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안성 조병화문학관

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하루이틀사흘여름 가고가을 가고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겨울 이 바다에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하루이틀사흘 학창시절에 외웠던 시인 조병화(1921~2003)의 추억이란 시다. 추억처럼 조병화의 시는 쉽고 간결하며 그윽한 울림이 있어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45년에 교직에 발을 들인 조병화는 시인 김기림을 통해 시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해방 직후 격동의 세월, 청년 조병화를 견디게 한 것은 시를 읽고 시를 짓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1949년에 펴낸 처녀시집이 버리고 싶은 유산이다. 조병화는 현대시는 난해하다는 통념을 깨고 평생 쉬운 언어로 독자에게 다가간 시인이었다. ■ 아들에게 듣는 시인 조병화 안성과 용인 경계에 있는 45번 국도변에 시와 조병화문화마을이란 입간판이 서 있다. 오랜 장마에도 고개를 숙인 벼 이삭을 보며 오묘한 계절의 섭리를 생각하며 마을로 들어선다. 조병화 시인의 고향 안성 난실리는 개똥벌레가 초가을 밤을 수놓을 것 같은 외진 시골마을이다. 골목 안에서 만나는 톡톡플러스지역아동센터도 아이들의 꿈처럼 알록달록 천진하다. 시인의 생가터에 세워진 이곳은 마을 아이들이 문학과 미술교육을 통해 예술을 감성을 일깨우고 소양을 익히는 배움과 체험의 공간이다. 이 건물을 돌아가면 조병화문학관(관장 조진형)이 있다. 조진형 관장과 인터뷰 자리에 오정교 학예사와 입주 작가 손현숙 시인도 동석했다. 난 문학과 거리가 멀어요. 일부러 멀리했지요. 부친의 뜻을 잇는 조 관장의 뜻밖 말씀에 살짝 놀란다. 매년 조병화 시인의 생일인 5월에 열리는 문학 축제 때 편운문학상을 수상하고 있다. 30회를 맞은 올해의 수상자는 전윤호 시인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김미희 시인이다. 고희를 맞은 시인이 1990년에 사재를 털어 후배 문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기 위한 편운문학상의 제1회 수상자는 조태일 시인이다. 서정적 경향의 시인 조병화와 달리 조태일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두 차례나 투옥되었던 저항시인이다. 조태일 시인은 아버님이 경희대 국문과 교수 시절의 애제자였지요. 조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조태일시문학관을 세울 때 유족들이 부친을 찾아와 글을 부탁했어요. 노환으로 글씨를 쓰기 어려워 몇 번의 시도 끝에 완성한 것이 조태일은 시인이다라는 글이지요. 먼저 간 제자를 추모한 스승의 육필은 곡성 조태일시문학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시인은 어떻게 53권의 시집을 포함해 무려 160권이란 책을 남겼을까. 부친은 남들보다 두 배의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문인들과 어울리다 밤늦게 집에 들어와도 새벽이면 반드시 일어났지요. 조 관장은 그 비결이 부지런함이라고 단언했다. 손현숙 시인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수영 시인과 특별한 사이셨어요. 인민군에 끌려가 죽은 줄 알았던 김수영 시인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조병화 시인께 편지를 보냈지요. 달려가 김수영 시인이 석방되도록 애쓴 분이 조병화 시인이랍니다. 조 관장은 편운문학상이 문인들이 선망하는 문학상으로 자리를 잡은 비결(!)도 들려주었다. 수상자들이 후보를 추천하고 수상자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학관에서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습니다. ■ 창작의 공간, 편운재와 청와헌 문학관은 크게 세 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조병화 시인이 대지를 제공하고 국고의 지원을 받아 1993년에 문화사랑방으로 지은 문학관과 시인이 직접 지어 이전부터 사용하던 두 채의 건물 편운재와 청와헌이다. 문학관 1층 전시실에는 시인이 펴낸 시집과 수필집을 비롯한 저서는 물론 갑(甲)으로 채워진 유년시절의 성적표부터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80년 생애를 드러내는 유물들로 가득하다. 럭비공과 유니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학 때 선수로 활약했지요. 고교와 대학에 럭비부를 창설하고 코치로 활동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어요. 육상선수로도 활약했다니 시인은 몸에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안내를 맡은 오정교 학예사는 조 시인의 시를 여러 편 노래하듯 낭송하며 유물을 설명하더니 귀에 솔깃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준다. 김수영은 일본어로 시를 썼다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조병화는 처음부터 한글로 시를 썼지요. 조병화와 김수영은 동갑내기 문우로 절친한 사이였다. 강의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사진을 담은 액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놀라웠다. 저 많은 것을 어떻게 간직했을. 2층 세미나실에는 편운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1회 수상자 조태일을 비롯해 마종기, 정호승, 나태주 같은 시인들은 물론 김세영, 유종호, 임헌영 같은 문학평론가의 얼굴도 보인다. 조각구름 집이란 뜻의 편운재(片雲齋)는 시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묘막 삼아 1963년에 지은 집이다. 시인의 사적 일상과 한국문단의 역사까지 두루 살필 수 있는 이곳에 시인이 혜화동에 있던 서재를 그대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마주한 청와헌(聽蛙軒)은 시인이 대학에서 은퇴한 1986년에 지은 화실이다. 개구리 소리를 듣는 집이란 낭만적인 이름의 청와헌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노년 시인의 모습이 상상됐다. 시인이 그림을 사랑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천경자, 장욱진, 김환기 같은 화가들이 그와 가까웠던 작가들이다. 시인은 개인전시회도 열만큼 그림에도 애정을 쏟았다. 시인은 노년을 청와헌에서 지내며 자신이 아홉 살까지 살았던 고향마을 난실리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나는 청와헌을 지으면서 내 고향 난실리에 버스정거장을 마을 사람들을 위해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지붕 꼭대기에 꿈이라는 깃발을 달아주었다. 꿈을 가지고 살자는 의도였었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에게 그 꿈이라는 깃발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처럼 노년의 시인은 고향의 아이들을 위해 운동장을 마련하고 철봉대와 농구대를 세웠으며, 이웃들이 쉬도록 등나무 넝쿨 휴게소를 지은 다정다감한 이웃 할아버지였다. ■ 나는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 전신)를 졸업한 21세의 조병화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합격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나는 네가 시험에 떨어졌으면 했다고 고백했을 만큼 아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둔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영혼의 영생(永生)을 믿는다. 편운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시인의 무덤이 있다. 어머니와 아내의 묘와 나란히 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던 해에 펴낸 어머니란 시집으로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 상금으로 어머니 무덤 앞에 시비 해마다 봄이 되면을 세웠다.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땅속에서, 땅 위에서공중에서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조병화 시인은 자신의 삶에서 소중히 여겼던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니는 나의 고향, 나의 종교. 시인이 미리 써 두었던 묘비명은 단 석 줄이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 꿈의 귀향 조병화 시인은 복 많은 시인으로 불린다. 세계 시인대회에서 계관시인의 호칭도 받았고 대학 부총장, 시인협회 회장, 문인협회이사장, 예술원 회장까지 지냈다. 그뿐인가. 여러 편의 시가 교과서에 오르는 명예도 누렸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하 하지 않은가. 내년이면 시인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김수영 시인도 1921년생이니 두 시인을 조명하는 기획도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안성은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고향이기도 하다. 조병화문학관과 박두진문학관을 함께 순례한다면 풍성한 가을이 될 것 같다. 코로나로 문학관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문 전에 문학관의 일정을 문의하는 것이 안전하겠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파주 한향림옹기박물관

숨 쉬는 항아리로 불리는 옹기는 된장과 고추장, 김치 같은 발효 식품을 만드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어디 그뿐인가. 쌀과 소금은 물론 때로는 귀한 책까지 보관했던 만능의 용기였다. 7080이라면 겨울날 밤새 수북이 내린 눈을 손으로 쓸어내고 늦가을에 묻어둔 김칫독을 열어 잘 익은 동치미를 꺼내 맛보던 정겨운 풍경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옹기는 한국인의 음식문화 중심에 있다. 김치와 된장은 옹기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장맛으로 한집안의 수준을 평가하기까지 했으니 우리 앞 세대가 옹기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을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독, 항아리로 불리는 옹기는 도기를 대표한다. 반면 청자와 분청사기, 백자는 자기를 대표하는 것이다.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를 합친 것이다. 왕실과 귀족 문화인 자기는 친숙하지만 평민들의 그릇이던 도기는 오히려 잘 알지 못한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옹기는 왕궁에서 백성들의 부엌에 이르기까지 계층과 지역을 넘어 널리 애용되었다. 옹기는 발효 식품 문화가 발달한 우리 음식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 자본이 대량으로 생산한 생활자기를 널리 유통시키면서 우리의 옹기는 소외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꾸준히 서민들의 생필품이었던 옹기는 산업화가 시작된 1970년대부터 식생활과 주거문화가 크게 변화하면서 사라졌다. 너무 흔했기 때문일까, 옹기는 너무나 빠르게 우리 곁에서 사라져갔다.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유리그릇이 등장하자 무겁고 거추장스럽다며 일부러 깨서 버리기까지 했다. 이제 시골에서도 장독대는커녕 옹기 한 점 구경하기 어렵다. 다행히 이런 아쉬움을 달래주는 곳이 경기도에 있다. 한국인의 멋과 맛이 배인 옹기를 한 자리에 전시하고 그 기능을 연구하여 옹기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곳이다. ■ 옹기에 깃든 멋과 지혜에 반하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한향림옹기박물관(관장 한향림, 이하 옹기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세련된 디자인의 박물관 건물과 고풍스러운 옹기의 어울림이 절묘하다. 도예가이자 컬렉터로 활동한 한향림 관장은 한국 도자예술의 역사성과 경제적 가능성, 교육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2004년에 한향림옹기박물관을 개관했다. 도예과 출신의 한 관장은 대학시절 도자기를 만들면서 투박한 옹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프랑스 유학생 시절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순례하며 숱한 도자기 명품들을 보았으나 옹기가 지닌 매력을 넘어서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1987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부터 옹기를 모으기 시작했던 한 관장은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옹기를 수집하고 박물관을 열게 된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 옹기는 선사시대 이후 인류의 일상생활 속에서 같이 숨을 쉬며 살아온 물품이다. 집집마다 장독대에 있던 항아리가 바로 옹기다. 플라스틱 용기가 나오기 전까지 옹기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조상의 지혜와 미의식이 담긴 옹기들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정감이 가고 자연스럽게 힐링이 된다. 이런 옹기의 가치를 제대로 보존하고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수집을 시작했다 옹기 가운데 항아리는 지역마다 생김새가 달라 개성이 뚜렷했다. 일조량이 적은 북부지방의 항아리는 볕을 많이 받게 하기 위해 입구를 넓게 만들었고 반대로 일조량이 많은 남부지방의 것은 배가 부르고 입구가 좁았다. 지역성까지 뚜렷한 이 같은 개성의 옹기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에 사명감을 가지고 수집에 뛰어들었다. 그러곤 옹기를 제대로 전시할 수 있는 박물관을 짓겠다고 결심했다. 한 관장이 옹기 수집에 열을 올릴 때 남편 이정호 옹기박물관 이사장이 함께했다. 그는 직장에서 은퇴하면서 아내와 같이 옹기 수집에 발 벗고 나섰다. 아내의 뜻에 따라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에 옹기박물관 터를 잡고 사재를 털어 박물관까지 지었다. 옹기가 사라지고 있던 시기에 옹기의 매력에 빠진 부부 덕분에 우리는 한국인의 생활문화의 중심을 차지했던 옹기를 오롯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 지역의 풍토와 역사를 담은 그릇 옹기박물관 양은영 학예연구원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 옹기가 많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니 눈앞에 있는 옹기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정말 그랬다. 1층에 전시된 것은 1950년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생활 옹기들이다. 옹기 앞에서 잠시 고향집 마당의 장독대와 어머니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 옹기를 관람할 자세가 되었다는 마음의 신호일까.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전라도에서 생산한 옹기를 구분 전시하여 그 지역의 특성을 살필 수 있도록 배치했다. 덕분에 관람객들도 옹기의 생김새가 지역의 풍토와 닮아 있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을 수 있다. 햇살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어깨를 넓게 만든 옹기, 배를 강조한 옹기, 옹기들은 입을 좁히거나 넓혀 지역의 풍토와 조화를 이루었다. 양 연구원의 설명처럼 전라도의 옹기가 가장 화려하고 세련되었다. 사람들이 호남을 예향이라 부르는 까닭을 알겠다. 친숙하다고만 여겼을 뿐 여태 잘 몰랐던 옹기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하나 둘 알아가는 즐거움은 박물관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잘 생긴 옹기 하나를 선택해 한국인의 자유분방한 미의식을 찾아낼 때까지 바라보길 권한다. 그 옹기를 매일 만지고 닦았을 조선의 여인네를 상상해도 좋고, 그 옹기를 능숙한 손길로 빗었을 늙은 옹기장이를 불러내 대화를 나누어도 좋겠다. 혹 옹기 뚜껑 안에 십자가를 새긴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옹기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왕조가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자 교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쌀농사 짓기 어려웠던 신자들은 옹기를 구워 팔아 식량을 마련하며 어렵사리 신앙을 지켜나갔다. 반짝이는 옹기 배도 유심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낼 것이다. 어느 지역 어느 마을에서 만든 것인지를 밝히는 글씨를 새긴 옹기들도 여럿 전시되어 있다. 모양이 어떻든 절절한 이야기를 간직하지 않은 옹기는 단 한 점도 없다. 2층 전시실에는 실생활에서 사용된 옹기 소품을 비롯해 다양한 옹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3단지, 4단지 같은 양념단지는 과거가 현재의 주부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병아리 물병은 지금도 응용하면 좋은 과학적인 제품이다. 집안에 들어온 구렁이를 편히 살도록 만든 업단지나 시신을 담았던 옹관은 자연과 하나였던 한국의 옛 문화를 살피게 만드는 특별한 물건들이다. 목부터 허리까지 바느질한 것처럼 쇠심이 가득한 옹기가 멀쩡하게 서 있다. 옹기에 가로 세로로 박힌 수많은 철심은 깨진 부위를 이어붙인 흔적이다. 옛사람들이 옹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검푸른 빛깔의 푸레독은 이름만큼이나 눈길이 가는 유물이다. 푸레독은 질그릇, 오지그릇과 함께 옹기의 한 종류인데, 가마에서 구을 때 잿물 대신에 소금을 사용한다. 잿물을 입히지 않은 그릇을 가마에 넣고 온도가 1100도 고온으로 올라가면 소금을 가마 속으로 뿌리고 가마를 밀폐시켜 구워낸다. 소금이 녹으며 잿물을 대신해 옹기 표면에 유리질막을 형성하면서 독특한 색감을 내는 것이다. 전시된 다양한 옹기들에서 소박하고 푸근한 옛사람의 마음까지 읽어낸다면 더욱 만족스러운 관람이 될 것이다. ■ 옹기는 다시 숨을 쉰다 최근 옹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옹기의 현재화, 생활화를 향한 옹기박물관의 꾸준한 노력과 맞닿아 있다. 박물관에서는 매년 절기마다 전국의 옹기 장인들을 초대하여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 옹기 장인들과 옹기의 기능을 연구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여 쓰임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을 쉬지 않는다. 옹기의 매력을 발견한 젊은 도예가들이 등장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제는 일반인들도 옹기가 숨을 쉬는 바이오 그릇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 소박하며 정감 있는 생김새와 천진한 문양은 한국적 미를 살린 것으로 평가되어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의 문화가 새롭게 조명받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옹기도 그중의 하나가 되리라 확신하며 옹기의 찬란한 변신을 기다린다. 옹기박물관의 자매 박물관인 한향림 현대도자미술관이 바로 곁에 있다. 파블로 피카소와 장 콕도 같은 서양 예술가와 김은호, 김기창, 장욱진 같은 우리나라의 유명 예술인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행복지기)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광명 '충현박물관'

