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재 더미에 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놀랍게도 연탄재에 파란 이끼가 살고 있다. 2025 동시대 미술의 현장 기후 위기 특별전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이지연 작가의 설치작품 ‘잿소리’다. 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의 경기도미술관(관장 전승보)은 찾을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는 미술관이다.
■ 미술의 경계를 넘어서는 현대미술관
거대한 반투명 유리벽과 경사진 지붕을 떠받치는 철파이프가 마치 배의 돛대처럼 보인다. “미술관은 수평성을 강조하면서도 수직적 요소를 더해 돛단배 이미지로 반투명의 유리판을 외벽에 사용했지요. 자연 채광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8.5m 높이의 천창 시스템은 전시 환경의 유연성을 높여주는 장치입니다.” 전승보 관장의 설명처럼 경기도미술관은 물과 빛,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열린 문화 공간이다. 독특한 건물 모양만큼이나 전시에 최적화된 첨단 시설이 돋보인다.
2006년 10월 개관한 경기도미술관은 현재까지 164건의 전시를 개최했다. 한 해 평균 8건 이상의 전시를 열었을 정도로 풍성하다는 뜻이다. 개관전 ‘호안 미로’전을 비롯해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2010년), 예술가와 장애인이 함께하는 공연 및 아카이브 전시 ‘총체적_난_극’(2013년), ‘경기 팔경과 구곡–산·강·사람’(2015년), 이건희 컬렉션특별전 ‘사계’(2023년)는 관객들의 사랑과 주목을 듬뿍 받은 전시였다. “특히 올봄의 목판화 전시는 미술관 개관 이후 최대 관람객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전문가들에게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공백을 메웠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25년에는 어떤 전시와 사업을 펼치고 있을까. 경기아트프로젝트 ‘한국현대목판화 70년’과 동시대 미술의 현장 ‘기후위기와 RE100’은 공공미술관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한 전시라 할 수 있다. 화제를 모은 소장품 상설 기획전 ‘비(飛)물질’과 경기작가 집중 조명전 ‘김나영&그레고리 마스·박혜수·최수앙’, 그리고 신진작가 옴니버스 ‘박예나, 김민수, 강나영’까지 5개의 전시가 진행된다.
굵직한 전시가 미술관의 오른쪽 날개라면 촘촘하게 연결되는 ‘맞춤형 교육프로그램’과 ‘무장애 경기도미술관 전시안내 앱’, ‘체험형 미술자료실’ 및 ‘문화 자원봉사 양성교육’ 운영은 왼쪽 날개라 할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호를 지휘하는 전승보 관장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경기도미술관은 경기도와 세계를 연결하며 일상생활의 삶에 접근하는 미술관, 미술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고자 합니다.”
■ 동시대 미술의 현장전
한국현대목판화 70년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특별한 전시가 3월부터 6월까지 열렸다. 유채린 학예사의 도움말을 들어본다. “1950년대부터 활발하게 진행된 현대목판화의 흐름과 주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해 ‘목판미술’의 당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1950년대부터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목판화는 전통성과 향토성을 기반으로 작품이 제작됐는데 1960, 70, 80, 90년대까지 시대별로 목판화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흐름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지요.” 한국 현대목판화를 전체적으로 조명하며 지나간 흐름과 사건을 예술적인 관점에서 고민해 보는 이 기획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10월까지 이어지는 기후위기와 RE100를 주제로 한 ‘동시대 미술의 현장전’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김현정 학예연구사의 해설에 귀를 기울인다. “기후위기와 자연생태 환경, 재생에너지 사용에 관한 고민을 담았습니다. 불안한 일상을 예술적 은유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통해 현재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는 기획전시실 1과 2에서 영상과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위기를 예술적 언어로 발언한다. “순환하는 자연에 비해 인간은 아주 작은 존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기획됐지요. 참여 작가들은 기후위기 시대에 재생에너지와 관련된 주제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전문가의 친절한 해설을 들었기 때문일까. 어렵게 보이던 작품이 가깝게 느껴진다. 지금은 자연의 위기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통찰을 담은 작품과 마주해야 할 성찰의 시간이다.
■ 가까이, 더 가까이
경기도 서해안을 비롯해 생태와 갯벌을 주제로 작업해 온 작가들을 초대해 동시대 미술이 인식하는 생태적 삶의 방식을 새롭게 조명한 기획력이 돋보인다.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작품을 배치한 공간이 시원시원해 답답하지 않은 것도 좋다. 환경의 고전으로 평가되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라는 부제가 붙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그리고 기후학자 조천호의 ‘파란하늘 빨간지구’와 데이비드 웰즈의 ‘2050 거주불능 지구’ 같은 환경 관련 도서를 미술관에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상설전 ‘비물질: 표현과 생각 사이의 틈’은 어떤 내용일까. “2019년 퍼포먼스를 처음 소장한 국내 첫 미술관으로 현대미술 환경의 변화와 흐름에 더욱 섬세하면서도 활발한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해 이뤘졌습니다.” 경기도미술관은 그동안 청년을 주목해 역량 있는 청년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청년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감상하며 미술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일은 즐겁고 보람된 일이다.
경기도미술관은 교육체험전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미술관을 가까이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현대미술을 쉽고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봄가을 단체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실도 고마운 일이다. 지역 기관들과 협력해 현대미술을 접할 기회가 적은 소외계층을 초청해 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매월 마지막 주 문화가 있는 주간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중 프로그램도 적극 운영하고 있다.
무장애 관람을 위한 ‘경기도미술관 전시안내’ 앱은 획기적이다. 관람자의 위치를 자동으로 파악해 경기도미술관 실내외에 상설 전시되고 있는 35점 작품의 정보를 음성해설, 화면해설, 수어해설 3종으로 제공한다니 얼마나 고마운가. 미술관의 기본정보는 물론이고 진행 중인 전시에 대한 콘텐츠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제작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경기도미술관의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접할 수 있게 한 이 애플리케이션의 운영을 통해 무장애 관람 서비스를 크게 개선한 것이다.
■ 설레는 마음으로 찾는 미술관
경기도미술관은 문화자원봉사자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사업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봉사활동을 희망하는 만 20세 이상의 교육수료자 중에서 경기도미술관 자원봉사자를 선발해 전시실의 질서 유지와 전시해설, 교육프로그램 업무지원 활동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40명의 봉사자가 총 1천267회 활동했을 정도로 미술관과 관람객에게 힘이 됐다. 내년이면 20세 청년이 되는 경기도미술관의 바람은 무엇일까. “누구나 언제든 설레는 마음으로 찾는 ‘모두를 위한 미술관’이 되기 위해 미술관 식구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년 개관 20주년을 맞아 노후한 시설 개선과 특별전시회에 주력하면서 공공미술관의 품격과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빛을 닮은 화랑호수와 너른 조각공원이 펼쳐져 있는 경기도미술관은 어느 계절에 누구와 찾아도 좋다. 저녁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있다. 주말 가까운 미술관을 방문해 마음에 드는 작품에게 말을 걸어보는 용기를 내보자. 밋밋한 일상이 구월의 능금처럼 향기롭게 변할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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