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소식통

[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DMZ의 봄과 ‘할매’

이달 말 ‘DMZ 세계문학 페스타’ 통해
전쟁의 공간→세계문학 담론의 장 ‘전환’
황석영 작가 ‘할매’, 전쟁 속 인간 존엄 증언
“평화는 작은 생명의 소리에 집중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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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장

2018년 일명 ‘도보다리 회담’에서 필자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군사분계선 0101 녹슨 표지판 앞에 선 남북 정상이 아니라 정상 간의 대화가 잠시 음소거된 사이 일산 킨텍스에 모인 외신기자들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된 새소리였다.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비극적 공간이면서 인간의 개입이 정지된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회복한 그 찬란한 생명의 소리는 이념과 갈등을 넘어 눈시울 뜨거워 오는 무정설법의 감동이 아니었나 싶다.

 

세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107년 전 만세 의거를 맞아 평화를 염원하는 새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일까.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그리고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DMZ 세계문학 페스타 2026’이 이달 말 병사들의 막사였던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릴 예정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포함해 초대된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세계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엿보인다. 가령 ‘분단, 평화, 민주주의, 마이너리티, 기후위기’ 같은 추상적인 의제가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소년병으로 직접 참여한 작가 이스마엘 베아의 “심지어 전쟁에서조차, 혼란과 광기의 그 한가운데에서조차 인간의 또 다른 영혼이 지닌 생동감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러한 인식이, 제아무리 미미할지라도, 평화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한다” 같은 생생한 증언과 만날 때 그 울림은 DMZ를 또 다른 세계문학 담론의 뜨거운 중심으로 바꿔 놓을 것이다.

 

알렉시예비치와 함께 기조 강연을 맡은 소설가 황석영은 배포된 프로그램 북을 통해 “우리는 평화로 나아가는 몇 개의 계단을 쌓아 올렸고 이제 마지막 계단을 만들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향후 ‘세계작가네트워크’(가칭)의 발족으로 이어질 이 ‘마지막 계단’의 정신을 황석영은 최근작 ‘할매’에서 웅혼한 대가의 필치로 육화한 바 있다. 소설에서 ‘할매’는 개똥지빠귀의 뱃속에서 잉태된 팽나무로서 왕조시대의 봉건적 질서를 통과하면서도 어떻게 공생의 윤리가 가능한지를 묻고 실천하는 상징적 존재인데 왜로 제국주의 시기에는 간척지 공사장으로 바뀐 마을에 가미카제 비행사를 훈련하는 육군비행장이 생기면서 사격 훈련의 목표물로 바뀐다. 생명과 평화의 노래 대신 “어버이 나라를 이제 막 떠나/이기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으리/다짐하는 마음의 용맹함이여” 같은 군가가 강박적으로 울려퍼진다. 소설은 새마을운동을 통과해 개발독재시대를 넘어 신군부의 재집권 프로젝트 중 하나인 새만금방조제 공사장까지 이어진다. 인간 이전의 대자연과 인간의 시간 그리고 인간의 시간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나무의 시간이 선 굵은 서사와 시적 비전 그리고 도래하는 영성의 예감으로 충만한 소설이다.

 

그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할매’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미군기지 용지로 결정돼 철거한 삼백 년 된 포구마을 ‘하제’터를 지키는 활동가들이 그들이다. 한 달에 한 번씩 팽나무제를 지낸다. 여기에 작가 황석영도 함께했다. 활동가 오동필을 모델로 한 소설 속의 배동수는 직장까지 바꿔 가며 갯벌과 나무를 지키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답한다. ‘갯벌의 합창을 들은 적이 있다’고. ‘아주 작은 소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들이 생명의 대합창으로 갯벌을 노래밭으로 만들어줬다’고.

 

생명의 노래를 지키기 위해 배동수는 정적을 유지하는 침묵의 상태에 있기로 한다. 침묵은 사물과 세계의 눈짓을 알아보는 힘을 준다. 그것이 이스마엘 베아의 ‘인간의 또 다른 영혼이 지닌 생동감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각성’일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에 대한 보살핌과 공생의 윤리가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DMZ 세계문학 페스타 2026’의 주제가 ‘침묵의 땅에서 생명의 언어로’인 까닭일 것이다.

 

‘할매’를 내가 처음 만난 건 소설이 아니라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를 본 뒤였다. 황 감독은 화성의 군 공항 이전 이야기를 하며 서해안을 따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화성의 서쪽 전곡리에도 ‘할매’를 닮은 천연기념물 물푸레나무가 있다. 미군의 폭격장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던 매향리 농섬의 아픔을 지켜본 나무다. 최대의 접경지역을 품은 경기도에서 이 땅을 지켜온 팽나무와 물푸레나무 ‘할매’들의 서사가 DMZ에 모인 세계 작가들과 함께 전쟁의 한복판을 향해 던지는 생명의 대합창 소리를 들어보자. 107년 전의 만세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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