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0. 중봉 조헌의 높은 뜻 서린 우저서원

“이른바 천명이란 그윽하고 황홀한 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삼가고 백성의 일을 힘써 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쓰임새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는 한 구절은 백성에게 임금 노릇하는 분으로써 제일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중봉집 권4 중봉 조헌(重峯 趙憲, 1544~1592)이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의 한 구절이다. 1591년 3월, 도끼를 지고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던 조헌은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싸우다 700의사와 함께 전사한 위대한 의병장이다.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고 싸웠던 곳은 충청도였지만, 김포에서 나고 자랐던 경기도 사람이다. ■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우저서원과 제90호 조헌선생유허추모비 김포시 감정동에 위치한 우저서원(牛渚書院)은 이만춘이 서원 건립을 상소하여 중봉 조헌이 나고 자란 옛 집터에 인조의 윤허를 받아 1648년에 창건한 서원이다. 1671년에 ‘우저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는데, 서원 주변에 소들이 물을 먹는 늪지가 있기 때문에 ‘우저’라는 이름을 얻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살아남은 47 서원중의 하나인 우저서원은 1972년에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은 언덕을 3단의 평지로 조성하여 건물을 배치하였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한 단을 높인 곳에 자리 잡은 강당 여택당(麗澤堂)이 나타난다. 여택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강당 앞 좌우에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유생들이 예절과 학문을 익히던 강학공간이다. 서원의 뒤편에는 제향 공간 ‘문열사’가 있다. 조헌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청을 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곳에서 매년 2월과 중봉의 기일(8월 18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당 앞 왼편에 우람한 느티나무가 있고, 그 아래 ‘조헌선생유허추모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0호)가 서 있다. 서원이 창건되기 전인 1613년에 세운 이 추모비는 월사 이정구가 비문을 짓고 해서체의 글씨는 김현성이 썼다. 받침돌 위에 높이 142cm, 너비 62cm, 두께 26cm의 대리석 몸돌을 얹은 비좌원수(碑座圓首)의 형태를 갖춘 비문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과 중봉의 우국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우저서원에는 서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행나무 대신 느티나무가 서 있다. 중봉의 스승 율곡의 위패를 모시는 자운서원에도 느티나무가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사연이 숨어 있지 않을까. 서원 앞에는 지금도 ‘우저’라는 이름을 갖게 작은 연못이 있는데, 칠월이라 푸른 연잎이 무성하다.■후율정사를 짓고 후학을 기르며 병법을 연구하다 율곡보다 먼저 스승으로 모신 토정 이지함(1517~1578)의 권유로 조헌은 28세가 되던 해에 파주로 찾아가 율곡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때 우계 성혼도 스승으로 모셨다. 이들 중에서 율곡 이이(1536~1584)를 깊이 존경했다. 보은현감을 사임하고 옥천으로 낙향했을 때 조헌은 ‘율곡의 뒤를 잇는다’며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후율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1574년 겨울,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갔던 조헌이 돌아와 시무에 절실한 8조의 상소문을 올렸다. 중국의 제도를 먼저 인용한 다음 우리나라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제도를 언급하여 그 득실을 논하고, 오늘날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풍속은 서로 다른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사관이 이런 평을 남겼다. “조헌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뜻을 지녀 글을 읽거나 이치를 궁구할 때 현실에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율곡이 국방문제의 해박했던 것처럼 조헌도 병학에 밝았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1575년 3월, 벼슬을 사직하면서 왜구를 물리친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문집을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요청했던 일이다. “명나라 장수 척원경(戚元敬)은 사람됨이 공정하고 부지런하며 적을 물리쳤으니, 그의 문집을 비변사에 내려 출판하여 널리 반포하게 하소서.” 그러나 선조는 이 말을 흘려들었다.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직후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막사를 찾은 선조는 이여송에게 평양성 전투의 승리가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의거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이 책의 가치를 깨달았다. 간곡한 요청에도 이여송이 국가의 비밀이라며 책을 보여주지 않자 선조는 역관들에게 상을 걸고 비밀리에 책을 입수했다. 서애 유성룡이 이 책을 바탕으로 훈련도감을 창설하여 삼수병을 육성하고, 속오군을 조직했으며, 훈련도감 낭청 한교가 이 책을 연구하여 무예도보통지의 바탕이 되는 무예제보를 편찬했다. 기효신서는 주자전서만큼이나 조선 후기 사회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책이다. 아마도 조헌은 1774년에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연구하고 이런 상소를 올렸을 것이다. ■ 700명의 용사와 결전을 벌이다 1591년에 도요토미가 승려 현소를 보내 명나라를 칠 것이니 길을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소식을 들은 조헌이 도끼를 메고 상소를 올려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했다. 상소를 본 선조는 “조헌이 여러 차례 미치고 망령된 소를 올려 귀양살이까지 했었는데도 오히려 그칠 줄을 모르니 참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다.”라며 비난했다.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명을 기다리던 조헌은 회답이 없자 머리를 주춧돌에 부딪쳐 피를 쏟았다. 누군가 조헌의 과격한 행동을 책망하자 “명년에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을 때는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리라.”고 대답했다. 조헌은 왜적이 영남으로 침략할 것이라며, 영남에서 적을 방비할 대책과 변경의 장수와 고을의 수령 및 충신 의사로서 쓸 만한 사람을 거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언급한 사람들은 임란 당시 거의 모두 전공을 세운 사람들로 알려졌다. 1591년 가을, 조헌은 김포에 있는 선영을 찾아 성묘하고 통곡했다. 이웃들이 까닭을 물으면 “명년에는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이니 이 뒤에 서로 보기는 어렵겠다.”고 대답했다. 소식을 들은 집안 어른이 찾아와 꾸짖었다. “자네가 대궐 앞에서 거적을 깔고 도끼를 가지고 대죄하면서 명년에 병란이 일어난다고 말한 것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이가 많은데, 지금 어찌 망령된 일을 하여 고을 사람들을 경동시키는가?” “우러러 천문을 살펴보니, 명년의 병란은 우리나라가 생겨난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큰 변란입니다. 원컨대 아저씨는 내 말을 망령되다고 하시지 말고 미리 피난할 계획이나 하시오.” 조헌이 예측했던 대로 한 해가 지난 임진년에 전쟁이 일어났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7월, 병력을 나누어 이웃 고을을 돌며 군사를 모으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왜적이 청주성을 점령했으며, 승장 영규가 홀로 적과 대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조헌이 군대를 이끌고 청주로 향했다. 8월 1일, 조헌은 승장 영규의 승군과 연합하여 적진을 공격했다. 버티던 적이 이날 밤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드디어 청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잠시 뿐,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카와의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때 전공을 시기하던 관군이 의병들의 가족을 잡아가두고 협박하여 많은 병력이 흩어졌다.조헌은 부하들을 매로 다스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나 군사들이 모두 명령을 잘 들었다고 한다. 관군의 방해를 받았을 때도 대장을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이렇게 남은 용사가 700인이다. 8월 18일, 전투를 앞둔 조헌이 입을 열었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함께 죽기로 맹세한 용사들은 중과부적의 적병을 세 차례나 물리쳤다.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왜적이 거침없이 장막으로 뛰어 들어왔다. 막하의 사병이 피하기를 청하자 조헌이 웃으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며 기둥을 잡고 싸움을 독려했다. 이 전투에서 조헌과 영규를 비롯한 700인 모두가 전사했다. 금산전투는 비록 패배한 전투였으나 결과는 승리였다. 금산에 있던 적군이 무주에 있던 적과 함께 모두 퇴각하여 충청도와 전라도가 이 전투로 인하여 안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산전투의 패보가 전해지자 “미천한 하인들도 모두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거리에는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포시는 중봉 조헌의 충절과 높은 뜻을 기리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조헌을 널리 알리기에 정성을 쏟고 있는 (사)중봉조헌선생선양회의 노력으로 중봉의 문집이 곧 완간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9. 병자호란과 김준룡의 광교산대첩

일본 오사카부립중앙도서관에 ‘조선자료실’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가져간 자료들을 모아놓은 특별공간이다. 이곳에 있는 자료들 대부분은 대한민국 어느 기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료 중에 ‘조선명장전(朝鮮名將傳)’은 조선시대 무장들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 500여 년 역사 동안 최고의 무장들을 조정에서 정리해 기록한 책이 ‘조선명장전’이다 기록. 이 기록에는 조선 무장들을 3등급으로 구분해 100명을 선정했다. 1등급 무장은 단연코 이순신과 권율 장군 등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무장 중에 100명으로 선정된 무사들은 정말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선명장전’에 선정된 무장 중의 한 명이 바로 김준룡 장군(1586~1641)이다. 그렇다면 김준룡 장군은 어떻게 해서 조선 100인의 무장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치욕의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승전했기 때문이다.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할 정도로 병자호란은 당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치욕의 역사였다.그런 과정에서 수원 광교산에서 무적의 청나라 군대에 승리했으니 김준룡 장군의 승전은 가히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했다. 이 승리는 단순히 병자호란의 승리만이 아닌 경기 천 년의 역사에서도 빛나는 역사로 평가받아 받아 마땅하다. ■병자호란의 발발과 삼전도의 굴욕 임진왜란 후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현명한 외교책으로 국제적인 전란을 교묘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당쟁의 희생물로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향명배금책(向明排金策)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것은 후금을 자극해 조선침략의 명분을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후금은 인조 5년(1627)에 조선을 침략해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당시 후금은 조선보다는 명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어 조선에 많은 군대를 묶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고 강북철병을 약속했으나 청은 이를 어기고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군량과 병선을 요구하는 등 압력을 가했다. 인조 10년에는 형제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고치고 세폐(歲幣)의 증가를 요구했다. 이러한 후금의 강압책은 조선의 배금의식을 한층 높게 했다. 또한 청 태종은 왕호인 한(汗)의 칭호를 버리고 황제의 존호를 사용할 것을 조선에 요구했다. 이러한 청의 강압적인 위압에도 조선은 청나라 사신의 인견(引見)을 거부하고 국서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8도에 선전교서를 내려 방비를 굳게 하는 등 적의를 보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청은 중국 대륙 남쪽으로 내려간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조선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의 칭호와 아울러 국호를 청이라 고친 태종은 조선원정군 10만을 동원해 인조 14년(1636) 12월 침략을 개시했다. 청 태종은 의주 부윤 임경업이 굳게 방비하고 있는 백마산성을 피해 서울로 직행하니 조정에서는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이조판서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 화의를 진행하는 한편, 왕자와 비빈종실(妃嬪宗室) 및 귀족을 강화에 피난시키고, 인조도 뒤따르려 했으나 이미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는 급히 명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청하고 8도에 격문을 보내어 근왕병을 독촉했다. 이 사이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해 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인조 일행이 입성했을 때에 산성에는 1만여 군사가 겨우 1개월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인 쌀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각종 화기ㆍ궁시 등 수성에 필요한 장비와 혹한기 전투에 필요한 장구들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듯 부족한 병력과 장비로는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한 장기적인 수성작전의 실효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 김준룡의 광교산 승첩 청의 막강한 군대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버렸고 조선의 군대는 추풍낙엽처럼 스러졌다.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인조는 전국에 의병의 봉기를 지시했고 자신을 구하기 위한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해 남한산성으로 오도록 지시했다. 국왕을 보호하겠다는 근왕병들의 의지는 강했지만 청의 군사력은 너무도 강했다. 중원의 패자였던 대명(大明)의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황제의 지위에 오른 청 태종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지휘하는 팔기군은 중국 역사상 칭기즈칸이 거느린 군대 다음으로 강력한 군대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대를 강화하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치중하던 조선의 군대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고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으로 절망적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던 김준룡 장군은 청의 군대를 제압할 천혜의 요새를 찾아냈다. 그곳이 바로 광교산이었다. 김준룡이 영솔하는 군사들은 광교산에 이르러 적장 약부양고리(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이곳 광교산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다. 김준룡은 인조 때의 무신으로 자는 수부, 본관은 원주이며, 동지중추부사 김두남의 아들이다.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거쳐 황해도, 경상도, 함경도의 병영에 근무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병에 포위된 채 고립무원으로 사태가 급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친병(親兵)을 이끌고 근왕병을 모집했다. 그는 근왕병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에 진을 치고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각처에서 모집한 근왕병은 거의 패몰되고, 오직 김준룡이 영솔하는 병사들만이 남한산성 부근에서 활약하는 형편이었다. 그가 민첩한 군병을 선발해 청의 유격기병(遊擊騎兵)을 격파하니 군병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처음 전투에서 패배한 청군은 몽고 공격병 수만을 합해 대병력으로 짙은 안갯속에서 공격해 왔는데 마치 풍우와 같아 일격에 대파할 듯했다. 김준룡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들고 군사들에게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피의 절규를 토하고 화살과 투석이 난무하는 곳에 홀로 서서 지휘했다. 그와 함께 목숨을 건 근왕병들은 이 모습을 보고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혈전을 거듭했다. 적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종일토록 격전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 중에 적의 경기병(輕騎兵)이 몰래 뒷산을 넘어 산봉우리를 점거하고, 화살은 비 오듯 퍼부었다. 그는 급히 용사 수백 명을 내어 올라가라고 독려하면서 “이때야말로 충의 있는 자가 국가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라고 외치며 병사들을 독전하니 휘하의 병사들은 일당백의 정신으로 적을 맞아 선전했다.이때 청군 중 갑주에 말을 탄 장수가 산 위에 홀연히 나타나 큰 기를 세우며 호령하니 적군이 모두 모여들었다. 김준룡은 “저 적장을 죽이지 못하면 적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독전하며 포를 쏘았다. 김준룡 부대의 포탄에 청 태종의 사위였던 액부양고리라고 하는 적장은 마침내 불귀의 객이 되었고 청의 군대는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조선군의 사상자는 불과 수십 인에 불과했다. 하루 밤낮의 광교산 전투는 마침내 조선군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연전연패의 참혹함 속에 이 전투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조선군의 체면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근왕병들로부터 구원받지 못했고 마침내 남한산성을 나가 잠실벌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김준룡 장군의 광교산 전투는 우리 역사 속에 가장 치열하고 가장 극적인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한 비참한 현실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경기인들의 치열한 호국정신이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청나라 군대를 패하게 한 것이다. ■ 채제공의 김준룡 장군 전승비 건립 병자호란 이후 경기지역에서 김준룡 장군의 전승이 알려지게 된 것은 정조시대 화성성역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백성이 돌 맥을 찾으러 광교산에 올랐다가 광교산에서 장군의 위업을 듣고 당시 화성 유수였던 채제공 선생에게 알린 것이다. 채제공 선생은 이를 정조에게 보고했고 정조는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당시 정조에게는 충성스런 신하의 모델이 필요하던 때였다. 정조의 명을 받은 채제공 선생은 청나라 군사가 항복했다는 ‘호항곡(胡降谷)’의 자연암벽에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김준룡전승지)’라고 새기고 좌우에 ‘丙子胡亂公提湖南兵覲王至此殺淸三大將(병자호란공제호남병근왕지차살청삼대장)’이라고 새겼다. ‘병자호란 때 공이 호남의 근왕병을 이끌고 청나라의 세 장군을 죽였다’라고 쓴 것이다. 이로써 병자호란 이후 백성의 기억에서 사라진 김준룡 장군과 당시 군사들의 위업이 드러나게 되었다. 최근 우리는 경기 천 년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경기인들이 역사에서 보여준 자주정신은 우리가 계승해야 할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 중심에 김준룡 장군의 승전이 있다. 김준룡 장군을 기억하는 역사유적의 보존만이 아니라 이를 현양 하는 사업도 적극 추진해야 할 것이다. 김산 홍재연구소장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8. 축만제 천년만년 만석의 꿈

