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끝자락, 폭설이 이어지는 괴이한 날들이지만 그렇다고 봄의 정령이 다시 잠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젯밤 뉴스에서 매화꽃 뒤덮은 흰 눈꽃을 보았다. 여린 꽃잎들이 눈꽃의 무게를 견디는 순간은 경이로웠다. 3월의 때늦은 눈꽃을 과잉춘설(過剩春雪)이라고 하나, 지난주에는 북설남우(北雪南雨)였다. 매서운 눈보라가 영동지역을 몰아쳤고 남쪽으로는 찬비가 내렸으니.
숲의 시간을 따라 봄꽃이 터지는 일을 자연의 이치로만 볼 수도 있으나, 상징계로 해석하면 그것은 숲의 영성이 깨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겨울 동안 숲의 가장 깊숙한 곳에 활생(活生)의 기운을 묻어두었던 정령들이 노란 활력을 틔우는 순간들인 것이다. 김성룡의 ‘반 고흐의 숲’은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화가 반 고흐를 통해 숲의 영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성룡이 20년 넘게 주목해 온 것은 격동의 근대화와 그 정치성이 야기한 개인의 상처 즉 트라우마(trauma)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 대부분에는 한 개인의 초상들이 등장하며 그 인물들에는 ‘흰 그늘’ 같은 것이 서려있다. 흰 그늘은 인간의 영성을 성숙시키는 카오스적 단련기제다. 공포와 환희, 죽음과 삶, 어둠과 빛처럼 서로 배치된 것들이 이종 교합하듯 한데 어울려야만 발아하는 것이 흰 그늘이다. 김성룡의 흰 그늘은 공포·죽음·어둠의 색채들로 구성된 회화들이 환희·삶·빛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어떤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 의지는 현실이라는 리얼리티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부조리한 세계의 찰나를 붙잡으려는 작가의 세계인식과 다르지 않다.
그런 그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특한 지점을 형성하고 있는데, 1980년대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새롭게 실험하고, 2000년대에는 현실과 비현실,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리얼리즘의 미학을 독자적 경지로 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은 쉽게 판타지의 영역으로 휩쓸리지 않는 그의 견고한 미학적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미학적 정치성은 여전히 ‘현실’이라는 아주 강력한 리얼리티이다.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짙게 배어있다. 그의 경외심은 불상의 광배나 아우라에서 볼 수 있는 외기(外氣)의 색채에서 두드러진다. 그 외기는 단지 한 인물의 기운 같은 것이 아니라 ‘그’를 자연과 이어지고 통하게 하는 ‘일여(一如)’의 어떤 것이다. 그 일여는 항상 우리 앞에 현현하는 보편이 아니다. 그것은 한 찰나에 엿 보이는 자연의 영적 순간들이다. 봄이 오는 순간들처럼.
김종길 미술평론가ㆍ경기문화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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