충현박물관은 경기도 광명시 오리로 347번길 5-6에 위치한다. 충현박물관은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직계 후손들의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는 전국 유일의 종가박물관이다. 13대 종손 이승규 박사와 종부 함금자 현 박물관장이 선비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박물관을 건립했다. 박물관은 가정집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돌 절구통들과 맷돌이 눈길을 끈다. 2층 전시실에 오르는 계단에는 수많은 사연을 담은 다듬잇돌들이 정겹게 놓여 있다. 금방이라도 다듬이질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1층은 종가에서 사용했던 제기와 민속생활품이 중심이고 2층 전시실은 오리 이원익의 영정과 친필 등이 주를 이룬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종가박물관답게 오리 이원익의 생애와 업적은 물론 집안의 내력을 소상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종가의 역사와 가계도를 배치했다. 오리 이원익의 초상화는 두 점이다. 그중 하나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53명 중 한명으로 뽑혀 1604년에 그려진 영정으로 2005년 국가문화재 보물 제1435호로 지정되었다. 또 하나의 초상화는 오리 이원익이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순찰사와 평양감사를 역임했는데 백성들이 그의 공을 잊지 못하고 생사당(生祠堂)을 지은 후 봉정한 영정(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이다. 오리 이원익은 백성들이 생사당을 지어 기릴 정도로 목민관의 사표였다. 다산 정약용은 오리 이원익의 초상화를 보고 이 한 사람으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왜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윤리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여유당전서 시문집 영의정 오리 이공 화상찬)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리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64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그리고 정묘호란 등 국내외적으로 국난이 끊이지 않았던 위기의 시대에 살았다. 그는 국난을 극복하고 전후 복구와 민심을 수습해야 할 때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영의정 6번, 도체찰사를 4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신망이 높았기 때문이다. 선조는 비록 전쟁을 겪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던(선조27년 6월 24일) 것은 이원익 덕분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인조는 경이 조정에 없으면 단 하루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인조4년 2월 9일)고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청백리이자 탁월한 경세가로서의 오리 이원익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충현박물관에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문서가 비치되어 있다. 바로 이원익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재산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는 17세기 이후부터 조상에 대해 제사 등을 지낼 때 종손을 중심으로 운영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다. 또한 금양묘산기(衿陽墓山記)에는 종가 묘소의 각각의 위치와 규모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1628) 손자 수약에게 목민관으로서 유념해야할 덕목을 상세하게 써서 당부하는 글도 보인다. 손녀 계온에게는 나이가 젊으니 더 힘써보라는 시 등 여섯 수를 써 주기도 했다. 자상한 할아버지다. 삶을 마감하기 4년 전 84세 되던 해(1630)에는 아들 의전과 손자 수약에게 형제간에 우애 잃지 말고 항상 검소하며 풍수지리설은 믿지 말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서(遺書)를 직접 써 준다. 도망(悼亡)이라는 시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에게 상투 틀고 쪽 찔러 부부가 된 지 여러 해가 지났구려. 그대 할 일 다 마친 것 부럽소. 그대 따라갈 것 몹시 원한다며 부인에 대한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다. 다정다감한 남편 이원익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월급을 어떻게 받았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1년에 4번 계절별로 월급을 지급했으나 1671년(현종 12)부터 월급제로 바뀌었다. 이원익의 4대손인 이존도(李存道, 1659~1745)가 정2품 자헌대부로 재직 시에 받은 급여명세서인 녹표(祿標)가 비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월급은 쌀과 콩이었다. 이존도는 월급으로 쌀 2섬(1섬은 80kg) 2말과 콩 1섬 5말을 월급으로 받았다. 급여명세서인 녹표에는 감찰과 광흥창 관리들이 꼬박꼬박 수결한 흔적이 보인다. 한마디로 사인문화였던 셈이다. 충현박물관에서는 오리 이원익이 과거시험을 치를 때 쓴 시권(試券)이라는 답안지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1683~1730)이 1705년(23세) 소과인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받은 백패(白牌), 1714년(32세) 소과에 합격한 지 9년 만에 드디어 대과에 합격하여 임금으로부터 받은 홍패(紅牌)도 관람이 가능하다. 국가 대사이자 집안의 성쇠가 달리고 개인의 출세까지 좌우되는 조선시대 최고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 꿈의 날개가 박물관에서 펄럭인다. 이존도는 1729년(영조 5년) 6월 21일에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된다. 이존도의 부인 숙인(淑人) 안동권씨에게는 나흘 뒤 6월 25일에 남편의 직급에 따라 정부인(貞夫人) 교지를 내려 준다. 정부인이 된 안동권씨는 조선 초기 대학자인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후손이다. 박물관 바로 앞은 종가이다. 종가에는 사대부가에서 사용하던 소반과 압다지 등 가재도구들이 즐비하고 끼니때마다 불을 지폈을 부엌 아궁이에는 가마솥이 걸려있다. 이원익은 명분이나 이념으로 말하는 성리학자와는 결이 다르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국가와 민생 현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문제점을 도출하여 실사구시 처방을 내리는 경세가였다. 그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방납 등 조세제도의 불합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을 최초로 제안하여 경기지방에서 실시한 사례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안민(安民)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다며 탁월한 전문성과 실무능력으로 난국을 타개하는 국가지도자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너무나 엄격하고 철저했다.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 평생의 재산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두어 칸 초가집(인조실록 24권, 인조 9년 1월 11일) 뿐이었고, 직접 돗자리를 짜서 끼니를 이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초가집 정승이었다. 이에 인조는 그의 청백한 삶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며 집을 지어준다. 그 집이 관감당(觀感堂,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0호)이다. 관감당은 조선의 모든 벼슬아치들과 백성들이 보고(觀) 느껴야(感) 할 집(堂)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이름이다. 관감당 바로 앞에는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고 그 밑에는 오리 이원익이 거문고를 뜯었다는 널찍한 탄금암(彈琴岩)이 자리를 지킨다. 관감당 뒤편으로는 오리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사당 오리영우(梧里影宇)를 둘러볼 수 있다. 충현박물관 건너편 충현역사공원은 이원익을 주제로 한 역사 테마공원이다. 공원 옆에는 오리 이원익 묘소와 신도비 등을 포함한 전주이씨 집안의 묘역이 자리한다. 오리서원은 수년 전부터 청백리 오리 이원익의 공렴(公廉)철학과 리더십에 대한 교육을 공무원, 군인, 공공기관 직원 등에게 실시하고 있다. 이는 청렴정신을 확산시키고 한국이 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정신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광명시의 전략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폐광산을 역사문화관광명소로 탈바꿈시킨 광명동굴은 충현박물관과 가깝다. 청렴하지 않으면 신뢰를 쌓을 수 없고, 신뢰가 없으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 시대가 혼탁하고 국가공동체가 어려울수록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커질 수밖에 없다. 백성들은 오리 이원익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오리 정승 나타났다고 안심하곤 했다. 백성들이 목말라 기다리는 이 시대의 초가집 정승은 누구인가.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아프리카서 남미까지...지구촌 악기들의 천국

파주 헤이리를 찾은 날 모처럼 햇살이 비쳤다. 예술인마을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지 평일인데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적잖다. 갈대광장을 지나 오르막길에 자리한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의 외관은 평범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입구를 지키는 목각인형 한 쌍이 눈길을 끈다. 아프리카 토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시아인이다. 인형이 아니라 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새삼 놀란다. 박물관 초입부터 세계에서 수집한 악기들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악기들 천지인데 눈에 익숙한 악기를 찾기가 어렵다. 특별한 악기가 보였다. 실로폰처럼 길고 커다란 돌을 연결한 독특한 악기가 눈에 들어온다. 베트남 소수민족이 사용한 돌실로폰인데, 아예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유물이라 고고학계에서도 탐을 낸다고 한다. 박물관을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세계 120여개국의 민속악기를 비롯해 소장 자료가 2천여점이나 된다고 한다. 전시된 민속악기의 많은 것들은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수집해 버린 탓에 이제는 구하고 싶어도 수집할 수 없는 게 많다고 한다. 박물관을 열었던 초창기에 일본에서도 찾아와 관심을 가질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 악기 사진의 대부분은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서 제공된 것이다. 국내에 100개 지역 이상의 유물을 갖춘 박물관은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이 유일하고, 아시아를 통틀어도 한국과 일본뿐이라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 세종의 절대 음감, 다윗의 비파 연주 세종은 박연이 시연하는 편경 소리를 듣고 20분의 1음의 차이를 찾아내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종묘제례에 사용할 곡을 직접 작곡하고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한 왕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을 소개하는 글에 세종을 끌어들인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한국인들이 음악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거문고 연주는 기본이었다. 이런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2천500년 전의 위대한 교육자 공자도 틈만 나면 악기를 연주하고 연주를 즐겨들었던 음악애호가였다. 공자보다 더 오래 전의 인물인 이스라엘의 왕 다윗도 비파 연주의 고수였다. 시편에 다윗이 지은 노래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성서는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그 노래를 불렀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처럼 옛사람들이 악기 연주를 즐긴 사실은 시대와 지역과 성별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럽을 제외하면 가까운 이웃나라의 음악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도 음악을 가까이하고 악기 연주를 즐기는 것은 한국인이나 유럽인들에 못지않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 들어서면 단단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트리는 유물을 만나게 된다. ■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세계의 민속악기 1층에는 박에서 나온 악기라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체험교육을 진행하는 시간과 겹쳐 분주한 김연주 학예사의 안내를 받으니 그게 그것 같았던 유물들이 비로소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을 사용해 이처럼 다양한 악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볼론은 말리나 기니의 만데족 악기인데 큰 박을 공명통으로 사용한 하프로서 전쟁 전 전사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거나 사냥 의식에서 연주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잠비아에서 제작한 마찰북은 생김새만큼이나 연주법도 특이하다. 박통 안에 박혀 있는 막대를 젖은 손이나 헝겊, 가죽으로 문지르면 마찰음이 가죽면을 진동시켜 소리가 나온다. 연주 방법이 성행위를 연상시켜서 성인식에 사용하기도 했다 상설전시관은 지하인데, 계단을 내려가자 악기 소리로 요란하다. 나라와 대륙, 문화권별로 악기를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으니 차분히 둘러볼 일이다. 세계 여러 민족과 부족들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닌 이 민속 악기들은 문화재급 가치가 있다. 이처럼 귀중한 악기를 관람객이 만져보고 연주할 수 있도록 허용한 박물관의 결정이 놀랍다. 세계민속박물관의 특징이자 자랑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세계의 악기를 볼 수 있고, 전시된 귀중한 악기를 두드리거나 현을 퉁겨서 소리를 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악기 연주가 신나는 것은 나이 불문이다. 신나게 악기를 두드리는 아이 곁에서 함지박처럼 생긴 악기를 두드리며 귀 기울이는 엄마의 표정이 환하다. 악기의 연원이 된 악기들을 아이와 함께 추적해보면 관람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중국의 산시엔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미센이 되었고, 한국의 해금이 터키와 몽골을 발원지로 하는 후칭이라는 악기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악기를 비교하며 살피는 일만으로도 문화의 역동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다. ■ 지구촌 모든 음악은 위대하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2003년에 개관한 이후 해마다 다양한 강좌와 교육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문화를 소개해 왔다. 세계의 민속악기에 대한 지식을 널리 전하기 위해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찾아가는 박물관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전국 100여 곳의 학교를 찾아 외국에는 이런 악기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연주법을 알려주는 박물관 체험 교육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풍부한 유물과 함께 음반, 도서 등 관련 학술 자료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악기 전시와 체험에서 더 나아가 박물관에서 구축한 자료를 잘 정리하여 다음 세대에 계승하는 것을 박물관의 임무로 삼기 때문이다. 이영진 관장의 철학에 따라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악기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과 악기의 역사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악기 유물과 관련된 자료를 꾸준히 확보하고 전문연구자를 키우는 일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그동안 세계의 민속 악기를 연구하여 네 권의 도서를 출판한 사실은 박물관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악기박물관으로의 여행(2009, 현암사), 인류의 문화유산 악기로의 여행(2010, 음악세계), 세계 민속악기 탄생설화(2013, 음악세계), 인간과 악기(2016, 모노폴리)라는 책이다. 이 책들을 기억했다가 서점에서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출해 박물관을 관람하기 전에 일독하면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신비롭고 재미난 악기 이야기 세계 민속악기 탄생설화를 펼쳐보면 세상의 모든 악기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악기 끝부분이 말머리 모양을 한 몽골 악기 마두금으로 연주한 전통 음악은 2008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고 한다. 마두금이 간직한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몽골 유목민이 기르는 낙타 중에는 가끔 새끼를 돌보지 않는 어미 낙타가 있다는데 이런 문제적 낙타 곁에서 마두금을 연주하면 신기하게도 어미 낙타가 마음을 바꿔 새끼를 돌본다고 한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도 통하는 언어가 음악이다. 옛사람들은 전지전능한 신의 마음도 음악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일까 현대에도 종교음악은 세상에 널리 퍼져있다. 악기 연주로 신과 자연을 움직이고 사람을 위로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사실을 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악기를 만든 재료는 너무나 다양하다. 조개껍데기, 뱀 가죽, 고양이 가죽, 심지어 사람의 무릎뼈도 사용했다. 조상숭배나 종교의식에 사용했던 악기는 예술품이나 다름없이 아름답고 정교하다. ■ 악기로 고정관념 깨고 열린 세계로 박물관을 나서며 문득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떠올렸다. 불면 근심 걱정을 사라지게 했다는 신라의 보물 피리 만파식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서 펴낸 책에도 소개돼 있다. 코로나19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시절 탓이겠다. 코로나19는 이제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상식들이 사실은 편견이거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우리도 이제 고정관념을 버리고 열린 생각, 열린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라고 권한다. 이영진 관장이 전하는 말이 귀에 아직도 쟁쟁하다. 한국만 세계 대표적인 민족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도 훌륭한 음악을 갖고 있지요. 다른 민족들도 훌륭한 민족음악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서양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행복지기)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_인터뷰] 표문송 관장

8월 초, 문체부에서 전국 227개 국공립박물관을 평가했는데,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이 설립 목적의 달성도 평가에서 100점 만점에 100점을 받아 전국 최우수 박물관으로 선정됐다. 표문송 관장은 요즘 몹시 바쁘다. 오는 9월에 개관할 예정인 동두천 소재의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의 관장도 맡고 있어 사흘은 용인, 이틀은 동두천에 있다. 내년이면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이 10주년을 맞는다.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섰던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박물관이 어린이 박물관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지난 10년 동안 디지털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이 일어났다. 그 사이 아이들의 환경이 급변했다. 아이들은 손바닥에 놓인 스마트폰으로 온갖 세계를 만나고 있다. 박물관의 주 관람객은 5~7세의 아동이다. 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시들한 곳일 수 있다. 새롭고 신선한 내용을 채워 어린이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 지난 10년 동안 스마트폰과 AI(인공지능)로 상징되는 디지털문화의 혁명적 발전을 보면 변신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표 관장은 박물관의 형식과 내용도 새로워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린이박물관은 일반박물관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일반박물관은 전시물을 만지지 못하는 곳이지만 어린이박물관은 만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직접 보고 만지며 체험으로 인지적인 감성을 기르는 곳이다. 그런데 올해 코로나19로 전시물을 만지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이제는 박물관도 체험하는 곳에서 경험하는 곳이 돼야 한다. 무엇을 경험할 것인데 묻는다면, 문화 예술이다. 문화 예술은 상상력이 바탕이다. 상상력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바탕이다. 창의력이 가장 왕성할 때가 유년시절이다. 창의력이 폭발적일 때 그 재능을 끌어내 주는 것이 일생을 좌우하게 한다. 공감되는 주장이다. 우리 교육은 아이들에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을 교육이라고 믿고 있다. 어린이의 재능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그의 주장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교육 현실 때문이다. 표 관장은 경기 남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경기도 북부에리모델링 중인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용인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은 음악을 특화하고, 동두천 북부어린이박물관은 미디어아트에 특화된 박물관으로 기획하고 있다. 가장 문턱이 낮은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누구라도 즐길 수 있다. 관람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2018, 2019년도에 관람객의 요구가 음악을 강화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어?이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다. 코로나19는 변화를 가속화했다. 디지털박물관으로의 전환도 단기간에 이뤄졌다. 표 관장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주문했다고 한다. 우리, 불가능이란 말은 쓰지 맙시다. 내년이 10주년이라서 연구 과제로 웃음을 삼았다는 말도 흥미로웠다. 웃음을 통해 어린이를 연구해 보자. 언제부터 어린이가 웃음을 잃는가? 어린이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웃음을 깊이 들여다보자. 아이가 웃음을 잃으면 가족이 웃음을 잃게 된다. 아이들의 웃음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다. 코로나로 올해 불가피하게 지나친 어린이날을 안타깝게 여겨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이 깜짝 선물을 준비 중이다.북부어린이박물관을 재개관하는 날을 D-day로 삼는다니 기대가 된다. 모든 박물관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지만 어린이박물관은 현재로부터 시작해 미래로 향한다. 어린이의 미래는 인간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곳이다. 이곳이 가장 중요한 곳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관심과 지원이 따라야 한다. 최소 10년 중장기 계획으로 어린이의 상상과 용기를 북돋우는 공간으로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이 거듭나야 한다. 어린이야말로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표 관장의 말처럼 어린이가 행복해야 나라의 장래를 기약할 수 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우리 아이들의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다. 벌써 20년째 청소년 자살률 1위에 출산율은 꼴찌인 나라다. 한국의 모든 교육이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장래를 깊이 생각한다면 교육정책에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어린이를 위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지난 10년처럼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이 다시 한국과 세계의 어린이박물관을 선도할 수 있도록 경기도가 정책적인 지원에 적극 나서기를 소망한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색색의 타일로 예쁘게 단장한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외벽을 보니 색동옷이 떠올랐다. 흥미롭게도 한국 어린이운동은 색동회를 중심으로 1920년대에 시작됐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소파 방정환(1899~1932)이 3ㆍ1운동을 기획한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의 사위고 소파와 함께 색동회를 이끌었던 정순철(1901~1950?)이 동학의 지도자 해월 최시형 선생의 외손자다. 두 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 어린이운동의 뿌리가 서양이나 일본이 아니라 어린이를 한울님같이 생각하라고 가르친 동학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 500만명이 찾은 한국 최대 규모의 어린이박물관 용인시 상갈동에 위치한 경기도어린이박물관도 여느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로 관람객이 크게 줄었다. 그래도 여느 박물관보다는 훨씬 많은 관람객을 만났다. 감염 예방을 위해 열을 재고 박물관에 들어서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안내하던 박종강 팀장이 알려준 대로 천정에 달린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은빛 돌고래들이 허공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아!하는 짧은 탄식을 토하며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관장 표문송)은 국내 최대 규모며, 최초의 독자식 형태의 전문 어린이 박물관이다. 실제로 개관 이후 우리나라의 도시는 물론 이웃나라 도시들의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전시시설이 1천평이 넘는다는 사실도 대단했지만 더욱 놀랐던 것은 관계자가 들려준 말이다. 한 해 동안 어린이박물관을 찾는 관람객 수가 60만입니다. 하루 평균 관람객이 2천명인 셈이지요 2011년 9월에 개관한 이후 지금까지 500만명이나 찾았다니 그 인기 비결이 무엇일까?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오랫동안 문을 열지 못했고 현재도 소수의 인원만 입장할 수 있으니 앞으로도 어린이들이 북적이는 풍경은 한동안 보기 어려울 것이기에 아쉽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의 모든 시설과 전시물은 첨단의 기술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것이다. 박물관은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어린이들만을 위한 특별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전시실은 각각 호기심 많은 어린이, 환경을 생각하는 어린이, 튼튼한 어린이, 세계 속의 어린이라는 4개의 미래지향적인 주제로 꾸며졌다. 체험과 학습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유기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스스로 찾아다니며 전시물을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지며 다양한 창조적 감각을 키우도록 한 것이 어린이박물관의 특색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열린 행정이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들의 꿈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역동적인 박물관이 되고자 해마다 경기도 내 초등학교 3~5학년을 대상으로 30명의 어린이자문단을 선발한다고 한다. 활동을 좋아하는 초등생을 둔 학부모라면 기억해 두자. ■ 상상력을 기르고 용기를 배우는 곳 경기도어린이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1층에 있는 21세기 잭과 콩나무다. 잭이 콩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동화의 주인공이 돼보는 흥미진진한 공간이다.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한데 진행을 돕는 선생님들이 아이들 곁에서 지켜봐 주기 때문에 안전하단다. 다만 안전을 위해 키가 120㎝ 이상인 아이만 입장할 수 있어 가끔 항의를 받는다고. 1층부터 3층에 걸쳐 정성스럽게 꾸며진 전시실은 △아기둥지 △자연놀이터 △튼튼놀이터 △한강과 물 △바람의 나라 △우리 몸은 어떻게? △건축 작업장 △에코 아틀리에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동화속 보물찾기 △별난 전시실 △박물관 속 미술관 등 다 둘러보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릴 정도로 흥미롭고 다양하다. 초등학교에 간다면?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나 부모의 걱정을 많이 덜어줄 것 같다. 어린이박물관은 유물 전시가 중심인 일반 박물관과 달리 어린이들은 전시물을 직접 만지고 작동하며 스스로 배우며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젖먹이 유아부터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을 넓힐 수 있도록 흥미로운 전시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으니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높은 것이리라.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의 심벌이 튼튼이이다. 튼튼이는 활기차고 밝은 어린이가 앞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이다. 심벌과 튼튼이 노래에 어린이박물관의 지향점이 들어 있다.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신기해 신기해 모든 것이!/ 꿈꾸던 것들이 여기다 모였네/ 반가워 반가워 반가워라!/ 괜찮아 괜찮아 달라서 좋아!/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들이니까/ 만지고 만들고 뛰어보자!/ 동화 속 친구도 만나보자! 경기도어린이박물관 바로 옆에는 두 개의 도립 문화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새롭게 단장해 4일에 재개관한 경기도박물관은 우리가 사는 경기도 천년의 역사와 곧 우리 곁으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해 보기에 좋은 곳이다.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예술세계가 장엄하게 펼쳐지는 백남준아트센터도 빠트리지 말고 둘러볼 일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남양주 ‘실학박물관’