◇물에 담아온 오랜 꿈 물은 뭇 숨탄것들의 생명이다. 몸도 삶도 모두 물로 이루어진다. 그렇듯 먹고 마시는 일상부터 농사에 이르기까지 물이 없으면 삶은 불가능하다. 예부터 치수(治水)를 군주의 덕목이자 나랏일로 삼았던 까닭이다. 그저수지는 런 물을 인위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자연 강우를 가두었다 필요할 때 쓰는 일. 수원에도 화성 축성에 따른 대사업으로 만든 저수지가 몇 전한다. 그 중에도 축만제(祝萬堤)는 가장 큰 규모의 관개저수지다. 1799년(정조 23년)에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했다.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니 원대한 계획에 걸맞다. 축만제는 국내 최초로 ‘세계관개시설물유산’에 등재된 저수지다. 2016년 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제67차 집행위원회에서였다. 축만제의 역사적 배경과 축조의 중요성과 가치 등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만석, 중농(中農)의 길 축만제는 서호(西湖)로 오래 불렸다. 본 이름 놔두고 서호로 불러온 것은 화성 서쪽의 위치한 때문이다(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로 오늘도 여기산 밑을 늠름히 지키고 있다. 서호는 운치와 문향(文香)이 남다른 이름이다. 중국 항주의 서호가 한시에도 자주 등장해서 옛 사람에게는 더 그윽했을 법하다. 서호 낙조 또한 이름을 널리 떨쳤으니 서정적으로도 더 깊이 들었겠다. 무엇보다 축만제보다 서호가 입에 편히 붙는 발음이니 기억하고 전하기에도 좋았다. 일상에서도 ‘저수지’보다 ‘호수’라는 운치 있는 이름을 더 애호하지 않던가. 하지만 축만제에 담긴 정조의 의지와 원대한 뜻은 잊지 않는다. 화성 축성에 담아낸 꿈, 즉 백성이 두루 잘 사는 신도시라는 원대한 기획을 위한 농업용 관개저수지였으니 말이다. 당시 농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쳐온 비를 가둬두는 저수지가 가뭄에 따른 흉작의 고통을 크게 덜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원화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북지(北池)는 수원화성 북문 북쪽에 있는 만석거(萬石渠, 1795년 완성)다. 수원 사람들은 조기정방죽으로 불러왔는데, 최근에는 본래 이름인 만석거를 되찾아 쓰고 있다. 남지(南池) 만년제(萬年堤, 1797년 축조)는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동지(東池)는 수원시 지동에 있었다. 축만제는 만석거와 만년제에 이어 축조되었다. 문헌상 제방의 길이는 1,246척(尺),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다. 몽리면적(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받는 곳) 232두락에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으로 본다. 화성 주변 저수지 중의 최대 규모로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었던 것이다. 축조 4년 만에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 도감관(都監官)·감관(監官)·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와 전장관리를 맡게 했다. 여기서 생기는 도조는 수원성의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한 기록이 있다니, 축만제의 관리가 철저했던 게다. ◇풍경을 거느리는 서호 축만제는 이제 실용성을 떠나 아름다운 호수로 더 많이 찾는다. 긴 역사를 담고 있는 둑방길과 함께 호수를 보면 축만제의 풍경은 더없이 멋지게 완성된다. 거기에 하나를 다시 얹으면 축만제 격조가 격상되니 바로 항미정(杭眉亭)이라는 아담한 정자다. 항미정은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가 축만제 남쪽에 지었다. 구릉을 이루는 지점의 높이에 자리하고 있어 조망이 좋다. 항미정에서 바라보는 ‘서호낙조’(西湖落照)가 수원팔경 중의 하나로 손꼽혀온 까닭이다. 예전에는 낙조와 함께 잉어도 유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1913년에 발견된 우리나라 고유 어종인 서호납줄갱이도 살았는데, 아쉽게도 오래 전에 사라졌다. 학명을 따로 받은 서호납줄갱이를 기리는 시에 저간의 사정이 짚인다. “그 해 여름 미국인 생물학자 두 사람이 우리 식구 한 마리를 채집하여 잡아갔고, 1935년 시월 스무아흐렛날 우리 살던 서호 둑을 개수한다고 둑을 허물어 물을 다 뺐을 때, 호수 바닥이 드러나 그 때 둘 만남은 우리 서호납줄갱이는 마지막으로 이 땅, 이 지구에서 영영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지요.//그 후로는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게 되었어요 (…) 등빛은 암갈색, 배는 은백색, 푸른빛이 감도는 옆줄은 희미하고, 풀잎 같은 지느러미 하른거리던 연약하고 연약한 물고기랍니다.” -김명수, 「서호납줄갱이」 일부 시에도 나타나듯, 서호납줄갱이 사연은 매우 애석하다. 그 납줄갱이가 계속 살고 있다면 서호가 얼마나 너른 물고기들의 삶터가 되어줄 것인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이 불러냈을 것인가. 그야말로 축만제의 또 다른 만석 풍경이 이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런데 항미정이 “서호는 항주의 미록같다”는 소동파 시구를 따서 지었다고? 우리네 지명이나 옛 건물 이름에 깃든 중국 영향이 좀 씁쓸하다. 하지만 풍경은 우리가 주인처럼 즐길 때 이름값을 더 하는 것. 항미정은 1908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융·건릉 다녀갈 때 쉬어간 정자로 회자되었는데, 명소의 이름값을 올린 셈이다. 축만제 인근에는 일제가 설치한 권업모범장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도 근처에 두었는데, 이 역시 중농의 맥을 잇는 근대농업의 실현이다. 그렇듯 농촌진흥청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이었던 축만제는 농촌진흥청의 이전에 따라 위상이 조금 바뀌었다. 인근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서호공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하지만 서호천살리기(수원문화원에서 펼친 하천살리기운동)를 펴기 전에는 죽은 호수 같았다. 이곳을 지나던 시인의 눈에도 오염으로 부글거렸던 당시의 서호가 각인되었던지 암울하던 서호 모습을 그린 시편이 남아 있다. 악취 속에서도 대지는 여전히 풀꽃을 피우고 마디를 늘리고 있는 나뭇가지들 밤이면 어김없이 켜지는 불빛들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삼삼오오 희미한 불빛 아래 담소하던 이들은 날벌레들에게 기꺼이 피 몇 방울 나누어 주고 늦은 밤 손 흔들며 다리를 건넌다 칸칸이 매달린 몸을 끌며 어둠 속을 달린다 -박홍점, 「서호에서」 일부 지금은 서호가 다시 푸르러져 축조 때의 원대한 뜻을 일깨운다. ‘악취 속에서도 대지는 여전히 풀꽃을 피우’듯, 서호의 삶도 계속 힘을 내며 이어왔던 것이다. 근처의 아이들이 ‘아랑곳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온 싱싱한 활력에 힘입은 것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서호천살리기라는 인위적인 문화운동 후 하천에 대한 관심 속에 서호도 관리를 더 받은 덕이다. 물론 주변의 주민들도 서호 지키고 가꾸기를 계속해서 오늘의 푸른 호수를 유지하는 것이겠다. ◇둑방길, 축만제의 만석 추억 축만제는 너른 호수로 거느리는 항미정과 더불어 물빛도 최고지만 둑방길이 또 일품이다. 송창식의 노래 장면이 선명히 기억되는 둑방길. 휘어진 소나무들 몸짓과도 닮은 송창식 특유의 허수아비춤(?)에 국악 풍 노래가 둑방길의 멋을 한껏 돋웠던 것이다. 서호 하면 떠오르는 그림도 있는데, 바로 나혜석의 ‘수원 서호’(진위는 논란 중)다. 항미정에서 바라보는 서호 그림은 축만제의 풍격을 한층 그윽하게 해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인 나혜석은 수원 출신답게 수원8경에 대한 긍지가 높았으니 그가 그렸을 법하다. 최근에는 서호 사진전도 열었는데, 축만제에 담긴 만석 정신을 문화 예술적으로 견인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뿐이랴, 둑방길은 일기장에 적어둔 연애 비사(秘事)에도 많이 등장할 법하다. 그만큼 수원 시민들 추억도 풍성하게 해준 축만제 둑방길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일품길이다. 그렇게 돌아보니 축만제는 삶과 추억과 생명을 천년만년 지켜갈 만석의 호수가 아닌가. 여름날 드넓은 호수 보며 둑방길 걷고 향미정 오르는 맛이 참으로 푸르다. 정수자(시인·문학박사)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7. 번암 채제공 초상화

“좋은 역사책은 좋은 그림과 같아서 신운(神韻)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눈과 귀와 코와 입이 모두 닮았더라도, 반드시 뺨 위의 세 가닥 수염을 잘 그리지 않으면 그 사람 그림이 아니다. 평범한 화공이 보기에는 세 가닥 수염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을 듯하나, 아는 사람은 그곳에 정신이 모인 것을 안다. 이 때문에 반드시 공력을 다 들인다.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일의 크고 적음에 관계없이 오직 신운이 붙은 곳을 적는데 뛰어나다.” 홍재전서에 실려 있는 정조(1752~800)의 말이다. 역사와 그림이라는 전혀 다른 소재를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정조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자는 정신을 그리지 형태에 연연하지 않으며,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상황을 기록하지 일을 중시하지 않는다.” 채제공과 정조시대의 진경문화 수원 화성박물관에 가면 명재상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보물 제1477-1호로 지정된 ‘채제공 초상 시복본’은 정조 시대의 진경문화를 드러내는 명작이다. 족자의 전체 크기는 170.0×90.0이고 그림은 120.0×79.8이다. 박물관은 5점의 채제공의 초상 흑단령포본 초본, 즉 기름종이에 그려진 밑그림도 수장하고 있다.이 역시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초본은 초상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되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 속의 채제공이 잡고 있는 부채에 달린 선추의 실물도 볼 수 있다. 선추는 부채의 자루에 다는 장식품인데, 선추 안에 향을 넣어 향낭, 또는 향합이라고 부른다. 선추 역시 정조가 선물한 것이다. 채제공의 얼굴은 선이 굵은 미남형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얼굴이 살짝 얽은 곰보인데다 한 쪽 눈이 이상하다. 채제공은 사시였던 것이다. 털 한 가닥도 틀리게 그리지 않는다는 화론을 실감하게 된다. 채제공의 초상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정조가 규장각에 설치한 ‘자비대령화원’이란 제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비대령화원이란 국왕이 ‘임시로 차출하여 왕명에 대기하는 화원’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뽑힌 화원은 1년에 4차례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국왕이 평가를 주관했다. 이런 제도를 통해 정조시대의 회화가 절정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규장각 도서의 그림, 왕실행사의 절차를 그린 반차도, 국왕의 초상화 제작을 주로 담당했다. 채제공의 초상을 그린 이명기는 김홍도, 김득신 등과 함께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초상을 자주 선물하여 친밀감을 보여주었다. 본인의 초상화를 세 차례나 그렸을 정도로 초상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다운 모습이다. 채제공은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린 당사자였다. 채제공은 청백리 오리 이원익과 함께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재상으로 꼽힌다. 채제공의 초상화를 보면 ‘터럭 한 올이라도 실물과 닮지 않으면 곧 타인’이라고 생각했던 당대 화가들의 고심을 읽을 수 있다. 화가는 초상 속에 인물의 정신과 성품을 담아내려 했는데 이것을 ‘전신(傳神)’이라 한다. 이를 위해 화가들은 대상 인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동시에 일상에서의 행동과 태도도 눈여겨보았다. 인물의 내면은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림을 주목해 보자. 그림에 적힌 글을 통해 채제공의 73세 초상이며 정조15년(1791) 이명기가 어진을 그린 다음 어명을 받아 채제공의 초상을 그려 대궐로 들여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왼편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이 눈길을 끈다. 이형이정爾形爾精 부모지은父母之恩 네 모습과 네 정신은 부모님의 은혜이고 이정이종爾頂爾踵 성주지은聖主之恩 네 머리부터 네 발끝까지 성군의 은혜로다. 선시군은扇是君恩 향역군은香亦君恩 부채도 임금의 은혜, 향 또한 임금의 은혜이니 분식일신賁飾一身 하물비은何物非恩 온 몸을 꾸민 것 은혜 아닌 게 무엇인가 소괴헐후所愧歇後 무계보은無計報恩 부끄럽게도 무능하여 그 은혜 갚을 길이 없네. 화산관 이명기와 단원 김홍도 다산 정약용은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 화가 김홍도와 이명기를 소개하는 글을 남겼다. “김홍도는 풍속과 여러 사물의 모양을 잘 그렸으며, 또한 화초와 오리, 기러기도 잘 그렸다. 그리고 이명기는 특히 초상화로 이름이 났는데, 먼저 임금인 정조 때에는 어진으로부터 대신과 재상들의 초상까지, 혹은 낡은 초상화를 옮겨 그리는 작업도 명기가 다 했다.” 이명기는 김홍도보다 10살 이상 후배였으나 얼굴 그림만은 김홍도보다 뛰어났다.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이 승정원일기(1791년 9월 28일자)에 실려 있다. 이날 정조는 어진을 그릴 때 1차로 완성한 초본 석 점을 걸어 놓고 채제공을 비롯한 20여 명의 대신들과 초상화를 그린 김홍도와 이명기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그림을 품평했다. 신하들의 평을 들은 정조가 말한다. “나의 얼굴색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변하니, 막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르고, 막 빗질하고 관을 쓸 때 다르고, 아침과 오후가 다르고, 오후와 저녁과도 달라서 무엇을 따라야할지 기준을 잡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런고로 나는 이명기에게 좋은 그림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것이요, 이래서 이 사람의 손에서 종내 나의 참 모습을 얻지 못하지 않을까 염려하던 바다.” “초상을 살피는 법으로는 먼저 눈동자를 본다고 한다. 내 얼굴을 내가 비록 스스로 볼 수 없지만 서편의 유지본은 눈동자의 정채로움이 여러 본 가운데 으뜸이다.”라며 정조는 셋 중에서 눈동자가 가장 살아 있는 그림을 최종 선택했다. 정조가 김홍도와 이명기를 사신을 따라 북경에 다녀오도록 했던 일도 흥미롭다. 최고의 화가 두 사람에게 청나라의 사찰 탱화와 천주당의 벽화를 직접 견문할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귀국한 직후인 1790년 2월부터 김홍도와 이명기는 김득신과 함께 용주사 대웅보전의 ‘삼세여래체탱’과 칠성각의 ‘칠성여래사방칠성탱’을 제작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듬 해 이명기가 정조의 어진과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와 채제공의 위대한 만남 조선의 위대한 역사는 명군과 명재상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의 세종과 황희, 후기의 정조와 채제공은 이를 웅변한다. 1758년, 영조는 39세의 채제공을 도승지에 임명했다. 이 무렵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관계는 위태로웠다. 급기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한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사실을 확인한 채제공은 불같이 화를 내는 영조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극력 만류하여 결국 명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훗날 영조는 정조에게 말한다. “나와 너에게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은혜를 온전하게 해 준 사람은 채제공이다. 나에게는 순신(純臣)이지만 너에게는 충신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채제공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정조의 개혁정책을 충실히 보좌했다. 세손 때부터 노비제 폐지를 구상했던 정조의 특명을 받은 채제공이 시노비의 폐단을 교정하는 조목을 만들었던 일은 주목해야할 일이다. 이 조목은 국가가 노비를 찾아주는 노비추쇄관제를 없애고 시노비의 수를 차츰 줄여 정조의 서거 직후인 1801년에 4만 명의 시노비를 해방시켰던 바탕이 되었다. 조선 최초의 시장 자유화 조치로 불리는 ‘신해통공’(1791) 역시 채제공이 주도한 일이다. 채제공의 가장 큰 공적은 역시 화성성역이다. 화성유수부의 초대 유수에 임명된 채제공은 1794년 정월, 화성 성역을 시작하면서 영의정 겸 총리대신으로 축성의 총책임을 맡았다. 10년 예상하고 시작한 공사를 2년 6개월 만에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중심으로 정약용을 비롯한 개혁세력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했기 때문이다. 거중기를 비롯한 기계를 제작하여 현장에 투입하고 벽돌을 사용했으며, 떠도는 백성들을 고용해 건설 현장에 투입하고 임금을 지불했다. 성역을 마친 후 채제공은 화성 건설의 모든 과정을 담은 종합보고서 화성성역의궤를 편찬했다. 이 책에는 1,800여명의 기술자들의 명단과 이들에게 지불한 임금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1799년 1월, 채제공은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비보를 들은 정조는 절절한 마음을 담은 추도사를 남겼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나는 참으로 이 대신과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오직 나만 아는 오묘한 관계가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6. 화성 궐리사

“지금 내가 군사(君師)의 위치에 처해 있으니 스승과 도에 대한 책임이 실로 나에게 있다. … 일찍이 깨우쳐 주고 교도함에 부지런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습속이 점점 어그러지고 선비들의 기풍이 예스럽지 못하여 크게 변화되어 도를 따르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 군사로 자부했던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는 규장각을 세우고 초계문신이라는 이름으로 37세 이하의 젊고 유능한 신하들을 선발하여 직접 가르쳤다.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같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들도 정조의 가르침을 받았다. 풍석과 다산은 정조의 신하이자 제자들인 셈이다. 정조는 공자를 힘써 배운 국왕이다. 정조는 공자를 ‘공부자(孔夫子)’로 높여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 공부자란 표현이 총 31회 나오는데, 이중에서 정조실록에만 무려 11회나 된다.정조는 1792년에 공자의 초상을 모시는 사당 ‘궐리사(闕里祠)’를 건립했다. 궐리는 노나라 곡부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오산의 화성 궐리사는 충청도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이다.이곳은 공자의 64대손인 공서린(孔瑞麟, 1483~1541. 중종 때 승지, 경기감사, 대사헌 역임)이 낙향하여 강당을 세우고 강당 앞에 손수 은행나무를 한그루 심어 가지에 북을 달아 놓고 두드려 제자들의 학업을 독려하며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공서린이 별세한 후 폐허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정조 때에 어명으로 재건되어 매년 예조에서 봄가을로 석전을 봉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4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이처럼 궐리사는 군사를 자처한 정조의 정치철학과 교육사상이 담긴 공간이다. 궐리사는 1994년 4월에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1974년 9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된 ‘궐리사 성적도’는 1904년 공자의 76대손인 공재헌이 중국 산둥성에 건너가 여성부가 조각한 진품 성적도를 들여와 그림과 글로 양면 조각한 108장에 공자의 일대기가 정리되어 있다. 피나무로 된 목판은 모두 60장인데 한 장의 크기는 세로 32센티미터, 가로 70센티미터, 두께 1.5~2센티미터이다.궐리사 성적도에는 공자를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유림들의 구국의 일념이 담겨있다. 이후 당국의 지원을 받아 8칸의 강당과 성적도 판각을 보관할 수 있는 장각을 신축하였다. 공자문화전시관에는 1792년에 정조의 명으로 이문원에 보관하다 이곳으로 옮긴 공자의 진영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 평등교육의 실천자 공자의 눈높이 교육 공자의 위대성은 2천500년 전에 이미 신분이나 계층의 차별이 없는 평등교육을 실천한 점이다. 아울러 특정 주제에 대한 문답을 통한 대화식으로 진행된 공자의 교육법은 질문이 사라진 우리시대에 절실한 부분이다. 논어를 펼치면 인(仁)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여덟 가지로 달리 대답하는 공자를 만날 수 있다. 제자의 학문적 수준과 그때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대답을 달리했던 것이다. 정치에 대해 묻는 제자의 질문에는 아홉 가지로 달리 대답하고 있다. 이처럼 공자는 제자를 가르칠 때 제자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을 실천했다. 공자는 말한다.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며 근면하고 미덥게 할 뿐더러 뭇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 그러고도 힘이 남으면 글을 배우라” 이것이 공자 교육의 핵심이다. 인성교육이 절실한 이 시대에 공자를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 궐리사를 세운 정조의 뜻 1790년 정월 초하룻날, 정조는 특별한 명을 내렸다. “올해 경술년은 바로 공부자(孔夫子)와 주부자(朱夫子)가 난 해이다. 성인이 태어나고 현인이 나신 옛날 경술년이 다시 돌아왔으니 마땅히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겠다. 문묘에 나아가 선성(先聖:공자)을 참알하고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들을 뽑을 것이니, 다음 달 초로 날을 잡도록 하라.” 공자의 탄생을 기념하여 특별 과거까지 열었던 정조였으나 이때까지는 공자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충청도 이성 궐리사에 부정적이었다. “전국 3백 60군데의 군현에 다 공부자를 제사지내는 곳이 있는데, 어찌 유독 이성에서만 향교 이외에 별도로 한 사당을 설치한단 말인가. …앞으로는 감히 옛 성인의 화상을 그려 봉안하는 서원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예조의 관리에게 지시하여 각도에 공문으로 알리게 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정조는 이성에 궐리사를 세운 것은 당파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1792년 10월, 정조는 수원읍지를 통해 공씨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맨 먼저 수원에 정착한 사실을 확인하고, 경기관찰사에게 궐리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도록 지시했다. 이를 통해 구정촌에 궐리사란 사우(祠宇)가 있고 은행나무도 심어져 있으며 대대로 살고 있는 후손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조는 경기 관찰사를 불러 궐리사 건립을 지시했다. “궐리 옛터에다 집 한 채를 세워 내각에 있는 성상(聖像:공자상)을 모시게 하고 영당에 모셨던 진영(眞影)도 모셔다가 함께 봉안하고서 이름을 궐리사라 하라. 사우의 편액은 써서 내리겠다. 봄·가을로 지방 수령에게 향과 축을 내려 제사를 모시게 하고 제사에 쓰이는 제수들은 대략 이성 궐리사의 예대로 시행하되 한사코 정갈하고 간략하게 하라” 1793년 5월에 화성의 궐리사가 완공되었다. 6월에는 이문원에 보관하고 있던 공자의 진본 영정을 화성의 궐리사에 옮겨 모시도록 지시했다. 8월에 정조는 수원 유생들을 대상으로 과거를 베풀었다. 궐리사의 건립을 기념하여 시제를 “성상을 본부의 궐리사에 공경히 봉안하다 (祗奉聖像安于本府闕里祠)”로 삼았다. 이때 정조는 수원 유수가 거두어 올린 시권을 자신이 직접 채점했다. 홍재전서에 ‘궐리사에 정경(正卿)을 보내어 잔을 올리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 화성으로 행차하던 1795년 윤2월 10일에 예조판서 민종현을 화성 궐리사로 보내 제향할 때 사용한 글이다. 공자의 사당이 / 부자지사夫子之祠 천하에 두루 퍼져 있는데 / 편어천하遍於天下 이제 화성에다 세우게 되었으니 / 의기화성義起華城 어찌 까닭이 없으리오 / 기무이야豈無以也 … 효경에서는 어버이를 드러냄을 말했고 / 효경현친孝經顯親 논어에서는 백성을 사랑하라 하였으니 / 노론애민魯論愛民 지척의 밝은 가르침을 / 지척명훈咫尺明訓 마치 순순하게 듣는 듯하네 / 약령순순若聆諄諄 이때 이곳에서 / 시시시경是時是境 어찌 정성을 펼치지 않으리오 / 갈부전침曷不展 이에 제기를 깨끗하게 갖추었으니 / 재견형두載豆 제문이 함에 담겨 있나이다 / 유문재함有文在函 ■ 공자와 거닐며 교육의 장래를 생각하자 현재 궐리사는 공자 사당으로서의 기능과 교육기관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공자의 정신을 전파하며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배우지 않는 것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두 가지를 주문하고 싶다. 먼저 교육의 형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질문이 사라진지 오래다. 입시교육이 낳은 우리 교육의 서글픈 현실이다. 궐리사에서 2천500년 전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문답법 교육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다른 하나는 교육 내용이다.궐리사에서 논어를 공부하되 정조와 다산이 읽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강독하는 것이다. 아울러 정조의 홍재전서를 읽으며 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은 어떤 바탕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찾아보고 정조의 리더십을 연구하는 일도 필요하다. 교육의 장래를 고민하는 학부모나 교사들이 궐리사를 찾으면 좋겠다. 교육에 관한한 공자의 교수법은 “오래된 미래”라는 말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무성한 그늘 아래서 논어를 펼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공자의 말씀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5. 조선 최대의 개혁 대동법 시행 기념비

