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박물관, ‘중국에서 그려 온 초상’ 무장애 특별기획전
“조선으로 가져온 초상을 본 친구들이 모두 광대뼈와 이마, 수염과 눈썹, 신체까지 닮지 않은 것이 없으나, 눈과 입만은 닮지 않은 듯하다고 하였다. (중략) 시옥은 본 바에 의거해 그렸으니 당연한 것을 어찌하리. 그러나 입 모양이 둥글게 처진 것은 어찌 내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덕수, ‘서당사재’ 중)
화려한 가죽이 덮인 의자 위 한 사내. 그림을 뚫고 나올 듯 권력과 기품이 느껴지는 태도와 함께 찌푸려진 눈에선 사대부의 고집스런 태도가 느껴지는 듯하다. 허나 그림에 얽힌 사연을 읽고 나면 그림 속 사내가 조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1735년(영조 11), 청옹제가 사망하고 건륭제가 즉위함에 따라 사신을 파견하면서 이덕수(1673-1744)는 부사로 차출돼 중국으로 향했다. 한양을 떠나 머나먼 청나라에 발을 내디딘 그는 사행길 중 청나라 화가 시옥에게서 받은 자신의 초상에 관한 후일담을 ‘서당사재’에 풀어냈다. 그 속엔 초상을 그릴 당시 눈을 찌푸렸던 연유와 눈병을 앓아 몹시 힘들었던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300여년 전, 사신으로 향한 곳에서 현지의 화가가 붓끝으로 남긴 초상과 이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 사내의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이야기를 알고 나면 권위적으로 보이던 사내의 얼굴은 보다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진다.
실학박물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무장애 특별기획전 ‘중국에서 그려 온 초상使行肖像: 순간의 기록에서 영원한 기억으로’는 깊이 들여다볼수록 생동감과 활기가 느껴지는 전시다. 이번 특별전은 2008년 청풍 김씨로부터의 ‘김육 초상’과 2024년 전의 이씨로부터 기증 받은 ‘이덕수 초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사행초상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마련됐다. 조선시대 국제교류의 생생한 현장을 드러낸 전시는 마치 그 옛날 말을 타고 사행길에 오르는 행렬과 머나먼 타지에서 함께하는 듯 그 시대로 보는 이를 데려가는 듯 하다.
김필국 실학박물관장은 전시에 관해 “찰나를 붙든 붓끝은 한 사람의 생김을 넘어 한 시대의 질서를 그려낸다”며 “외교의 현장에서 태어난 초상은 가장 생생한 역사의 증언이자,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기억의 초대장”이라고 표현했다.
총 4부로 이뤄진 전시는 ▲1부 ‘기록, 초상으로 남기다’ ▲2부 ‘신문물, 초상으로 이어지다’ ▲3부 ‘영원, 초상으로 기억하다’ ▲4부 ‘순간의 기록에서 영원한 기억으로’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77점의 작품을 통해 다채롭게 구성됐다.
조선시대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일은 국가의 공식 관례로 이는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명나라로 파견하는 것을 부경사행(赴京使行), 줄여서 ‘사행’이라 불렀고 이후 청나라 시대엔 ‘연경사행(燕京使行)’, 줄여서 ‘연행’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사행은 문화교류의 장이었다. 사신들은 명·청나라의 황제와 대신을 만나고 신물문을 접하며 보고 들은 것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며 조선에 새로움을 더했다.
관람객은 산수화, 행사기록화, 지도 등 그들이 남긴 기록물을 살펴볼 수 있다. 그중엔 중국 화가가 직접 그려준 초상화가 있다. 이는 사신단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자료로서 국내 약 9점이 현존한다. 이번 전시엔 명·청나라의 화가가 그려준 김육 초상 3점과 이덕수 초상 4점이 포함돼 있는데, 당시 역사·문화의 변모를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제작연도, 제작자, 제작 배경 등이 남아 있는 등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상당히 뛰어나다.
특히 명나라 화가 호병이 그린 김육 초상과 청나라 화가 시옥이 제작한 이덕수 초상에 주목할 만하다. 이는 서양화법이 동아시아 초상에 스며든 과정을 사실주의의 두 시선으로 살핀다.
김육(1580~1658)은 1636년(인조 14) 동지사로서 약 1년간 명나라를 다녀온 경험을 ‘잠곡조천일기’ 등 견문록으로 남겼는데, 사행 중 병자호란 발발 소식과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하며 당시를 생생히 전한다. 학을 수놓은 천조각의 짙은 녹색 관복에 사모를 쓰고 있는 ‘김육 초상전신좌상본’과 소나무 아래 학창의를 입고 서 있는 인물을 표현한 '김육 초상와룡관본․송하한유도’는 1636 성절사로 명에 갔을 때 제작됐다. 두 초상은 17세기 중반 초상 화풍을 잘 보여주는 예로 이후 명대 화풍의 조선 유입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런가하면 전시는 초상화가 사람의 얼굴뿐 아니라 정신을 담는 예술임을 드러낸다. 조선의 초상은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려진 사람의 얼과 마음을 느끼도록 그리는 두 가지의 방향성을 함께 추구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식에 관한 그림 등 초상은 영혼의 눈을 통해 영원의 순간을 담아내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2025년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돼 모든 관람객이 차별 없이 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완전한 무장애 동선, 수어 영상, 자막·음성 해설, 촉각 자료 등을 제공했다. 누군가의 얼과 마음을 시각이란 하나의 요소가 아닌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의 눈으로 느껴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4부 ‘순간의 기록에서 영원한 기억으로’에선 발달장애 예술가들과 함께 초상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확장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독창적인 선과 대상에 대한 애정을 담은 자화상 ‘니얼굴 은혜씨’를 선보인 정은혜 작가 등 발달장애 예술가 5인의 작품 28점은 오늘날 초상에서 공존과 포용의 얼굴을 읽어 내려간다.
전시는 오는 3월1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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