실학의 중심지는 경기도다. 경기지역 학자를 중심으로 발생한 실학은 경기도에 수많은 유적과 이야기를 남겼다. 실학이 경기도를 대표하는 인문학임을 인식한 경기도는 실학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2003년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실학현양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실학을 널리 알리기 위한 실학축전을 열었다. 이때 실학을 연구하고 실학정신을 보급하는 중심기관으로 실학박물관 건립을 추진해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고향인 남양주에 박물관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4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09년 10월에 개관한 실학박물관은 지난해 10주년을 맞았다. ■ 다시 실학정신을 생각하다 실학박물관은 기획전시실(1층)과 상설전시실(2층)이 있다. 실학의 전모를 살필 수 있는 상설전시실은 3개의 테마로 구성돼 있다. 제1전시실에는 실학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꾸며졌는데 서양문물이 전래된 배경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심화된 조선사회의 모순과 개혁, 변화의 과정을 친절히 소개하고 있다. 실학의 전개라는 주제로 꾸며진 제2전시실은 실학사상의 다양한 면모들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조선사회의 핵심 문제는 토지와 신분제였다. 소수의 양반이 독점하고 있던 토지와 점점 늘어나는 노비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초래했다. 토지를 몰수해서 공평하게 재분배하고 노비제 폐지를 주장했다. 유형원의 생각은 요즘 논의되고 있는 기본복지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실학은 실학자의 삶과 생각을 만나는 일이다. 제3전시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천문과 지리를 소개하며 하늘의 별자리를 그려 넣은 천문도와 조선지도, 세계지도를 볼 수 있다. 아울러 성호 이익,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영재 유득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유명한 실학자들의 저서와 초상화, 천문 도구를 살펴볼 수 있다. 의산문답을 통해 우리가 세계의 중심임을 선언한 담헌 홍대용이나 북학의를 통해 부강한 조선의 청사진을 그렸던 초정 박제가 같은 실학자를 만나는 일도 즐겁다. 홍대용이 거문고 연주의 명수이고 수학을 즐겼으며 자신의 집에 천체관측소를 세워 별자리를 관측했다는 사실까지 알면 흥미가 더해진다. 여기에 어머니를 위해 북경을 여행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한글로 정리해 어머니에게 바친 홍대용의 마음을 읽는다면 더욱 실학자가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홍대용, 박지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백탑파의 우정도 조선 후기실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장의 지도는 최고의 과학지식과 기술력을 가늠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앞에서 경의를 표해야 한다.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역사상 최초의 세계지도를 임진왜란 때 약탈당한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그래도 600년 전에 아프리카를 인지하고 세계 최초로 지도 속에 그려넣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선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현종 대에 탁월한 기술자이자 과학자 송이영이 제작한 혼천시계의 아름다운 외관과 첨단의 성능이 놀랍다.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100여년 전에 정상기, 정항령 부자가 동국지도라는 탁월한 지도를 제작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상기, 정항령은 지도제작을 가업으로 전승한 멋진 부자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처럼 탁월한 상상력과 빼어난 기술이 왜 전승되지 못했을까. ■ 실학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실학은 여전히 살아있는 학문이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옛사람들이고 그들이 남긴 책은 한문으로 이뤄져 있으니 쉽게 다가서기가 어렵다. 실학박물관은 이러한 장벽을 허무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박물관은 여전히 유효한 실학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전달하기 위해 궁리하고 있다. 실학박물관 김태희 관장은 생활 속의 실학과 경기 너머 실학이라는 두 가지를 실학박물관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으로 제시한다. 생활 속의 실학은 조선시대 실학을 현재의 우리 생활 속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즉 일상생활에서 글쓰기, 여행, 음식 같은 친숙한 주제들에 실학자들이 했던 당대의 고민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일상에 실학을 더하면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행이라는 주제에 정약용을 더해 정약용의 여행이라는 콘텐츠를 만들면 조금 더 친근해질 수 있다. 정약용이 당대에 했던 고민을 여행기처럼 풀어나가는 것이다. 경기 너머 실학은 전국에 있는 실학 관련 자원을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다. 실학의 현재화, 생활화를 위한 박물관의 노력은 확장되고 있다. 전시물을 감상하고 강의만 듣는 게 아니라 박물관 일대를 둘러보고, 교육과 연결하는 방식이다. 박물관 관람객 자체가 인근에 놀러 왔다 방문하는 사람이 많아 이런 방식의 교육이 이뤄져야 효율적이다. 남양주를 근거지로 지역 주민과 학교, 문화단체와 함께 박물관이 복합문화공간이 될 수 있도록 꾸려나가고 싶다. 이처럼 관람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실학박물관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실학박물관의 상징이 하늘과 땅 사이에 수레바퀴가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수레바퀴는 18세기 실학이 추구한 생산과 문명의식을 의미하는데 실학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미래를 열어가고자 하는 실학박물관의 건립취지가 담겨 있다. ■ 수원화성박물관과 공동기획전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 조선 정조의 개혁 정치를 도운 번암 채제공(1720~1799년)의 삶과 업적을 되돌아보는 특별전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가 수원화성박물관 공동기획으로 열리고 있다. 실학박물관에서 다음달 23일까지 전시하니 아직 관람하지 못한 이들은 서두를 일이다. 9월3일부터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전시된다. 보물로 지정된 채제공의 초상을 비롯해 30여점의 유물과 3점의 전시 영상을 통해 정치의 장에서 실학정신을 펼쳐나간 채제공의 역동적인 삶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채제공의 출신 배경과 재상으로서 행적, 채제공의 실학 관련성, 시대 변화를 읽은 뛰어난 관료로서 활동, 채제공 초상과 문집 등 4부로 구성됐다. 채제공은 국가개혁을 위해 대안을 제시한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했고, 성호 이익의 학문을 후배들에게 권면했던 정치가로 실학적 역량을 가진 인물이다. 널리 알려진 채제공의 공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의전 등이 점유한 특권적 상업 독점권을 폐지하는 조치였다. 채제공은 실패를 거듭했던 통공책을 실현했고, 영세소민의 삶을 보호해 줬다. 서울의 상업 활성화에 기여한 신해통공의 단행은 실학적 관료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정책이다. 채제공이 신도시 수원화성의 건설을 총괄했던 사실은 그에 대한 정조의 기대와 믿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2폭의 수원화성도 병풍을 통해 상업 물류의 중심으로 부상했던 조선 최고의 신도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관람의 재미를 더해준다. 채제공의 특별한 초상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시된 초상화 밑그림을 통해 동양 삼국 중 가장 빼어났던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에 관한 특별한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 교과서 속 실학이 재미난 동영상으로 실학박물관은 실학을 오늘 여기에서 느끼고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실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동영상도 이런 문제의식으로 만들어졌다. 8분의 짧은 영상이지만 실학자들의 학문적 결실과 개혁안을 인상 깊게 보여준다. 장래세대의 주역인 어린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다. 지식보다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실학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김태희 관장은 대중화를 선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3분짜리의 동영상으로 실학의 주제를 문답식으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실학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유튜브에 실학박물관을 검색해 동영상물을 몇 개 시청하면 실학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바뀔 것이다. 실학박물관은 한강의 너른 품처럼 생각의 크기를 키우는 박물관으로 성장하고 있다. 관람을 마쳤다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을 둘러보고 생가 뒤편 동산에 있는 묘소를 참배하면서 글쓰기를 비롯한 다산의 공부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경치가 뛰어나 머리를 식히고 새로운 계획을 설계하는데 그만이다. 혁명적인 주장으로 가득한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은 우리 시대에 자주 호출해야 할 매력적인 인물이다. 올 가을에 실학박물관에서 반계 유형원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니 기억할 일이다. 우선 고위관료로서 정조를 보좌하며 조선을 개혁한 번암 채제공부터 만나자.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광주 '영은미술관'

오전 내 쏟아지던 장맛비가 미술관에 들어설 무렵 그쳤다. 미술관 마당의 잔디밭이 더없이 싱싱하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모던풍의 영은미술관 건물 외벽에 숫자 20을 새긴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2000년에 개관한 영은미술관이 20주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스무 살 청년으로 성장한 영은미술관(관장 박선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1층 전시실 입구에 두 개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영은미술관 설립자인 이준영 명예이사장(1917~2007년)과 그의 아들 이상은 회장(1940~1992년)이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어릴 때 가난해 겪은 고생과 남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내 마음속에 언제나 한으로 남아 있다. 내 일생의 마지막 사업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다. 이 사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 진흥발전에 기여하고 세계미술 속에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 설립자 이준영 이사장의 회고록 작게, 낮게, 강하게에 실린 글이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여러 문화 산업 중에서도 미술을 택한 것은 우리나라에도 미술계통에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경제적 뒷받침 및 미술에 대한 이해부족 등 사회적 여건이 성숙하지 못해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미술가들을 위한 적당한 제작실이나 전시실도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 발전을 위해서 매우 뜻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설립자는 자신의 이름 이준영의 영자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이상은의 은자를 따서 영은미술관이라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업을 통해서 상은이를 영원히 기념하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내 일생의 마지막 사업임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영은미술관은 한국예술문화의 창작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1992년 11월에 설립한 대유문화재단과 함께 2000년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영은미술관은 다 양한 장르의 작품을 소장전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 사립미술관 최초로 국내외 작가를 지원하는 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박선주 관장은 미술관 자체가 살아있는 창작의 현장이면서 작가와 작가, 작가와 평론가와 기획자, 대중이 살아있는 미술(LivingArt)과 함께 만나는 장을 지향목표로 삼아 새로운 문 화를 선도하는 문화촉매공간이 되기를 지향해 왔다며 지난 20년의 노정을 회고하고 있다. 영은미술관을개관하기 1년 전인 1999년 12월에 대유문화재단의 주최로 국제세미나를 열었다. 그 주제가 21세기 새로운 미술관의 비전과 운영안이다. 이처럼 영은미술관은 21세기를 선도하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관을 지향한다는 지향점을 분명히 선언하고 출발해 20년 세월을 달려왔다. ■ 20주년 특별기획전: 영은지기, 기억을 잇다 영은지기, 기억을 잇다는 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의 이름이다. 여기서 영은지기란 영은미술관 출발 때부터 함께 한 작가와 큐레이터,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관계자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별기획전에는 영은창작스튜디오를 거쳐 간 작가 총 240여명이 참가해 2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세 차례에 걸쳐 열리는 기획전의 주제도 흥미롭다. Ⅰ진실되게, Ⅱ꾸준하게 , Ⅲ가치있게라는 꾸밈없는 이름에서 영은미술관의 설립 이념과 지향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전시 진실되게는 창작스튜디오 1기부터 7기(2000~2010년) 작가들의 작품을 4월부터 지난 6월28일까지 전시했다. 7월4일부터 시작된 두 번째 전시는 8기부터 9기(2011~2016년)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가을에 열릴 세 번째 전시는 10기(2016~2018년)와 11기(~현재)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 진실되게 꾸준하게 가치있게 안내를 해 준 송민정 학예사는 이번 기획전의 특별함을 이렇게 들려줬다. 이번 전시는 영은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이해 영은창작스튜디오 작가들의 소장 작품을 한 자리에서 대규모로 공개한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5년 동안의 짧은 기간인데도 80 점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2010년대 초반의 평면회화, 설치미술, 조각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추상화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박승순의 정제된 이미지Ⅲ, 드로잉에 대한 두 가지 대비되는 시선을 표현한 최영 작가의 연작, 공학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태양의 궤적을 좇는 이장원의 설치작 There is 등 중진작가와 신진작가를 포함해 약 70명의 작품 86여점을 선보인다. 이 작품들은 현대인들의 일상을 범람하는 SNS와 그로 인한 예술품의 복제와 소비가 무분별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던 2010년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작가들은 현실을 외면하듯 개인마다의 철학과 심오한 사유의 결과를 반영한 작품들, 또는 매체 본질에 대한 실험적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방혜자의 빛의 탄생은 눈동자처럼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크리스티안 발자노의 CHOOSE YOUR LIFE1은 캔버스에 금박을 입히고 부식시켜 표현한 것인데 폭풍에 일렁이는 세찬 파도처럼 시선을 파고드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김기환의 에이브러햄 링컨은 아크릴과 철, 감속모터를 설치해 링컨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모니터를 통해보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릇 최상의 감상은 작품 앞에서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응시하다가 가까이 다가갔다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기도 하며 대화를 나눠야 비로소 말을 걸어온다. 물론 운 좋으면 첫눈에 눈길을 사로잡거나 가슴으로 파고드는 작품도 만날 수 있다. 2층의 제2전시장에는 미술관의 20년 역사가 촘촘하게 기록돼 있다. 미술관이 개관한 2000년부터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표방하고 시행했던 전시와 교육, 영은창작스튜디오, 음악회 등 다양한 영역의 아카이브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20년 동안 진행했던 주요 전시 포스터와 도록을 비롯해 영은미술관에서 작가들과 제작한 아트 상품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전시실과 야외 조각공원, 창작스튜디오를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360도 가상체험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가장 따끈한 최신 미술품을 보려거든 4전시실(지하)을 찾아야 한다. 현재 입주 작가 이다(본명이주연)의일렁 Sway전이 열리고 있다. 추상화 작가 이다의 재미있는 작품은 다음달 9일까지 감상할 수 있다. ■ 미술관에서 여름나기 영은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은 재능과 열정은 갖추고 있으나 창작 여건이 좋지 않은 작가들에게 소중한 곳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환경에서 작업에 전념하고, 갓 생산한 작품을 전시하며 이웃 작가들과 일반 관람객과의 만남과 대화가 이뤄지는 곳이다. 이처럼 미술관 내에 작가와 연구자가 생활하면서 작업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 영은미술관의 자랑이다. 작업실도 평면작업실과 입체작업실이 구분돼 있으며 작업실과 가까운곳에 생활공간이 있다. 장기작가는 2년을 머물며 개인전을 기획하고, 평론가와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며, 연합전에 참여하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단기작가는 3개월에서 6개월을 머물며 작품을 창작하고 전시할 기회를 제공한다. 중견 이상의 국내 및 해외 거주 작가들에게 개인전을 열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주고 있다. 역대작가 중에서 전시 공간 지 원이 절실한 작가에게 기회를 다시 부여해 주는 제도도 있다. 심사를 거쳐 입주하게 되는 작가들에게 작업실 1실과 숙소 1실을 제공한다. 시각미술 전 분야에 걸쳐 모집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작가들은 영은창작스튜디오의 문을 두드려 볼 일이다. 전시실을 나와 다시 미술관 주변을 둘러봤다. 산허리에 자리 잡은 미술관 앞으로는 경안천이 흐르고 뒤로는 잣나무 숲이 있다.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 잡은 미술관은 2001한국건축문화대상에 입선한 작품이다. 잔디밭 에 펼쳐진 야외조각공원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좋아할 것 같다. 올여름 피서는 인파로 북적이는 바닷가 대신 미술관 순례를 계획해보면 어떨까. 그 시작은 20살청년이 된 영은미술관부터.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사진=윤원규 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광주 ‘경기도자박물관’

