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고민한 시인의 시와 육신이 묻힌 무덤과 그가 봤던 책과 원고, 시인이 펴낸 유명 잡지와 그를 기리는 시비는 물론이고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만날 수 있는 행복한 문학관이 있다. 경기 화성시 노작로 206의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이 모두를 갖추고 있다. 2010년 3월 개관한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작지만 충실하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인 홍사용을 만나러 화성 동탄으로 향한다.
■ 이슬에 젖은 참새가 민족의 아침을 노래하다
노작홍사용문학관 로비에서 1922년 1월 9일 창간된 문예종합지 ‘백조(白潮)’ 창간호 복원품을 만난다. 조선백자에 한 여인이 서 있는 표지 그림이 인상적인 백조 창간호는 홍사용의 문학적 열망과 지향점을 보여준다. 재종형 홍사중과 김덕기의 후원을 받아 순수문학 동인지 백조를 창간한 홍사용은 자신이 편집을 맡지만 3호까지의 발행인은 모두 외국인들에게 맡긴다. 1호는 배재학당의 교장 아펜젤러, 2호는 보이스 여사, 3호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훼루훼로를 내세운 까닭은 일제의 검열과 간섭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백조 3호에 홍사용의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실려 있다. 홍사용은 왜 자신의 호를 ‘이슬(露) 참새(雀)’로 지었을까. 소아(笑啞), 백우(白牛) 같은 호도 있지만 노작을 즐겨 사용했다. ‘돌부처’와 ‘대리석’, ‘고양이’와 ‘열두박사’ 같은 그의 별명도 재미있다.
1920년대 초 홍사용은 춘원 이광수를 찾아가 인연을 맺는다. 이광수는 1921년 자신의 집을 찾아온 청년 홍사용의 모습을 이렇게 추억한다. “옥색 옥양목 두루막을 입은 표표한 선비가 찾아왔다. 그것이 노작 그대였다. ‘이슬에 젖은 참새’ 하고 우리 웃지 아니하였나. 백조를 낼 무렵은 그대의 득의한 때였다.” 노작이란 호를 사용한 것은 아침을 여는 참새의 귀엽고 맑은 노랫소리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홍사용의 삶’을 보여주는 연보를 홍사용의 글씨로 꾸며 정겹다. ‘청산백운(靑山白雲)’이라 쓴 붓글씨가 눈길을 끈다. 현대의 캘리그래피처럼 푸른 산과 흰 구름을 표현한 홍사용의 예술적 감각이 느껴지는 멋진 글씨다. 무인이었던 부친에게 한문을 배우고 글씨를 배운 덕에 붓글씨가 단정하다.
원고지에 적은 홍사용의 글도 몇 구절 읽어본다. 휘문의숙에 재학할 때 공부를 잘했던 모양이다. ‘남양 홍사용 1등’이라 적힌 시험지에서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홍사용이 보던 책도 전시돼 있다. 1916년 출판된 ‘현토 고문진보’와 너무 낡아 글씨도 희미한 ‘맹자’다. 한국의 연극사를 증언하는 귀한 유물도 있다. 문학은 물론이고 연극에도 심취했던 홍사용이 극단 토월회를 이끌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정장 차림의 홍사용이 동료 연극인들과 어울린 모습이 정겹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들과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은 무엇일까. 1940년 있었던 장남의 결혼사진에서 주례를 선 춘원 이광수의 얼굴을 발견한다. 이 잔치에 초대된 문인과 예술인들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 근대시의 우뚝한 봉우리
전시실을 둘러보며 우리가 홍사용을 너무나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것도 몹시 안타깝다. 노작문학상 운영위원장을 지낸 시인 홍신선이 정리한 ‘홍사용의 정신’이 강렬하다. “이민족의 강점기인 20세기 초중엽 노작 홍사용 선생은 친일의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으셨다. 올곧은 문사적 기개가 어둡고 추웠던 저 궁핍의 시대에도 그렇게 선생으로 하여금 외홀로 형형한 호롱불을 켜 드시게 한 것이었다. 또 우리 신시와 신극 운동의 선구자로서 척박한 겨레 마음에 근대문화의 씨앗을 묻고 크게 싹 틔웠으니 가히 선생은 겨레의 지남(指南)이시자 우리 근대시의 우뚝한 한 봉우리이셨도다.”
