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읽는 동시] 한가위 날에

한가위 날에 - 장덕천 내 마음의 보름달하늘에 걸자달은 수직으로 나를 내려본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보름달은 꼭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보름달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음 안의 보름달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사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 동시는 마음 안의 보름달을 하늘에 걸자고 귀띔한다. 사는 게 힘들어서, 앞만 보고 달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서, 모든 게 귀찮아서…잊고 살았던 마음 안의 저 보름달. 이 동시에서 보름달은 그냥 보름달이 아니라 자신을 비쳐볼 수 있는 ‘삶의 거울’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제대로 살아왔는지, 나 좀 잘 살겠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지…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잖다. 그러고 보니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추석은 일 년 동안 땀 흘려 일한 햇곡식과 과일로 차례를 지내고 친지와 이웃이 한데 어울려 둥근 보름달 아래서 삶의 기쁨을 누리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이 동시는 추석에 딱 어울리는 시. 밤하늘의 보름달만 바라보지 말고 마음 안의 보름달도 함께 보잖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 모두 ‘사람답게’ 살잖다.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무엇보다도 인간답게!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들꽃은

들꽃은 - 김소운 눈 맞춰주는 이하나 없어도 쓸쓸하지 않아이름 불러주는 이하나 없어도외롭지 않아들녘 여기저기마구 피어서 예쁘게 수놓으면 그뿐......아무런 꾸밈없이아무런 욕심없이피었다 진다. 꽃도 자리가 있다. 잘 가꿔진 정원 안에서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꽃이 있는가 하면 민가(民家)와는 거리가 먼 들판에서 피었다가 지는 꽃도 있다. 이 동시는 정원과는 거리가 먼 들녘의 풀꽃에 바치는 헌시이기도 하다. 아무도 봐주지 않고, 게다가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 들꽃. 그러나 들꽃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오로지 예쁘게 꽃을 피워 들녘을 자신의 꽃으로 수놓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신이 자신에게 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어여쁜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것! 욕심 내지 않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 이게 바로 아름다운 일생이란 것! 최근 들어 몇 통의 부고장을 받으면서 생각난 게 이 동시다. 한 세상 사는 일이 들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봐주거나 이름 불러주지 않아도 한 세상 스스로 자위하며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삶이 아니겠는가. “살아 보니 별 게 아니군!” 며칠 전 우연히 만난 초등학교 친구가 내게 한 말이었다. 머리가 허연 우리 둘은 찻집이 떠나가라 웃고 또 웃었다. 아, 무덥던 여름도 기울고 이제 가을이다. 들꽃을 보러 들녘에라도 나가야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손글씨 편지

손글씨 편지 엄기원 옛날엔 편지를 손글씨로 썼다 종이 한 장 펴놓고 생각을 다듬어 한 줄 두 줄 편지 사연 속엔 따뜻한 마음, 정성이 가득 글씨가 비뚤배뚤 받침이 틀려도 편지 쓰는 얼굴에 번지는 미소! 그런 편지 한 장 받고 싶다 스마트폰에 찍힌 문자는 도무지 편지 같지 않아서… 학창시절의 추억 가운데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편지 쓰기였다. 고향을 일찍 떠나온 나는 좋아하는 연상의 여학생을 만나는 방법이 편지밖에 없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썼던 편지! 지금 생각하면 내 문학의 시발점은 바로 그 편지 쓰기였다. 요즘은 휴대폰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통신이 가능하지만 당시엔 편지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편지는 정성 없이는 쓸 수 없는 통신이다. 우선 종이와 펜이 있어야한다. 여기에 편지를 쓸 만한 장소도 있어야 한다. 그것만 가지고 편지가 되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마음속의 생각을 다듬고 이를 풀어내야 한다. 그런 후 한 자, 한 자 정성을 모아 써야 하는 손글씨. ‘글씨가 비뚤배뚤/받침이 틀려도/편지 쓰는 얼굴에 번지는 미소!’. 편지를 써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설렘과 행복감을 이 동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런 편지 한 장 받고 싶다/스마트폰에 찍힌 문자는 도무지/편지 같지 않아서…’. 요즘 같은 시대에 편지라니? 그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손글씨 편지는 문자 이전에 ‘마음’이요, ‘정성’이란 생각이 든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정다운 이가 보낸 편지 한 장 정말이지 읽고 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섬에 갈 이유