비췻빛 고려청자나 순백의 조선백자 혹은 현대추상화를 방불케 하는 분청사기 이미지를 지긋이 바라보자. 그러면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는 도무지 찾기 어려운 한국인의 풍류정신이라 할 멋과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도자기만큼 한국의 정서와 미를 담고 있는 유물이 달리 있을까. 밥그릇, 찻잔, 술병과 그 자체를 감상하는 현대의 관상용까지 도자기는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고 있다. 16세기까지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첨단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새삼 놀란다. 조선시대 최고의 도자 제품은 왕실에 납품하는 임무를 맡았던 사옹원 분원에서 제작된 것들이다. 경기도자박물관은 조선시대 500년간 왕실용 도자기를 생산했던 관요의 고장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백자와 분청사기가 중심이지만 고려청자는 물론 근 현대의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도자기 전체를 아우른 도자 전문박물관이다. ■ 그릇 속에 깃든 한국의 미 경기도자박물관의 독특한 건물 디자인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박물관 좌우에 있는 건물 모양도 재미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먼저 찾으면 좋은 곳은 박물관 1층 왼편에 도자문화실이다. 이곳을 천천히 둘러보면 도자의 개념과 역사, 제작기법을 비롯해 도자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영상, 모형, 현미경 등 시청각 매체를 함께 활용하여 도자에 관련된 유익한 정보를 흥미롭게 전달하는 공간이니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2층 상설전시실은 고려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소장품을 통해 한국도자기의 역사를 이해하도록 꾸며져 있다. 제1상설전시실은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를 전시하는 곳으로 우리나라 자기문화의 발전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청자와 조선시대의 분청과 백자의 변천과정과 특징, 상감청자에서 분청으로 변화과정, 분청과 백자의 공존관계, 백자의 종류와 미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근현대 전통도자 상설전은 전통도자를 재현한 전승도자와 일부 생활도자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전통가구와 도자기의 어울림이 자연스럽고 멋스럽다는 당연한 사실에 빙긋 미소를 지을 것이다. ■ 조선 백자의 고장, 광주 조정에서 사옹원의 사기제작소인 분원(分院)을 경기도 광주에 설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광주의 지리와 환경 때문이다. 광주는 수도 한양과 가깝고 한강의 뱃길로 백토와 자기를 운반하기 쉬우며, 산림이 울창한 무갑산과 앵자봉이 있어 가마에 사용할 땔나무를 구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분원은 약 10년 단위로 수목이 무성한 곳으로 옮겼다. 금사리에 있던 분원은 1752년(영조 28)에 분원리로 이전되면서 분원이 민영화되는 1883년까지 130년간 운영되었다. 이곳에서 순백자ㆍ상감백자ㆍ철화백자ㆍ청화백자와 분청사기 같은 다양한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미를 창조한 광주 분원도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지 못했다. 1884년 분원의 운영권이 민간에 넘어간 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분원조차 백자를 생산하지 못했다. 값싸고 세련된 일본 도자기에 밀려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 도자의 유구한 전통은 단절되다시피 했다. 임진왜란에 이어 또다시 겪어야 했던 뼈아픈 역사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1945년부터 한국도자 문화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도자 예술에 뜻을 둔 사람들이 분원의 가마터가 가득한 광주를 비롯하여 이천과 여주 등지에 모여들어 수백 개의 가마를 세워 자유분방한 예술혼으로 분청사기와 백자를 창조한 조선 도공의 맥을 잇고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설립된 것이 한국도자재단의 경기도자박물관이다. ■ 근대 도자, 산업과 예술의 길에 서다 5월 22일부터 8월 30일까지 2020 기획전 근대도자, 산업과 예술의 길에 서다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도자 역사의 암흑기라 할 개항부터 일제강점기의 도자 산업을 당대의 유물과 기록을 통해 꼼꼼하게 살펴보는 기획전이다. 큐레이터로 기획전을 연출한 김진영 학예사의 안내를 받으며 1876년 개항부터 조선말기와 대한제국기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의 근대시기에 생산되고 유통된 다양한 도자를 살펴볼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회였다. 김 학예사는 이 시기의 작품을 주목하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시기에 비로소 산업과 예술로서의 도자가 탄생되었습니다. 우리 근대 도자의 과도기적 양상을 이해해야 비로소 현대의 우리 도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시는 1부 조선의 도자, 수공업에서 산업의 길로와 2부 제국주의 시대, 쓰임의 도자에서 창작의 도자로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876년 개항 이후 광주에 있던 사옹원 분원이 민영화되고 분원자기 주식회사로 이행되는 시기에 분원에서 제작된 도자의 근대화를 다룬다. 이 시기는 왜사기로 불리는 일본산 수입자기가 밀려들어 전통의 도자산업을 크게 위협했다. 도자산업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전봇대에 절연체로 사용된 도자애자와 대량으로 생산된 술독이나 석유의 수입으로 널리 보급된 등잔 같은 유물을 통해 근대로 진입한 한국사회의 생활상을 엿보는 것도 흥미롭다. 강원도 양구 칠전리, 전라도 장흥 월송리 등 지방 민수용 가마에서 전통 생산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본과 선진 기술을 앞세운 일본인이 전통 가마를 계속 점유하여 일본식으로 개량하면서 지방의 가마까지 전통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나마 1940년대에 우리 자본으로 행남사, 밀양도자기 등 산업자기 회사들이 설립되었던 것은 주목되는 일이다. 현대 산업도자의 근간을 이루는 국내 기업들이 생산한 제품들에 눈길이 쏠렸다. 2부 제국주의 시대, 쓰임의 도자에서 창작의 도자로는 20세기 제국주의의 풍파에 맞서 우리 장인들이 전통도자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일본의 앞선 기술과 자본으로 재현해낸 청자가 창작도예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일본인들의 불법 도굴과 발굴로 세상에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 고려청자는 일본인에게 탐욕과 열광의 대상이었다. 이 시기에 왕실에서도 민족문화의 진작을 위해 조선미술품제작소, 이왕직미술품제작소를 운영했으나 시대적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일본자본에 잠식되고 말았다. 게다가 일본자본으로 설립된 재현청자 요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주 고객인 일본인의 취향에 맞추어 청자의 전통을 왜곡시켰다. 삼화고려소, 한양고려소에서 생산된 고급 재현청자는 기념품 혹은 창작품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도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이때 생겨났다. 이 시기에 고려청자 재현에 몸담았던 유근형, 황인춘 같은 사람들은 이후 조선미술품전람회에서 이어진 대학의 도예교육과 함께 해방 후 한국도예를 이끈 주축이 되었다. 또 하나 특별한 사실은 도자산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지사들의 활발한 움직임이다.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백용성 선사(1964~1940)가 함양에 생활용 백자를 생산한 일이나 이승훈 선생(1964~1930)이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 설립에 관여한 일, 경기도 광주 출신의 몽양 여운형선생(1886~1947)이 분원 사기를 개량하기 위해 광주에 사기회사 설립을 추진했던 일도 한국도자기 역사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할 소중한 역사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인해 기획전을 관람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신 한국도자재단 홈페이지를 접속하면 3D뷰어를 통해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현장 관람은 개인에 한해서만 가능하며 박물관 관람이 완전 정상화될 때까지 입장료는 무료다. 단체예약 및 전시해설, 연계교육 같은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당분간 운영하지 않는다고 하니 박물관을 찾기 전에 미리 전화로 확인하기 바란다. 박물관 옆에 산책하기 좋은 야외 조각공원이 있고, 광주 지역 도예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광주왕실도자기판매관도 구경할 만하다. ■ 분원백자자료관과 이천세계도자센터 경기도자박물관을 모두 둘러봤다면 인근에 자리한 분원백자자료관(광주분원)도 찾아보기를 권한다. 분원백자자료관은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는 최고급 백자를 생산했던 분원리 가마터에 조성되어 있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사옹원 분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내친김에 이천세계도자센터(이천세라피아)와 여주세계생활도자관(여주도자세상)도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무릇 예술작품을 보는 안목을 갖추고 재미있게 감상하려면 많이 봐야 한다. 김준영 (다사리행복학교 행복지기)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 백남준의 작품이 있는 백남준아트센터.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지은 미술관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지만 우리 땅에서는 백남준이 처음일 것이다. 그만큼 백남준이란 작가는 현대 미술사에 빛나는 존재였다. 천재 음악가에서 천재 전위 설치 예술가로 삶을 바꾼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은 백남준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100년을 앞서는 작품이 아니라 1천년의 시대를 앞서는 작품이었다. 그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이용한 기이한 작품들은 단순한 설치예술품이 아닌 권위와 폭력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민주주의와 인권 진보의 상징이기도 했다. 2001년 경기도는 백남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백남준을 통해 경기도 문화의 혁신적인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경기도가 단순히 대한민국의 경기도가 아닌 세계 수준의 문화 지역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백남준 프로젝트의 목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 백남준 프로젝트는 어언 20년이 되었다. 2006년에 작고한 백남준과 직접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3명의 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작품구매와 건축설계 공모를 통한 뮤지엄의 하드웨어 구축을 통해 2008년 개관하였고 그 후로도 2명의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벌써 12년이 지났다. 백남준이 그토록 염원했던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은 어떤 모습일까? ■ 생전에 전시품 확보 건축설계 UIA공인 국제현상공모 백남준아트센터는 공공 프로젝트로서는 국내외에서 보기 드물게 사업 구상을 진행한 주체들이 뮤지엄 건립부터 운영까지 지속하게 된 프로젝트다. 경기도가 경기문화재단에 위탁을 주며 진행하게 된 이 프로젝트는 2001년부터 백남준과 3차례에 걸쳐 체결된 양해각서를 통해 작품을 확보하게 되었고, 백남준의 최종 선택을 통해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뮤지엄의 부지가 선정되었다. 수원 백씨라는 프리미엄으로 경기도에 (당시)백남준미술관을 유치하게 되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백남준은 당시 사업담당자들의 열정에 반해 백남준이라는 명칭을 가진 최초의 미술관을 경기도에 확정하게 된 것이다. 당시 백남준 프로젝트를 추진한 고(故) 최춘일은 백남준과 그의 동료에게 감동을 주었고, 오늘의 백남준아트센터를 존재하게 하였다. 그의 작품들이 하나하나 이렇게 백남준 살아생전 작가와의 개별 계약을 통해 진품들을 소장품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미디어 아트 작품의 원천 소스인 비디오 아카이브를 확보하여 뉴욕 작업 스튜디오 벽체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작품들을 기반으로 2003년 건축설계에 있어 당시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 이뤄진 UIA공인 국제현상 설계공모를 진행하여 신예 건축가였던 크리스텐 셰멜(Kirsten Shemel)의 매트릭스(The Matrix)가 선정되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백남준에게 새로운 의지를 불타오르게 하였으며 백남준아트센터에 많은 기대를 보여주었다. 2006년 시작되어 2008년 준공된 건축물은 위에서 보면 백남준의 이니셜인 P자 형태로 드러나는 유리 건물로 그랜드 피아노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고 건물 안과 밖의 흐름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 인적구성과 아카이브 2008년 개관 당시 해외 큐레이터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며 화제를 모았던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뮤지엄의 기본 구성요소인 소장품 수집 및 관리, 연구, 전시, 교육 등을 위한 인력뿐만 아니라 비디오 아카이브 연구를 위한 전문적인 아키비스트와 함께 모든 작품을 손수 유지관리 할 수 있는 테크니션 또한 뮤지엄의 전문 인력으로 채용하고 있다. 현재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개관 당시 확보하였던 백남준의 비디오 아카이브를 모두 디지털로 전환하여 보관하고 있으며 아카이브 리서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남준아트센터의 홈페이지에서는 아카이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백남준 아카이브는 백남준과 함께 작업했던 동료 작가, 지인, 컬렉터들이 생성하고 수집한 원자료 컬렉션들로, 백남준의 전시 및 일상과 관련한 서신, 사진, 오브제 등을 포함하며 백남준아트센터 데이터베이스(db.njpartcenter.kr)를 통해 검색할 수 있다. 비디오 아카이브는 백남준이 작업해 왔던 비디오 작품 및 작업 소스, 퍼포먼스 기록 영상, 다큐멘터리 및 영화 등으로 이루어진 아날로그 비디오 2천285점으로, 비디오 아카이브 컬렉션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 Orwell,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 과달카날 레퀴엠 Guadalcanal Requiem등이 포함되어 있다. 스튜디오 아카이브는 백남준의 작업실로 이루어진 아카이브 컬렉션으로 백남준이 작업실로 사용하던 뉴욕의 브룸 스트리트에 위치한 스튜디오의 사물과 문서 전부를 이관한 메모라빌리아와 그랜드 스트리트에 위치했던 스튜디오의 문서로 구성된 그랜드 스트리스 컬렉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 뮤지엄의 공간 구성과 대중 프로그램 지하 2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된 백남준아트센터는 1층과 2층이 전시공간과 함께 대중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층의 전시공간은 , 등의 소장품으로 소장품 전시를 구성하고 있으며 2층에서는 다양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매년 2~3회의 기획전시가 열린다. 2층에는 특별히 메모라빌리아가 상설 전시되어 있으며 일명 플렉스 룸이라 불리는 공간을 통해서는 교육프로그램이나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고, 블랙박스라는 공간을 통해서는 대규모의 미디어 설치물이나 전시와 연계된 퍼포먼스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다양한 아트상품을 판매하는 뮤지엄 샵은 건물 입구인 1층에 있으며, 건물의 안과 밖을 이용해 활용할 수 있는 카페는 1.5층에 자리 잡고 있어 아트센터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NJP 살롱으로 6년간 운영되어 온 교육프로그램은 최근 현대미술과 미디어를 보여주는 것과 백남준에 대한 것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진화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백남준의 전시, 백남준의 퍼포먼스, 백남준의 ***로 표현될 백남준에 대한 개론적인 프로그램은 인간 백남준과 작가 백남준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코로나 시대 비대면 전시 기획 코로나19 상황으로 뮤지엄들이 문은 닫은 지 어언 4개월이 넘었다. 공공기관들의 공공성과 함께 코로나19 확산 방지 차원의 부대낌은 비단 뮤지엄 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간 협의해 온 결과물들이 대중들에게 보여줄 기회가 없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작가들과의 약속, 국제적인 협력 등에도 빨간 불이 들어온 지 오래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일찌감치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4월 6일 유튜브에 큐레이터가 해설하는 기획전시를 오픈하여 비대면의 만남을 모색하고 있다. 미디어 아트 창시자인 백남준의 정신을 이어받은 백남준아트센터의 향후 활동이 궁금해진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백남준이 그토록 염원했던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의 앞의 10년은 그의 정신이 오래 살 수 있는 건축물과 구성물을 완성하는 과정이었고 이후 10년은 동시대의 작가들과 함께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걸음을 걸어온 시간이 아닐까 싶다. ■ 세계인이 찾을 백남준의 집 백남준은 자신이 작품이 전시되는 뮤지엄이 만들어지면 그 도시는 풍요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전 세계의 문화인들이 백남준을 소리 높여 외쳤기에 그는 자신이 죽은 이후 백남준 아트센터를 보기 위해 세계의 모든 이들이 용인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 이상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가 세계 곳곳의 관람객의 발길이 멈추지 않고, 이로 인하여 용인과 수원 그리고 경기남부 지역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염원과는 달리 백남준아트센터는 엄청난 콘텐츠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그리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20년의 경험과 기반을 바탕으로 백남준아트센터를 세계에 적극 홍보하고 국제적인 설치예술작품 비엔날레를 개최한다면 정말 백남준이 생각한 대로 세계적인 뮤지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육사가 광야에서 이야기하듯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백남준 아트센터를 찾아와 기쁨의 노래를 목 놓아 부를 것이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 / 사진=윤원규 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용인 ‘한국등잔박물관’

