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찾아 왔다던 칼바람 추위가 물러가더니 성큼 봄이 다가왔다. 앞마당의 목련 꽃몽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고, 온실 문틈사이로 새나오는 천리향(千里香)의 짙은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겨우내 비좁은 온실 속에 갇혀 있던 화분들을 마당으로 내놓고자 온실 문을 여니 천리향의 짙은 향이 뭉게구름처럼 흠뻑 몰려나와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마침 현관문을 열며 바깥을 내다보던 안사람이 향기에 이끌리어 온실 앞으로 다가선다. 안사람이 화분 겉에 묻은 흙먼지나 닦아 내놓자며 나보고 안에 들어가 ‘바께쓰’에 더운물을 떠다가 마당에 놓인 ‘다라’에 부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일을 도와주겠다는 말도 고마우려니와 이를 어느 영(?) 이라고 거역하겠는가.
오랜만에 부부가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화분을 꺼내어 마당에 보기 좋게 진열을 해 놓고 보니, 미니 화원이 부럽지가 않았다. 천리향에 비해 미향(微香)이긴 하지만 꽃 봉오리를 활짝 열고, 그윽한 자태를 뽐내는 매화는 근엄한 군자답게 화분 가운데서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안에 들어와 잠시 쉬면서 생각을 해보니 아까 안사람이 한 이야기가 마음에 거슬린다. ‘바께쓰’, ‘다라’라는 말은 순수 우리말이 아닌 일본말과 변질된 일본식 외래어 발음이었다. 우리가 일본의 침략에서 벗어나 독립한지 어언 67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들의 잔재인 찌꺼기 말을 주워다 쓰다니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바께스는 원래 영어의 버킷(Bucket)에서 나온 말인데 일본말로는 ‘바께스’로 밖에 발음이 안 된다. 이는 양동이를 뜻하는 말이다. ‘다라’는 일본말의 다라이에서 나온 말인데 세수 대야 또는 양동이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는 모두가 일본말이거나 외래어의 일본식 발음인데 일반적으로 우리말인줄 알고 사용하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와 같이 알게 모르게 찌꺼기 일본말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사용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며 외국어를 자랑삼아 쓰는 세상이 됐는데 이게 무슨 흉이 되겠냐 하겠지만 일본어만큼은 다른 외래어와는 다르다.
일본어는 과거 우리의 침략어이다. 그래서 환영을 못 받는다. 방송에서도 다른 외래어는 인정하나 일어(日語)만큼은 인정치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출연자가 방송 중 일어를 병용하면 진행자가 즉시 우리말로 시정 시킨다. 우리는 훌륭한 말과 글을 가진 세계 12위의 나라로서 우월한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남의 것을 추종한다는 것은 자기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소신 없는 처사이다. 말끝마다 외래어를 섞어 쓰며 혀 꼬부라진 발음을 해야 스스로 유식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 자처하는 지식층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외래어는 부득이 써야할 곳에서 써야한다. 함부로 남용하다보면 주체의식을 저버릴 수도 있다. 2003년 ‘유엔개발계획’의 발표를 보면 한국의 비문맹률은 97.9%(문맹율 2.1%)에 해당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런 나라에서 제나라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변질된 일본말을 주워다 쓰고 있다니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본말의 매개경로는 대개 왜정을 겪은 노년층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제 앞도 못 가리는 주제에 남의 얘기를 하고 있다니 나 자신이 팔불출은 아닌지 자성을 해본다.
이준규 수필가·국제펜한국본부 인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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