육지를 벗어나 혼자 있는 섬 따돌림 받는 민영이도 섬이다 혼자 지내는 옆집 할머니도 섬이다 가끔 시무룩한 아빠도 섬이다 배 멀리 참고 섬에 찾아가야겠다 ‘태어나보니 섬이었다. 둘러보아야 온통 바다뿐, 들리는 것이라고는 파도소리뿐…’. 욕지도가 고향인 언론인 김성우 선생은 자서전격인 수필집에서 이렇게 썼다. 자기를 태어나게 해준 섬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 김성우박성배 작가의 ‘섬에 가야 할 이유’를 읽고 문득 떠오른 글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섬치고 외롭지 않은 섬이 어디 있으랴. ‘육지를 벗어나/혼자 있는 섬’. 작가는 첫 연을 이렇게 썼다. 벗어난다는 것, 그건 곧 혼자이고 외롭다는 얘기다. 작가는 여기서만 그치지 않고 섬을 아예 사람들 안으로 옮겼다. ‘따돌림 받는 민영이도/섬이다//혼자 지내는 옆집 할머니도/섬이다//가끔 시무룩한 아빠도/섬이다’. 인간은 누구 할 것 없이 하나의 섬이고, 섬과 섬 사이에는 바다가 있다는 것. 상대방의 섬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친 물살과 배 멀미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시란 그릇에 담은 게 이 동시다. 바캉스의 계절이다. 산도 좋고 바다도 좋지만 호젓한 섬은 어떨까.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혼자 있는 섬을 찾아가는 건 어떨까. 사위(四圍)가 바다인 그 곳에서 ‘나’를 돌아다보는 일은 또 어떨까. 섬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의 좌표를 가지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웃음을 찾아보세요

웃음을 찾아보세요 - 이연희 파도가 곱게 다져놓은 모래밭을 뽀득 뽀득 맨발로 가면발바닥이 간질간질 까르르 웃음이 발바닥 안에 숨어 있었네. 신발 속에 갇혀 있던 내가 나왔다 수많은 모래알 속에 반짝!빛나는 것들 모래밭은 맨발로 걸어야 제 맛이다. 그 간질거리는 맛을 뭣에 비기랴. 제아무리 웃음과 담을 쌓고 살던 사람도 맨발로 모래밭을 걷는다면 1초도 안 되어 낄낄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동시는 사람들 마음 안에 숨어 있는 ‘웃음’을 노래하고 있다. ‘웃음이/발바닥 안에 숨어 있었네.//신발 속에 갇혀 있던/내가 나왔다’. 웃음이 발바닥 안에 숨어 있었고, 그건 곧 ‘나’ 자신이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우린 모두 어린 시절부터 웃음을 입에 물고 지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이 웃음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갔다. 어른이 돼 가면서는 아예 웃음과 멀어졌다. 그러면서 남들과도 자연 거리가 생겼다. ‘수많은 모래알 속에/반짝!/빛나는 것들’. 웃음이 삶의 보석이라는 사실을 점차 까먹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차제에 ‘잃어버린 웃음 찾아주기 운동’이라도 벌이면 어떨까 싶다. 시내 적당한 곳에 모래밭을 조성하여 누구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발바닥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햇빛에 달궈진 모래를 통해 심신의 건강도 얻고 마음속에 숨어 있는 웃음을 되찾는다면 이 보다 더 즐겁고 행복한 일도 없으리라. 문학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삶의 한 지혜란 생각이 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누군가가 품어 주면