한국등잔박물관은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곡로 56번길 8에 있다. 세계에서 오직 하나뿐인 등잔박물관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이 위치한 능원리는 2011년에 후기 구석기 시대 타제석기 등이 발굴된 역사적인 유적지이기도 하다. 등잔박물관의 모형은 조선시대 성곽인 수원 화성의 공심돈(空心墩)을 모티브로 설계했다. 수원 출신이자 수원화성복원추진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수원화성에 애정이 남달랐던 초대 김동휘(金東輝, 1918~2011) 관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등잔박물관은 할아버지 김용옥과 아버지 김동휘 그리고 손자 김형구 3대에 걸쳐 수집한 등잔과 유물을 1969년 수원에서 김동휘 관장이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중에 병원 2층에 고등기전시관(古燈器展示館)을 개장하면서부터 출발한다. 1997년에는 수집한 유물과 민속품이 단지 개인이나 한집안의 소유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겨레의 문화유산으로 길이길이 후세에 남기고자 정식으로 박물관을 설립해 용인의 현 위치에 재개관한다. 2년 후 1999년에는 전 재산 사회 환원을 통해 비영리 공익 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으로 등록한다. 일상의 불과 문명의 불을 밝히는 에너지가 전기로 바뀌는 순간 등잔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날마다 우리 방안을 밝혀주던 소중한 등잔이 하루아침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으로 치부되었다. 김형구 제2대 관장은 너무나 중요하고 귀중한 문화유산이 그냥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우리 조상의 손때가 묻은 등잔을 보존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 조상들의 얼을 되새기고 한국 고유의 등잔문화를 연구해 대한민국의 문화정체성을 뚜렷이 부각시키고자 하는 사명감 때문에 나서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호마저 아예 등잔이라고 지었다. 3대에 걸친 등잔지킴이 활동으로 김동휘 관장은 2004년 제1회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보존 관리 부문에서, 김형구 관장은 2013년 박물관 기능 활성화 부문에서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지난 5월20일에는 등잔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화촉(華燭)이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됐다. 전통 혼례에서 상위에 신랑 신부의 화촉을 나란히 세워 밝히는 풍습 때문에 우리는 요즘도 결혼식을 흔히 화촉을 밝힌다고 말한다. 화촉은 그 어원의 출처가 되는 유물이다. 선조들이 연지곤지 찍고 화촉을 밝히며 인륜지대사를 치렀는데 이제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니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가로등도 없던 시절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조족등(照足燈) 또한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순라꾼들이 주로 사용했다고 해서 순라등 또는 도둑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인의 주거문화는 온돌문화다. 온돌문화는 한국의 독창적인 주거문화다. 인류가 불을 사용한 흔적은 약 6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온돌문화는 한국이 유일하다. 온돌은 구들장이 깔린 방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바닥에 놓인 돌판인 구들장을 덥혀 난방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한국 고유의 난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은 약 2천5백 년 전부터 구들장을 채석장에서 적당한 크기로 켜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고, 고인돌을 만들려면 화강암 돌을 켜는 기술이 온돌의 진수인 구들장을 깨는 기술로 전이됐다. 등잔은 이 온돌에서 좌식생활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등기구라 할 수 있다. 등잔은 불그릇이다. 방안의 불을 밝히기 위해 불그릇을 어디에 올려놓고 쓰느냐를 고민하면서 등잔문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온돌방에 앉아서 생활하는 온돌문화 때문에 받침과 대와 잔으로 구성된 등잔의 높이는 사람의 눈보다 약간 낮게 설정됐다. 불을 방으로 들이는 설계가 치밀하다. 대의 높이에 실용성ㆍ예술성ㆍ과학성이 농축됐다. 한국의 고유한 온돌문화와 한국식 등잔문화는 한국문명의 줏대였다. 그래서 한국식 등잔문화가 없는 곳에는 온돌문화도 없다. 이 점이 세계 유일의 등잔박물관이 한국에만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온돌문화가 중국의 문화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형구 관장은 이러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강력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일한 한국등잔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 보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역사적이고 국가적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등잔박물관에서는 오랜 준비 끝에 한반도 고유의 온돌문화와 등잔문화의 기반이 되는 민족의 이동경로와 고인돌에 대한 연구서로 코리안의 기원(저자 최무장 고고학박사.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이라는 책자를 작년에 발간해 온돌문화의 논리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등잔박물관에서는 온돌이 우리 문화임을 증명하는 공공기관이 없는 점을 감안해 향후에 온돌과 등잔 연구소를 설립할 예정이다. 등잔박물관 전시실은 1층과 2층의 상설전시실을 비롯해 3층에는 다목적 문화공간이 마련됐고 지하의 교육실과 농기구 특별전시관 및 야외 전시공간으로 구성됐다. 1층 전시실은 부엌과 찬방과 사랑방 및 안방으로 구성됐다. 먼저 부엌 부뚜막에는 가마솥과 함께 등잔이 놓여 있고 벽에는 벽걸이 등잔이 걸려 있다. 부엌 바로 앞 찬방은 부엌 살림살이를 두는 곳이자 음식을 마무리하는 곳이다. 그래서 도자기 그릇들이 즐비하다. 안방에는 종지형 등잔과 화로, 자개농과 화장대인 경대 그리고 바느질 꾸러미와 다리미, 화조도 병풍, 민속문화재 제15호 화촉(華燭) 등이 진열됐다. 사랑방은 선비가 공부하는 방이다. 글을 밝히는 죽절문(竹節文) 문양의 서등(書燈)이 제격이다. 석유는 1876년부터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동물성 기름과 식물성 기름을 쓰던 종지형 등잔보다는 석유를 주연료로 하는 호형등잔이 등장한다. 호형등잔은 종지형 등잔에서 볼 수 없었던 뚜껑이 달렸다. 석유가 휘발성이라 열어두면 날아가고 인화성이 강하며 냄새 또한 고약하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바뀌니 등잔이 바뀌고 등잔이 바뀌니 일상의 빛도 달라진다. 이렇듯 등잔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 2층 전시실에는 등잔의 변천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전시했다. 삼국시대를 시작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등 각 시대별로 대표적인 등잔을 배치했다. 특히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조족등이 길을 밝힌다. 고려는 불교국가라서 염주모양의 대를 하고 있고, 조선은 유교국가라서 선비의 절의를 상징하는 대나무 모양의 대가 그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한지를 잘게 찢어 꼬아 만든 끈으로 등잔을 만든 후 겉에 기름칠을 한 지승기법(紙繩技法)의 등잔도 보인다. 심지가 두 개인 쌍심지 등잔도 등장한다. 우리들이 흔히 쓰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켠다라는 말이 실물로 다가오니 재미있다. 쌍심지 두 배인 사심지 등잔도 옆자리에 버티고 있다. 사심지는 부자 등잔이다. 석유를 많이 소모시켜 아무나 사심지 못 켠다. 야외 전시공간에는 정겹게 웃는 장승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등잔 모양의 박물관 건립기념탑은 밤을 열어주는 등잔을 예찬한다. 농기구 특별전시관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 디딜방아, 쟁기, 멍에, 지게, 되, 달구지, 삼태기 등이 기다린다. 등잔박물관은 경기도와 용인시가 지원하는 2020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사업에 4년 연속 선정되어 눈으로 담아, 마음에 새기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정상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었으나 7월 3일부터 예약제로 운영할 예정이다. 하반기 9월에서 11월까지는 선조들이 남긴 보물을 만나다 기획전이 준비됐다. 전시 연계프로그램으로 고고학전문가를 초빙한 특별강연도 진행된다. 등잔박물관에 가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예술 활동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온돌문화와 등잔문화는 한국문명의 뿌리이다. 돌과 불은 한국문명의 원형을 담고 있다. 등잔을 보면 등잔불에 바느질하시던 엄마가 생각난다. 등잔불 밑에서 꿈을 꾸던 어릴적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성남 판교 '현대어린이책미술관'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어린이가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하고 기발하며 특별한 존재인지를. 아이는 서너 살만 되면 방바닥과 벽은 물론 냉장고나 소파에도 그림을 그려대는 미술가다. 그러나 샘솟던 호기심과 반짝이던 예술적 재능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물론 그 책임은 부모와 교사를 비롯한 어른들과 낡은 제도를 고집하는 국가에 물어야 한다. 입시와 취업을 향해 설계된 한국 교육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국의 어른들은 여전히 아이들의 호기심과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교육이라 착각하고 있다. 아이들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도 정보와 재미를 일방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한국 교육과 닮은꼴이다. 놀이터도 찾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일방적으로 정보와 지식을 전달받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닫힌 공간인 학교ㆍ학원,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에서 벗어나 타인과 소통하고 사물과도 소통하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성남시 판교에 책을 주제로 한 어린이 미술관이 있다. 현대어린이책미술관(애칭 MOKA, 관장 노정민)은 지역사회 공헌과 문화예술 지원을 위해 현대백화점이 설립한 문화교육공간이다. 노 관장은 그림책을 통해 어린이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스토리에 담긴 의미와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을 다양하고 흥미롭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 소개한다. ■말도 안 되는 것을 현실로 현재 미술관에서는 말도 안 돼! No Way!라는 기회전이 열리고 있다. 이 기획전을 설계한 박수민 학예사는 건축가는 예술가인 동시에 엔지니어이자 철학자이다라는 말을 소개하며 기획전을 구상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건축물들을 짓기 위해 건축가들은 어떤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이 질문을 동행한 아이와 자신에게 던지면서 전시실을 둘러볼 일이다. 전시실에서 처음 만나는 인물은 벽 없이 기둥만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는 필로티(Piloti) 구조를 제창한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인데 그는 시대적 경향을 훌쩍 앞질러 간 프랑스 건축가이다. 두 번째는 끈과 추를 거꾸로 매달아 만든 푸니쿨라 모형 실험을 통해 대성당의 아치와 기둥을 세우는 건축법을 완성한 안토니 가우디(1852~1926)다. 그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벽과 바닥, 천정이 연결되어 물이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비정형 건축을 선보인 자하 하디드(1950~2016)라는 이라크 출신의 여성이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설계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처럼 현대 건축의 역사를 새롭게 쓴 세계적인 건축가 세 사람의 놀라운 생각과 그 생각을 건축에 담은 작품을 감상하면 큐레이터 박수민씨의 의도처럼 말도 안 돼!라고 생각됐던 일들을 가능케 만든 인간의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아치, 다리, 마천루 아치, 다리, 마천루라는 세 가지 건축 요소를 질문과 함께 표현한 해외 작가들의 그림책 원화도 전시하고 있다. 첫 번째 주제는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어 볼까?인데, 소재가 아치이다. 데이비드 맥컬레이 작가의 고딕성당 Cathedral은 실제 건축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과 건축의 원리를 담고 있다. 어느 날 벼락이 떨어져 무너진 성당을 프랑스에서 가장 높고, 가장 아름다운 쉬트로 대성당으로 짓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건축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주제는 더 먼 곳까지 연결할 수 있을까?이고 소재는 다리이다. 데이비드 로버츠의 그림책 꼬마 건축가 이기 펙은 건축의 원리를 이용해 어려움에 빠진 상황을 재치 있게 극복하는 아이 이기 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저귀로 타워를 만들고, 사과와 복숭아를 쌓아 교회를 만들며 건축을 놀이처럼 생각하는 이기 펙은 친구들과 함께 강을 건너가기 위해 나뭇가지부터 신발끈, 자 등을 이어 다리를 완성한다. 세 번째 주제는 아주아주 높게 세워 볼까?인데, 소재가 마천루이다. 디디에 코르니유의 높이 솟은 마천루에 올라요는 하늘에 닿은 듯 높은 마천루를 튼튼하면서도 아름답게 건설하려 했던 건축가의 고민과 노력을 그려낸 그림책이다. 건축 도면을 그려내듯 건축가의 재미있는 생각과 신기한 건축 원리까지 읽어낼 수 있다. ■건축가들의 놀라운 상상력 비밀 르 코르뷔지에, 안토니 가우디, 자하 하디드 건축의 특징과 건축의 원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연계활동도 마련되어 있다. 르 코르뷔지에가 만들었던 것처럼 어린이들이 직접 자신만의 옥상 정원을 상상하고 종이와 색연필 등으로 만들어 볼 수 있다. 가우디가 천장에 줄과 추를 매달아 모형을 거꾸로 만든 다음 바닥 거울에 비춰 영감을 받았던 것처럼 거꾸로 건축 모형을 만들어 거울에 비춰보는 것도 즐겁다. 유선형의 건축물을 디자인한 자하 하디드의 자유로운 발상을 따라 종이 띠를 이용해 부드러운 건축물을 재현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다양한 건축 재료와 도구를 만지면서 각 재료의 사용 목적과 기능을 탐구해 볼 수도 있다. 건축가가 건물을 짓기 전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종이에 스케치할 때 사용하는 연필과 지우개, 삼각자 같은 도구와 나무와 석재, 금속, 플라스틱 등의 건축 재료들을 손으로 만지고 직접 사용하다 보면 어느새 건축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2전시실에 마련된 건축의 몸 상상 실험실은 건축가와 함께 구성한 것으로 어린이들이 건축에 관한 사고와 상상을 더욱 쉽게 접근해 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다. 터널처럼 둥글고 길게 펼쳐진 벽, 구멍을 뚫고 나온 듯한 선반 위에 신기한 집 모형들이 있다. 모형을 하나씩 관찰하며 걷다 보면 건축 실험실 입구에 도착한다. 실험실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무중력의 우주에 들어선 것 같은 백색 소음이 흘러나오고, 곧 벽 전체가 거울로 둘러싸인 상상의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서는 구름 위에 걸린 집, 폭신폭신한 정전기의 집,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집 등 6개의 집 모형들을 관찰하면서 건축의 재료와 건축의 형태에 대한 재미있는 상상 실험을 하게 된다. 모형들은 우리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과연 말도 안 되기만 한 건축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건축 재료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거울 벽에 붙어보며 자신의 몸 자체가 건축물이 되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소통의 통로, 책미술관 책미술관 MOKA의 건축은 미술관의 새로운 공간 유형을 보여준다. 앉아서 쉬고 책을 볼 수 있는 징검다리 모양의 계단인 버블 스텝과 거대한 기둥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통로인 램프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미술관의 심장이라 할 열린서재에는 6천여 권의 그림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조각조각 이야기, 울퉁불퉁 이야기, 진짜 같은 이야기, 춤추는 이야기, 간질간질 이야기 같은 75개의 주제어로 그림책을 분류하여 흥미를 끌어낸다. 서재에는 북마스터(담당 백지연)가 친절하게 도움을 준다. 도서관 옆으로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종이접기 형식을 닮은 널찍한 교육 공간이 연결된다. 그림책은 어린이들이 태어나 가장 처음 접하는 예술이자 풍요로운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문학이며 다양한 세상과 만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그림책은 어린이가 세상과 소통하는 문이며 다름을 이해하는 통로이자 사람의 감성을 어루만지는 작은 미술관이기도 하다. 그림책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내면을 어루만지는 글귀와 자연을 닮은 선과 색깔, 그리고 바람처럼 자유로운 상상이 가득한 그림책은 우리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어른도 그림책을 펼치면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아이를 만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고 지금의 내 아이를 조금 더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신분당선 판교역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있는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아이와 부모, 세대 간의 차이를 뛰어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 주는 도심의 허파와 같은 공간이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 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는 미술관 입장료는 아동, 성인 모두 6천원이다. 자가용이면 백화점 주차장을 2시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사진=윤원규 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경기도미술관

아, 아깝다! 경기도미술관 벽면에 걸린 동시대 미술의 현장, 우리와 당신들과 그림, 그리다라는 두 개의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바라보다 절로 터져 나온 탄식이다. 코로나19로 이처럼 정성을 기울여 마련한 수준 높은 전시를 관객들이 관람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미술관의 협조를 받아 2층에 전시된 다양한 작품을 관람하면서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현대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훌훌 벗어던지게 된 것은 기대 이상의 수확이다. 물론 그것은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최혜경, 이수영 두 분의 친절한 안내와 해설 덕분이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젖빛 금색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공작석의 빛을 발하기도 한다. 해가 비치면 자주색이 튀어 올라, 눈에 어른거리다가 비취색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그 색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을까, 보지 않고서 먼저 마음속으로 정해 버린 것이다. 선입견을 버리라는 연암 박지원의 조언은 우리가 현대미술과 마주할 할 때 꼭 기억해야 할 말이다. 모든 예술적 성취는 이처럼 대상을 생명체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잘 알고 있겠지만, 연암과 동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위대한 화가 단원 김홍도가 안산 사람이기 때문에 경기도미술관이 안산시 단원구에 세워지게 되었다. 2006년 10월에 개관한 경기도미술관의 영문명은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이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모던이다. 초현실주의니 팝아트니 하는 용어에서 풍기듯 현대미술은 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저항과 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낯설고 어렵다. 현대미술에 대한 평범한 관객들의 보편적인 선입견은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과 마주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막연한 두려움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하나 둘 사라지기 마련이다. ■ 상설전시 : 그림, 그리다 경기도미술관(관장 안미희)에서는 현재 두 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하나는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기반으로 기획한 그림, 그리다전이 11월 29일까지 열린다. 박물관 학예팀의 최혜경 큐레이터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회화를 주제로 사물(정물화), 사람(인물화), 순간(풍경화), 행위를 주제어로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를 비롯한 클래식 선율이 귀를 즐겁게 한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전시하는 그림의 주제에 어울리는 곡을 추천한 것인데,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다. 아울러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경험해 볼 수도 있다. 미술관을 찾기 전에 네 가지 키워드를 먼저 살펴보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물: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은 모두 그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대상으로 그린 정물화는 17세기에 들어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독립된 화제가 되었다. 이명미정희민 작가의 정물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사람: 사람은 그림의 중심 소재이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의 미술은 모두 사람이 주제였다. 정정엽이동기 작가의 사람을 그림의 대상으로 화폭에 담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순간: 찰나의 아름다운 자연과 작가의 눈과 손의 만남은 감상자들에게 새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정직성공성훈빈우혁 작가가 표현한 순간을 감상할 수 있다. 행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순간순간의 결정들과 겹겹이 쌓아올리는 겹의 축적이다. 그러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행위로서 보여주는 작업들이 있다. 하종현박경률안지산의 행위를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다. 네 개의 주제마다 관람객에게 던지는 질문의 답을 생각하다 보면 현대미술을 보는 시야가 열릴 것 같다. 사물-작가의 시선을 통해 자유롭게 해석된 정물들이 화면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자. 사람-전통적인 그림의 주제인 사람이 현대 화가들의 눈과 손을 거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자. 순간-작가들이 느낀 색채와 다양한 표현법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는 순간들을 고요히 살펴보자. 작가들의 그 순간들로 우리도 함께 떠나보자. 행위-작가들의 움직임을 떠올려보면서 행위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 기획전: 우리와 당신들 아시아 5개국의 13명의 작가가 참여한 기획전 우리와 당신들전이 8월 30일까지 열린다. 우리와 당신들전을 기획한 이수영 큐레이터는 이 기획전은 우리, 인간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다양한 지역에서 자란, 다양한 세대의 작가들은 세계를 구성해 온 보편적 기준들이 무너지고 있으며 세계가 더 이상 진보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작가들은 인종, 젠더, 문화의 차이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이 기술을 매개로 공존하는 다양한 세계를 작품으로 제시한다. 이처럼 우리와 당신들전은 역사와 관습에 묶인 공동체를 넘어서, 다양한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가능성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여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홍콩관에서 전시되어 호평을 받았던 삼손 영(홍콩)의 위 아 더 월드, 여성의 문제를 페미니즘의 틀을 넘어서서 바라보고자 하는 소니아 쿠라나(인도)의 드러눕다/새의 논리, 미래의 AI를 태양의 모습으로 구현한 이장원의 윌슨, 공유지를 상징하는 구조물 안에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전진경의 마당의 실내를 비롯해 권병준, 김규호, 노진아, 심학철, 아크로바틱 코스모스, 아트 레이버, 이우성, 파트타임스위트, 황연주의 사진, 조각, 영상, 설치 등 총 32점이 전시되고 있다. ■ 경기도미술관에서 만나자 현대 미술은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미술을 즐기려면 현대 미술에 관심을 갖고 기본 정보를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현대 미술은 너무 어렵다 하는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작품은 결국 내 주변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현대미술을 이해할까라는 필자의 우문에 대한 안미희 관장의 현답이다. 그렇다. 일단 문을 두드려야 문을 열 수 있고, 발을 들여놓아야 새로운 것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역사가 15년이 된 경기도미술관만큼 인프라를 구축한 미술관은 없을 것입니다. 내실을 기하기 위해 아카이브 구축하면서 계속 연구하고 공부하며 도립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나갈 것입니다. 미술관 곁에 자리 잡은 연꽃 가득한 화랑저수지를 산책하거나 숲으로 조성된 산책로도 훌륭하다. 멋진 조각 작품이 곳곳에 서 있는 야외 공간도 전시관 못지않게 잘 꾸며져 있으니 미술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필수 코스다. 아울러 경기도미술관 가까운 곳에 김홍도를 기념하는 단원미술관이 있으니 함께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경기도미술관 지붕에 경기도미술관에서 만나자라는 글자판이 있다. 머잖아 코로나19도 지나갈 것이다. 경기도미술관을 좋은 사람들과의 약속 장소로 예약하면 어떨까. 홀로 찾아가 시대를 성찰하는 작품과 마주하여 작가와 말 없는 대화를 나누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코로나19로 관객들이 직접 미술관을 찾기 어려운 뜻밖의 상황을 맞아 경기도미술관은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인터넷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우선 경기도미술관 홈페이지를 접속해 보자. 두세 번만 클릭하면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 전시기획에 대한 이야기, 전시장의 공간 구성. 작가와의 인터뷰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은 당신 곁에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용주사 효행박물관

