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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 끝까지 품은 ‘율곡 교서’… 율곡 15대 종손 이천용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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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15대 종손 이천용씨. 김요섭기자

 

“아버지가 황해도 해주에서 피란 올 때 가져온 것은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 노씨 신주 그리고 조선왕조 교서 단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율곡 이이 15대 종손인 이천용씨(84)는 최근 자신이 소장한 ‘문성공 이이 묘정배향공신 교서’가 경기일보를 통해 처음 공개되면서 주목받자 반포 140년 교서를 보관해 온 과정을 이같이 밝혔다.

 

해당 유물은 고종 23년인 1886년 조선 왕조가 율곡을 선조의 묘정(종묘 공신당)에 배향하며 내린 공식 교서로 26행에 총 732자다.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어새도 12곳에 찍혀 있다.

 

교서가 주목받는 이유는 16세기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19세기 조선 왕조가 공식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율곡 이 임진왜란 발발 전 10만의 군사를 미리 길러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십만양병설이 사후 그의 제자 김장생의 ‘율곡행장’ 등에만 언급돼 국가구국론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번 교서로 재조명이 불가피해졌다.

 

이씨는 교서 공개를 꺼렸지만 최근 파주시 향토사료관 개관 전시차 방문한 박재홍 파주문화원장 등의 권고로 마음을 바꿨다.

 

그는 교서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올 당시를 또렷이 기억했다. 1942년 8월 황해도 벽성군 석담리 율곡 종갓집에서 태어난 이씨는 6·25전쟁 발발 무렵 부친과 월남했다. 당시 8세였다.

 

이씨의 부친은 긴박한 상황에 율곡의 30만점에 이르는 고문서 등을 가지고 올 엄두가 나지 않아 신주와 교서만 간신히 지닌 채 빠져나왔다.

 

그는 “짙은 밤 황해도 해주에서 길잡이의 도움을 받아 파주 임진나루를 넘어왔다”며 “(부친은) 교서와 신주를 나보다 더 챙겼다”고 회상했다. 이씨의 말대로 교서는 늘 신주 옆에 접어진 채 보관돼 있었다.

 

1979년 부친이 작고하자 서울에서 고양으로 거주지를 옮긴 이씨는 교서가 훼손될 것을 염려해 20여년 전 액자를 만들어 보관했다.

 

교서 공개 이후 그는 16대 종손 지정에 앞서 율곡 알리기에 힘을 내고 있다. 최근 암 수술을 받은 이후 파주시가 율곡의 업적과 사상 계승을 위해 ‘율곡문화진흥원’ 설립을 추진하자 부지 무상 기증 협약을 체결하고 637쪽에 달하는 방대한 율곡 종가 이야기도 자비를 들여 출간하는 등 더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씨는 “십만양병설은 16세기 고리타분한 옛 얘기가 아닌 지금의 국제 위기 대응과 실천적 지성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며 “더 많은 사람에게 율곡의 멋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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