누군가가 품어 주면 - 신이림 친구한테 시비 걸고 강아지를 걷어차던 창민이도 누군가가 꼬옥 품어 주면 온순한 아이가 될 거예요. 정말이에요. 천방지축 생채기를 내고 아무에게나 날을 세우던 칼날이 대팻집나무를 만나고는 얌전한 대팻날이 되었거든요. 초등학교 시절, 꾀나 말썽을 피우던 아이가 있었다. 걸핏하면 싸움질에다 손버릇까지 나빠서 선생님 속을 새까맣게 태웠던 아이. 학교에서뿐 아니라 고아원에서조차 일찌감치 ‘문제아’로 점이 찍혀진 아이. 그런데 난 이상하게도 그 아이가 싫지 않았다. 그 아이 역시 나한테는 신기하리만큼 고분고분하였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잘 들어준다는 것! 여기에다 “그랬니?” “그랬구나.”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해가며 호기심에다 맞장구까지 쳐준다는 것! 그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비밀스런 이야기도 나한테는 서슴없이 해주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많이 외로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한테서도 정을 받아보지 못한 불쌍한 아이였다. 이 동시를 읽었을 때 난 그 옛날의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지금이라고 해서 그런 아이가 없으리란 법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자. 그런 아이가 있다면 내 아이라 생각하고 따뜻이 가슴으로 품어주자. ‘아무에게나 날을 세우던 칼날이/대팻집나무를 만나고는/얌전한 대팻날이 되었거든요.’ 병아리도 어미닭의 품에서 나온다는 것, 품보다 더 깊은 사랑은 없다. 이 동시는 그것을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해주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경운기

경운기 - 김용희 황소 대신 들여와서 손발을 맞춘 경운기 할아버지 따라 그새 나이를 먹더니 털 털 털 힘겨운 숨소리 내리막길도 소걸음 “아즉, 멈춰 서지 않고 힘쓰는 것이 어디여!“ 등을 쓰다듬는 할아버지 손길에 툴 툴 툴 가쁜 숨 몰아쉬며 오르막도 거뜬히 탈 탈 거리며 한 대의 경운기가 시골길을 간다. 경운기 위에는 학교 가는 아이들이 아예 전세를 내었다. 뭐가 좋은지 연실 웃고 떠들며 소란한 아이들. 경운기를 운전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아침 햇살이 금빛이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경운기는 장터에서 돌아오는 아낙네들의 발품을 덜어주는 택시(?)이기도 했고, 씨앗이나 농기구를 운반하는 전용 트럭이기도 했다. 또 급한 환자가 생길 땐 읍내 병원까지도 마다않는 구급차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길에서 종종 마주치던 광경이다. 이 동시는 그 경운기를 노래했다. 비록 기계일망정 세월 속에서 정이 든 경운기를 황소처럼 아니, 한 가족처럼 여기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따뜻하게 그렸다.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노쇠해 버린 경운기의 등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쓰다듬어 주는 할아버지의 손길.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길을 힘차게 오르는 경운기.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가. 이쯤 되면 경운기는 더 이상 차가운 기계가 아니다. 피가 흐르고 마음이 통하는 한 가족이다. 문학은 이래서 아름답다. 시인은 이래서 귀한 존재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어깨동무하기

