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재정난에 임상단계 넘지 못해 미국·중국 등과 글로벌시장 격차도 “제도 지원 부족… 정부, 집중 투자를”
국내 제약·바이오 현장은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에 직면해 있다.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 ▲장기적·비수익적인 신약 개발 ▲제한적인 세제 혜택 등으로 인한 자금난 이유로 시장 진입 장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는 ‘글로벌 5대 바이오 강국 도약’을 선언하며 제약·바이오 산업을 차세대 국가 성장동력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미국·중국 등 주요국이 ‘바이오 강국’으로 치고 나가는 사이 한국의 제약·바이오계는 여전히 현실과 목표 간 간극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제약·바이오계에 따르면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이달 초 의약품에 대한 100% 관세를 예고했다. 한국은 지난달 29일 한미 협상으로 의약품은 최혜국 대우, 제네릭은 무관세 혜택을 받게 됐다. 다만 바이오시밀러 관세는 불확정이어서 업계는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흔들리는 국제 정세와 함께 내부적으로도 산적한 과제가 많다.
가장 큰 부담은 ‘길고 비싼 신약 개발’이다. 신약 개발은 ▲유망 물질 탐색 ▲동물실험 ▲임상 1~3상 ▲당국 승인 등 과정이 필요하고 약 10~15년이 걸린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대형 글로벌 제약사들의 신약 개발 평균 비용은 약 3조원(22억 달러), 임상 실패 비용은 10조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중소 제약·바이오기업들이 자금난으로 임상 진입조차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며 업계에서는 이를 ‘죽음의 계곡’이라 부른다.
연구개발(R&D) 자금 대부분이 기업 부담인데 세제 지원도 충분치 않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는 “혁신 기술이 있어도 상용화 단계에서 좌초된다”는 토로가 나온다.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도 격차가 두드러진다. 지난해 매출 1위 제약사는 미국 존슨앤드존슨으로 75조원을 기록했고 애브비·머크 등이 뒤를 이었다. 중국 운난백약그룹도 약 7조5천억원을 기록했다. 한국은 글로벌 13위 규모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작년 매출 4조원을 넘기며 선전했지만 5조원 이상 기업은 없다.
경기도내 한 바이오기업 연구소장 A씨는 “최근 바이오 투자가 급감하며 벤처사들이 자금난에 직면했다”며 “중앙·지방정부 차원의 선별적 집중투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약사 관계자 B씨는 “신약 개발에 10년 이상, 임상 3상까지 시간이 길어지는데 R&D 15% 이상을 투자해도 제도 지원이 부족하다”며 “장기적으로 신약 개발 역량 강화가 국민 건강에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죽음의 계곡’ 향하는 韓 제약·바이오 연구개발 ‘속병’ 新처방전 ‘발등에 불’
■ AI로 심사 빨라진다지만…현장은 속도보다 ‘균형’
세계 10위권 수준의 바이오 의약품 수출 규모를 가진 우리나라는 ‘5위권 진입’을 목표로 한다. 이재명 정부는 관련 산업을 5대 강국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비전으로 ‘K-바이오 의약산업 대도약 전략’을 발표하고 다양한 과제를 추진 중이다.
그러나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 현장에선 지속적이고 예측 가능한 정책과 함께 시장 수요에 맞는 효율적인 R&D 지원 등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지난 9월 정부가 발표한 ‘K-바이오 의약산업 대도약 전략’은 오는 2030년까지 바이오 의약품 수출 2배 달성, 블록버스터급 신약 3개 창출, 임상시험 3위 달성을 목표로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를 위한 핵심 과제로는 ▲수요자 체감형 규제로의 대전환 ▲기술·인력·자본 연계로 혁신 성장 가속화 ▲앵커·바이오텍 기업 동반 성장을 통한 글로벌 경쟁력 강화가 세워졌다.
정부는 특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신약을 심사하는 구조를 마련, 400일 이상 소요되는 허가심사 기간을 240일로 줄인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인력을 늘리고, 인공지능(AI) 심사도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현재 심사는 1단계가 지나야 2단계를 시작하는 순으로 자료를 검토해 절차가 길어지는데, 이를 1단계+2단계 동시 체계로 바꾸는 방식이다. 또한 AI 신약개발과 로봇 자동화 실험실 등 ‘AI-바이오 의약기술 대전환’ 프로젝트를 추진해 연구 생산성을 높인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정부 정책과 지원이 현재 산업 수요에 부합하는지 점검이 먼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정부는 디지털바이오, AI 바이오 등 미래 기술 중심으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개발 중인 1천여개 이상의 신약 후보 물질과 연구 과제 등을 유지하고 있어 현장 수요와의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 만큼 현장에서의 수요를 고려해 상호 ‘균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 연구개발비 90% 기업이 부담…“뒷받침할 정책 절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낸 ‘2023년 바이오헬스산업 실태조사’를 보면 국내 제약 산업의 총 연구개발비는 4조1천748억원으로, 이 중 94.2%가 기업 자체부담금이었다. 정부 등 외부 재원은 5.8%에 그쳤다.
