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참전비 순례(4) 영연방참전기념비
‘홀로 남겨진 대대는 악몽과도 같은 달빛 아래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시간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다. 이 조용하고 따사로운 오후가 영원히 계속되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설마리전투’에서 종군신부 셈 데이비스의 일기 中
1951년 4월22일. 영국 글로스터 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235고지는 임진강에서 피어오른 안개로 섬처럼 떠올랐다.
병력이 70배나 많은 중공군에게 포위된 영국군에게는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명령만 있을 뿐 후퇴하라는 명령은 없었다. 지원군도 올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오직 목숨을 건 최후의 결전뿐. 사흘을 버티기 위해 열에 아홉의 전우를 잃어야 했던 영국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 그러나 그들의 용맹함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영광’으로 세인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60년전 용맹스러웠던 젊은 병사들은 어느새 팔순의 노병이 됐다. 6·25 전쟁 발발 60년이 되던 지난 6월25일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높이 12m의 ‘영연방참전기념비’ 앞에는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참전용사 20여명이 차렷 자세로 섰다. 국가보훈처가 전쟁 60년을 맞아 이들을 초청한 것이다.
먼저 간 동료들을 향해 거수 경례를 하고 내려온 영국군 참전용사 재임스 브리지스(78). 그의 눈가가 촉촉하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 주변에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며 “이곳에 다시 서니 동료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 듯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다”며 소회를 밝혔다.
이들은 추도식을 마치고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청춘이 묻힌 전장을 둘러봤다. 노병들이 떠난 자리에는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국기가 나란히 새겨진 기념비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전쟁 당시 16개 유엔 참전국 중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영국은 영연방 국가의 부대들이 도착하자 모두 통합했다. 영국을 중심으로 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을 묶어 탄생한 것이 영연방연합군이다.
이들은 가평전투(1951년 4월23일~25일)에서 중공군의 1차 춘계공세를 좌절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67년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이 세운 것이 ‘영연방참전기념비’다.
가평군은 매년 4월 마지막 주에 이곳에서 기념식을 열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나흘 뒤인 6월29일 극동함대 군함 8척을 한반도 서해로 보내 북한 해안을 봉쇄한다. 이후 영국은 홍콩 주둔의 영국 제27여단을 파병키로 결정하고, 50년 8월 말 한국전선에 전개한다.
영국 제27여단은 50년 9월에 호주군을 배속해 영연방 제27여단으로 개칭됐다가, 51년 4월 뉴질랜드·캐나다·인도군을 추가 배속해 영연방 제28여단이 된다.
영국은 영연방 1개 사단, 2개 보병여단과 군함(항공모함 포함) 17척 등 8만7천명을 파병했고 이 중 1천78명이 숨지고 2천674명이 부상했다. 영국군은 유엔군 중 미군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독립된 사단체제를 유지하며 작전활동을 전개했으며, 대표적인 전투로는 정주전투, 박천전투, 설마리전투, 가평전투 등이 있다.
<설마리전투>설마리전투>
1951년 4월 서울공략을 위해 인해전술로 남하하던 중공군과 임진강 일대를 지키던 영국군이 충돌한 대표적 혈투로 꼽힌다.
이 전투는 영연방 제29여단이 적성 일대에서 임진강을 방어하고 있던 중, 중공군의 제1차 춘계 공세를 맞아 중공군 제63군(제187·제188·제189사단)과 치른 방어 전투다. 이 여단은 이 전투에서 대규모 중공군의 파상 공세를 3일간이나 방어하여 유엔군의 철수를 엄호함으로써, 유엔군이 안전하게 철수하여 서울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전투를 치르는 동안 여단 병력의 1/4이 희생됐다.
이 여단 중에서 중공군 2개 사단의 집중적인 포위 공격을 받고 고립 방어를 전개하고 있던 글로스터 대대는 철수과정에서 39명만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글로스터 대대의 이 전투는 6·25전쟁사상 대대 규모로서는 그 임무를 가장 훌륭히 수행한 전투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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