대동법 시행 기념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는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조선 효종 10년(1659) 잠곡 김육이 추진한 대동법이 소기의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자 대동법 시행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인 평택에 세웠다. 원래 기념비가 세워진 위치는 현재 위치에서 남동쪽으로 약 50m 지점 언덕에 세웠다고 한다. 1970년대에 현 위치로 이전했다. 비는 거북 받침돌 위에 비 몸(碑身)을 세우고 맨 위에는 머릿돌을 갖추고 있다. 원래 명칭는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이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 이민구가 짓고 글씨는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썼다. 소사(素沙)라는 마을 이름은 평평하고 넓은 들이라는 의미이다. 그 소사의 들녘에 양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했던 대동법 시행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는 조선에 엄청난 세공(歲貢: 해마다 바쳐야 하는 조공물)을 요구했다. 청의 요구는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무명 1400필, 쌀 10,000포 등(인조실록 권34, 15년 1월 28일 戊辰) 국가재정을 악화시키고 백성들의 숨통을 옥죄는 것들이었다. 국내적으로 공물의 폐단 역시 백성들의 피를 말리고 국가재정을 텅텅 비게 만들었다. 인조는 즉위 10일 만에 재정운영 담당들을 소집했다. 영의정 이원익, 호조 판서 이서, 호조 참판 권반이었다. 이서(1580~1637)는 백성들은 살길을 찾아 “모두 흩어져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있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원익(1547~1634)은 백성을 안정시키는 안민(安民)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핵심은 공물을 줄이는 조치라고 말했다. 일명 삼도대동법의 발의였다. 그러나 이 법은 한 번도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만 2년이 채 안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실패였다. 잠곡 김육(1580~1658)은 오직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던 헌책도 시렁에 올려놓고 살아있는 민생의 책을 읽으며 선혜(宣惠)와 대동법을 제안했던 이원익을 꿈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이원익을 만나고 난 후 “임금 사랑과 나라 걱정은 죽은 자나 산자가 한 가진데 이 얼마나 행운인가 오늘밤 꿈속에서 공을 뵈었네”라는 시를 쓴다. 잠곡 역시 이원익처럼 안민이 정치적 노선이자 중심 이슈였다. 그는 평생 전쟁을 네 번이나 겪으며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가평 잠곡에서 10년 동안 농사꾼이자 숯장사로 살았다. 그 시대 조선의 중심 사상은 성리학이자 도학이었다. 그러나 도학은 외세의 침략과 창칼 앞에는 무력했다. 잠곡은 백성들의 삶과 관계없이 자기들만의 논리에 갇혀있는 도학류와는 달랐다. 그는 백성의 현실을 시무(時務)와 실사(實事)로 삼고서 안민의 입장에서 진단하고 처방하는 경세가였다. 대동법은 그 정책적 결과물이었다. 김육은 대동법을 평생 입안하고 추진했다. “대동의 법은 부역을 균등히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진실로 시대를 구제하는 좋은 정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동법 반대론자들과는 사안을 바라보는 입각점이 달랐다. 반대론자들은 공물 수취의 폐단을 제도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에서 찾으며 “치란과 흥망의 기틀은 단지 전하의 한 작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잠곡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면 천하국가도 살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입으로만 말하면서 시무가 급하다고 하는 사람을 공리를 추구한다고 비웃는다”고 비판한다. 사회의 악과 국가의 치명적 문제점과 폐단이 개인의 도덕성으로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만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겠는가. “일 처리는 실(實)로써 하고자” 할 뿐이었다. 잠곡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충청도는 총 전결수에 비해 공역가의 부담이 지나치게 큰 지역이었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의 여파가 크게 작용했다. 조정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닥치는 대로 가까운 곳에 더 많은 공역가를 부과했다. 충청도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잠곡은 충청도 관찰사 시절 전임 관찰사 권반(1564~1631)이 작성해 놓은 실태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대동법을 위한 세밀한 계획안을 마련한 후 효종 2년(1651) 충청도에 대동법(호서대종법)을 실시한다. 조선 최대의 개혁이었다. 대동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각 지방의 규모와 상관없이 토지결수를 기준으로 쌀로 환산하여 납부하고 산간과 해안 지방은 무명(베)으로 납부하게 하는 조세제도이다. 조정에서는 지방의 특산물을 매년 200여개 항목 이상을 소비했다. 그러나 공물은 생산 조달 납부 과정에서 공물에 따라 또는 고을에 따라 납부를 대신하는 방납이 유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방납인이 폭리를 취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가중되는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적이 되거나 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국가대로 수입이 감소하여 각종 폐단이 나타났다. 그 폐단의 사상적 근거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이었다. 임토작공은 각 지방에서 나는 토산물을 공물로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논리는 우임금이 천하를 9주로 나눈 후에 그 지방에서 나는 물산을 거두었다는 고제(古制)에서 유래하였다. 때문에 임토작공의 입장에서는 공물에 대한 수취를 왕에 대한 예적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효종은 청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자 김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복수설치론이 가져올 백성들의 참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북벌을 하려면 전쟁 물자를 준비해야 하고 그것은 곧 백성의 수탈로 고스란히 전가되기 때문이었다. 잠곡은 철저히 민본의 입장에 서 있다. “왕자의 정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백성이 편안한 후에라야 국가도 편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백성을 보호하는 정치를 시행하는 것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삶이 편안하도록 할 따름일 뿐”이었다. 김육은 백성이 편안해야 국가가 견고해진다(安民固國)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대동법 시행 전에는 나이 많은 노인이나 어린 아이에게도 세금을 부과했다. 대동법 시행으로 이런 폐단은 잠시 개선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모조리 열거하며 나라를 나라답게 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았던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어린 아이는 물론 이미 죽은 자 심지어 개와 절구에도 세금을 부과했다고 기록한다. 맹자의 말처럼 왕도의 시작은 토지의 경계에서 시작하지만 세금이 결정적이었다. 제도가 시대정신을 상실하면 착취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럼 지금 여기에서는 어떤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시대마다 그 시대의 현안문제는 늘 존재한다. 그때마다 누가 어떤 사상과 철학으로 누구를 위해 진단하고 처방하느냐가 중요하다. 시무(時務)와 시사(時事)를 떠난 철학은 공허하다.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시켜준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이지만 기념비를 힘겹게 받치고 있는 눈 큰 거북이가 백성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은 아닐까. 마치 화를 내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기념비 바로 앞에는 대동균역법을 실시한 김육의 공적이 한글로 번역되어 동판에 새겨져 있다. 효정 10년(1649)에 새긴 글을 1980년에 새롭게 새겼다는 기록이다. 우리는 이 땅을 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보다 거대담론을 좋아한다. 한 걸음과 거대담론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삼남대로 옛길을 걷다보면 그 한 걸음에 철저했던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볼 수 있다. 기념비는 이 나라 모든 땅이 해당되고 모든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던 그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 근처에는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어 우리나라 선사문화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소사동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같이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4> 안양 만안교(萬安橋)

“어여차 대들보를 아래로 던져라/ 붉은 난간 아득하게 먼 들판 안았는데/ 돌아보니 만안교 밑으로 흐르는 시내가/ 도도하게 날마다 콸콸 흘러내리는구나./ 엎드려 바라니 상량한 뒤에/ 기둥들은 빛을 발하고/ 온 동네는 더욱 넓어져라./ 바람과 구름은 현륭원에 있는 나무들 길이 보호하여/ 그 복을 더욱 돈독히 하고/ 산과 물은 누각의 해자를 둘러 안아서/ 길이 이 땅을 편안하게 하소서.” 1796년 11월에 우의정 윤시동이 지은 신풍루 상량문의 끝부분이다. 이처럼 만안교와 화성 행궁은 동시대의 문화유산이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위치한 만안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는 안양시민들에게 아주 친숙한 유적이다. 매년 정월이면 이곳에서 답교(다리 밟기)축제가 벌어지고, 10월초에는 안양시민의 날 행사인 ‘만안문화제’가 열린다. 안양시 도심을 가로지르는 만안로 역시 이 다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처럼 안양시 역사문화의 뿌리와 줄기인 이 돌다리는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하러 갈 때 사용되었다. ■ 길이 31.2m 너비 8m ‘돌다리’ 즉위한 지 13년이 되던 1789년, 정조는 오랜 숙원을 풀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고 자급자족의 신도시 화성을 건설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조는 매년 현륭원을 참배했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창덕궁을 떠나 용산에서 배다리로 동작나루를 건너 남태령을 넘고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지지대고개를 넘는 길이었다. 그러나 과천의 노정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참여한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노량진에서 시흥, 안양, 수원의 새로운 행로를 만들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는 과천길에 남태령이라는 가파른 고개가 있어 겨울철에 오가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새롭게 길을 개척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처음에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했으나 1795년(정조19)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돌다리를 완성했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 31.2m에 너비 8m인데 실용성이 돋보인다. 가로로 열두 명의 병사가 지날 수 있고, 말을 탄 다섯 기병이 나란히 지나 갈 정도로 넓은 이 다리의 바닥은 대청마루를 엇물려 짠 것처럼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정교하게 깔았다. 7개의 홍예는 하단부터 곡선을 그어 전체의 모양은 반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홍수가 져도 바닥이 파이지 않도록 시내 바닥에 반반하게 다듬은 판석을 넓게 깔았다. 원래는 현재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던 것인데 1980년 8월 국도를 확장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아무튼 정조가 행차하던 이 원행길은 훗날 1번 국도가 되고, 수원을 거쳐 삼남으로 연결되는 철도도 이 길을 따라 났다. ■ 만안교 건설의 숨은 주역 ‘신형’ 만안교는 임금의 행차가 편안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는 이 다리를 건설한 주역은 누구일까. 경기감사 서유방의 공로는 알려진 것이지만, 실제로 공사를 감독한 주역은 따로 있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한 인물은 평안도 안주에서 차출되어 온 무관 신형(申泂)이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신형은 1794년 3월에 간역(看役)으로 임명되어 11월에 이르기까지 실사 266일, 1795년 8월에서 17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실사 246일 동안 장안문을 비롯해 동장대 등을 건설한 것으로 확인된다. 1797년 1월 말, 만안교에 도착한 정조가 다리를 건설할 때 감독한 신형을 어가 앞으로 불러 성명을 아뢰게 하고, 새롭게 건설한 다리가 잘 되었다며 칭찬했다. 정조와 신형의 일문일답이 이어진다. “지금 이후부터 아무 염려가 없겠느냐?” “이전에 비하면 완전하고 단단합니다” “그런데도 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냐?” “다리 아래 좌우의 석축 부분의 미진한 곳을 마무리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너는 화성성역에서는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떤 상을 받았느냐?” “장안문의 성벽 700보를 쌓았고, 동장대를 간역했으며 신은 이미 재작년에 오위장을, 작년에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정조가 다시 물었다. “변장을 지냈느냐?” “아닙니다” “네가 수고 많았다. 화성에서 명을 기다려라” 정조는 신형이 평안도 안주 병영의 장교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화성 성역의 총재대신 채제공이 신형을 첨사로 제수할 것을 청하자 허락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1797년 2월 1일자로 신형을 청성 첨사로 삼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덧붙여 기억할 사람은 안양의 백성들이다. 관악산과 삼성산 자락에 화강암이 많고 석공도 많아 석수동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렇다면 만안교와 만안교비도 이 석공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정조 편안한 원행길 ‘효행의 다리’ 정조는 원행을 ‘행행(行幸)’이라 선언했다. 곧 행복한 나들이라는 뜻이다. 정조의 뜻대로 원행길에서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어가를 호위하는 5군영 군사들의 진법훈련도 길 위에서 벌어졌다. 백성들은 장용영과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 병사들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일사불란한 훈련을 지켜보았다. 백성들에게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이지만, 군사들에게는 행군과 훈련이 동시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병사들에게도 원행이 끝나면 무예를 시험보아 부상을 넉넉하게 주어 격려했다. 원행을 시작하면서 ‘신작로’(新作路)를 건설한 것도 특별한 일이다. ‘신작로’라는 용어는 정조4년(1780년)에 처음 등장하는데, 수원으로 원행이 이루어지면서 신작로는 더욱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국왕의 잦은 행차가 백성들에게 좋을 수만 없는 일이다. 왕의 행차를 위해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정조는 지역 수령들에게 무보수의 부역을 시키지 말고 일당을 지급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백성들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격쟁’을 허락했다. 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은 왕과 백성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꽹과리를 쳐 원통한 일을 고하면 왕이 즉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재위 24년 동안 1천335건의 격쟁 처리했다. 백성들이 행복한 행차가 되어야 한다는 정조의 신념이 만들어낸 특별한 행사였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다가가려는 정조의 노력으로 13번의 원행길은 큰 원성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를 위한 정조의 효심은 고을과 고을을 잇는 신작로로, 신도시 화성의 건설로 결실을 보았다. 원행은 농사철을 피해 농한기인 겨울철에 이루어졌다. 겨울철 눈 쌓인 험한 남태령 고개를 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길을 닦으려면 수고도 배로 들었다. 해당 고을의 수령들에게 대안을 마련하도록 어명이 하달되었다. 새로운 길을 어디로 내면 좋을 지 살펴본 수령들은 시흥로가 편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런 논의 과정을 거쳐 시흥로는 화성 성역이 착공된 지 2개월 째 접어든 1794년 4월에 개설되었다. 거리는 과천로와 비슷했으나 시흥로의 지세가 평평하고 넓었다. 정조는 원행을 앞두고 금천현감을 한 등급 높여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금천이란 읍호를 옛 이름인 ‘시흥’으로 개칭했다. 더불어 그때까지 ‘금천로’로 불리던 노정 또한 ‘시흥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시흥로는 조선시대 도로건설의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사업이다. 이때 새로 닦여진 노량진과 화성을 잇는 넓은 신작로는 한양과 화성의 거리를 좁혀줬다. 1795년 9월, 경기감사 서유방이 안양천에 석재로 만안교를 착공하여 3개월 만에 완공했다. 이 만안교는 현륭원 부근 황구지천에 놓았던 대황교와 함께 원행 과정에서 축조된 석교이다. 잘 닦여진 신작로 ‘시흥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서울과 수원을 잇는 육상 교통의 대동맥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고 있다. 만안교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서 있다. 만안교비는 높이 164cm, 너비 64cm, 두께 34cm이다. 1795년에 건립된 만안교비는 서유방(徐有防, 1741~1798)이 비문을 짓고, 명필 조윤형(曹允亨)이 본문 글씨를 썼다. 비석 전면의 ‘만안교’라는 큰 글씨는 예서의 대가 기원 유한지(兪漢芝, 1760~1834)의 작품이다. 공사를 지휘 감독하고 비문을 지은 서유방은 그 형인 서유린(1738~1802)과 함께 정조의 최측근이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3. 허준의 묘소와 동의보감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어떤 책일까. 바로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이 책의 저자가 허준(許浚, 1539~1615)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책을 들추면 허준이 이 책을 편찬하며 쏟은 정성과 예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611년 4월, 내의원 제조 이정구가 왕명을 받아 지은 동의보감의 서문에서 이 책의 강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의술 전반에 걸쳐 수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내용도 조리가 정연하니, 비록 병자의 증후가 백 천 가지로 다를지라도 각각의 증상에 따라 적절히 처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옛 서적을 상고하고 가까이 주변의 의원을 수소문할 필요 없이 그저 병증의 종류에 따라 그 처방을 찾으면 온갖 처방들이 곳곳에서 나와 증상에 따라 투약하면 어김없이 들어맞으니, 참으로 의가의 보감이요 세상을 구제할 좋은 법입니다.” 그러나 동의보감은 25권 25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내용으로 일반인들이 활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분량과 명성에 걸맞게 책값도 엄청났다.1780년 연암 박지원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중국에서 펴낸 동의보감을 구입하고 싶었으나 책값이 너무 비싸 발길을 돌려야 했다. 누구나 이 책을 집안에 소장하고 싶어 했으나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이런 사실을 안타까워하던 조선 22대 국왕 정조(正祖, 1752~1800)는 동의보감을 백성에게 널리 보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정조의 뜻에 따라 동의보감을 바탕으로 새롭게 편찬한 의학책이 제중신편(濟衆新編)이다. 동의보감 다이제스트 판이라 할 제중신편의 편찬으로 동의보감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 동의보감의 철학… 몸은 곧 우주다 동의보감 내경편 첫머리에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라는 인체 그림과 이를 풀이하는 흥미로운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을 통해 사람의 몸을 우주로 이해하는 허준의 의학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우주에서 가장 영귀한 존재이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발이 네모진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하늘에 사시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다. 