제약·바이오 현장에서는 정부가 수조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하고 있음에도, 실제 체감할 수 있는 직접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연구개발 지원이 대기업·중견·벤처스타트업 등 기업의 성장 단계에 맞게 세분화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예를 들어 벤처스타트업의 경우, 실질적으로 현재 벌어들이는 ‘돈’이 없기에 세제 혜택에서 소외된 그룹이라는 지적이다. 현행 조세지원 체계가 매출 기반으로 돼 있어 성과를 내기 전까지는 혜택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행 조세특례제한법은 세액공제 이월 기간을 10년으로 제한하고 있으나, 백신과 바이오의약품의 경우 개발에만 12년 이상이 걸려 실질적인 혜택을 받기 어렵다는 지적도 더해진다.
무엇보다 신약 연구는 실패 위험이 높은 만큼, 이를 뒷받침할 지속적이고 예측 가능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대표적으로 블록버스터 신약을 위한 메가펀드를 꾸준히 확대하고, 세액 공제를 늘리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제약·바이오 산업은 특성상 국민 건강의 증진과 공공 재정 절감에 기여할 수 있는 산업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업계에서는 관련 지원을 ‘국가적 투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KIET 산업연구원은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의 성과 및 발전 방향 연구’ 보고서에서 인플루엔자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제네릭의약품 출시 이후, 약 1천여억원 이상의 건강보험 재정 절감 효과가 발생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조헌제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전무이사는 “연구개발의 성과는 결국 국가로 돌아간다”며 “어떤 신약이 개발돼 치료 효과가 높아지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 절감은 물론 기술수출과 글로벌 시장 진출을 통해 국부 창출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코로나19 유행 당시처럼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다국적 제약사에 의존했던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신약 개발을 단순한 산업 차원이 아닌 ‘국가 안보산업’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글로벌 각축전 속…“지속가능한 성장 기반 만들어야”
미국에 뒤이어 세계 2위 바이오 강국으로 떠오른 중국은 이미 2015년부터 10년 장기 계획을 세워 제약·바이오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규제를 완화하고, 자금과 인재 투입을 대폭 늘려 성장에 속도를 내고, 세계 시장 개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가 10년 만에 나타났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적극적인 정부의 정책적 지원 및 R&D 투자가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번 정부 발표에서는 ‘혁신 거점, 네트워크 강화로 글로벌 진출 지원’을 통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방안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해외 바이오 클러스터 거점 구축 ▲주요 글로벌 전문의학회 참여 확대 ▲해외마케팅 지원 서비스인 ‘K-바이오 데스크’ 확대 등이다.
다만 업계는 이 방안이 현장의 요구와는 다소 온도차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실태조사에서 제약 산업 450곳 중 60.3%가 해외 진출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으로 ‘금융지원’을 꼽았다. 정부의 해외 진출 지원정책이 물리적 네트워크나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기업들은 당장 체감할 수 있는 자금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내년도 R&D 예산을 역대 최대 규모인 35조3천억원으로, 올해보다 19.3% 늘려 편성했다. 바이오, AI, 방산, 에너지, 제조 등 6대 첨단산업에 올해보다 2조6천억원 증가한 10조6천억원을 세웠다. 보건복지부의 바이오·헬스 분야 연구개발 예산은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이때 단순히 예산을 늘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필요한 기업과 기술 분야에 적재적소로 배분되는지 시스템을 짚어봐야 한다는 의견이 더해진다.
윤희정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은 “국가 R&D 예산이 35조원을 넘어선 만큼 한정된 재원을 바이오 산업에 효율적으로 투입하기 위한 정책 기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안정훈 이화여대 융합보건학과 교수 역시 “연구개발 실적에 따라 세제 지원이나 합리적인 보상이 이뤄지는 시스템을 통해 개발 리스크를 줄이고, 다시 투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며 “이는 신약 및 첨단의약품 개발 촉진 등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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