용주사 효행박물관(孝行博物館)은 사실상 정조박물관(正祖博物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주사(龍珠寺) 자체가 정조의 혼이 그대로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절집 안에 있는 효행박물관의 유물 대부분이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와 직접적인 유물이기 때문이다. 실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인 효행박물관은 용주사의 성스럽고 보배로운 유산들이 모셔져 있는 박물관이다. 역사에 빛나는 유물들을 수장하고 전시하는 성보박물관을 소유한 사찰들이 우리나라에는 여러 곳이 있다. 오대산 월정사 성보박물관이나 통도사 성보박물관 그리고 해인사 성보박물관은 어지간한 시립박물관이나 대기업이 만든 박물관 이상으로 뛰어난 박물관이다. 그러나 이들 성보박물관보다 더 좋은 유물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성보박물관이 바로 용주사 효행박물관이다. ■ 용주사는 그 자체가 에코뮤지엄 용주사는 정조시대 창건된 사찰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1789년(정조 13) 7월에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진 원찰(願刹)이다. 정조는 즉위 직후 전국에 있는 왕실 원당(願堂)을 없애라고 지시하였다. 사찰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원당이라고 지정한 제도를 없애라는 것이다. 원당으로 정해진 사찰들이 왕실과 결탁해서 부정행위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용주사는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기획된 사찰이기에 적극적으로 짓게 하였다. 용주사 사적기에 의하면 보경당 사일 스님이 정조의 행차를 막고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강의하여 정조가 감동받아 용주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의하면 현륭원 공사 책임자인 이문원이 공역을 마치고 원찰을 지어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정조가 이를 수용하여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관찬 사서인 비변사등록의 내용은 정확한 것이니 이는 정조의 의중을 확인한 이문원과 정조의 합의로 추진된 것이다. 정조가 현륭원 공사의 책임을 이문원에게 맡긴 것은 매우 의도된 것이다. 이문원의 부친인 이천보(李天輔)는 영의정으로 있다가 사도세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자살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사도세자의 한(恨)을 풀어줄 수 있는 신하로 정조가 이문원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문원에게 용주사 건립의 책임을 맡았다. 정조는 용주사 건립에 필요한 돈을 왕실에서 모두 제공할 수도 있었지만 전국의 모든 백성들과 관료들에게 시주를 받았다. 조선 사찰사료에 의하면 엄청난게 많은 백성들이 모두 87,000냥을 모아서 사찰 건축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수원 화성의 축성 비용이 870,000냥이 들었으니, 용주사 건립비용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용주사는 처음부터 왕실 원찰로 만든 곳이기에 유교식 문화가 반영되었다. 그래서 용주사는 유교 건축문화와 불교 건축문화가 결합된 조선 유일의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조선 왕실 원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용주사 정문이 일반 사찰들과 같이 일주문의 형식이 아니라 향교나 서원의 정문처럼 삼문(三門)으로 되어있다. 삼문의 중앙문은 국왕이 왔을 때만 여는 문이기에 용주사의 삼문 중 가운데 문도 역시 국왕인 정조가 왔을 때만 열게 되어 있다. 특히 용주사 대웅보전은 왕실의 전각을 그대로 사찰의 금당(金堂)으로 재현하였다. 국왕이 친림한 어전과 같은 건축기법으로 만들어져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942호로 지정되었다. 대웅보전 안에 있는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가 감독한 탱화로 유명하다. 지금 경기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아마도 조금 더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보물로 승격될 수 있다. 대웅보전 앞에 종각에는 용주사 동종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된 종의 하나로 몸체에 비천상과 삼존상이 새겨져 있는 고려시대 종이다.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문과 천보루 사이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5층 석탑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종합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용주사 그 자체가 에코뮤지엄인 것이다. ■ 용주사의 보문 부모은중경판 사찰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자 엄청난 스토리를 갖고 있는 용주사는 정조가 창건 과정과 그 이후에 하사해준 특별한 유물들을 효행박물관에 소장하여 전시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부모은중경판(父母恩重經板)이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은혜를 깊이 새기고 반드시 호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특별한 경전이다. 불교란 원래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초월적 자아로 가는 것을 공부하는 종교인데, 오히려 가장 세속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효를 이야기하니 특별한 경전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이 부모은중경을 너무 귀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은중경판을 용주사에서 만들게 하였다. 용주사 은중경은 변상도의 그림이 워낙 섬세하고 탁월하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은중경은 정조대왕의 특별한 후원에 힘입어 조선 말기까지 다양한 판본이 유통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에게 부모와 자식 간의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효심으로 만들어진 절집이 용주사이다 보니 지금도 용주사를 효찰대본산(孝刹大本山)이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동짓날이 되면 관상감에서 부적을 인쇄하여 백성에게 나누어 주게 했었다. 정조는 용주사 창건 이후 관상감의 부적 나누어 주는 풍속을 없애고 용주사에서 부모은중경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나누어 주게 하였다. 조선의 모든 백성에게 진정한 효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가장 먼저 전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부모은중경판이다. 잘 살펴보기 바란다. ■ 정조의 불심이 담긴 봉불기복게 다음으로 중요한 유물이 용주사 봉불기복게(奉佛祈福偈)이다. 매우 큰 대장지(大壯紙)에 정조가 지은 봉불기복게를 참으로 멋진 글씨로 쓰였다. 정조는 1796년(정조 20)에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을 목판본 9매와 필사본 2종으로 용주사에 하사하였다. 목판본은 정조가 지은 불교 게송인 만큼 그 내용을 기리기 위해 목판에 새기고 이를 왕실의 원당인 용주사에 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용주사 봉불기복게는 한국 불교사에 빛나는 유산이기도 하다. 정조는 용주사를 건립하면서 대웅보전 안에 모셔질 석가모니불상을 하사했다. 그리고 부처님을 위한 기복문을 직접 작성하였다. 조선의 국왕이 왕실과 연관된 사찰에 불상을 만들어 내려준 사례들은 존재하지만 국왕이 직접 부처님을 위한 기복문은 쓴 적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불교관을 그대로 봉불기복게에 담아 냈다. 그 스스로 금륜성왕(金輪聖王)을 자처하여 국왕이자 깨달은 존재로서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흡사 인도의 아쇼카왕과 같은 모습이었다. 국왕이자 부처인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인정된 아쇼카왕처럼 정조도 금륜성왕으로서 불교에 깊이 감화된 인물이었음을 드러내었다. ■ 용주사의 보물들, 정조시대 문화를 드러내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서 가장 빛나게 전시되는 유물은 채제공(蔡濟恭) 선생의 친필 대웅보전 상량문(上樑文)이다. 황색 중국 비단에 쓰여진 상량문은 명필 채제공의 필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수원 화성 화서문(華西門) 편액을 쓴 채제공의 붓놀림이 대웅보전 상량문에도 나타난다. 화려한 비단에 새겨진 채제공의 상량문은 200여년전 작품이 아니라 오늘의 작품과도 같다. 그만큼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유물은 혜경궁 홍씨 회갑연에 사용된 물품이다 공연을 위해 사용된 이 유물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꿈이 자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든 몽금척(夢金尺)의 깃발이 원형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당대 왕실에서 행해지는 공연문화의 실체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이다. 옹주사가 세계적인 에코뮤지엄이고 효행박물관에 있는 유물은 정조시대 극상의 진경유산(眞景遺産)으로 그 시대의 문화를 드러낸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지금 박물관을 찾아다니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용주사는 정조의 효심이 담겨 있는 사찰이고 그 안에 있는 효행박물관은 정조시대 문화의 정수이니 기쁨 마음으로 찾아가기 바란다. 그러면 그곳에서 정조를 만날 수 있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 전공) 사진=조주현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터 무늬 있는 ‘안양박물관’

안양박물관은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길 4(석수동)에 위치한다.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가 있었던 자리이다. 바둑판처럼 배치되어 있는 많은 주춧돌은 그 흔적이다. 이 흔적 옆에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 그리고 교육관과 특별전시관이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들은 외관상으로 보면 전혀 박물관처럼 보이지 않는다. 박물관 정문에 설치된 초소도 생뚱맞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의 삶으로 연장되고 누적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짜임을 통해 늘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낸다. 안양박물관에는 그 흔적이 역력하다. 안양박물관은 1959년 유특한 회장이 제약회사 유유산업을 설립한 후 안양공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안양박물관 외벽 귀퉁이에 그대로 남아 있는 파이오니아상과 모자상이 그 증거이다. 개척자 정신을 뜻하는 파이오니아상과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 지극정성과 사랑을 의미하는 모자상은 유유산업 경영철학이 담겨 있다. 유유산업 공장건물은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인 건축가 김중업(김중업, 1922~1988)이 설계했다. 그래서 안양박물관은 고대 중세 현대라는 시간의 층들을 켜켜이 담아내는 터 무늬 있는 박물관이다. 안양박물관은 2004년 평촌아트홀의 안양역사관으로부터 시작된다. 유유산업이 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안양시에서는 부지를 매입하여 안양사(安養寺) 터를 발굴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안양사(安養寺)라는 명문와편(銘文瓦片)이 발굴되었다. 그동안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안양이란 지명이 구체적인 유물로 고증된 것이다. 이로써 안양의 역사와 뿌리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와 안양의 역사적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안양시는 기존의 안양역사관을 안양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한 후 2017년 지금의 자리에서 새롭게 출발하였다. 박물관 정문에 들어서면 보물 제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불화를 그린 기(당幢)를 걸던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 좌우에 세우는 기둥)와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안양박물관 바로 옆 24개의 기둥은 구조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빔 그 자체를 떠받들고 있는 느낌이다. 자칫 해체된 건물의 잔해로 없어질 뻔했으나 가운데 8개 기둥에 수메르설형문자 등 여러 문명에서 사라진 문자들을 새겨 넣음으로써 24개의 기둥은 살아 움직이는 건축언어로 재탄생되었다. 안양박물관이 역사문화의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또 하나의 기발한 디자인이 아닐 수 없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안양사의 탑은 태조가 세운 옛것이다(도은집 권4)라고 증언한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안양사를 방문(대각국사문집 권1)했다는 기록과 안양사. 흥왕사, 왕륜사의 승려가 거병하여 무신정권의 최충헌(1149~1219) 척살을 주도하다 실패했다(고려사 권42)는 사건도 보인다. 고려 말 최영장군이 안양사 칠층전탑을 중수하는데 승려 천 명이 불사를 올리고 보시한 시중이 삼천이었다(도은집 권4)는 기록으로 본다면 안양사는 고려 초기에서부터 말기까지 시대마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대단히 주목받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교국가인 조선에 들어서면서 안양이라는 지명이 주목을 받은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태종 때는 농번기 때 금주해야 하는데도 수원부사, 금천현감, 과천현감이 안양사에서 기생을 불러 음주 가무를 즐기다 급기야 금천현감이 죽는 사건이 발생(태종실록 권33)했으며, 조정에서 사찰의 폐단을 논할 때 안양사가 거론되고 있다.(문종실록 권4) 조선시대에는 행정구역의 편제에도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양이라는 지명이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에 의해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이 신설되면서부터이다. 안양박물관은 유유산업의 공장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재활용했다. 건축은 인체와도 같다는 김중업의 말처럼 이 건물은 사람처럼 육체적이다. 안양박물관은 건물의 뼈대를 여실히 드러낸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 전시다. 1층에는 어린이 체험실이 호기심 많은 어린이를 기다린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전시실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 유물까지 안양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전시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삶의 시작 부분이다. 안양 관양동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돌창 등은 안양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둘째는 안양의 기원이다. 안양사가 새겨진 기와 조각 등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중요 유물들이 전시된다. 우리는 안양이 왜 안양인지 확실한 역사적 유물과 마주하게 된다. 이때 유물은 말없이 안양을 안양이라 부르고 그 침묵의 소리에 안양은 비로소 안양으로 깨어난다. 셋째는 조선시대 문화의 전승을 소개한다. 조선시대 안양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화성으로 이장한 후 현원릉이라 이름하고 능행차를 위해 만안교를 축조하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당시 6천여명의 수행원과 100여명의 악대가 행진하던 어가행렬의 모습이 정교한 모형으로 진열되어 있다. 안양의 민속놀이와 마을제도 챙겨 볼만하다. 안양 지역에서 마을제로 풍요와 무병장수와 번영을 기원하는 관악산신제 등이 봉행 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만안교가 건립된 후 시작된 다리밟기 놀이는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그릇을 빚는 도요지(陶窯地), 즉 가마터도 확인 가능하다. 가마터는 불당골 도요지와 비산동 도요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특히 비산동 도요지는 서울 근교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청자도요지이자 고려 후기 백자가마터이다. 때문에 고려 후기 백자의 양상과 조선 백자의 성립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도요지로 평가받고 있다. 박물관은 안양의 농민항쟁과 항일투쟁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해 두었다. 안양지역에서는 1898년(고종 35년) 군수의 탐학과 학정에 저항하여 일어난 제1차 농민봉기와 1904년(고종 41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위해 한국인 역부를 강제동원하려 하자 향회를 열어 조직적으로 저항한 제2차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이는 안양 사람들이 사회적 불의에 어떻게 항거했고 항일의식은 또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만한 대목이다. 안양 출신 독립운동가 역시 치열하다. 이재천(李在天, 1913~?)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 이용환을 따라 중국으로 가서 한국소년동맹을 조직하고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잠입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이재천의 동생 이재현(李在賢, 1917~1997)은 17살의 나이에 임시정부 특별훈련반에 입대하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광복군에 편성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백범 김구는 결혼하는 그에게 평생을 혁명과 함께하라며 혁명반려(革命伴侶)라는 유묵을 써준다. 또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시흥, 안양, 군포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가행진을 주도한 몽당(蒙堂) 한항길(韓恒吉, 1897~1979) 등이 대표적이다. 넷째는 근현대 도시의 성장이다. 안양은 1960년대 근대화의 추진과 함께 공업도시의 면모를 갖추며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준비된 영상 자료는 그 당시의 거리풍경, 영화관, 여가와 문화, 정치와 사회 등 그 시절의 추억을 소환한다. 특히 안양은 영화제작의 메카였다. 안양영화촬영소는 동양 최대를 자랑했다. 한국영화계의 거목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가 제작한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벙어리 삼룡이(1964), 빨간 마후라(1964) 등의 영화전단지는 시대의 울림으로 남아 있다. 안양박물관은 안양의 성지(聖地)이다. 안양(安養)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안양사 터에서 발굴된 기와의 파편들은 안양의 세계를 기원하는 건축어휘들이다. 어휘가 다르면 철학이 다르다. 철학이 다르면 건축물도 다르다. 안양사의 주인공들은 안양을 위해 이 세계를 어떻게 건축하려 했을까. 우리는 지금 여기의 터전 위에서 나와 공동체의 안양을 위해 이 세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 안양박물관에 가면 그 질문의 파편들이 말을 걸어온다.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사진=윤원규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ㆍ미술관 다시보기] 광주 풀짚공예박물관