하늘에는 오행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는 육극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다. …하늘에는 음양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한열이 있고, 땅에는 초목과 금석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모발과 치아가 있으니, 이러한 것은 모두 사대, 오상이 묘하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성립된 것이다.”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허준은 의성(醫聖)이다. 허준을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던 의사로 기억하도록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1990년에 발간되어 400만 부가 팔린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이다. 이 책의 독자는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병든 이웃부터 돌보는 허준의 따뜻한 품성에 감동하고, 제자의 의술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몸을 해부하도록 당부하는 위대한 스승 유의태의 결단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빗어낸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허준의 개인사는 너무나 소략해 고개를 갸웃할 정도다. 심지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밝힐 수 있는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동의보감의 편찬에 관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이정구의 서문을 통해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 동의보감의 숨은 공로자는 선조·양예수 그리고 정작 임진왜란의 참화로 대다수의 의학 서적이 사라졌다. 1596년 선조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수의(首醫) 허준에게 새로운 의학서적의 편찬을 지시했다. 이때 허준과 함께 왕명을 받아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은 어의 양예수(楊禮壽, ?~1597)·이명원·김응탁·정예남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던 유의(儒醫) 정작(鄭, 1533~1603)이다.역대 의학자들의 전기인 의림촬요를 저술해 의원들의 존경을 받았던 양예수는 허준의 스승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물이다. 또 한 사람 주목해야 할 인물은 정작이다. 정작은 포천 현감을 지낸 형 정렴과 함께 도교 양생술의 대가로서 의학에 밝다는 평판을 얻었던 인물인데 동의보감에도 그의 의학사상이 짙게 들어 있다. 이명원은 침술의 전문가였고, 김응탁과 정예남은 신예 어의였다. 이처럼 동의보감의 편찬은 처음부터 정부가 기획한 국가사업이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참여한 인물들이 흩어지고 편찬도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1601년 봄, 선조는 허준을 불러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금의 의서 100여 권을 내주면서 동의보감을 단독으로 편찬할 것을 명했다. 이 무렵 허준은 어명으로 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언해두창집요을 지었다. 책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세 권 모두 한글로 풀이한 의서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과중한 업무 때문에 동의보감 편찬은 지진 부진했다.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자 허준은 어의로서 책임을 지고 의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의서 편찬에 골몰하던 허준은 광해군의 특명으로 1609년 말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와 편찬에 전력을 다해 1610년 8월에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책을 받은 광해군은 선왕의 유업을 완성한 허준의 노고를 치하하고 좋은 말 1필을 상으로 내렸다. “양평군(陽平君) 허준은 과거 선왕조 때 의서를 찬집하라는 특명을 받고 여러 해 동안 깊이 연구했다. 심지어 이리저리 피난 다니는 와중에도 연구를 계속한 끝에 이제 편찬을 완수해 책을 바쳤다. 한편 생각해 보면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을 이 우매한 과인의 대에 와서 완성했으니, 나는 비감(悲感)을 이길 수 없다. 허준에게 좋은 말 한 필을 하사해 그 노고에 보답하도록 하고, 속히 내의원에 명하여 국청(局廳)을 열고 이 책을 간행해 서울과 지방에 널리 유포하도록 하라.” ■ 허준이 잠든 파주에 남북합작 동의보감연구소 건립하자 의성 허준이 잠들어 있는 묘소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있는 허준의 묘소는 1992년에 경기도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 재미 고문헌 연구가 이양재씨가 양천허씨족보를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이 부근을 샅샅이 탐색한 끝에 허준의 묘소를 찾아냈다. 허물어진 묘소 주변에서 허준의 이름자가 새겨진 비명을 기적처럼 발견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책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동의보감은 목차(2권)와 의학 내용(2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학 내용은 내경편(내과)(6권)과 외형편(외과)(4권) 그리고 잡병편(내과/외과질환 및 부인과, 소아과)(11권)과 탕액편(3권)과 침구편(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체 내부와 관련된 내용을 내경편에, 신체 외부와 관련된 내용을 외형편에 배치하고, 각종 병 이론과 병 내용은 잡병편에 다루었다. 탕액편은 약에 관한 이론과 약물에 관한 각종 지식을 실었고, 침구편은 침과 뜸의 이론과 실재를 다루었다. 동의보감은 병의 치료는 물론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지키는 양생을 함께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각각 전해지던 의학과 양생의 전통을 하나로 합했던 점도 주목된다. 허준은 중국문헌과 향약집성방 같은 조선의서를 참고한 내용을 자신의 학식과 경륜에 결합해 책에 녹여내고, 다양한 학설과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목차 2권은 백과사전의 색인처럼 상세하며, 본문의 관련 내용끼리는 상호 참조를 가능하게 하고, 참고자료의 인용처를 모두 밝혀 원저작을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이런 강점을 두루 갖춘 동의보감은 출간 직후부터 조선을 대표하는 의서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18세기 이후에는 국제적인 책이 되었다. 동의보감은 출간 출판된 지 115년이 지나 일본에서 먼저 완질이 출판되고, 1763년에는 중국에서도 출판되었다.이후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2009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5년에는 국보로 제정되어 있다. 국보 제319-1호는 국립중앙도서관, 제319-2호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제319-3호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하고 있다. 북한의 한의학도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남북의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도 다양한 협력과 상생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한의학계가 나서서 허준의 묘소가 있는 비무장지대 파주에 남북공동으로 동의보감연구소의 설립을 제안하면 좋지 않을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2. 행주대첩<구비>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음 이덕형은 행주대첩을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전투로 높이 평했다. 그는 “권율이 행주에서 크게 이긴 것이나,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힘껏 싸운 것은 당시 가장 큰 공으로 참으로 중흥의 근본이 되었다”고 했다.‘행주대첩구비’는 전쟁의 환란에서 조선을 구한 권율의 공로와 행주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의연한 뜻이 서린 경기도의 귀중한 유산이다.■ 평양성 전투 뒤 ‘코리아 패싱’을 당한 조선군 임진왜란기 행주산성 전투를 ‘대첩’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전투가 일본군을 한강 이남으로 몰아낸 결정적인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에 크게 패한 뒤 상황이 좋지 못했다. 서울로 퇴각한 일본군은 추운 겨울 날씨에다 전쟁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고 병력도 전체적으로 40% 이상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명군 역시 벽제관 전투(1593.1.25.~1.27)에서 일본군에 패한 뒤 평양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꺼렸다. 명군 지도부는 조선의 관군과 의병에게도 임진강 이북으로 후퇴하라고 권유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조선을 배제한 채 일본군과 강화 회담을 시작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코리아 패싱’이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달랐다.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사기가 충천했다. 그래서 승리 여세를 몰아 명군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 서울을 수복한다는 작전을 구상했다. 당시 서울 주위에 포진한 관군과 의병의 규모는 강화·수원·양주·여주·양근·안성 등지에 약 2만 명 정도였다. 이곳은 서울까지 하루 또는 하루 반나절이면 올 수 있는 거리여서 언제라도 군사 동원이 가능했다. 권율은 문관으로서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당시 전라도 광주 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5월 중순 전라도 관찰사 이광 등이 남도근왕병을 조직해 상경할 때 권율은 방어사 곽영의 중위장이 되어 북진했다가 용인에서 일본군에게 패해 돌아왔다. 그 뒤 의용군 1천500여 명을 모집, 이치(梨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해 나주 목사에 임명되고 곧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1593년 2월 초순 권율은 명군과 호응해 서울을 수복하고 일본군의 급습을 피하기 위해 서울 외곽에 진을 쳤다. 이 고지가 바로 행주산성의 중심부였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도착하자 이틀간 목책을 만들고 인근 주민으로 군사력을 보강했다. 당시 권율이 이끈 병력 규모는 기록마다 다른데 대략 2천300여 명 또는 4천여 명으로 보고 있다. ■ 행주대첩에서 거둔 놀라운 승리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은 권율 부대가 행주산성에 진을 친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공격 준비를 했다. 1593년 2월 12일 일본군은 3만여 명의 병력을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지형이 좁아 대규모 병력을 일시에 투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격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권율이 이끈 조선군은 병력의 열세를 딛고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일본군이 조총을 쏘며 산성 가까이 돌진하자 각종 총통, 화차, 수차석포, 화살 등을 발사했다. 일본군이 마른풀에 불을 붙여 바람을 이용해 성을 불태우려하자 물을 퍼부어 불을 꺼버렸다. 승병들은 일본군이 산성 서북쪽의 승군 진영을 돌파하려 하자 재를 뿌리면서 항전했다. 또 조선군은 화살이 바닥나자 크고 작은 돌들을 모아 투석전도 벌였다. 일본군은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권율 공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알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그저 한번 엿보다가 발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라 여겼다”(행주대첩구비)는 기록처럼 조선군을 우습게 알고 공격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본 장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행주산성 패전 보고서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울에서 30리 되는 서쪽 한강 끝에 있는 행주산에 성 하나를 만들어 놓고 조선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2만 명을 뽑아 명군의 군량을 모아 쌓아둔다고 하므로 명군이 나오기 전에 쫓아버리려 했습니다.” 일본군은 권율이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했다고 판단하고 명군의 출병을 미연에 막고자 행주산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군을 얕잡아 보고 공격하는 바람에 전세 역전을 자초하고 말았다. ■ 두 개의 행주대첩구비 전쟁이 끝나고 1599년에 권율은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향년 63세였다. 그가 세상을 뜬 지 한 돌이 되자 휘하 보좌관과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태 비를 세웠다. “권율 공이 예전에 행주대첩에서 공이 매우 크므로 그 언덕 위에 비를 세워 공적을 적어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행주대첩구비)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비가 ‘행주대첩구비’다. 오늘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인 ‘행주대첩구비’는 2기가 함께 지정되었다. 하나는 1602년(선조 35) 처음 세운 구비(舊碑:옛 비)로 현재 고색창연한 상태로 행주산성 경내인 덕양산 정상 부근에 있다. 비의 받침돌은 땅에 묻히고 몸체만 지상에 있다.비의 몸체도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금이 가고 깨졌는데 현재는 틈새와 깨진 곳을 보수한 상태다. 이 비문은 당대 문장가로 손꼽힌 최립이 짓고 글씨는 ‘한석봉’으로 더 유명한 한호가 썼지만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비의 뒷면에도 비문이 있는데 권율의 사위 오성 이항복이 지었다. 이 비는 풍화를 막기 위해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처음 비각을 세운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70년 행주산성 보수정화 공사를 하면서 옛 비각을 헐고 새로 건립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른 한 기는 1845년(헌종 11) 옛 비의 상태가 좋지 못하자 세운 중건비로 행주서원지(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1호) 경내에 있다. 옛 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뒷면에 일부 내용을 추가해 세운 것이다. 비문을 보존해 후세에 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비는 1970년 행주산성 성역화의 일환으로 충장사(권율 사당)를 새로 조성하면서 그 앞으로 옮겨졌다가 2011년 3월 원래 자리인 행주서원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일은 올바른 문화재 보존의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 행주대첩을 찾은 매천 황현 1899년(광무 3) 시인이자 우국지사 매천 황현이 행주산성을 찾았다. 외침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시절에 임진왜란 승전지를 찾은 것이다. 매천 나이 45세였다. 그는 행주산성을 바라보며 한시 한 수를 지었다. 지세는 한갓 험준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님을 나는 행주에 와서 알았네 산성이 이처럼 낮은데도 왜놈 귀신들 지금도 시름에 젖어 있으리 해 지는데 변방의 봉화는 꺼졌고 봄바람에 한강 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항상 밧줄 청할 뜻을 품고 살았는데 저무는 강가에서 눈물만 뿌리네 시(詩)로 당대를 울린 매천의 뼈아픈 시다. 매천은 행주산성에 아직도 ‘왜놈’ 귀신들이 그날의 패전으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데 왜 이 시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자탄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행주대첩구비는 행주대첩의 그날을 보여주는 오래된 역사다. 비가 그저 오래되었다고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뜻과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그저 비일 뿐이다. 행주대첩구비 2기의 존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소중한 이유는 다시는 외침으로 나라가 신음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정해은(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1.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하남 동사지(桐寺址, 사적 제352호)가 위치한 춘궁동은 오래전부터 ‘고골(古谷)’ 또는 ‘궁마을’로 알려진 곳이다.이곳에 보물 제13호 삼층석탑과 보물 제12호 오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탑은 천년 세월 동안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언제 누가 세웠는지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다만 부근에서 발굴된 기와조각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이곳에 있었던 절의 이름이 동사(桐寺)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석탑과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화를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먼저, 이 석탑이 자리 잡은 지리적 환경을 꼼꼼히 살피는 일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석탑의 형식이 통일신라의 석탑을 계승했으나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끝으로 이 석탑이 세워진 10세기가 격동의 시대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천년 석탑과의 대화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8세기에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다. 그러나 9세기부터 왕족의 분열과 귀족들의 정쟁과 사치로 신라는 빠르게 쇠락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견훤이 후백제를, 궁예가 고려를 세우면서 후삼국이라 불리는 격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탑이 세워진 10세기 초는 그야말로 난세였다. 50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에 신라가 삼국으로 분열되고, 이 삼국을 고려가 재통일하는 극적인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에 세워진 춘궁리 석탑에서 고려인들의 꿈과 기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한민족의 대통합에도 성공했다.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워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도 신라처럼 운명을 다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압제를 피해 동족의 나라 고려로 망명한 발해의 유민을 태조 왕건이 따뜻하게 받아들여 민족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춘궁리 동사에는 정토세계를 꿈꾸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모여 들었을 것이다. 초파일을 앞둔 요즘과 같은 봄날, 탑돌이를 하며 화합과 상생을 염원했을 고려인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면 석탑과의 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 두 개의 산성과 마주한 석탑 동사지의 건너편에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다. 동쪽으로는 춘궁동 옛 마을과 남한산성, 서쪽으로는 몽촌토성과 백제고분군이 있다. 그리고 이 일대에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널려 있어 백제의 첫도읍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남한산성과 이성산성, 그리고 한강이 동사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은 이곳이 후삼국 시대에도 격전지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동사는 절터 규모로 볼 때 고려시대에 경기도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여기서 잠시 탑에 대해 알아보자. 석가모니 부처의 뼈와 사리를 사리함에 넣어 토석을 쌓아 올린 묘를 스투파라고 하는데, 범어 스투파(stupa)를 탑파(塔婆)라고 한자로 옮기면서 ‘탑’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진다. 1층이나 2층으로 마련하는 기단부는 탑의 무게를 받치는 역할을 한다. 기단부 위의 탑신부는 탑의 핵심인 사리를 봉안하는 몸체이다. 지붕처럼 생긴 옥개석은 탑의 신앙성과 예술성을 가늠하는 부분이다. 상륜부는 탑의 가장 높은 부분으로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 찰주로 구성된다. 탑은 나라마다 특성을 드러내는데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 한국은 석탑이 발달했다. 7세기 초 백제에서 처음으로 목탑을 본뜬 석탑이 건조되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이 발달한 나라였다. 신라가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가 초빙되었던 것이나 일본의 초기 사찰을 만들 때 백제의 장인들이 공사를 담당했던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춘궁리 석탑 역시 백제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지는 한국 석탑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 천년의 세월을 견딘 삼층석탑과 오층석탑 1988년에 실시한 발굴조사 때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의 주변에서 주춧돌이 일부 드러나 있는 금당지를 포함한 네 구역의 건물터를 확인했다. 금당지 안에서 불상대좌의 기단부로 보이는 유구도 발견되었다. 석탑의 동북쪽 계곡 위에서 우물터가 발견되어 승방지 또는 식당지로 추정하는 곳이다. 1911년 동사지에서 고려시대의 철불이 출토되었다. 보물 제332호로 지정된 이 철불은 현존하는 철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국립 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넓고 반듯한 이마에 긴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고, 얼굴에 비해 인중이 짧고 입이 작아 부처의 자비보다 고려인의 강인한 기상이 느껴지는 불상이다. 왕건의 얼굴로 알려진 철불도 있을 만큼 고려 초에 철불이 유행했던 사실도 주목된다. 철불이 발견된 동사는 태조 왕건의 정치세력 기반과 깊이 관련이 있다. 학계는 고려 초에 이 일대를 장악했던 호족 왕규(王規)를 지목하고 있다. 