어깨동무하기 - 신새별 어깨동무하고 몰려다니는 구름들. 어깨동무하고 뻗어 있는 산들. 어깨동무하고 누워 있는 밭이랑들. 강물도, 파도도 파란 어깨동무. 어깨동무하기 사람들만 힘든가 보다. 어깨동무는 아무나하고 할 수 없다. 친구라 하더라도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게 어깨동무다. 신새별은 이를 자연 속에서 찾았다. 어깨동무를 한 구름, 어깨동무를 한 산, 어깨동무를 한 밭이랑 그리고 강물, 파도…이들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산다. 그래서 자연은 아름답다. 거기에는 서로를 존중해 주고, 아껴 주고, 신뢰해 주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시는 마지막 연에서 가슴이 칵 막힌다. ‘어깨동무하기/사람들만 힘든가 보다.’ 아,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다. 시인은 요 말을 하기 위해서 구름, 산, 밭이랑, 강물, 파도 얘기를 한 것 같다. 참 고약한 시인이다. 이렇게 아픈 곳을 찌르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럴 때 시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칼’이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어깨동무한 풍경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어른들 세상에 던지는 경고장이나 다름없다. 어릴 적엔 잘도 어깨동무하던 그 버릇이 어디로 갔는지를 묻고 있다. 그와 함께 금을 그어 놓고, 담을 쌓아 놓고 지내는 어른들의 그 단절과 슬픈 이야기들을 고발하고 있다. ‘어깨동무하기’는 아이들이 읽어야 할 동시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먼저 읽어야 할 것 같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시골 빈 집

시골 빈 집 - 박지현 버리고 떠난 시골 빈 집 돌담 틈새로 새어나온 귀뚜라미 울음소리만 담에 기대어 환한 달빛 아래 오늘 밤도 잠 안 자고 목이 쉬도록 애타게 주인을 부릅니다. 끼루루 끼루루 깊은 가을밤 몇 해 전 일본 여행에서 본 것 중 하나는 빈 집이 많은 시골 풍경이었다. 굳게 닫힌 창문, 아무 것도 널린 게 없는 마당 안의 빈 빨랫줄,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든 동네…남의 나라이긴 해도 시골이 황폐화된 걸 보는 기분은 여행의 맛을 씁쓰레하게 하였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도 시골에 빈 집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그 현상이 날로 두드러지고 있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저 황량한 시골 풍경, 시골이 죽어가는 걸 보는 마음은 어둡다 못해 아프다. 위 동시는 버리고 떠난 빈 집을 회색빛깔로 보여준다. 도시로 가면서 팽개치고 간 집, 달빛만 가득한 마당, 귀뚜라미 울음만이 들리는 텅 빈 집. 박지현 시인은 이런 시골 풍경을 아픈 마음으로 시 속에 담았다. 그러면서 ‘빈 집’을 통해 우리들의 공중에 뜬 삶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시골집은 단순히 낡은 집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적 고향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 그 집에는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그 위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았던 삶의 터전. 여기에서 ‘끼루루 끼루루’ 애타게 주인을 부르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다. 그리고 어쩌면 고향을 잃어버린 우리들 자신이라는 생각도 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꼬불꼬불

꼬불꼬불 - 최영재 강은 그냥 곧게 흐르면 맘 편하고 훨씬 빠를 텐데 왜 꼬불꼬불 돌아가지? 장마철 모래톱 바위는 굳건히 서 있는지 나무와 폭풍은 이제 사이가 좋아졌는지 산새들은 여전히 알을 품고 있는지 휘휘 둘러보느라 강물은 요리조리 꼬불꼬불 돌아서 간다. 직선으로 흐르는 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구불구불 흐르든지, 꼬불꼬불 흐르든지 곡선으로 흐른다. 그렇게 흘러야 강이다. 강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곡선미(曲線美)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곡선은 아름다움에만 그치지 않고 세상과 세상을 끊임없이 연결시켜 준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저 수많은 길들, 길 위를 달리는 저 바퀴들. 최영재 시인은 강이 지닌 곡선의 의미를 동심의 눈으로 잘 풀어 놓았다. 강은 ‘모래톱 바위’, ‘나무와 폭풍’, ‘산새 알’ 등을 둘러보느라 직선을 마다하고 꼬불꼬불해졌다고 썼다. 이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꼬불꼬불’은 단지 통로로서의 의미만 갖는 게 아니다. 만나는 것들을 몸으로 핥고 끌어안는 ‘포용’의 의미가 훨씬 더 크다. 그러고 보면 강은 어머니의 마음을 닮았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 듯 땅의 구석구석을 품에 안으며 흐른다. 시인은 이를 ‘휘휘 둘러본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 또한 어루만지고 보듬어주는 시인만이 지닐 수 있는 언어법(言語法)이다. 시인은 같은 언어라 할지라도 격하거나 모난 언어 대신 순한 언어를 택한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순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5월은 마음속에 ‘시 나무’ 한 그루 심는 달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물 웅덩이