풀짚공예박물관은 광주시 오포읍 문형산길 76에 위치한다. 풀짚공예박물관은 풀과 짚을 이용해 민속생활도구와 공예품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전시하는 공간이자 풀짚공예 교육을 위해 2006년 6월에 설립됐다. 풀짚공예박물관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풀짚공예 전문박물관이다. 본관 1층은 전시실과 체험관이 배치되어 있고 2층에는 수장실과 연구실이 마련되어 있다. 풀짚공예박물관은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공적 목적을 위해 건립한 국공립 박물관이 아니다. 개인이 세운 사립 박물관이다. 농경사회에서 흔하디 흔한 풀과 짚에 대해 실용적 가치와 미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예(工藝) 쪽으로 접근해서 그 기능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교육까지 실시하고 있다. 설립자 전성임 관장을 비롯해 학예사 4명이 근무하고 있다. 월요일 정기휴관을 제외하고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언제든지 관람ㆍ체험을 할 수 있다. 한국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서구의 공업사회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산업의 공업화는 플라스틱 생활용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풀과 짚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바구니, 깔개, 소쿠리 등 생활도구와 공예품들은 차츰 사라져갔다. 풀과 짚을 이용한 공예는 구전(口傳) 이외에는 별다른 전수방법이 없었다. 말로 대충대충 전달할 뿐 특정한 도구 만들기에 적합한 매뉴얼 자체는 생각조차 못하는 실정이었다. 전성임 관장은 너무나 하찮은 풀과 너무나 흔한 짚으로 생활도구 등을 만들어내는 70대 이상 어르신들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찾아다니며 사라진 민속자료를 조사하고 그 기능을 정리했다. 그대로 그냥 지나친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풀짚문화를 다 잃어버릴 것 같고 정리할 기회마저 전부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 관장은 구전으로 내려오던 기능을 하나하나 아카이브(Archive)로 구축하고 체계적으로 과학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드디어 2020년과 2021년에는 그 기능들이 집대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풀짚공예박물관에서는 2006년 박물관을 개관한 후 2008년 제1회 초고공예연구회 회원전 가을 들녘을 시작으로 해마다 기획전시회를 개최해 왔다. 2012년 특별기획전에서는 망태기전을 선보였다. 2018년 기획전의 주제는 산~들 山野 산~들 나들이였고, 2019년에는 민초들의 꿈, 꽃을 피우다. 전래동화 속 풀짚공예 등이었다. 또한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어르신 문화프로그램 풀짚공예의 추억, 지역문화 플랫폼 육성사업 등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다. 풀짚공예박물관에서는 경기도와 광주시의 경기도 지역문화예술 플랫폼 육성 사업의 일환으로 2020년 5월 1일에서 12월 31일까지 짚과 집(Straw & House)이라는 기획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기획전은 특히 어린이들이 짚과 집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열었다고 한다. 이번 기획전은 풀짚공예를 통해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생각해보는 기획전시로 전시수량은 총 99건에 153점이 전시되어 있다. 민속품에는 한국 29건 57점, 외국 장식소품 17건 24점, 현대작품 14건 14점, 지역주민 애장품 25건 44점이 진열되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미지 패널 및 사진은 12점, 영상모니터는 2대이다. 주제는 다섯 가지로 엮였다. 첫째 주제는 초가(草家)이다. 초가는 볏짚, 갈대, 왕골, 띠 등으로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하는데 대부분 볏짚을 사용했다. 초가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업사회에서 볏짚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매우 경제적인 생산물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초가집이 1970년대부터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자연친화적 주거문화는 점차 소멸돼 갔다. 전시회에서는 원시시대의 바위집에서부터 동굴, 움집, 고상가옥과 초가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12지신 탈과 열두 띠 탈놀이를 주제로 하고 있다. 12지신인 쥐(子), 소(丑), 호랑이(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 돼지(亥) 등의 얼굴 모양을 짚으로 엮어 12지신 짚탈로 꾸며 놓았다. 새해에 열두 띠 탈을 쓴 풍물패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태평성대와 풍요를 기원하는 띠 탈놀이는 주로 경기, 충청, 강원 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민속행사다. 셋째는 띠뱃놀이이다. 띠뱃놀이는 주로 어촌지역에서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과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신께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마을공동체 행사를 말한다. 특히 바다에서는 짚과 싸리 등으로 엮은 배에 떡과 밥, 고기, 과일, 허수아비 사공을 태우고 용왕굿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넷째는 생활 속의 짚이다. 우리 조상은 삼신짚(아기가 태어났을 때 깨끗한 짚을 골라 아기를 눕히고 건강을 기원)에서 태어나서 초가(草家)에 살다 초분(草墳ㆍ땅에 매장하지 않고 돌 축대 등에 짚으로 덮어두는 매장법)에 묻혀 생(生)을 마감하는 삶을 살았다. 짚에서 태어나서 짚에서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짚은 생활 속에서도 의식주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선조들은 농경사회에서 생산된 볏짚과 보릿짚, 밀짚 등으로 짚신, 멍석, 맷방석, 망태기, 씨오쟁이, 삼태기, 깔방석, 닭둥우리, 계란망태, 강아지집 등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건들을 누구나 쉽게 만들어 사용했다. 풀짚공예박물관에 가면 선조들의 삶과 지혜를 살펴보고 그 숨결과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다섯째는 신현리 마을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신현리는 풀짚공예박물관이 위치한 마을 이름이다. 풀짚공예박물관에서는 마을의 문화플랫폼 역할을 위해 주민들의 마을이야기에 주목했다. 마을 주민에게 접근해 주민들과 인터뷰하고 주민들의 애장품에 얽힌 이야기와 가족사를 중심으로 각자의 삶을 돌아보면서 풀짚공예와 전통문화 그리고 마을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긴다. 체험관에서는 풀짚을 이용해 다양한 매듭 묶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체험학습은 풀과 짚이라는 자연 소재를 가지고 머리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을 이용한 몸공부를 한다. 몸공부는 풀짚공예 기능만을 단순하게 습득하는 활동이 아니다. 몸공부는 창의력을 개발하고 증진시키는 중요한 창작활동이다. 오늘날 풀짚문화는 바스켓트리(Basketry)로 통한다. 바스켓트리(Basketry)는 세계 공통어이다. 바스켓의 역사 속에는 수렵과 채취생활을 했던 인류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공통의 기초 생활문화로서 바스켓은 묶고 얽고 매고 엮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 소재인 풀과 짚을 이용해 씨줄과 날줄을 만들어 다양한 기물을 만들어 낸다. 지리적 환경과 생활습관에 따라 자연에서 채취하는 재료는 달라도 도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기술은 거의 비슷하다. 가마니는 1900년대 일본에서 들어왔다. 가마니가 들어오기 전 짚을 엮어서 곡식을 담는 데 쓰는 그릇은 주로 섬이었다. 섬은 가마니처럼 짚을 소재로 해 만들었으나 가마니보다 훨씬 듬성듬성했다. 가마니는 새끼를 날줄(經)로 하고 짚을 씨줄(緯)로 해 촘촘히 짠다. 가마니가 들어온 이후 섬문화는 가마니 문화로 차츰 옮겨 갔다. 짚을 엮는 방식이 문화의 틀까지 바꿔 버린 것이다. 이때 짚은 그냥 짚이 아니다. 이 세계를 포착하는 그물망이다. 한국에는 풀짚문화가 있다. 전성임 관장은 남들은 다 하찮게 여긴다는 풀짚을 무려 40여 년 동안 붙잡고 연구하고 있다. 풀짚공예를 바스켓트리 용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우리 기법으로 정리했다. 주변 사람들이 왜 돈도 안 되는 풀짚을 놓지 못하는지 안타까워하지만, 전 관장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다. 풀짚문화는 환경, 인간의 정서, 교육, 산업 등에 법고창신(法古創新)할 소중한 미래의 문화적 자산이다. 그러니 풀짚문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풀짚공예는 그저 단순히 전통을 답습하는 단계에 그쳐서는 안 되고 경쟁력 있는 산업분야로까지 키워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우리는 근대화로 인해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풀짚공예박물관에 찾아오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 옷고름도 묶을 줄 모르고 신발끈도 묶을 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무엇을 가진 것보다 어떤 전략으로 다루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풀짚공예처럼 우리 땅에서 생산된 소재로 철학의 얼개를 짜고 그렇게 탄생한 철학으로 우리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해 나가야 한다. 그 하찮은 소재가 바로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흔하디 흔한 풀이고 짚이 아니겠는가.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사진=윤원규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과천 한국카메라박물관

한 장의 흑백사진이 책 한 권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주기도 한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이 강화도 광성보를 점령한 후에 찍은 처참한 풍경, 서울로 압송되어가는 녹두장군 전봉준, 31만세 운동의 현장을 찍은 사진은 우리 역사의 생생한 장면들이다. 50~60대라면 올림푸스라는 카메라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카메라에 얽힌 추억을 더듬다보면, 소풍날 사진관에서 빌린 카메라로 온갖 폼을 잡으며 찍고 나서 필름을 감아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무심코 카메라 뚜껑을 열었다가 한 장도 건지지 못해 욕을 먹었던 쓰라린 경험도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 가정에서도 카메라 한 대는 소유하게 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니콘 혹은 캐논을 어깨에 메고 자랑스레 거리를 활보하던 사람들이 수두룩했는데 요즘은 보기 힘든 풍경이 되어버렸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가까이 하던 카메라가 슬슬 사라지고 있다. 물론 여전히 고급 카메라야 팔리고 있지만 그 수가 크게 줄어든 것은 확실하다. 카메라의 역사는 곧 사진의 역사다. 1836년 프랑스 사람이 감광물질을 발견하여 최초의 사진이 탄생되면서 카메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독일제 콘탁스와 라이카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9년에 일본광학에서 카메라 역사의 기념비적 모델이 된 니콘 F를 출시하면서 카메라 시장은 독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기술의 발전을 거듭하여 디지털 카메라까지 탄생시켰다. 카메라만큼 극적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물건도 찾기 어렵다. 이러한 카메라의 변천사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한국카메라박물관이 과천에 있다. ■ 눈앞에 펼쳐지는 카메라 변천사 전철 4호선을 타고 대공원 역4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앞에 한국카메라박물관이 있다. 2007년에 개관한 박물관의 건물부터 예사롭지 않다. 카메라의 몸체와 렌즈를 연상하도록 만들어진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180년 이어진 카메라의 놀라운 역사가 펼쳐진다. 전쟁 중에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용카메라, 지포라이터 카메라, 손목시계 카메라, 방아쇠가 달린 권총 카메라, 나이가 백년은 훌쩍 넘은 목재카메라 등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법한 희귀한 카메라를 직접 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카메라 3천여 대를 비롯해 렌즈 6천여 점, 유리원판 필름과 초기 환등기, 사진 인화기, 액세서리 등 1만5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안내하는 학예사의 설명에 따르면 실재 전시되고 있는 카메라는 500여 점이라고 하니 전체 소장품의 15프로 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내부 전시 공간은 층별로 3개 전시실로 나뉘어져 있다. 1전시실은 카메라와 렌즈, 부속 기자재들을 테마와 이야기를 담아 주제별로 기획 전시하는 공간이다. 2층에 위치한 상설전시실은 카메라가 최초로 등장한 1839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단위로 카메라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카메라를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다. 그러니 카메라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상설전시실부터 둘러보는 것이 좋다. 처음 만나게 되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카메라의 시조이다.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 한쪽 벽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와 반대쪽 벽에 구멍 밖 풍경을 거꾸로 나타내는 원리를 이용해 제작한 것이다. 최초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1839년에 프랑스에서 제작한 것이지만, 이곳에는 1890년 무렵 독일에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 전시되어 있다. 카메라 루시다 역시 주의해서 살펴야할 물건이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콘탁스Ⅱ 라이플이다. 이름처럼 총의 개머리판 위에 장착된 카메라를 방아쇠를 당겨 셔터가 동작되도록 만든 것으로 히틀러 나치 정부의 주문으로 단 4대가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오직 이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카메라다. 게다가 제작한 해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1936년이다.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는 손기정 선수 당당한 모습과 이를 보도하는 신문사가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어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운 일장기말소사건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역사적인 유물이다. ■ 박물관을 열기까지 한국카메라박물관은 설립자인 김종세 관장의 헌신과 열정의 산물이다. 젊은 날 그는 광고와 디자인 계통의 일을 하면서 카메라에 빠져 카메라 수집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카메라 박물관 설립을 계획하던 1993년 당시에 그가 소장하고 있던 카메라가 400대에 가까웠다. 이때부터 박물관을 만들기로 계획하고 꼭 필요한 카메라들을 의욕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대해서도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고, 1998년부터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카메라를 구입하기 위해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을 드나들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120여 개국을 돌아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는 나치 전범들의 주 도피처였던 까닭에 희귀한 독일제 카메라를 많이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여러 차례 밝힌 것처럼 지금까지 필요에 의해 카메라를 교환하는 일은 있었지만, 팔아서 돈을 만든 일이 단 한 차례도 없었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카메라 전문박물관을 개관할 수 있었다. ■ 체험으로 배우는 카메라의 원리 지하에 위치한 제3전시실은 다양한 사진전시, 스튜디오, 암실 등 다목적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청춘카메라 교육과 같은 문화강좌, 카메라를 직접 만들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만들어 보는 체험, 카메라의 원리, 사용법, 촬영방법들을 간단하게 배운 뒤 촬영한 필름을 암실에서 직접 현상, 인화작업을 해보는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다. 역시 아이들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손으로 만지며 체험하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사실 오묘한 카메라의 원리를 말로 설명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고 재미도 없다. 박물관에서 마련한 카메라 옵스큐라, 바늘구멍(핀 홀) 카메라 만들기 체험 학습은 카메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박물관에서 제작한 바늘구멍 카메라는 2300여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노트에 기록되어 있던 원리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한국카메라박물관은 매년 4~6회 특별전을 통해 세계 카메라 발전사에 크게 기여한 명작 시리즈나 역사적인 명기, 희소가치가 큰 카메라 등을 기획 전시하고 있다. 그 동안 라이카 카메라 특별전, 펜탁스 카메라 특별전, 옛날 카메라로 찍은 사진전, 입체카메라 특별전, 군용카메라 특별전, Rolleiflex & 세계 이안반사식 카메라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 좋은 사진을 찍는 비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사진은 일상이 되었고,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갖춘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적지 않다. 작가가 아니라도 DSLR로 불리는 고급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고급 카메라를 가졌다고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마 모를까. 필자 주변에도 거금을 들여 고급 카메라를 샀다가 채 1년도 되지 않아 흥미를 잃고 장롱 속에 보관만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거금을 들여 고급 카메라를 장만하는 것은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잠재우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어떤 카메라건 늘 손에 들고 다니며 많이 찍는 것이야말로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비결 아닌 비결이다. 한국카메라박물관은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박물관을 만든 주인공은 어떤 카메라를 사용하며 어떤 작품을 찍고 있을까. 마침 박물관 지하 전시실에는 박물관장 김경세 작가의 다랑이논을 주제로 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하늘에서 찍어 지도의 등고선처럼 보이던 다랑이논을 다시 쳐다보니 카메라의 조리개를 닮았다. 이번 주말에는 집 어딘가에 처박아둔 카메라를 찾아 렌즈라도 닦아야겠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사진=윤원규기자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4. 과천 ‘추사박물관’

이 시대에 우리가 추사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를 만나면서 사람들은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태계를 파괴하고 과소비하며 성장과 속도만을 외친다면 인류의 장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어수선하고 답답한 시절 탓인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헤치며 뜨겁게 이 땅을 살다간 위대한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1786~1846)의 삶과 예술을 가슴으로 만나고 싶었다. ■ 추사를 만나는 법 추사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2층 중앙 벽면에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라는 난초 그림 벽화를 볼 수 있다. 멋진 난초 그림을 살펴보면서, 제주도 유배 시절에 스승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고 청나라의 신간 서적을 꾸준히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세한도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세한도에 얽힌 애틋한 사연과 그림에 대한 찬사를 들었으나 왜 저 그림이 그토록 유명한지, 왜 국보로 지정되었는지를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국회화와 서예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추사의 그림과 글씨는 안평대군이나 석봉 한호의 글씨,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의 그림과는 너무나 다르다. 마치 고흐의 자화상을 보다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볼 때처럼 낯설다. 그런 추사를 만나려면 약간의 여유와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추사박물관을 돌아보며 새삼 깨달았다. 추사 김정희라는 천재 예술가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소개하는 공간이 과천 주암동에 자리한 과천시 추사박물관이다. 추사 김정희가 19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학자이자 빼어난 예술가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역사 시간에 등장하는 추사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고 해독한 금석학의 대가이며,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이라는 글로 대표되는 실학의 종장이다. 이런 까닭에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그의 글씨와 책이 대부분이다.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같은 유명한 그림도 있지만 몇 작품에 불과하다. 추사의 그림은 추사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에 비한다면 그래도 접근이 쉬운 편이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추사의 작품을 보고도 감동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어린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나이 든 성인들의 감각은 더 무디고 어둡다. 추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를 빼고 박물관에 있는 글씨를 줄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면 추사는 너무나 먼 당신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잘 모르는 한자를 애써 읽으려 하지 말고 그림을 보듯 글씨의 구도를 뜯어보며 느낌대로 감상하라는 것이 추사전문가가 권하는 방법이다. 여유와 시간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아야 추사를 만날 수 있다. ■ 왜 과천일까? 그런데 왜 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있을까? 과천은 추사 김정희 선생 집안의 별장인 과지초당(瓜地草堂)이 있던 곳입니다. 아버지 김노경의 묘가 있었던 곳이고 추사가 말년 4년간을 살았던 곳이지요. 2006년에 추사를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모은 일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 아키나오 선생이 이 관련자료 전부를 과천시에 기증하면서 추사박물관이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추사는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돌아가셨지요. 예술가에게 말년은 자신의 예술혼을 잘 드러내 주는 시기입니다. 이를 미술사에서는 말년 양식이라고 하지요. 과천은 추사가 생애 말년을 보내면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운 곳입니다. 과천에서 가까운 강남의 봉은사 판전(版殿)도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쓰신 최후의 작품이죠. 박물관을 안내하는 허홍범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니 왜 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세워졌는지 절로 이해가 갔다. 추사의 글씨는 매우 파격적이고 혁신적이다. 추사의 창조성은 근거가 있는 창조성이다. 이를 당대 사람들조차 이해를 못 해 괴이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추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하는 까닭은 글씨의 뿌리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다. 상형문자인 한자는 동물이나 사물, 신체의 모습을 본뜬 문자로 학교에서 배웠듯이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의 다섯 가지 서체가 있지요. 여기에 추사는 글씨의 원류를 예서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고대 한나라의 비석이나 구리거울 등에 쓰여진 예서글씨의 강한 미감을 추구한 결과 이런 창조에 도달하게 된 것이랍니다. ■ 한국 서예사의 꽃, 추사체의 탄생 추사는 글씨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조맹부(송설체), 소동파, 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중국 고대의 한나라와 남북조시대의 여러 금석문을 익히다가 예서체가 서예의 근본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과 부단한 노력으로 완성된 추사의 글씨는 서예가 발달한 중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추사의 예서글씨를 특히 높이 평가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공간적 구성이 완벽하다는 점과 한 화면 안에 직선과 곡선, 획의 굵기와 가늘기 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는 점이지요. 추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인 것 같다. 나도 전문가에게 배운 대로 앞으로 추사박물관을 방문하게 될 관람객에게 권한다. 마음을 끄는 추사의 글씨 앞에 서서 글씨를 한 자씩 한참 바라보세요. 글씨에서 수직과 수평, 사선, 굵은 획과 가는 획이 적절히 구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체의 공간 구성이 탁월하고 새롭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추사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추사는 돌이나 쇠 같은 금석기가 강한 글씨를 선호했다. 공간경영의 완벽함을 서예에서는 포치(布置)라고 하는데,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추사의 서체는 글씨의 본질을 완벽히 이해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대 디자이너가 가장 좋아하는 글씨 또한 추사체다. 화가와 조각가 중에도 추사에 빠진 작가들이 적지 않다. ■ 박물관의 구성 추사박물관은 지하 2층, 지상 2층이다. 2층은 추사의 생애 전시실이고,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면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추사의 학예 전시실이 나온다. 지하 1층은 추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지츠카 기증실과 상설체험실, 기획전시실, 교육실과 세미나실이 있다. 관람은 2층 추사의 생애실부터 시작한다. 추사의 소년 시절에 쓴 편지부터 24살 때 부친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머물며 옹방강과 완원 같은 학자들 만나 배움을 청했던 연행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을 지낸 한양시절, 억울한 누명을 쓰고 8년 3개월간 제주도에서 보낸 유배 시절, 노량진에 머물던 강상(江上)시절, 1년여의 함경도 북청에서의 유배 시절, 생애 마지막 4년을 보낸 과천시절 순으로 관람할 수 있다. 추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더 즐겁고 유익하게 관람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학예사는 이렇게 당부한다. 어느 박물관 미술관을 가더라도 꼭 두 번씩 보세요. 먼저 해당 박물관 미술관의 건물구조나 전시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작품을 이어서 보되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좀 오래 보는 게 좋습니다. 그 작품이 추사의 계산무진(谿山無盡) 같은 유명작품일 수도 있지만, 소품인 경우도 있고, 패널의 설명문 한 구절일 수도 있습니다. 관람은 예술가의 작품과 관람자인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 추사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추사박물관에는 관람객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이 풍성하다. 유치원부터 초등생이나 중고생은 물론 일반인을 위한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추사의 벗, 문방사우 두근두근 나도 암행어사 조선명필, 추사를 만나다 추사박물관 탐험대 과천문화재탐방 꼭꼭 닫힌 과지초당의 문을 열어라 옛날옛날 추사의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추사박물관 붓놀이터 조선의 선비, 추사의 하루 . 추사박물관이 시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전철로 이용하려면, 사당이나 과천 쪽은 선바위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6번 버스를 타면 되고 양재 쪽은 양재역 9번 출구에서 6번 버스를 타면 된다. 박물관을 나서기 전에 방문객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추사 선생님이 오늘날 계속 얘기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핵심은 창조성입니다. 큰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추사 선생님의 창조적인 예술정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 수원화성박물관