태조의 16번째 비가 낳은 왕자 광주원군의 외조부 왕규는 두 딸을 태조의 후비로 들일 정도로 광주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나갔으나, 945년 왕위계승을 두고 겨루다가 패하면서 몰락했다. 이에 따라 이 철불의 제작 시기를 왕규가 활동했던 10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오층석탑은 높이 7.5m로 경기도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큰 탑이다. 이 탑의 기단은 여러 장의 사각형 석재로 조립했는데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이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다른 석탑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옥개석이라 불리는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면서 모퉁이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구성에서 규칙적이며 전체의 비례도 양호하다. 이 석탑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신라 석탑의 양식인 정사각형의 탑으로 탑신부의 각층 비례도 조화를 이루는 등 양식에서 신라 석탑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일부 탑재와 상륜부가 사라졌지만 상태가 좋은 편이다. 하층 기단 각 면석에는 안상무늬가 3조씩 새겨져 있으며, 층급받침이 3단인 탑신부의 지붕돌은 얇고 평평하며 섬세하고 수려하다. 높직한 1층 탑신에 비해 2·3층의 높이가 크게 줄어든 것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보수할 때 하층기단 중심부에서 금동불을 비롯한 귀중한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두 석탑은 신라 석탑을 계승하고 있으나 고려 석탑의 작풍도 엿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 석탑에 담긴 시대상 삼국통일 후 석탑의 조형미는 최고 수준에 도달한다.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은 한국 석탑의 멋과 아름다움이 잘 구현되어 있다. 이후 신라의 석탑은 작은 변화가 생기다가 9세기 후반에는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이 무렵 신라 왕실의 골육상쟁과 지방 호족들의 각축이 격화되었다. 사회가 혼란해지자 탑에서도 섬세한 아름다움과 씩씩한 기상이 사라져갔다. 신라 중대에 성행한 불교는 화엄경을 기본 경전으로 한 화엄종이다. 화엄사상의 ‘일즉다, 다즉일’은 국왕과 다수의 민이 하나라는 통합의 이념을 제공하여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의 성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크게 성행한 선종 불교는 경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안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고자 했다.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방에 웅거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 호족의 의식구조와 부합하는 측면이 많았던 선종은 지방 호족들에게 환영받아 널리 유행했다. 아울러 지방 호족들은 풍수지리설까지 받아들여 신라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 춘궁리 석탑서 화해·협력의 대동 세상을 상상하다 우리는 1천 년 전에 민족의 재통합에 성공한 고려의 문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을 유불선이 어우러진 풍류도라 하였다. 고려 역시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고 유교와 도교의 제천의식도 함께 시행하는 개방형 국가였다. 고려는 통일신라와 고구려, 백제는 물론 발해 유민들까지 품에 안았다. 고려가 새로운 민족문화를 건설한 바탕에는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룩하는 풍류문화가 있었다. 고려의 다원적 문화는 남북이 화해와 협력으로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일구려는 우리 시대에도 필요하다. 그 지혜의 한 자락을 춘궁리 석탑에서 찾으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0. 조선시대 헌법의 기초를 놓은 ‘조선경국전’

‘경국(經國)!’, “나라를 경영하다”는 뜻이다. 조선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은 통일적인 성문 법전으로, 세조대에 본격적으로 편찬에 착수하여 성종대에 완성되었다. 이후 영조의 속대전과 정조의 대전통편이 뒤를 잇지만, ‘경국대전 체제’는 조선시대 전 시기를 관통했다. 한마디로 경국대전은 조선의 헌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경국대전의 시발을 이루고 기초가 된 것이 바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었다.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1342~1398)은 고려 말 신흥사대부로서 고려의 개혁을 위해 분투하고 좌절하면서, 고려의 운명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은 9년 동안 유배와 유랑생활을 겪은 후에, 1388년 이성계의 군막을 찾아가 만났다. 그가 군사력을 갖춘 이성계를 찾아가 만난 것은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스스로 한 고조를 만든 장량이라 자임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단순히 야심가나 지략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개혁사상가요, 경세가였으며, 새로운 국가의 통치질서를 설계한 사람이었다. 고려 말 개혁가들에게 개혁을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된 것이 바로 주례(周禮)였다. 개혁가들은 법제도의 문란을 주례의 육전체제가 문란해진 것과 결부하여 인식했다. 주공이 지었다는 주례는 본래 명칭이 ‘주관(周官)’이었다. 일원적인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망라하여 규정한 통치규범이었다. 전체 구성은 ‘육관(六官)’으로 되어 있으며, 각 이름은 ‘천지’와 ‘춘하추동’으로 불러서, 인간의 질서를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조화를 이루고자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또 육관에 상응하여 치전(治典), 교전(敎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형전(刑典) 사전(事典)의 ‘육전(六典)체제’로 관제를 편성했다. 주례는 위작이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 성격에 관해서도 학자들의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나 주례의 실체는 역사 속에 엄연했다. 주례는 경세론적 개혁론을 제기할 때마다 줄곧 제도 구상의 준거 틀로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그 영향이 확인된다. 고려 말 김지의 주관육익이라든가,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경세유표에서도 주례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1394년(태조 3) 정도전이 지어 왕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은 주례의 육전체제를 전면에 표방했다. ‘전(典)’이란 술어도 처음 쓰기 시작했고, 서문은 육전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했다. 조선경국전은 주례의 6전에 상응하여 치전(治典), 부전(賦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헌전(憲典), 공전(工典)을 두었다. 치전, 예전, 정전은 주례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으나, 교전은 부전으로, 형전은 헌전으로, 사전은 공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원(元) 나라 경세대전(經世大典)의 육전과 동일하다. 경세대전도 주례의 영향으로 성립된 법전이었다. 정도전은 새로운 국가를 위한 통일적 성문 법전의 원형을 주례의 육전체제에서 구했다. 조선경국전으로 시작되는 ‘경국대전 체제’는 유교적 가치를 성문법전으로 구현한 ‘유가적 법치’로서 법가의 법치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조선경국전에 담긴 사상은 무엇일까? 군주에 관해 언급이 없는 주례와 달리, 조선경국전은 육전의 앞부분에 군주에 관한 사항을 배치하고 있다. 정보위(正寶位), 국호(國號), 정국본(定國本), 세계(世系), 교서(敎書) 등 5편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군주를 일정하게 규율하는 의미가 있었다. ‘정보위’ 편은 군주권의 정당성을 논설하는 것으로, 유가적 통치를 기획한 정도전에게 통치론의 출발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적 핵심은 ‘인정론(仁政論)’이었다. “주역(周易)에 말하길,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요, 천지의 큰 덕은 생(生)이니, 무엇으로 위를 지킬 것인가? 바로 인(仁)이라’고 했다. 천자(天子)는 천하의 받듦을 누리고, 제후(諸侯)는 경내(境內)의 받듦을 누리니, 모두 부귀가 지극함이다. 현능한 사람들은 지혜를 바치고, 호걸들은 힘을 바치며, 백성들은 분주하여 각기 맡은 역(役)에 종사하되, 오직 인군의 명령만 복종할 뿐이다. 이것은 위(位)를 얻었기 때문이니, 큰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위(位)는 유가적 질서를 가리키며, 인(仁)은 그런 질서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장치였다. 군주의 지위가 높고 귀하지만 천하는 지극히 넓고 백성은 지극히 많다. 수적 다수는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정도전의 민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정치란 이들 다수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정(仁政), ‘어진 정치’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이는 통치권력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에 비유하면 국민주권 내지 민주주의에 상당하는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 ‘인정론’은 ‘유가적 법치’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육전, 그러니까 치전(治典)의 앞에 둔 ‘총서(總序)’에서 자신의 핵심적 정치론인 ‘재상중심정치론’을 피력했다.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하여 지향한 왕도(王道)정치는 유능한 재상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군주는 세습제이므로 능력이 없는 군주가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니 유능하고 현명한 인재를 재상으로 뽑아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재상론은 군주제의 한계를 합리적으로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또한 ‘예치론’을 피력했다. ‘예전’에서 ‘예’는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질서’라는 인식을 보였다. 또한 ‘헌전’에서 예치와 덕치가 우선이고, 정형(政刑)은 보충적인 수단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천지는 만물을 봄에 생육시키고 가을에 정리하며, 성인은 만민을 인(仁)으로 사랑하고 형(刑)으로 위엄을 보인다. 대개 정리하는 것은 그 근본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고, 위엄을 보이는 것은 그 생명을 아우르기 위한 것이다. 가을은 천지에서 의기(義氣)인데, 형(刑)은 추관(秋官)이 된다. 그 작용이 동일한 것이다.” 정도전은 일단 형벌의 사용을 인정했다. 그러나 형벌은 정치를 보조할 뿐이다. 2차적이고 보충적인 것이다. 형벌을 씀으로써 형벌을 쓰지 않게 하고, 형벌로 다스리되 형벌이 없어지기를 기대했다. 만약 정치가 이미 제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형벌은 불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요컨대 형정의 궁극적 목표는 형벌규정이 불필요하게 되는 상태이다. 이를 위해 백성이 법을 잘 모르고 금법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잘 알릴 것도 강조했다. 정도전의 인정론, 재상중심정치론, 예치론 등은 군주의 전제적 권력행사에 대한 견제장치의 의미가 있다. 군주권력의 근거이면서도 제한으로서의 위상을 갖는 것이다. 현대의 법치주의에서 권력을 부여하는 수권(授權)조항과 권력을 제한하는 제한(制限)조항을 동시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조선의 경우는 처음부터 중국에서와 같은 전제적 황제권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군주는 유교적 가치에 의해 확실하게 규정되고 있었다.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이 일어난 명분이라든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도 근본적 체제의 변화가 없이 왕조가 유지되었던 것도 이러한 울타리 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유가적 가치와 질서로 전제권력까지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 조선시대 ‘유가적 법치’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나중에 태종이 된 이방원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여 패배했다. 그로 인해 조선시대 내내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훗날 정조가 뒤늦게나마 삼봉집을 간행한 것은 경세가로서의 면모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경국전에 담은 이상은 조선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 체제’를 이루는 기초가 되어 전해졌다. 조선경국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성문 법전을 갖춤으로써 합리적인 통치질서의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물리적 힘에 의한 정치가 아닌 다수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서 하는 정치를 지향했다. 군주 혼자 하는 정치가 아닌 유능하고 현명한 인재에 의한 정치를 추구했고, 자의적 권력을 견제하고 자연질서와 인정에 부합하는 정치 등을 제도화했다. 최근 우리 사회는 헌법 개정 논의를 하고 있다. 조선경국전은 우리 헌법 생활에 중요한 역사 유산이요 훌륭한 자산이다.김태희(다산연구소장)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9. 임진왜란 당시 육전서 첫 승리를 거둔 ‘해유령전첩지’

2015년 12월에 세운 ‘해유령전승기공사적비’에는 임진왜란 초기의 급박한 사정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도성 방위군은 왜적이 미쳐 한강에 당도하기도 전인 5월 2일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한강 방어진을 속수무책으로 포기한 부원수 신각은 임진강 방면으로 도주하는 도원수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 머물며 병사들을 수습하는 중 때마침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함경병사 이혼과 양주 장수원 등에서 전투를 치르며 북상해 온 인천부사 이시언의 병력을 합쳐 비로소 전투가 가능한 대오를 편성하고 양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도성을 점령한 왜적은 평양과 함흥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먼저 선발대를 편성하여 양주로 보냈는데 이들은 양주 일대를 약탈하며 음력 5월 16일 이곳 해유령에 도착하게 된다.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하던 조선군은 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고개를 넘는 왜적을 급습하여 적병 70여 명을 한 자리에서 몰살하였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 거듭되던 패전을 비로소 극복하고 마침내 첫 승리를 거두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왜적이 접근한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 우리도 왜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조선군이 해유령에서 승리한 뒤부터 양주 일대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왜군은 조선군을 대규모 전투로 끌어내지 못한 채 유격전에 말려들어 지쳐갔다. 경기도 일대에서 신각 장군에 대한 칭송이 자자해지자 백성들은 조선이 아직 완전히 패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믿음도 잠시, 평양에서 어명을 받은 선전관이 내려와 반역자 신각을 즉시 처단하라는 어찰과 보검을 전해 주었다. 이 참담한 사건의 전후사정은 이러하다.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수비를 포기하고 달아난 후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부원수 신각이 명을 어기고 도주했다고 국왕 선조에게 보고했다. 이때 우의정 유홍도 김명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며 신각의 처형을 주장했다. 선조는 다른 정보를 받지 못한데다 정승까지 처벌을 주장하자 신각의 처형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저물기 전에 신각이 이끄는 부대가 양주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하고 왜군 70여 급을 거두었다는 승전보를 전해온 것이다. 선조는 섣부른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서둘러 전령을 보내 신각을 처형을 막도록 명을 내렸으나 현장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신각이 죽은 뒤였다. 이 전투 직전에 충주에서 신립이 대패하고, 용인에서도 이광이 대패하자 선조는 한양을 포기하고 몽진을 서둘렀다. 전라 충청 경상 3도의 5만 군사를 총지휘했던 전라감사 이광은 유리한 곳을 확보하여 적의 허실을 엿보자는 권율의 제안을 물리치고 전투를 독려했으나 선봉장이 겁을 먹고 말을 돌리는 바람에 조선군은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듯” 전투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당시 상대한 왜군은 2천에 불과했다. 패전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으나 이광을 처벌하지 않았다. 이때 이광의 휘하에 있었던 권율이 후퇴하면서 전라도 병력을 잘 보전하여 이치전투를 비롯해서 독산성을 거쳐 행주대첩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 해유령, 파죽지세 왜군 육지서 첫 승전보 해유령은 양주 연곡리에서 파주 광탄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좌우로 낮은 산이 둘러싸여 있어 산 위에 매복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포위할 수 있다. 이 부근에는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명을 찾을 수 있다.해유령 아래 동네에는 해유령 전투에서 죽은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이 있고, 부근에는 신각 장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진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전첩비가 서 있는 마을의 버스정류장 이름은 게너미가 아니라 ‘기내미삼거리’이다. 1977년 4월, 양주시민들이 뜻을 모아 해유령 전첩지에 높이 10.6m, 둘레 4.8m, 기단 면적 132m의 기념비를 세웠다. 같은 해 10월에 전첩지는 경기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기념비는 국난을 극복한 신각 장군과 함께 싸운 무사들의 기개를 나타내듯 하늘로 곧게 높이 솟아있다.기념비 아래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신각, 이양원, 이혼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충현사(忠顯祠)가 있다. 해유령 전첩 추모제향은 충현사 제전위원회가 매년 5월 19일에 제향을 올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신각 장군과 무사들의 고귀한 넋을 위로하고 있다. 2015년 12월에 해유령 전투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한글로 촘촘히 새긴 비석을 다시 세웠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해유령 전첩지’를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육지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 이 전투의 경과와 신각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높았다. …신각이 비록 무인이기는 하나 나라에 몸 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는데, 죄 없이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장군이 곧바로 처형을 당하는 기막힌 광경을 지켜보았을 양주 백성들의 두려움과 분노가 어떠했을까. 이러한 때에 민심을 달래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승전을 거듭한 빼어난 장수가 있었다. 1594년 12월, 성균관 생원 유숙이 선조에게 상소하여, 상벌을 분명히 할 것을 요청하며 신각의 억울함을 전달했다. “신각은 죽을힘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에 앞장서 일당백으로 곧장 적의 소굴을 짓밟아서 80명의 목을 베어 바쳤으나 주첩(奏捷)의 공은 받지 못하고 도리어 복검(伏劍)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모두 원통해 하기를 ‘신각만은 무고하게 죽었다’ 합니다. …신은 전하께서 신각의 공훈을 생각하여 승급시키고 상을 내려 나라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삼군(三軍)의 의기를 고무시키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592년 8월 초에는 의병장 조헌이 청주성을 회복하고, 상소를 올려 신각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을 요청했다. ■ 해유령 전투의 영웅들 충주전투에 참전했던 고언백이 해유령 전투에서 공을 세워 양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고언백은 신각의 승리를 제대로 계승한 장수였다. 당시 양주의 일부 지역은 왜적이 차지했으나 곳곳에 고언백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매복해 있기 때문에 왜군도 함부로 다니지 못했다.당시 비변사의 보고를 보면, “양주목사 고언백은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싸움에 이겨 위엄과 명성이 멀리까지 소문이 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호응한다”고 했다. 또한 “진을 쳐 대전한 적은 없고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적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또 적의 형세를 잘 염탐하여 혹 야경(夜驚)도 하고 혹은 숲속에서 저격하였는데 자신이 사졸들보다 앞서서 싸웠다”며 고언백의 지략을 찬양했다. 실록을 통해 1593년 1월 현재의 경기도에는 양주에 방어사 고언백의 군사 2천 명, 안성군에 조방장 홍계남의 군사 300명 등이 확인된다. 주목할 것은 고언백의 부대에 승군(僧軍) 400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사실들 고언백은 충주전투에서 신립의 척후장이 되어 적을 여럿 죽였고, 해유령 전투에서도 선봉에서 싸웠다. 평양에서는 한밤중에 대동강 능라도에 주둔한 왜적을 기습하여 1천여 명을 격파하였다. 양주 목사로 임명되자 왜적에게 투항한 백성 6천여 명과 승려를 불러 모아 왜적을 일곱 번이나 물리쳤다. 선조가 “평안도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고언백 장군의 공이다”고 칭송할 정도였다. 