물 웅덩이 - 홍오선 아무도 찾지 않아 춥다고, 외롭다고 산속의 웅덩이가 달님께 기도합니다 달님이 구름을 헤치고 밤새 지켜줍니다. “네 안에 내가 있지? 나를 꼭 안아보렴 누군가를 사랑하면 가슴이 따뜻하단다.” 웅덩인 가슴에 가득 달님을 안습니다. 외아들로 자라서인지 난 어릴 적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다. 가슴에 무엇이든 담지 않고서는 하루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것이 밤하늘의 별이든, 들녘의 풀꽃이든 상관없었다. 사춘기로 접어들어서는 그 대상이 이성異性으로 바뀌었고 외로움과 그리움은 나이 든 오늘날까지도 나를 놔주지 않고 있다. 홍오선 시인의 ‘물웅덩이’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아!”했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아무도 찾지 않아/춥다고, 외롭다고//산속의 웅덩이가/달님께 기도합니다’. 외로운 웅덩이는 밤하늘의 달님에게 하소연한다. 그러자 달님은 밤새 웅덩이를 지켜주며, 네 안에 내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면/가슴이 따뜻하다.’고 말해준다. 홍오선 시인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 웅덩이를 소재로 삼았다. 여기에다 사랑의 대상을 밤하늘의 달님으로 정했다. 물 웅덩이와 밤하늘의 달은 서로의 처지부터가 다르고 거리상으로도 까마득하다. 여기에 바로 시인의 노림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다만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영원한 사랑이며, 고단한 삶의 위안이며, 행복이 아니냐는 것. 봄밤에 읽으면 더욱 좋은 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징검다리

징검다리 - 김숙분 내가 누군가의 발이 될 수 있을까요? -정말 힘든 일이에요. 시냇가로 나가 보세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든 이의 발이 되려 잠시도 떠나지 않는 징검돌 다섯 개. 어릴 적 동네 냇물에 놓여 있던 징검다리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폴짝폴짝 뛰어 건너는 재미는 그 어떤 놀이보다도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간혹 발을 헛디뎌 냇물에라도 빠지는 날엔 배꼽을 쥐고 웃고 또 웃었던 저 어린 날의 추억. 지금은 웬만한 시골에 가도 그런 풍경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아니, 어쩌다 그런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은 그런 재미를 모를 것이다. 김숙분 시인은 징검돌 다섯 개가 놓인 징검다리를 통해 삶의 깊은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다. 여기에서 ‘징검돌 다섯 개’는 자기 자리에서 오로지 남의 발이 되어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아니,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 몸 하나로 여러 사람의 발이 돼주는 사람이다. 그것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를 가리지 않고 한 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사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사람. 우린 그들에게 다들 빚을 지고 산다. 오늘은 잠시나마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면 어떨까. 나에게 발이 돼주고 있는 이에게 고마움의 목례라도 보내자.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짝꿍

짝꿍 - 오순택 너 없으면 어떻게 길을 가니. 고맙다 지팡이야. 할아버지 아니면 나는 누구와 함께 놀겠어요. 그렇구나. 너와 나는 참 좋은 짝꿍이구나. “아침에는 네 발로 기다가 점심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은?” 어릴 적 동네 누나들이랑 수수께끼 놀이를 할 적에 난 이 문제를 풀지 못해 이마에 알밤을 먹은 기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문제의 해답이 ‘인간’이라는 것을 난 몰랐던 것이다. 수수께끼치곤 참 고약한(?) 수수께끼였다. 이 동시를 쓴 오순택 시인은 나와 같은 동갑내기이다. 그도 어느새 지팡이가 필요한 세월을 맞았다. ‘짝꿍’은 할아버지와 지팡이의 관계를 재미있게 보여준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 친구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따뜻한 작품이다. “너 없으면/어떻게 길을 가니./고맙다 지팡이야.”, “할아버지 아니면/나는/누구와 함께 놀겠어요.” 이 얼마나 정겨운가. 친구는 기쁠 때보다 외로울 때 더 필요한 존재다.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 그게 친구란 생각이 든다. 언젠가 노인대학 강의에 갔다가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곁에 있는 사람처럼 고마운 사람이 없다는 걸 느낀단다. 옳은 말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지팡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짝꿍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있어야 하지만 노년엔 더더욱 필요한 존재란 생각이 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김미영 씨

