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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 칼럼] 왜 박쥐는 진화를 멈추었을까?

지난주 국회는 새로 임명된 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가 있었다. 많은 국민들이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저런 사람이…’ 하며 혀를 차기도 하고 보다 못해 TV 채널을 돌려 버리기도 했다.

최종호 건설교통부장관 후보자는 그의 눈부신 ‘아파트 시리즈’에 20차례 이상 “반성하겠다”는 말을 했고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됐던 김연철 통일부장관 후보자 역시 18번에 걸쳐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초등학교 어린이도 아니고 일국의 장관이 되겠다고 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의 이런 모습은 씁쓸하기만 했다. 그는 천안함 폭침을 “우발적 사건”이라고 한 과거 발언에 대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5ㆍ24 조치에 대해서도 과거 “바보같은 제재”라고 했던 말에 야당의원들이 물고 늘어지자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 대한 대응조치”라고 태도를 바꾸었다. 특히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자신을 “감염된 좀비”라고 한 것에 사과를 요구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와 같은 ‘미안’하고 ‘죄송’하며 ‘반성한다’는 것이 그냥 그 자리만 모면하고 보자는 것인지, 정말 마음에서 울어 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 총격에 사망한 것도 그 때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국회 청문회 때는 ‘애도를 표한다’고 생각이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지성인으로서 그리고 공인으로서 그들이 걸어 온 길을 미루어 생각할 뿐이다.

흔히들 나약한 지성인을 ‘박쥐’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지성인으로서 정체성이 흔들리거나 애매할 때 그렇다. ‘신념 없는 말의 성찬’을 늘어놓을 때도 그런 비유를 인용한다.

육지의 들짐승 나라와 새의 나라가 어느 날 전쟁이 붙었다. 이 싸움에서 구경을 하던 박쥐가 아무래도 새의 나라가 이길 것 같아 새들이 집결해 있는 캠프를 찾아 갔다. 그리고는 “나는 당신들을 돕겠소”하고 새들과 합류할 뜻을 비쳤다. 하지만 새들은 “당신은 쥐를 닮았고 새끼를 젖으로 먹여 키우니까 들짐승이요. 받아들이지 않겠소”하고 의심을 했으나 워낙 말을 잘하는 박쥐에게 설득된 새들은 그를 요직에 앉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들짐승 나라가 이길 것 같으니까 박쥐가 슬며시 그쪽 캠프에 찾아갔다. 이곳에서도 박쥐가 새인가, 짐승인가로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짐승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얻게 되었다.

들짐승임을 내세울 때는 쥐와 똑같은 머리와 가슴의 젖을 이용했고, 새에 속하는 것을 내세울 때는 그의 긴 날개가 결정적 증거로 내세운 박쥐, 그렇게 정체성이 없던 박쥐는 어떻게 되었을까?

새에게도, 들짐승에게도 속하지 못한 박쥐는 캄캄한 동굴 속 천정에 매달려 살 수 밖에 없었고 밤을 이용하여 먹이를 챙기는 운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박쥐같은 지성인은 있다. 자유당 캠프에 있던 사람이 4ㆍ19 혁명이 나자 민주투사가 됐고 5ㆍ16과 유신, 제5공화국을 미화하고 옷을 입힌 것도 소위 지성인들이었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도 중세 때 크롬웰이 집권하여 왕정을 뒤집고 공포정치를 실시하자 지식인들 중에는 그를 구세주로 떠받들었으나 그가 실각할 처지에 놓이자 왕당파에 가담, 왕정을 옹호했다.

정말 박쥐 지성인이 없는 시대는 요순시대만 가능했을까? 왜 박쥐는 진화를 멈추었을까?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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