경상도 방어사로 부임한 고언백은 함안에서 싸웠고, 경상병사가 되어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성을 공격하는 등 임진왜란 때 257번이나 싸웠던 맹장이자 지장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선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제흥군에 봉해졌던 고언백의 최후도 비참하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임해군을 제거할 때, 임해군의 심복이라 하여 살해되었던 것이다. 해유령 전투는 육전에서 관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는 점, 평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련한 점에서 주목해야 할 전투이다. 해유령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도 억울한 죽음을 맞은 신각 장군은 물론 장군의 뒤를 이어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군사를 독려하여 양주와 경기도를 굳건히 지킨 고언백 장군도 기억해야할 것이다. 무엇보다 국난을 당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선 양주를 비롯한 경기도의 이름 없는 무사와 승군들의 존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산(홍재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8. 공생과 대동의 정치를 생각하는 여주 대로사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이 중에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하리라이 시조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의 작품이다. 푸른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산수 간에서 물 흐르듯 살고 싶다고 노래했던 송시열의 80평생은 바람과는 너무나 달랐다.그는 우리 역사에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대의 한복판을 걸어간 학자이자 정치가로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송시열, 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정조는 송시열을 공자나 주자처럼 ‘송자(宋子)’로 높여 불렀다. 고종의 밀사이며 뛰어난 역사학자였던 호머 헐버트는 자신이 지은 한국사에서 송시열을 ‘조선의 철혈재상’으로 표현했다. 역사가 이덕일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정조가 대로(大老)로 높였던 송시열을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던 ‘편벽한 소인’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극단을 달린다.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나라의 원로로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던 송시열이지만 세종이나 정조, 퇴계나 율곡 같은 인물들과는 달리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천 번이나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왜 우리 시대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 정읍에서 사약 마시고 83세에 운명 1607년 충청도 옥천에서 태어난 송시열은 유년 시절에 부친 송갑조에게 학문을 배웠다. 부친에게 율곡의 격몽요결을 배운 열두 살의 소년 송시열은 “이 글처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다짐했다고 한다.24세에 율곡의 수제자 김장생에게 배우고, 스승이 별세하자 그 아들 김집에게 배웠다. 1636년에 천거를 받아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어 8개월을 가르쳤다. 그해 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인조가 항복을 결정하자 바로 낙향해버렸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배웠던 그에게 국왕 인조의 항복은 패륜행위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기축봉사를 올려 대청복수를 주장했다. 내리는 벼슬을 매번 거절하다 1658년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자 출사하여 효종과 독대하며 북벌을 논의했다. 그러나 효종과 뜻을 함께 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이듬해 효종이 승하하자 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을 것인가를 두고 남인과 예송논쟁을 벌였다. 천하의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예를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로 여겼던 송시열 같은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런 일이었다. 1674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갑인예송을 벌였다. 현종이 남인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은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 이 무렵부터 주자의 저서에 주석을 붙인 주자대전차의를 펴내기 시작했다. 1683년에 김석주와 함께 공작정치로 남인을 탄압했던 김익훈을 옹호하여 서인 내 소장학자들을 실망시켰다.1685에 동문수학한 친구 윤선거의 행적을 비난하여 그 아들인 제자 윤증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윤증을 공개리에 배척하면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1689년에 장희빈의 아들인 원자의 책봉을 서둘지 말라고 건의하여 숙종의 미움을 받은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6월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운명했다. 향년 83세. 1694년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1756년에는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었다. ■ 1785년 정조가 사액 내려 ‘사액서원’ 여주에 송시열을 기리는 사우가 들어선 것은 사후 40년이 지난 영조 때였다. 송시열은 살아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대로사 자리에서 효종의 능인 영릉을 바라보고 비통해 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다고 한다.1731년에 문정공 이재를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이곳에 송시열을 기리는 영당(影堂)을 세웠다. 그러나 영당을 세운 지 10년이 지난 1741년에 영조의 명으로 영당은 헐리고 말았다. 이후 노론 사림들은 오매불망 영당을 복원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779년 8월 5일, 효종이 서거한 지 2주갑(120년)을 맞은 정조는 영릉을 참배하러 여주에 행차했다. 이때 정조는 정운기를 비롯한 경기도 유생들의 요청을 받고 이렇게 화답했다. “이 고을은 효묘의 능침이 있는 곳이고 또 선정[송시열]이 소요한 곳이니, 제향할 곳을 세워서 제사를 같이하는 뜻을 대략 붙이는 것이 정으로나 예로나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특별히 청을 허락한다.” 영당이 헐린 지 40여년 만에 우암을 제향하는 대로사(大老祠)를 짓도록 허락 받았던 것이다. 대로는 “덕망이 높은 노인”이란 뜻이다. 정조실록에 “대로란 두 글자는 다만 예부터 천하대로(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선정(先正 : 송시열)의 문집 가운데에 뛰어난 구절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을 대로일고라 하였으니, 이에서 따온 것이다”라는 정조의 말이 실려 있다. 6년이 지난 1785년에 정조가 사액을 내려 대로사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대로사는 경기지역 노론의 주요한 거점 역할을 하며 약 백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 ‘대로사’는 살아남아 여강 변에 위치한 대로사는 서쪽을 향해 효종의 무덤인 영릉을 바라보고 있다. 효종과 북벌을 추진하던 이완 대장의 묘도 영릉을 향하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대로사비각, 중문을 지나면 대로서원 강당, 삼문을 지나면 우암의 영정을 모신 대로사 본채가 나온다. 먼저 대로사비각부터 살펴보자.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84호인 이 비각은 1787년 11월 송시열이 태어난 뒤 세 번째 맞는 회갑년(180년)을 기념하여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전서로 글씨를 쓴 비석을 세웠다. 장대한 비석 우측 상단에 ‘어필’이라는 글씨가 있다. 비면에는 사당을 세우는 대의와 우암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 그리고 정조가 영릉을 배알한 후 대로사와 비를 세우게 한 배경이 빼곡히 적혀 있다. 국왕의 통합력으로 노론을 포용하고자 하는 정조의 포부와 자신감이 담겨져 있다. 대로서원 강당은 팔작지붕에 정면 6칸 측면 4칸의 품위 있는 건물이다. 당에 올라서니 여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시원하다. 강당 처마 밑에는 정조대 명필 중의 한사람인 황운조가 휘호한 ‘대로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또 안에는 전서의 대가인 이한진의 전서로 된 ‘첨백당’과 황운조가 행서로 쓴 ‘강한루’ 편액, 이기진이 지은 ‘강당상량문’과 1785년에 이조판서 서유린이 짓고 쓴 ‘대로사상량문’도 걸려 있다.강당 우측의 장린문을 들어서면 대로사 본채가 나타난다. 영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게 세워진 사당에는 송시열의 복제본 초상화가 걸려있다. 사당의 정면에는 1785년 9월에 사액 받을 때 정조의 명을 받들어 규장각제학 김종수가 쓴 ‘대로사’ 현판이 걸려 있다. 이러한 대로사도 사액서원이라는 권위를 빌어 탈법을 일삼다가 정조의 분노를 산 일이 있다. 1791년 3월, 승지 박황이 여주 목사로 있다가 돌아와 여주에서 불법으로 군사를 징발하는 비리를 숨김없이 보고하자 정조가 이렇게 선언했다. “(대로사가) 별도로 정원수 이외의 명목을 만들어 군역을 피하는 소굴로 삼고 있으니, 어찌 이런 법도가 있단 말인가. …대로사는 곧 내가 특별한 감회가 있어 세운 것인데 이제 그 원우(院宇)에도 원납이란 명목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있다 한다. 그러니 반드시 특별한 분부를 내려 신설한 곳부터 금지하도록 한 뒤에야 다른 서원에서도 두려워할 줄 알게 될 것이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47개만 남기고 대부분 철폐했을 때도 대로사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때 명칭을 강한사로 개명했는데, 흥선대원군이 스스로를 ‘대로’라 했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실학자였던 대제학 박규수가 왕명을 받들어 쓴 ‘강한사’라는 현판이 남아있다. ‘강한’은 여주의 풍광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조선후기 ‘이분법적 논리’ 배격… 뜻깊은 공간 조선 후기에 노론은 군자당이며 소론이나 남인은 소인당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당론화하였다. 이러한 독선은 당쟁을 극한까지 격화시켰다. 이러한 독선을 뒷받침하는 송시열의 발언이다. “모든 일에는 두 편의 나뉨이 있으니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그르게 마련이다. 옳은 것은 천리이고 그른 것은 인욕이므로, 옳은 것을 지켜서 잃지 말 것이며 그른 것은 남김없이 제거해버려야 한다” 대결만 있는 정치판에서 민생이 중심이 될 리가 없다. 정조가 송시열을 ‘송자’로 높이고 대로사의 건립을 허락했던 것은 남인과 소론과도 소통하고 협력하는 공생의 정치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로사는 송시열을 기리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대동정치를 추구했던 정조를 기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로사가 상생과 대동의 정치를 꿈꾸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7. 시대를 아파한 이이의 정신이 숨 쉬는 파주 ‘율곡선생유적지’

파주시 법원읍에 자리 잡은 율곡선생유적지에 들어서면 율곡 이이(1536~1584)와 신사임당(1504~1551)의 동상이 서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거리는 가깝지만, 방문객과의 심리적 거리는 멀게 느껴진다. 두 분은 분명 우리 역사에서 다시 찾기 어려운 위대한 어머니와 아들이다. 그러나 위인과 범인의 거리감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위대할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상으로 남게 된다. 높지만 가파르지 않고 빛나지만 눈부시지 않을 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아홉 번 장원한 천재의 신화와 시서화를 두루 갖춘 빼어난 예술가이자 자녀 교육의 모범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으면 이율곡과 신사임당의 본 모습에 다가서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두 인물에게 씌워진 위인으로서의 고정된 이미지를 걷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 ■ 파주, 한국유학의 성지 이이는 20세에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 ‘자경문’을 지었다. 입지(立志)부터 용공지효(用功之效)에 이르는 11가지 항목으로 세분하여 삶의 자세를 가다듬었던 그는 ‘입지’에서 이렇게 다짐한다. “무엇보다 먼저 뜻을 높은 데에 두어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 조금이라도 성인의 가르침에 미치지 못한다면 나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스무 살 젊은 나이에 높은 뜻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 분투했던 율곡 이이의 정신이 깃든 곳이 파주 율곡선생유적지이다. 이곳은 1973년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입구에 서 있는 율곡선생신도비를 비롯하여 자운서원, 율곡 집안의 묘지 등 율곡 이이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들이 널려있다.여기에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생애를 더듬을 수 있는 율곡기념관도 갖추고 있어 학생들도 많이 찾고 있다. 이곳은 부모와 자식 및 부부의 바람직한 관계, 날로 어려워지는 자녀교육 문제, 올바른 정치가의 자세, 우정과 예술 등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삶의 주제를 생각하고 토론해 볼 수 있는 지적 공간이다. ■ 자운서원과 율곡의 묘소 정문의 왼편 언덕에 있는 ‘율곡 이이 선생 신도비’는 이이가 세상을 떠난 지 47년이 지난 1631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사위 신익성이 쓰고, 전액은 김상용이 썼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제자 사계 김장생을 비롯한 유림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파주 호명산 아래 율곡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율곡의 묘소가 있는 자운산 자락으로 광해군대(1615)에 이전하여, 1650년에 효종으로부터 ‘자운(紫雲)’이라는 친필현판을 받았다. 이후 이곳에 박세채와 김장생을 추가로 배향했다.그러나 흥선대원군이 47개만 남기고 서원을 모두 혁파했을 때 한 분의 선현은 한 서원에만 배향한다는 원칙에 따라 사액서원이지만 철폐되고 말았다. 서원의 남은 건물마저 한국전쟁으로 모두 사라졌다. 서원을 건립할 때 심었을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와 ‘자운서원묘정비’만이 터전을 지키다가 1970년에 유림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과거자료 고증을 통해서 복원하였다. 1683년 우암 송시열이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서원의 건립 내력을 기록한 글을 명필 김수증이 예서체로 쓴 자운서원묘정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다. 2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은 아랫단은 4장의 돌로 짜 맞추고, 윗단은 옆면과 윗면에 각각 구름과 연꽃무늬를 조각했다. 강학공간인 강인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갖추고, 이율곡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가 자리 잡고 있다. 사당 좌우에는 김장생과 박세채 두 분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자운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율곡 집안의 묘역으로 가려면 여현문(如現門)을 통과해야 한다. 계단을 오르면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소가 나타나고, 이어 율곡과 부인 곡산 노씨의 묘소를 비롯하여 율곡의 형과 누이, 후손에 이르는 묘소가 모여 있다. 이이의 묘비에는 ‘문성공 율곡 이선생지묘 정경부인 곡산 노씨지묘 재후’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어 생전의 단아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 이율곡의 사상 어머니 사임당의 사랑을 받으며 곱게만 자랐을 것 같은 이이도 혹독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이원수의 여자문제로 이이를 비롯한 자녀들과의 갈등은 심각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16살에 맞은 어머니 사임당의 죽음은 소년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며 이이는 삶과 죽음, 인생에 대해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삼년상을 마친 이이가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연히 금강산으로 들어갔던 것도 아버지와 불화 때문이다. 금강산에서 1년 동안 불교를 공부하다가 이 길이 아니다 판단하고 하산했다. 하산한 이이는 앞에서 언급한 ‘자경문’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여 이듬해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이는 39세가 되던 해에 우부승지로 재직하면서 선조에게 올린 만언소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을 개혁할 방안을 1만5천자로 풀어쓴 이 상소문을 받은 선조는 “옛사람도 여기에 더할 수 없겠다.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겠느냐?”고 화답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이가 힘써 주장한 제안을 하나도 실행하지 않았다. 정치가로서 이이는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어떠냐에 따라 정치의 성패가 결정된다.그런 면에서 이이의 정치적 좌절은 선조의 우유부단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품과 관련이 깊다. 이이는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며 성학집요를 지어 바쳤다. 선조는 전쟁 중에도 경연을 열 정도로 학문에 열성을 보였으나 지혜로운 왕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이의 불행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이이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학교모범이라는 세 권의 교육관련 책을 지었다. 성학집요는 임금을 위한 것이고 격몽요결은 일반 초학자를 위해 지은 것이며 학교모범은 공립학교라 할 관학 교육을 위한 책이다. 이율곡이 세운 사상의 뼈대는 이기일원론으로 이와 기는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理)는 우주의 체(體)가 되는 당연한 법칙이고, 기(氣)는 체의 활동을 구체화하는 용(用)이라는 이기일원론이다. 이이의 사상과 철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짙다. 이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하나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이이의 삶에 늘 따라 붙는 말이다. 머잖은 날에 큰 변란이 있을 것을 암시하며 군대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의 병력을 배치할 것을 주장했다는 율곡이 임종 직전에 남긴 말도 국방문제였다. ■ 화석정에서 민족의 봄을 노래하다 임진강 언덕에 율곡 이이가 사랑했던 정자 화석정이 서 있다. 임진강은 분단을 상징하는 곳이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경기도와 황해도를 잇는 동서교통의 요지로 사람과 화물을 실은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던 곳이다. 율곡은 화석정에서 우계 성혼, 송강 정철 같은 지우들과 안민을 위한 정책을 논의하고 몰려든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학문과 정치의 길은 하나라고 믿었던 율곡의 정치철학은 안민(安民)으로 귀결된다. 사림이 분열해서는 정치의 목적인 안민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동서로 나뉜 사림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죽는 날까지 힘을 쏟았다. 율곡이 실천한 안민은 백성들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율곡 이이의 안민사상은 오리 이원익, 잠곡 김육으로 이어져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다. 2018년 봄은 남북이 화해와 협력의 풋풋한 기운이 싹트고 있다. 율곡 이이가 노래한 ‘화석정’은 툭 트인 기상과 풍류가 느껴진다. 산토고윤월(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함만리풍(江含萬里風)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가까운 날에 좋은 사람들과 율곡선생유적지를 둘러보며 모자가 왜 화폐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토론해 보고, 화석정에 올라 임진강을 굽어보며 이런 소망을 기원하면 어떨까. 갈등과 대립을 멈추고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는 그날을!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6.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 안에서 현존 건물 중 가장 멋진 건물을 꼽는다면 단연 수어장대다. 수어장대는 서쪽에 자리한 장대라는 의미에서 ‘서장대’로 더 많이 불렸다.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다. 1972년에 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 번호가 의미 없다고도 하나 제1호는 각별한 가치가 있다. 가장 처음 지정되었다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 ■서장대에 오른 숙종 1688년(숙종 14) 2월 29일 저녁 숙종은 남한산성에 당도했다. 4박 5일 일정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寧陵)에 거둥했다가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숙종은 이미 2월 26일에 영릉으로 가면서도 남한산성에 들렀다. 오가면서 두 차례나 방문했을 만큼 숙종이 공을 들인 행사였다. 남한산성 동문에 도착한 숙종은 가마를 타고 서문 쪽의 서장대에 올랐다. 서장대에는 광주 유수 이세백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숙종은 번잡한 의례도 생략한 채 측근들만 데리고 단출하게 올랐다. 서장대에 오른 숙종은 “내가 오늘 이곳에 와서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절로 서글픈 감회가 일어난다”고 했다. 숙종은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병자호란 당시 전사한 신성립과 지여해의 자손, 전공을 세운 서흔남의 자손에게 관직을 내리고 다른 관련자들에게도 음식물을 주고 품계도 올려주었다. 조선의 국왕 중 처음 남한산성 서장대에 오른 국왕이 숙종이다. 병자호란의 아픔이 담긴 남한산성을 대폭 보수한 국왕도 숙종이었다. 오늘날 남한산성 외성으로 불리는 봉암성과 한봉성 그리고 신남성의 시작이 모두 숙종의 손에서 이뤄졌다. 