누군가 “김미영 씨.” 하고 부르는 순간 나도 한 알의 씨앗이었다는 걸 깨달았네. 채송화씨, 오이씨, 겨자씨처럼 지구라는 커다란 밭에 뿌려진 씨앗 한 알. 우린 모두 이름으로 존재한다. 박 아무개 씨, 이 아무개 씨, 정 아무개 씨….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요즘엔 개명을 하는 이도 있지만, 그건 일부 사람들에 해당되는 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지니고 일생을 산다. 김미영 시인은 이를 ‘씨앗’에 비유했다. ‘누군가/“김미영 씨.”/하고 부르는 순간//나도/한 알의 씨앗이었다는 걸/깨달았네.’ 씨앗은 작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씨앗이 비로소 씨앗 값을 한 것이다. 우리들 인간도 씨앗과 다를 게 없다. 자기 이름값을 하기 위해 평생 땀을 흘린다. 누구는 학자로, 누구는 예술가로, 누구는 종교인으로, 누구는 의사나 상업인으로, 또 누구는 정치인으로...각자 맡은 바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름 석 자를 남기고 떠난다.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는 오로지 각자에 달렸다. 위 동시는 ‘지구라는 커다란 밭에/뿌려진’ 씨앗 한 알인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떠나야 할까를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비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삼아 쓴 동시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읽어야 할 시(詩)가 아닌가 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손가락

최 향- 손가락 무엇을 가리켜야 할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갖고 싶은 것 모두 가리키고 싶지만 손가락은 거친 엄마의 손등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하고 싶다고 갖고 싶다고 이것 저것 가리키면 안 된다는 것을. 법정 스님같이 ‘무소유’의 삶을 산 이도 있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소유의 동물이다. 이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똑 같다. 인생의 길에는 갖고 싶은 게 왜 그리도 많은지. 이 동시는 손가락을 내세워 인간의 소유욕에 대한 경계심을 훈계한다. ‘갖고 싶은 것을 가리켜 보라’고 했을 때 무엇을 가리켜야 할지 고민에 빠진 아이의 손가락. 마음 같아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가리키고 싶은데, 하필이면 그 때 엄마의 거친 손등이 떠오른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림을 꾸리느라 나무껍질처럼 거치러진 손, 크림 한 번 발라보지 못한 억센 손...그 손은 ‘이것 저것 가리키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땅의 어머니들도 그렇게 살았다. 전쟁과 가난의 세월 속에서 한 가정의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그리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만큼이라도 사는 데는 그렇게 바보처럼 산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동시를 쓴 시인의 어머니도 그런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 어머니의 삶을 하나의 거울로 삼은 시다. 자기 몸을 방패삼아 자식들의 안위와 장래를 위하는 데 행복의 의미를 두었던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헌시(獻詩)이기도 하다. 참 예쁘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짐수레