유물이 지닌 사연에 빠지면 관람 시간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30세 무렵부터 5년간 홍사용은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전국을 방랑한다. 1932년 희곡 ‘벙어리굿’을 발표했던 그는 1935년 무렵부터 세검정 근처에 자리 잡고 한의를 공부해 한동안 한의사로 생계를 꾸린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검열로 붓을 꺾어버린 홍사용은 1947년 마흔일곱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문인과 예술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한 글들이 한결같이 절절하다. 청마 유치환은 홍사용을 ‘가장 어진 조선의 심장’이며 이 땅 청년들의 길을 밝힌 ‘호롱’으로 표현한다.
청록파 조지훈 시인이 쓴 추도사는 노작이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다. “눈감으면 몇십 년을 하루같이 흰 모자에서부터 흰 신까지 신고 다니던 그 깨끗한 모습, 술은 마실수록 더욱 조용해지고 날 샐 무렵까지 앉은 자리에서 벽에 한 번 기대지도 않던 그 단정한 모습이며 불기(不羈)의 민족 감정 때문에 글 쓸 자리를 고르다 못해 남 먼저 붓을 꺾고 만 그 정신이 역력히 살아온다.” 휘문고보 1년 후배였던 소설가 월탄 박종화의 ‘홍노작 영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선생이 사랑하던 우리 향토에 조국의 봄이 와서 노랑 저고리 개나리와 분홍치마 진달래꽃이 필 때와 조선의 가을이 와서 단둘이 조국의 붉은 마음 토할 때에 아, 선생의 추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으며 이 강산의 바람, 이 향토의 흙내, 이 백성의 노래 앞에 선생이 없이 우리들만 혼자 이 향토의 사랑 어찌 받을 수 있으리오. …아, 우리는 선생을 자연에 장사치 않고 우리의 가슴속에 길이길이 묻어두나이다.” 홍사용의 다정다감하고 고고한 모습을 알려주는 문인들의 추모사를 직접 볼 수 있어 감사하다.
■ 노작 홍사용을 기리는 화성인들의 열정
2층은 제2전시실을 비롯해 강의실과 작가의 방, 아동·청소년 자료실, 기획전시실, 북카페가 있다. 화성시는 홍사용을 기리는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노작홍사용문학관은 매년 ‘노작문학제’을 열고 ‘노작문학상’을 시상한다. 홍사용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2001년 제정한 노작문학상은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에게 수여했고 2018년부터는 한 해 동안 출간된 시집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시집에 수여하고 있다.
한편 ‘노작홍사용창작단막극제’는 근대문학과 신극운동을 이끈 홍사용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됐던 홍사용의 작품 활동이 후속 세대를 통해 다시 이어나가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시작됐다. 홍사용이 활동한 ‘산유화회’에서 이름을 빌린 시민극단 ‘산유화’는 시민이 주체가 되는 연극동아리로서 노작홍사용문학관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극 연출가, 배우 등을 초빙해 연극 이론과 실제에 대해 배우고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해 연극을 만드는 시민 동아리이다. ‘우리동네 작은 영화관’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를 상영해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시인과 함께 걷는 시 숲길’은 문학관 뒤편 에코벨트에서 자연의 정취를 느끼며 시민의 건강과 문화 향유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작가의 작품과 함께 강연, 대담회 등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시민 참여형이다. 작가와 음악가를 초빙해 작품과 음악을 같이 감상할 수 있는 ‘문학이 함께하는 음악회’도 시민들의 반응이 좋다. 기획전시도 연 2회 꾸준하게 열린다. 9월2일부터 11월2일까지 하반기 기획전시 ‘남궁산 장서표전(展)-별 하나, 책 하나’도 볼거리가 풍성하다.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작지만 내실 있는 콘텐츠와 공간 구성이 특징이다. 지역민과 작가 지망생들이 문학적 감수성과 교양을 쌓고 창작 역량을 높이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멋진 문학관이다.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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