“비나니 어진 정승들이여/나의 잘못을 살펴주고/복령(茯笭)과 대춘(大椿)처럼/오래 오래 사시오”

125편의 한시를 남긴 연산군의 시 구절들이다. 초기시는 평온한 성정(性情)을 담고 있어 폭정을 예감할 수 없을 정도이나 생모의 폐비·사사(賜死)사건을 알고난 뒤에는 “임금을 가벼이 여기면/그는 간신이라/어찌 망령되이/제 몸 중함을 생각하랴/(…)/부월(斧鉞·작은 도끼와 큰 도끼)이 우레처럼 진노함을/면하기 어려우리”라고 써 섬뜩해진다.

연산군의 폭정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시적인 감수성을 풍부하게 가진 인간이었으며, 그런 감수성에 바탕을 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심이 그의 성품을 포악하게 이끌었다는 것이다.

TV드라마 ‘왕과 비’의 인기 탓인가. 양주군 해등촌, 지금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의 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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