조선은 병자호란 패전으로 청과 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 중 하나가 성벽의 수리나 신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돌 하나조차 맘 편히 쌓지 못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1673년(현종 14) 말에 청에서 ‘삼번의 난’이 발생했다. 청이 내부문제로 골몰하면서 조선에 대한 감시가 약해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즉위한 숙종은 강화도에 돈대 48개를 쌓고 북한산성을 축조했다. 남한산성 보강도 이 연장선상에 있었다. 숙종이 서장대에 오른 뒤 그 행적은 후대 국왕들의 모범이 되었다. 숙종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던 영조를 비롯해 정조, 철종, 고종이 남한산성을 찾았다. 남한산성을 찾은 국왕들은 하나같이 서장대에 올랐다. ■서장대의 역사 서장대는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서남북에 조성한 4개 장대 중 하나다. 장대란 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설치한 장수의 군사 지휘소를 말한다. 서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498m) 정상에 있다. 멀리 서울의 강서, 강동, 강남 일대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조망이 좋아 당대에도 장대 중 가장 전망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또 수원 화성 서장대나 북한산성 동장대 등 전국에 손꼽히는 장대도 있으나 서장대처럼 2층으로 된 장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한산성에는 나중에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면서 5개 장대가 있게 되는데 이 중 현전하는 건물은 서장대뿐이다. 그래서 더 귀하다. 서장대를 오늘날 모습처럼 2층 구조로 지은 사람은 1751년(영조 27년) 수어사 이기진이었다. 처음 서장대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층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17세기 말 무렵에 제작된 남한산성도(영남대 박물관)에 동서남북 장대 모두 1층 누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진이 서장대를 지을 당시에는 터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기진은 영조가 이곳을 다녀간 의미를 되새겨 2층 누각을 완성한 뒤 건물 바깥쪽에는 ‘서장대’라는 현판을,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을 걸었다. ‘서장대’라 한 것은 처음 이 장대의 옛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무망(無忘)’이란 임금이 치욕을 당한 병자호란의 통한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다.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올라 동으로는 한봉성을, 서쪽으로는 삼전도비를 바라보면서 북벌을 추진한 효종의 뜻을 이어받아 원수를 갚자는 권고를 담았다. 어찌 보면 ‘서장대’나 ‘무망루’ 모두 옛 일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읽힌다. ■‘서장대’에서 ‘수어장대’로 오늘날 수어장대의 모습은 1836년(헌종 2) 광주 유수 박기수(1774~1845)의 손에서 탄생했다. 박기수는 서장대를 다시 손보고 현판도 ‘수어장대’로 고쳐 달았다. 글씨는 그의 형 박주수가 썼다. 현재 수어장대 경내에 있는 큰 바위에도 ‘수어서대(守禦西臺)’라 새겨 있는데 이 역시 박주수 글씨다. 현판을 보면 ‘수어장대’라는 큰 글씨 옆에 작은 글씨로 ‘세병신계하하한(歲丙申季夏下澣)’이라 새기고, ‘집금오대장군(執金吾大將軍)’과 ‘반남박주수군여지인(潘南朴周壽君與之印)’이라는 낙관을 남겼다. 현판을 조성한 해가 1836년 6월 하순이며, 글씨를 쓴 사람이 박주수라는 의미다. 집금오대장군은 이 글씨를 쓸 당시 박주수 직함인 판의금부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반남은 박주수의 본관이고, 군여는 호다. 이때 새로 고쳐 단장한 건물이 현재 수어장대의 원형이다. 오늘날 수어장대는 1층이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2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1층 안쪽에는 사방이 트인 방을 만들었는데 그 네 기둥이 2층의 바깥기둥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지붕은 웅장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수어장대는 이후에도 계속 크고 작은 보수를 거쳤다. 1960년대 사진들을 보면 ‘수어장대’ 현판의 위치가 바꿔있고 현판도 검정바탕에 흰색글씨로 되어 있다. 모두 수어장대를 잘 보존하겠다는 의도로 이뤄진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원형을 변형시키고 말았다. 건물의 세부 사항도 몇 차례 바꿨다. 한국전쟁 이후 문화재 관리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2년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909년의 유리원판 사진을 토대로 원형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남한산성은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그 덕분에 1836년에 고쳐진 서장대의 옛 모습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바로 수어장대 옆에 자리한 무망루 보호각이다. 원래 수어장대 경내에는 이 건물이 없었다. 이 보호각은 1989년에 짓고 이 안에 ‘무망루’라는 현판도 새로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또 현재 걸려있는 ‘수어장대’ 현판도 원본을 본떠서 새로 만든 것이다. 1836년에 조성한 진짜 ‘수어장대’ 현판은 현재 상자에 담아 수어장대의 2층 누각에 보관하고 있으며, 영조 대에 조성한 ‘무망루’ 현판 역시 2층 누각 안쪽 벽면에 걸려있다. 남한산성박물관이 완공되면 그때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 한다. ■한강물로도 다 씻지 못할 통한의 역사 앞에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행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쪽에 있다. 서장대에서 서문(우익문)까지는 대략 0.6km로 어른 걸음으로 5~6분 거리다. 서문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조선 측과 접촉하거나 편지 또는 국서를 전달할 때 이용한 곳이다.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성을 나설 때도 이 문을 이용했다. 하지만 서문은 1637년 1월 하순에 조선군이 청군 공격을 크게 막아낸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서문 책임자는 수어사 이시백이었다. 청군은 야간에 세 차례나 서문 방면의 성곽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조선군의 분전으로 실패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성벽의 얼음과 눈이 모두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정도로 큰 승리였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는 서장대에 올라 이런 글을 남겼다. “그 서쪽으로는 평야가 연결되어 바로 한강에 닿으니 오랑캐가 일찍이 진을 치고 대장기를 세운 곳이다. 비록 한강물을 다 기울인다 해도 그때의 더러운 노린내를 씻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서장대에 올라 풍경이나 즐길 뿐 마음속 깊이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양심을 잃어버린 자라 했다. 오늘 다시 수어장대를 오르면서 이 말을 떠올려본다. 수어장대 역사를 되짚어 보면 김만기의 절절한 외침이 지금도 빛바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도 한반도가 평화롭지 않아서다.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5. 지지대비(遲遲臺碑)에 새긴 마음의 깊이

5 지지대비(遲遲臺碑)에 새긴 마음의 깊이■ 멈춤과 돌아봄의 고갯길 멈춤과 돌아봄. 멈춤은 곧 돌아봄이다. 멈추어야 옆이나 뒤편 혹은 멀리 있는 것들을 돌아보게 되니 말이다. 그런 멈춤과 돌아봄에 알맞은 곳이라면 가쁜 숨을 고르던 고갯길이 제격이다. 특히 깊은 멈춤이라면 지지대고갯길, 거기서 더 깊이 찾을 수 있다. 수원으로 들고 나는 길목인 데다 지지대비(遲遲臺碑)를 품고 있는 고개라 여느 경계에 비할 수 없는 역사적 깊이까지 지닌 까닭이다. 지지대라니, 휙휙 지나치던 생각을 지지 당기는 유다른 명명이다. 그런 시적 운치가 묻어나는 비석 앞에서 오래된 미래 같은 효(孝)라는 정신의 깊이를 돌아보게 된다. 지지대비에 담긴 효심과 그에 따른 명명의 내력을 생각할수록 우리 마음마저 지지 울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지대는 현륭원(융릉)과 화성을 돌아보고 한양으로 환궁할 때 얼른 뜨지 못하던 정조의 심정이 그윽이 뿌리 내린 유서 깊은 길목이다. ■ 지지대비, 효의 한 이정표 지지대비, 그 비석의 거주지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47-2다. 비는 지지대로 명명된 때보다 조금 뒤인 1807년(순조 7) 12월에 건립했다고 한다. 높이 150㎝에 너비 60㎝의 금석각 형태다. 글은 서영보(徐榮輔), 글씨는 윤사국(尹師國)이 썼고, 비의 상단에 있는 전자(篆字)는 수원부유수 겸 총리사 홍명호(洪明浩)가 썼다. 1972년 7월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 지지대비에 담아온 가치와 의의를 기리고 있다. 이 비문에 담긴 정조의 마음은 곡진하기 이를 데가 없다.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 마치 선왕을 뵙는 듯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 정조의 깊은 슬픔과 아픔과 그리움이 고개에 새로운 이름을 짓고 비도 세우게 했으니, 지지대에는 효심에 따른 명명의 역사도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지지대라는 이름을 남기게 된 정조의 마음은 시에도 잘 나타난다. “이십일 일이 어느 날이던고. 와서 초상을 참배하고 젖은 이슬을 밟아보니, 어버이 사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다. 화성에 돌아와서는 비 때문에 어가를 멈추었는데, 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 마음에 맞아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새벽에 다시 길을 떠나 지지대에서 머물렀다. 구불구불 길을 가는 도중에 어버이 생각이 계속 마음에 맺히어 오랫동안 그곳을 바라보면서 일률(一律)의 시로 느낌을 기록하다”(弘齋全書 卷七)라는 설명을 달고 있는 시가 특히 그렇다. 당시의 정조 마음을 소상히 전하고 있어 함께 읽어본다. 혼정신성의 사모함 다하지 못하여 (晨昏不盡慕) 이날에 또 화성을 찾아와 보니 (此日又華城) 침원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寢園雨) 재전에선 방황하는 마음이로다 (徘徊齋殿情) 사흘 밤을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若爲三夜宿) 그래도 초상 한 폭은 이루었다오 (猶有七分成) 지지대 길에서 머리 들고 바라보니 (矯首遲遲路) 바라보는 속에 오운이 일어나누나 (梧雲望裏生) 먼저 밤새 안녕을 돌보고 여쭙는 자식의 예인 ‘혼정신성’ 그 ‘사모함’을 다하지 못한 아픔이 짙게 배어 나온다. ‘침원엔 가랑비’마저 ‘부슬부슬’ 내려 가누기 힘들던 정조의 마음은 ‘사흘 밤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토로에서도 여실히 묻어난다. 그런 그리움이 지지대고개 위에 닿으면 다시 길어졌으니, 아버지 묘가 있는 화산(花山)을 마지막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고개였기 때문이다. 고갯길에서의 긴 멈춤과 돌아봄의 시간은 다른 시에도 잘 나타난다. 시의 마지막 구절 ‘새벽에 화성 떠나 머리 돌려 바라보며(明發華城回首遠)/지지대 위에서 또 한없이 머뭇거렸네(遲遲臺上又遲遲)’라는 대목은 정조의 깊은 그리움을 겹쳐 보인다. 멀리 화산을 돌아보며 차마 발을 뗄 수 없어 머뭇거리던 정조의 회한 어린 모습. 그 심중을 ‘지지대 길에’ 올려놓고 보니 한숨소리마저 밟히는 듯 아릿하게 잡힌다. ■ 머뭇대는 마음의 깊이 지지의 길목에서 돌아볼 멈춤의 시가 또 있다. 화성 축성에 과학적 기여가 특히 컸던 조선 최고의 학자 시인 정약용의 시다. ‘지지대에서 행차를 멈추며(奉和聖製遲遲臺駐韻)’는 정조 어제(御製) 시의 화답으로 심금을 더 울린다. 임금과 신하가 시를 주고받던 전통을 물론 지지대에도 마음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대 아래 푸른 실로 꾸민 행차길 (臺下靑繩路) 아득히 화성으로 곧게 뻗었네 (遙遙直華城) 상서로운 구름은 농부 기대 맞추고 (瑞雲連野望) 이슬비는 임금의 심정을 아는 듯 (零雨會宸情) 용 깃발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龍旗色) 의장대 피리 소리 퍼져나가네 (悠揚鳳管聲) 그 당시 군대 행렬 어제 일처럼 (戎衣如昨日) 상상하는 백성들이 지금도 있어 (想像有遺氓) ‘(지지)대 아래 푸른 실로 꾸민 행차길’에서부터 정조의 축성 정신과 실현을 기리고 있다. 다산은 원행을 자주 한 임금의 효심은 물론 행차의 의미도 지지대에 흐뭇이 얹는다. ‘구름’이 ‘농부의 기대에 맞추’거나 ‘이슬비’가 ‘임금의 심정을 아는 듯’ 그리면서 수원 고을 ‘백성들’의 마음까지 담아내는 묘사로 화성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살린다. 철학·과학·실학·예술 등을 통섭한 시인다운 넓고 깊은 헤아림이 두드러진다. 시를 보면 지지대고개를 넘을 때 환궁 가마를 멈출 수밖에 없었던 정조의 심경이 전해진다. 그 고개야말로 아버지 묘를 모신 화산을 잠시나마 더 바라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휴식을 한참 취한 뒤에도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워서 정조의 행차는 항상 느릿느릿 움직였다고 한다. 느릴 ‘지(遲)’를 따서 지지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의 배경은 지금 다시 봐도 우리네 마음을 지긋이 당긴다. ■ 遲遲(지지), 느림의 미학을 깨우는 현재 지지대비는 비각에 둘러싸여 자세히 보기가 어려운 모습이다. 비문이 결락된 곳도 있는 데다 비신 곳곳에는 한국전쟁 때 맞은 탄흔도 남아 있다. 게다가 차들이 빠르게 지나치는 고갯길 위의 중턱에 있으니 접근이 쉽지 않다. 그리 높은 곳은 아니지만 특별히 찾지 않으면 웬 비각이 하나 있네, 하며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마음 숙이듯 가까이 가야 보이는 지지대비. 그 비는 조선의 한 근간이었던 효의 정신과 실현을 일깨운다. 참혹한 죽음의 다른 이름이던 ‘사도’를 훗날 장헌세자로 추존하며 화산에 모시기까지 정조는 수원으로 큰 걸음을 자주 했다. 지지대비는 그런 원행의 역사적 걸음이자 정치적 구현인 수원화성 축성과 정조의 가없는 효심을 들려주는 의미심장한 증표다. 흔히 아는 만큼 본다고들 하지만 문화재는 특히 그렇다. 우정 이목리 노송지대를 지나 그 지지대고개를 가봐야겠다. 그러려면 일단 차를 멈추어야 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에 기대지 않아도 가속의 시대에는 멈추어야 돌아 보이는 게 많다. 지지대비는 그런 멈춤과 돌아봄, 그리고 느림의 힘을 짚어보게 한다. 지금쯤 개나리며 진달래가 봄빛을 한층 돋우고 있으리라. 경기 천년의 문화재 지지대비는 효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삶의 속도 등에 대한 인문적 성찰도 일깨운다. 멈추고 돌아보는 그래서 느리고 머뭇대는 고전 같은 시간이 새삼 귀하게 다가든다. 정수자 시인문학박사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4.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정암 조광조

용인 수지에는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자리하고 있다.선조 38(1605)년 서원이 건립되고 효종 때(1650) 조정에서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서원의 운영에 필요한 서적이나 노비를 받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야말로 국가가 공인한 서원으로 격상되었다. 대원군이 서원철폐의 철퇴를 휘두를 때도 훼철되지 않았던 서원이다.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배향하는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심곡서원 바로 앞 광교산 등산로 초입에는 정암 조광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조광조는 1519년 전남 능주(화순)로 유배간지 한 달여 만에 임금이 내린 사약을 들이키고 절명시를 남기며 죽는다. 그의 나이 38살이었다.愛君如愛父 임금을 섬겨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나라걱정 돌보기를 식구 걱정 돌보듯 하였노라.白日臨下土 밝은 태양 대지를 환히 밝혀주니昭昭照丹衷 내 정성어린 속마음 거울처럼 비쳐지네■ 개혁가 조광조의 원대한 꿈 조광조가 이처럼 뜨겁게 사랑했던 임금은 바로 조선역사상 최초로 반정에 의해 추대되었던 중종이었다. 연산군이 흥청망청 국정을 농단하고 반유교적 정치로 적폐가 쌓이고 쌓이자 신하들은 ‘바른 것으로 돌리자’며 반정(反正)을 일으켰다.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중종은 집권초기 반정 삼인방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눈치를 보며 조회가 끝나고 물러갈 때면 일어났다가 문을 나간 연후에 자리에 앉을 정도로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허약한 군주였다.그러나 집권 10여 년이 지나면서 반정공신들이 하나 둘 사망하자 왕권을 강화하면서 ‘나라를 나라답게’ 하고자 나섰다. 중종은 사림들의 존경을 받는 조광조를 개혁의 파트너로 발탁했다. 조선이 직면한 적폐문제를 성리학으로 진단하고 처방해야 한다는 조광조의 주장에 공감했던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며 ‘성리학 나라 만들기’에 박차를 가했다. 이를 위해 조광조는 ‘성리학 나라 만들기’ 교본에 따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치열하게 실천했다.먼저 성리학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도학정치(道學政治)로 왕도(王道)를 세워야 했다. 충신의 화신으로 받드는 정몽주와 자신의 스승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하여 도통(道統)을 세웠다. 둘째는 성리학적 이념에 위배되는 소격서를 혁파했다. 망설이는 왕을 설득하기 위해 하루에 몇 차례나 아뢰며 새벽닭이 울 때까지 계속하다가 끝내 요청대로 허락을 받고서야 물러 나올 정도로 집요했다. 중종에게 소격서는 왕이 하늘에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의 고유권한이었지만, 조광조에게는 ‘백성에게 사도(邪道)를 가르치는 것’이자 ‘왕정으로서는 끊고 막아야할 것’이었다.셋째는 성리학 국가를 만들기 위해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대거 등용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으로 현량과를 신설했다. 또 세자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중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경연을 강화하여 아침 조강, 낮 주강, 야간 석강, 특강 및 보강까지 열었다. 넷째는 개혁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는 대사헌(현재의 검찰총장)으로 초고속 승진한 후 117명의 반정공신들의 훈작을 재조사하여 이 중 76명이 거짓된 훈작이라며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반정공신들의 기득권을 박탈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반발은 거셌다. 그들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반격했다. 급진 개혁에 피로를 느끼던 중종은 사건이 발생한지 4일 만에 사림의 영수 조광조를 전격적으로 파직하고 유배 보냈다. 그를 지지하던 사림들까지 체포하여 주변을 고립화시켰다. 이로써 도학정치로 왕도를 세워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조광조의 원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이상과 현실의 간극 조광조에게 있어서 당대의 개혁과제는 성리학 나라 만들기에 너무나 중대하고 시급한 시대적 과제였지만 그 방법은 너무 조급했다. 그는 중종에게 요순시대의 “삼대의 정치를 지금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도 아주 쉽습니다” 하며 자신만만했다. “먼저 임금 자신이 덕을 닦고 나서 그 방법을 사물에 옮겨 행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감화하여 자연 덕을 닦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임금이 수신을 하고 덕을 쌓아 주변으로 차츰 넓힌다면 다른 사람들도 덕을 쌓아 왕도의 나라, 성리학의 질서가 도래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쉬운 방법을 두고 왜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유배지에서도 북쪽을 보며 그 실낱같은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시대적 요구사항을 시의 적절하게 간파하여 타락한 조선사회를 개혁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방법이 서툴렀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정암선생문집) 1518년 변경에 여진족 속고내가 몰래 침범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잡아가서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를 징계하지 아니하면 성밑 야인이 계속하여 서로 반란할 것이니 난이 일어난 후에는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급히 변방을 잘 아는 중신을 보내어 감사, 병사와 함께 조치하여 잡고 법을 두어 후일을 징계하소서”했다. 그러자 조광조가 “이것은 속이는 것이요 바른 것이 아니니, 왕도(王道)가 군사를 어거하는 도가 아니요 곧바로 담을 뚫는 도적의 꾀와 같은 것입니다.당당한 성조(聖朝)로서 일개 보잘 것 없는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꾀를 써도 나라를 욕되게 하는 줄을 알지 못하니 신은 그윽이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병조판서 유담년이 버럭 화를 내며 “옛말에 밭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한다…물정을 모르는 선비의 말은 예부터 이와 같이 비록 이치에는 가까운 듯하나 형세는 다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반박한다. 조광조는 오랑캐가 쳐들어와 힘없는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기습작전 같은 군사전략은 도적의 꾀와 같고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오랑캐를 군사작전으로 일망타진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고 바른 것이 아니다. “이적(夷狄)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으니, 만약 성의로 움직이면 복종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오직 도덕만이 전략이다. 도덕과 전략이 하나 된 사고방식이다. 이 땅에 유교문명을 건설하겠다는 당찬 꿈을 가슴에 품고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개혁가 조광조의 모습과 물정도 모르는 선비 조광조의 모습 사이의 간극은 실로 크다 하겠다. 이 사상적 간극은 조선의 사상적 유산으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왕도의 꿈은 사림의 사상적 지표가 되었지만 그러나 패도를 탈각시키는 우를 범했다. 인류문명사에서 어느 역사가 도덕으로만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물리적 힘을 상징하는 패도 없이 문명이 구축된 역사가 있는가? 물리적 폭력 없이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평화를 누린 적이 있는가? 왕도와 패도는 국가경영의 두 축이다.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 균형의 상실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왕도 없는 패도는 맹목적이고 패도 없는 왕도는 허약하다. ■ 조선정치사상사의 성지 심곡서원은 이런 사상의 갈래들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자 조선정치사상사의 도통의 정맥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 곳이다. 도덕으로 무장된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분투했던 정암 조광조. 