경기도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가장 관람객이 많이 찾는 박물관을 묻는다면 단연코 수원화성박물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주말이나 공휴일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수원화성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은 끊이지 않고 있다. 물론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내에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는 것도 주요한 요인이겠지만, 그 안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의 중요성이나 다양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이 수원화성박물관을 찾는 결정적 이유이다. 수원 화성은 조선 성곽의 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조선의 모든 성곽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들이 화성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화성은 산성의 역할과 평지성의 역할이 함께 나타난 평산성(平山城)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아가 도성(都城)으로 만들어진 성곽이기에 성곽 안에 유천(柳川)이라는 시내가 흐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방에 있는 읍성은 관아와 군사시설물 위주로 되어있는 반면 수원 화성은 관아와 각종 관청 건물, 장용영 군사들, 백성과 상인들 모두가 거주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5.74km라는 매우 긴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곽 밖으로 많은 논을 만들어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수원 화성의 특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수원화성박물관이다. 수원화성박물관은 2009년 4월27일에 개관하였다. 조선시대 개혁군주의 대명사로 평가받고 있는 정조대왕의 즉위일인 1776년 3월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다. 정조대왕의 즉위일로 개관일을 맞춘 것은 21세기 수원 및 경기도의 문화융성의 중심축으로 성장하려는 바람을 담고 있다. 화성박물관은 개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시와 특별기획전 그리고 체험교육 프로그램과 주민들과 함께 하는 상설 프로그램 운영으로 대한민국의 전체 박물관 중에서 단위 면적당 두 번째로 많은 관람객이 찾아오는 박물관으로 성장하였다. 지난 2009년에는 대한민국 건축대상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전시와 건축디자인 모두에서 최고의 박물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 번암 채제공 유물 기증 수원시는 1997년 12월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수원시는 화성을 보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이후 2003년 수원 화성행궁을 복원하면서 화성을 알릴 수 있는 박물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물론 화성을 알릴 수 있는 특화된 박물관 건립은 민선1기 심재덕 시장 때부터 기획되었지만 본격적인 추진은 민선 3기 김용서 시장 때였다. 박물관 건립을 추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전시운영계획의 수립이다. 이때 유물 수집과 전시 그리고 건립 위치에 대한 적절성을 세운다. 문제는 여기에서 벌어졌다. 수원시가 소유하고 있는 화성 관련 유물이 없다는 것이다. 이때 거짓말 같은 역사가 일어났다. 바로 정조대 최고의 명신(名臣)이었던 번암 채제공 선생의 모든 유품이 그대로 박물관으로 기증된 것이다. 화성성역총리대신으로 화성축성을 이끈 장본인이며,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의 후손인 채호석, 김양식 선생님께서 번암 선생의 유물을 일괄 기증해 주셔서 박물관 건립의 초석이 되었다. 이때 기증받은 대표적인 유물이 보물 1477호로 지정된 채제공 선생의 초상화와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보낸 정조의 비밀어찰, 번암집 필사본 등이다. 채제공 선생의 유물이 기증되면서 박물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이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경기관찰사 조돈을 임명한 영서(令書),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조선시대 최초의 무예훈련 교범인 한교의 무예제보 등을 구입하여 박물관에 소유하고 있다. 모든 시설물을 지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건축비의 조달이다. 수원시가 아무리 큰 도시여도 박물관 건립비가 무려 627억 원이 들어가는 대형 사업이기 때문에 비용 조달이 어려웠다. 다행히 국비와 도비를 포함한 토지보상비와 건축비가 3년 안에 공급이 되었기 때문에 건립이 가능했다. 더불어 박물관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많이 있었지만, 화성과 연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곳으로 하자는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수원 화성 내 가장 중심부지에 건립할 수 있었다. ■ 전시실 구성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축성과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 공간과 어린이체험실을 중심으로 하는 체험교육 공간, 그리고 수원지역의 시민 및 연구자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21세기 박물관은 전시 위주의 건립방식에서 벗어나 전시와 체험 그리고 교육이 삼위일체가 되는 박물관 건립을 지향한다. 따라서 화성박물관도 이러한 박물관 건립 취지를 살려 전시, 체험, 교육의 비례를 맞추어 공간을 구성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수원화성박물관은 화성 성곽 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지역문화센터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한 무예24기 교육, 어린이 화성 교육, 수원천과 어우러진 역사와 융합한 생태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크게 세 곳의 전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야외전시와 화성의 축성과정을 알려주는 화성축성실과 화성의 다양한 문화를 알려주는 화성문화실이다. 야외 전시의 대표적 전시물은 바로 실물과 같은 크기로 재현한 거중기와 녹로를 비롯한 화성축성에 사용된 과학 기자재이다. 높이 11m에 이르는 거중기와 녹로는 화성 축성 당시 높은 성벽을 어떻게 쌓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계이다. 또 하나의 특별한 전시물은 바로 정조대왕의 태실이다. 조선시대 국왕의 태실은 일반인들이 관람하기 어려운 곳에 위치한다. 정조의 태실의 석물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기에 화성을 축성한 정조의 태실을 일반 관람객을 위해 똑같이 모각하여 전시하였다. 전시의 기본 방향은 에코뮤지엄인 수원화성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시구성이 특징이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박물관과 인접하고 있기에 박물관 전시에서는 화성의 시설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화성 축성의 콘텐츠를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였다. 수원 화성이 어떻게 축성되었는지, 누구에 의해 주도되었는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스토리텔링 기법에 의해 전시구성이 이루어졌다. 어린이와 청소년, 일반인들에게 축성 과정을 쉽게 이해시켜주기 위해 모형 전시를 65%, 관련 유물 전시를 35%로 구성하였다. 상설전시관인 화성축성실에 들어서면 황금갑주를 입고 백마를 탄 정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조가 화성을 행차할 때 입었던 황금갑옷과 투구를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작한 것이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축성기법을 확인하는 모형과 중국과 일본 성곽의 축성기법 모형도 함께 전시하여 삼국의 성곽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표적 유물로는 화성 축성을 알려주는 화성성역의궤와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하사한 정조의 비밀어찰, 그리고 규장각과 화성박물관만이 소장하고 있는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완질본을 비롯한 여러 기록유산이 전시되어 있다. 더불어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왕을 대신해 관리를 임명한 국내 2점 밖에 없는 왕세자 유훈교서도 볼 수 있다. 화성문화실은 1795년 윤2월에 있었던 정조의 8일간의 행차를 재현하는 내용이다. 정조는 위민정책을 추진하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화성행차를 단행하였고, 이 행차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정조의 화성 행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팔폭병풍 모사도와 화성유수 번암 채제공의 영정을 비롯하여 정조가 하사한 비밀어찰과 필사본인 번암선생집을 전시하고 있다. 더불어 화성을 지킨 장용영 군사들의 복식과 다양한 무기를 전시하여 조선시대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영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박물관내에 있는 영상실과 강의실은 평생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수원 화성박물관의 앞으로의 기대효과 수원화성박물관은 개관한 지 12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전국에서 모범적인 10대 공립박물관으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해마다 우수박물관으로 선정되고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서 행궁동 마을 주민들의 반짝 시장도 열리면서 지역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수원 화성과 연계한 많은 관광콘텐츠의 개발로 박물관을 찾는 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아울러 수원화성박물관은 지역문화 센터와 정조의 정치사상 및 화성 연구의 학술연구기관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 한국사전공)

[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포천 허브아일랜드 박물관

박하라는 말만 들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애플민트, 오렌지민트, 페퍼민트, 스피어민트 등. 롯데 껌을 선전하던 가수 윤형주의 CM송을 떠올리며 민트의 시원한 맛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박하와 같은 향기로운 풀을 옛사람들은 무엇이라 불렀을까? 벗과의 맑고도 좋은 사귐을 지초와 난초의 사귐[芝蘭之交]이라 했다. 선한 사람과 더불어 지내면 지초나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고, 선하지 않은 사람과 지내면 절인 생선 가게에 들어가 있는 일과 같다. 지초는 향기로운 풀, 곧 허브식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친숙한 허브식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허브아일랜드 박물관 심재인 관장은 이런 의문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마늘과 쑥 같은 식물도 허브에 속합니다. 이름에서 풍기듯 라벤더, 로즈마리 같은 지중해의 향기로운 식물을 허브로 알고 있는데 쑥과 마늘도 허브에 속한다는 것이다. 단군왕검의 어머니 웅녀는 본래 곰이었지만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지내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사람이 되었다. 향긋한 쑥은 아주 오래전부터 떡을 비롯한 음식과 한방은 물론 대중목욕탕에도 활용되었던 허브식물이다. ■ 사람살이 유용한 허브 식물 수백종 한자리 허브란 푸른 풀, 향이 있는 식물이라는 라틴어 허바(Herba)에서 유래되었다. 허브란 식용이나 약품, 향초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식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허브란 향이 있고 먹을 수 있으며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유용한 모든 식물을 말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약, 요리, 향료, 살균, 살충 등에 사용되는 식물 전부를 의미한다. 상큼한 허브의 향기는 기분을 좋게 한다. 인간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지고, 피부로 느끼는 오감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그중에서 후각은 미각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저장되는 것이다. 허브는 냄새와 맛과 관련이 깊은 식물이다. 허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로즈마리는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라벤더는 진정효과가 있다. 이처럼 사람살이에 유용한 허브 식물 수백 종을 한 자리에 모은 곳이 경기도 포천에 있다. 바로 포천시 신북면 삼정리에 자리 잡고 있는 허브아일랜드 박물관이다. 1989년에 문을 연 허브아일랜드는 43만여㎡의 부지 위에 허브의 원산지인 지중해의 생활 속의 허브를 테마로 운영하고 있다. 1996년에 불의의 사고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임옥씨(59)가 신북면 종형산 자락에 9천900㎡의 땅을 구입하여 허브를 심은 것이 허브아일랜드 박물관의 출발이다. 30여 년이 지난 현재 허브아일랜드는 건축 30동(3천 평), 43만여㎡의 대지에 허브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 겸 휴양시설로 성장하였다. 허브아일랜드의 심장부라 할 박물관을 비롯하여 공연장, 음식점, 선물가게, 체험장, 펜션과 야외 묘포장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허브박물관은 2010년 11월에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서 정한 1종 식물박물관으로 등록했다. 등록할 때의 소장 식물은 로즈마리를 비롯해 144종, 1천864점의 식물을 갖추고 허브를 연구하는 학예사와 전시실 등 규정 조건과 시설을 충족하여 박물관으로 등록되었다. 2020년 4월 현재, 허브박물관은 식물원 온실 6천600㎡(2천 평)과 2만9천㎡(9만5천 평)의 야외전시장에 허브 식물 200여 종 2만3천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허브아일랜드 박물관은 허브의 역사, 허브 관련 유물, 허브를 소재로 만든 향신료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식물원이다. 박물관을 중심으로 계절마다 로즈마리축제, 라벤다축제, 케모마일축제, 생생수확축제가 열린다. 또한 야외정원 1만 평에도 오감으로 허브를 체험할 수 있도록 싼타마을, 스카이허브팜, 허브폭포정원에서 물과 허브아일랜드 카니발, 불빛동화축제를 열고 있다. 또한 박물관 주변에는 힐링센터, 허브식당, 허브용품 판매장, 허브카페, 허브 체험관과 추억의 거리, 민속 전시관 같은 쉼터와 휴양시설을 갖추고 있다. ■ 세계 유일의 허브 박물관 약 2천 가지의 허브 제품을 보유하고 있는 허브아일랜드가 포천지역 농가와 협력하여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와 인삼으로 허브와인과 홍삼과립차를 개발한 것은 특별한 성과이다. 또한 2010년부터 허브아일랜드 안에 포천 농산물전용 판매관을 열어 쌀, 사과, 버섯, 홍삼, 잣, 막걸리, 한과 등 지역 농산물을 홍보하며 판매하고 있다. 허브에 관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허브아일랜드는 허브의 원산지인 지중해의 이국적인 생활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테마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15년에는 한국인이 꼭 가보아야 할 관광 100선(문체부), 일자리 창출 우수기업(대통령), 경기도 10대 관광 명소, 웰리스 관광지로 선정되어 연간 100만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 허브아일랜드 박물관(식물원)은 국내뿐만이 아니라 세계 유일의 허브 식물 전문박물관이다. 박물관에 허브 역사, 허브 유물, 향신료 등의 전시관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허브가 종류별, 지역별로 일목요연하게 분류가 되어 있지 않고 허브의 역사와 문화를 쉽게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소감을 전달하자 박물관 관계자는 허브 식물과 관련한 커피, 와인, 인형, 도서 등의 다양한 자료의 수집이 이미 완료되어 가까운 시일 내에 자료를 분류별로 정리하여 전체를 살필 수 있도록 전시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 오월, 향긋한 기억을 저장하기 좋은 달 허브가 코끝에 닿는 순간 스트레스 가득한 일상을 잊게 될 것이다. 냄새는 행복한 날의 기억의 잠을 깨운다. 허브 정원은 숨만 깊이 들이쉬어도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곳이다. 유년에 체험한 행복한 기억은 평생 가는 법이니, 아이들과 함께 향기 여행을 떠나보자.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예민하고 섬세하다. 풍부할 감성을 키우는 유년기에 허브의 싱싱한 향기와 허브에 달린 꽃잎의 오묘한 빛깔을 보는 즐거운 경험은 행복한 장래를 저축하는 것이다. 겨울부터 꽃 피는 사월까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덫에 걸려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사람들과는 여전히 거리를 두더라도 자연과는 더욱 가까이해야 할 계절이다. 향기로운 기억을 담으러 들판에 나가자. 가족이나 연인과 일상을 벗어나는 꿈을 꾸자. 허브아일랜드 박물관은 연중무휴로 문을 연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니 어느 때 찾아도 그 계절에 어울리는 허브 향기를 맡고 부드러운 촉감을 느낄 수 있다. 허브아일랜드가 있는 포천에는 한과박물관, 전통술박물관, 아프리카예술박물관 등 특화된 박물관이 여럿 있다. 지역은 다르지만 바로 옆에 연천 선사박물관도 있다. 차로 20분이면 닿는 거리에 있으니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찾으면 좋을 것이다. 라벤더가 보라색 꽃을 활짝 피운 광활한 농장을 천천히 걸어보자. 눈과 코를 모두 충족시키는 이 순간의 감각적인 경험과 비교될 만한 것은 세상에 흔치 않다. 벌들이 붕붕거리며 꽃들 사이를 날아 꿀을 찾을 때라면 귀까지 행복해질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을 맛보려거든 향기로운 곳을 찾아 길을 나서라. 오월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인터뷰]심재인 허브아일랜드 박물관장 경기도박물관협회장 중책 박물관미술관 발전 최선 허브아일랜드 박물관 심재인 관장(69)은 올해 경기도박물관협회장을 맡았다. 경기도 고위 공무원 출신이기도 한 심 회장은 협회의 역량을 강화하고 협회와 회원 간의 유대를 강화하며 협회와 관련 기관 및 단체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도내 박물관과 미술관의 발전을 이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언론과 SNS 등을 통해 박물관ㆍ미술관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각종 회의ㆍ모임 행사를 지역별로 순환 개최하여 비교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며 유관기관 및 단체와의 긴밀한 네트워킹 구축은 물론 향후 박물관을 순회하면서 실무자들과 면담을 통해 현실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안을 적극 모색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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