짐수레- 김종상 짐수레가 간다 오르막길에. 수레 끄는 아저씨 등이 땀에 흠뻑 젖었다. 가만히 다가가서 수레를 밀었다. 아저씨가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나는 더 힘껏 밀었다.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짐수레를 보자 얼른 다가가서 수레를 밀어주는 아이의 행동을 꾸밈없이 담은 동시다. 오르막길과 땀에 젖은 아저씨의 등, 가만히 다가가서 수레를 밀어주는 아이, 이를 눈치 채고 고맙다는 인사의 표시로 씨익 웃어주는 아저씨의 모습…이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이 동시 속의 아이는 깨달았을 것이다. 내 작은 힘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 만한 것은 이런 ‘작은 것’ 때문이 아닐까. 남의 힘듦을 모른 채 하지 않는 관심,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손을 보태는 따뜻한 정. 힘이란 것도 그렇다. 커다란 힘도 있어야겠지만 작은 힘도 필요한 법. 오히려 큰 힘보다는 여러 개의 작은 힘들이 모여 값진 일을 하는 것을 우린 많이도 봐왔다. 그것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꽃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시인은 이 동시를 1967년에 썼다고 했다. 60년대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사는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그러나 인심 하나만은 넉넉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울타리 사이로 뻔질나게 드나들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고, 대문조차 활짝 열어놓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이 동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대나무

대나무- 유희윤 한 마디 한 마디 다짐하며 자라지요 마디마다 굳은살 박히도록 곧게 살자 푸르게 살자 마음일랑 비우자 어른이 되어도 그 다짐 잊을 줄 모르지요. 비 내린 뒤의 대나무밭처럼 왕성한 푸른 기운이 어디 또 있을까. 단단하게 나무질화한 줄기를 가진 여러해살이식물 대나무. 아니,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는 듬직한 이 땅의 푸른 기둥들. 우린 누구나 어렸을 적에 한 번쯤 대나무처럼 곧게, 푸르게 살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이 동시는 저 순은(純銀)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한다. ‘굳게 살자/푸르게 살자/마음일랑 비우자’.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다. 그렇게 살았는가? 아니, 우리들을 향해 짓궂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참, 고약한 사람이다. ‘어른이 되어도/그 다짐/잊을 줄 모르지요.’ 비아냥대기까지 한다. 참 얄미운 사람이다. 시인의 말과는 반대로 우리들은 아주 오래 전에 어린 날의 그 푸른 다짐을 잊고 살았다. 살다 보니 맘과는 달리 그렇게 돼버렸다. 아니다! 잊지 않고는 살아내기 힘든 세월이었는지도 모른다. 저 팍팍한 날들, 고단한 하루…. 오늘은 잠시 때 묻은 가슴을 열고 어린 날의 ‘나’를 들여다보면 어떨까? 그 어린 날의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뭐라 하는지…. 동시는 때로 어른들에게 부끄럼을 가르쳐 주는 거울이란 생각이 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기지개 켜네

기지개 켜네-문삼석 아가가 두 팔로 기지개 켜네. 눈을 꼬옥 감고 기지개 켜네. 얼마나 컸을까? 고 사이에... 꼬옥 눈감은 고 사이에... 세상의 아기들은 먹고 자는 게 일이다. 그러면서 큰다. 몰래몰래 큰다. 성미 급한 이의 눈엔 보이지 않는 아기의 성장. 그러나 엄마와 아빠만은 아기가 자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꼬옥 감은 눈, 오물거리는 입, 살며시 켜는 기지개…이 얼마나 평화롭고 귀여운가. 어린이의 아버지로 불리는 방정환 선생은 무릎 위에서 잠을 자는 어린이를 보고 이렇게 감탄하였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서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이라고.그는 여기서만 그치지 않고 잠자는 어린이를 하느님으로까지 표현하였다.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 아기의 잠든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욕심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착하디착한 저 순진무구한 모습을 무엇으로 말해야 제대로 표현했다 하겠는가. 아기를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큰 삶의 기쁨도 없다. 사는 일이 팍팍하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저 하루하루가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리라. 최근 들어 우리 사회의 고민 중 하나는 날이 갈수록 신생아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고 있는 것. 이 기지개 켜네를 새해 첫 작품으로 내보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기와 함께하는 행복한 사회가 이뤄졌음 참 좋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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