조광조 선생의 염원이 서려 있는 심곡서원은 아쉽게도 아파트 숲에 가려 있어 찾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대문에 들어서면 역시 좋은 터에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서원에는 조광조 선생이 아버지 시묘살이를 하면서 심었다는 수령 500년 된 아름다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사상의 칩처럼 뿌리 내리고 서 있다. 성리학 나라 만들기를 위해 개혁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조광조의 사상은 은행나무의 뿌리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사유방식에도 깊게 각인되어 있다.서원은 앞에 강당이 있고, 뒤쪽에 사우가 배치된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현재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 강당에는 숙종이 내린 어필 현판과 서원의 규약, 중수기 등 서원의 역사와 내력을 알 수 있는 유물이 걸려 있다. 서원 근처에는 조광조 선생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 있으니 빠트리지 말고 둘러볼 일이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내용은 태종실록에 실려 있다. “…경신년(1380)에 우리 태조께서 운봉에서 싸워 이겨, 동남 지방이 편안하여졌다. 무진년에 시중 최영이 권간들을 주륙할 적에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살아난 자가 자못 많았다.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서 우군 도통사의 절월을 주어 억지로 요동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에 머물렀을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정의에 의한 깃발을 돌이켰다. 군사가 강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휩쓸어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최영을 잡아서 물리치고, 대신 명유 이색을 좌시중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광패한 자들이 중국과 흔극을 만들어, 위망이 눈앞에 닥치고 화란이 헤아리기 어려웠었는데, 우리 태조의 돌이킨 힘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위태하였을 것이다. …무자년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께서 승하하니, 춘추가 74세이고, 재위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않으신 지 11년이다. 갑자기 활과 칼만 남기시니, 아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 애모함이 망극하여 거상 중에 예를 다하였다.…” 비석에 새긴 이성계의 이력서 1408년 5월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왕릉 조성을 위해 풍수지리에 밝은 대신들과 지관들을 불러 한양 주변 80리 안에 최고의 명당을 찾도록 명했다. 총책임을 맡은 영의정 하륜(河崙)이 김인귀에게 양주 검암산에 좋은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추천하자 태종이 승낙하고 박자청(朴子靑, 1357~1423)에게 산릉을 조성하도록 지시했다. 역군 6천 명이 동원되어 7월 하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9월 9일에 발인했는데, 이때부터 건원릉(健元陵)으로 불렀다. ‘건’은 하늘의 도, ‘원’은 나라와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뜻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때 능을 관리하는 개경사라는 원찰도 지었다. 건원릉 주변에 8기의 능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 조성의 감독을 맡았던 박자청은 이에 앞서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과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조성했던 경험을 가진 건축과 토목의 전문가였다. 특이하게도 건원릉의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 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언에 따라 억새를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억새는 태종이 아버지의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제1741호)과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비각 안에는 태종대에 세운 건원릉신도비(보물 제1803호)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2단의 대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고, 받침돌은 거북이 모양이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는 장방형의 몸돌을 얹고, 몸돌 위에는 용모양의 머릿돌이 위치했다. 300년 세월이 흐른 1790년 비각이 훼손된 것을 안 숙종이 비각 건립을 지시하여 이듬해 헌릉신도비의 비각을 참고하여 새롭게 완성했다. 1764년(영조 40)과 1879년(고종 16)에 정자각을 고치면서 비각도 함께 개수했다. 그리고 1900년(광무 4) 신도비 옆에 능표석을 추가로 세우면서 비각의 규모를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익공식 팔작지붕 건물로 확장하여 현재에 이른다. 신도비 비신의 앞면에는 권근이 지은 비문이 성석린의 단정한 해서체로 쓰여 있다. 비신의 상단 중앙에 새긴 전액이 ‘태조건원릉비’라 되어 있다. 비신의 뒷면에는 변계량이 짓고 성석린이 쓴 비음기가 새겨져 있다. 태종의 명으로 작성된 비음기에는 51명의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운 22명의 정사공신과 1400년 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43명의 좌명공신 등 총 116명의 공신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태조의 건원릉 신도비에 태종을 도와 공신이 된 인물들의 명단을 새긴 것은 태종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태종은 글씨를 쓴 성석린에게 공로를 표창하고 말을 하사하면서 “칠십이 넘었음에도 필력이 매우 뛰어나니 후세 사람이 보면 크게 탄복할 것”이라며 칭찬했다. 한 덩어리의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건원릉 신도비는 비석 양식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귀부이수를 갖추고 있다.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참여하여 조각이 매우 아름답고 섬세하다. 신도비의 이수는 태종무열왕릉비 이수 구도를 본받은 것으로 용이 비신 상단을 입에 꽉 물고 승천하는 형상이다.태종무열왕릉비 이수가 좌우 각각 3마리씩 모두 6마리인데 건원릉 신도비 이수는 좌우 각각 2마리씩 총 4마리이다. 이수 중앙에 공간을 마련하여 비의 명칭을 전서로 쓴 점 또한 동일하다. 이처럼 건원릉신도비에는 신라와 고려, 당나라의 우수한 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다섯 번째 용, 태조 이성계의 눈물 이성계는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이자춘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왕위에 오르면서 지은 이름은 단(旦), 호는 송헌(松軒)이다. 이성계는 손자 세종이 지은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해동육룡 중에 다섯째 용이다. 전주감영의 아전으로 있다가 야반도주하여 함흥에서 터전을 닦은 이안사가 해동육룡의 첫째 용이고, 마지막 여섯째 용이 태종 이방원이다. 이성계는 1356년 철령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쌍성총관부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전장을 누비며 명성을 쌓다가 1380년 지리산 운봉전투에서 1만의 왜구를 대파하면서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 무렵 이성계를 찾아온 정도전과 무학이 곁에 있었다. 1392년 7월 16일, 이성계는 개성 수창궁에 올랐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여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이 시달렸으므로 군사 강국 명에 사대하는 외교정책을 채택하고, 숭유억불정책으로 유학자들의 환심을 샀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한 무렵에는 박자청처럼 신분이 천한 사람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역동적 인 사회였다. 그러나 창업군주 태조의 정책에도 잘못이 있다. 태조는 개성에 기반을 둔 고려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이 상공업을 경시하고 농업에만 매달려 가난을 벗지 못한 원인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나는 문무를 겸전한 아들을 두고 겨우 11살의 막내 방석을 세자를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태조는 자식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비극을 지켜봐야 했고 왕좌까지 내려놓아야 했다. 태조는 둘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성계는 살아생전에 부인 두 명과 아들 8명 중에서 5명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조선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 그리고 태조의 원비 한씨의 제릉과 정릉까지 조선 왕릉의 기본제도를 마련한 사람은 박자청이다. 태조에게 발탁된 박자청은 세종대까지 4대에 걸쳐 조선왕조의 중요한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경복궁 경회루와 창덕궁의 인정전도 박자청이 총지휘하여 만든 작품이다. 박자청의 스승은 김사행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왕릉을 호화판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던 김사행은 태조의 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 공사를 맡았지만 왕자의 난에 연루돼 사사되었다. 뒤를 이은 것이 박자청이다. 천재 건축가 박자청은 고려와 조선의 건축을 잇는 중심인물이다. 세종실록에 실린 박자청의 졸기에 놀라운 그의 생애가 압축되어 있다. 박자청은 1393년에 입직 군사로 궁문을 파수하다가 태조의 아우 의안대군이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얻어맞으면서도 문을 굳게 지켰다. 이 말을 들은 태조가 박자청을 호군으로 특진시켰다. 1406년에 중군 총제에 선공 감사를 겸임하면서부터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일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문묘와 문소전을 지었으며, 공조판서가 되어 제릉과 건원릉의 역사를 감독하였다. 박자청은 토목의 공역을 관장한 공로로 최하층 사졸에서 출발하여 1품의 최상층의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가 67세로 죽었을 때 세종은 3일간 정사를 보지 않으며 애도를 표했다. 동구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 프롤로그

천년의 경기, 경기의 천년! 천년을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천년을 지속한다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역사의 장구함이야 어찌 필설로 이야기하겠느냐만 하나의 지역이 하나의 몸체로, 이름으로 천년을 간 것이 세계 역사에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이 바로 경기(京畿)이고, 경기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고, 경기의 문화가 곧 우리의 문화인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경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경기는 왜 경기였는가? 경기를 경기로 만든 그 힘은 무엇이고, 그 발현은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그 발현의 상징이 바로 우리와 호흡을 같이하고 우리의 감정과 이성이 담겨진 문화유산이다. 그렇다면 경기도 문화유산의 특질은 무엇일까? 경기도의 역사가 다른 지역의 역사와 다르듯이 경기도의 문화유산은 다른 지역과 분명한 차별성을 가진 문화유산일 것이다. 너무도 잘 알려졌듯이 경기도는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해 우리 역사발전의 중추가 됐던 곳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곧 경기도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할 만큼 경기도는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핵심이었다.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기도는 문화를 태동시키고 전파했다. 경기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인물이 새로운 사상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 시대의 인물들은 사상과 문화를 알려주는 조형물을 만들게 됐고 그것은 훗날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경기도 문화유산의 특질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다. 다만 경기도의 역사적 환경으로 인하여 ‘가장 오래된’ 혹은 ‘가장 아름다운’ 혹은 ‘가장 웅장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수준이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경기도가 한반도 역사에서 어떤 지리적 위치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가! 한반도의 젖줄이라 불리는 한강과 임진강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강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이 강을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가 창조되었다. 강은 인간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선사시대 이래 사람들은 어로와 채취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강 없이는 생존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에 강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인간과 강이 서로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탄강의 연천 전곡리와 한강의 미사리, 여주 흔암리에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된 것은 강과 인간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전곡리 선사유적은 단순히 한탄강을 끼고 있는 너른 들판이 아니다. 이곳은 민족의 시원을 알려주는 곳이며, 한반도의 역사가 세계 그 어떤 민족의 역사보다 앞선다는 것은 보여주는 상징이다. 구석기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과 국가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은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이 자신들의 일천한 역사를 과대포장하기 위해 신석기와 구석기 유적을 조작해 역사의 시대를 끌어 올리려 한 사실은 구석기 유적의 존재가 왜 중요한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전곡리 선사유적에서 나온 ‘아슐리안형석기’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발달된 구석기 유적의 전형으로 우리 민족의 뛰어난 문화적 생명력을 알려주는 것이다. 경기도는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많은 성곽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이곳이 전략적으로 너무도 중요한 곳이었기에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곽을 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서 강과 산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성곽을 쌓아 한반도 전체 백성을 지켜주기 위해서이다. 한번 보자! 강에 성곽이 있는 곳이 한강과 임진강 말고 한반도에 그 어디에 있는가? 경기도를 차지하는 세력이 곧 한반도의 주인이 된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였다. 백제가 경기도에서 건국하여 위대한 문명을 만들었고, 고구려가 남하하여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만주 일대를 차지하여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신라는 경기도를 차지함으로써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이와 같은 역사속에서 경기도 일대는 한강과 임진강에 끊임없이 연결되는 성을 쌓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강안성(江岸城)’이 만들어졌다. 임진강의 호로고루, 은대리성, 당포성 등과 한강의 구리 아차산성, 여주 파사성은 강안성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강안성과 달리 경기도의 산성은 외세와의 항전으로 백성의 피와 눈물이 가득했던 곳이다. 고양의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한곳이다. 고니시유키나와, 가토 키요마사, 구로다의 장수가 지휘하는 일본 최고의 정예 연합군을 물리친 행주대첩은 지휘관이었던 권율의 탁월한 공로도 인정할 수 있지만 백성의 단결과 죽음을 무릅쓴 항전이 없었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이는 다시 말해 행주산성은 곧 백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백성의 사랑 속에 유지되었기에 백성의 힘으로 그 성을 지켰던 것이다. 백성은 자신의 성을 지켰지만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킨 것이다. 그래서 행주산성은 곧 조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한산성은 성곽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한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도시이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웅장하고 거대한 성곽인 남한산성은 우리 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산성이 ‘청야입보(淸野入堡)’라는 전술적 원칙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반해 남한산성은 성곽도시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 때문에 2014년에 세계문화유산을 등재된 것이다.이처럼 많은 성곽들 속에서 성곽의 모든 장점들을 모아 최고의 성곽이 만들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華城)’이다. 유네스코가 강조하듯 화성은 18세기 동서양 군사건축물의 모범이자 너무도 아름다운 성이다. 그러나 단순히 화성을 건축학 범주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화성은 개혁군주 정조의 꿈과 희망이 담긴 위민(爲民)을 위한 실학의 터전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결국 경기도의 성곽들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성곽이니 그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경기도는 사상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중심이었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 성리학의 중심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고려시대는 불교를 장려하여 후삼국 전쟁을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으므로 주로 불교 유적이 만들어졌다. 수도 개경에는 많은 사찰과 탑이 건립되었다. 더불어 경기 지역에는 국가와 백성을 위한 대규모 기도사찰이 만들어졌는데 안성시 죽산의 봉업사와 여주의 고달사, 양주의 회암사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특히 고려말에 여주의 신륵사는 중국의 새로운 수행 방법은 간화선을 공부한 나옹 혜근이 수도한 가장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다. 이 사찰들은 모두 최고 혹은 최대라는 표현을 써도 전혀 위축이 되지 않는 곳이다. 사람들은 흔히 경주 황룡사지, 익산 미륵사지가 가장 큰 절터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봉업사, 회암사, 고달사의 절터는 우리나라 그 어느 절터보다 크다. 아니 큰 것만이 아니라 아직도 푸르른 광채가 빛나는 문화유산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달사지는 역사상 가장 큰 석불대좌와 부도가 존재한다. 큰 것만이 아니라 너무도 빛이 나서 눈을 뜰 수가 없다. 불국사 다보탑을 보며 돌을 밀가루 반죽다루듯 하였다고 하지만 고달사에 남아있는 작품들을 보면 1천여 년 전의 그이들의 손놀림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기도 문화유산의 특질이다. 더불어 경기도는 조선 성리학의 본향이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의 학업을 계승하기 위한 서원들이 만들어졌다. 파주 자운서원, 하남 석실서원, 용인 충렬서원, 심곡서원 등은 조선시대 유림 종장(宗匠)들이 거처하던 유림(儒林)의 심장이었다. 이와 같은 성리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실학이 태동되었고, 경기도는 실학과 연계된 문화유산이 곳곳에 남아있다. 다른 그 어떤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실학유산은 우리 경기도만의 보배인 것이다. 경기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은 ‘조선왕릉’이다.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은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지세적 조영술을 따랐다. 중국의 황제릉과 같이 인위적 조성에 의한 딱딱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이지 들인지 왕릉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는 그만큼 조선의 왕실이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체 44기의 조선왕릉 중 대부분이 경기도에 있는 것은 바로 경기도의 지기(志氣)와 산세(山勢)가 극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왕릉을 산책만 하여도 깊은 사색과 성찰을 얻을 수 있다. 결국 경기도의 문화유산은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의 중심에 늘 경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민족적 역사적 책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문화유산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보다 선진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우수성도 매우 뛰어나다. 그러나 더욱 경기도의 문화유산이 가치가 있는 것은 백성을 위하고 그들을 지켜야한다는 정신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도의 문화유산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 천년 경기, 경기의 천년 시대를 맞아 남북의 화해와 협력, 민족의 새로운 미래의 중심에 서게 될 경기도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1년 여간 경기지역 최고의 문화유산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정체성을 통해 다시 경기의 정체성을 찾을 것이다. 이는 바로 미래의 경기 천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산 홍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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