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뿌리 ‘전통시장’… 민초들 ‘희망’ 일구다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광복 직후 ‘온기와 연대의 힘’으로 삶의 공간 ‘장터’에서 생계 꾸려
일제항거 성지 화성 ‘발안만세시장’, 첫 근대상설 인천 ‘신포국제시장’ 등
상업문화·역사 품은 유산 명맥 이어...진흥원 “온라인시장 등 新사업 박차”

1960년대 재래시장 전경. 국가기록원 제공
1960년대 재래시장 전경. 국가기록원 제공

 

광복 80주년 특별 기획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9. 상업문화의 원형 ‘전통시장’

광복 직후 아픔과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간, 사람들은 ‘삶’을 꾸리기 위해 장터로 모였다.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누군가는 위로를 나누기 위해 물건을 사고 팔며 서로의 말동무가 됐다. 오랜 기간 이어진 그 삶의 터전에는 단순한 거래를 넘어 온기와 연대를 나눈 끈끈한 희망의 역사가 스며 있다. 지역경제의 심장이자 불굴의 개척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지역 유산, 바로 전통시장이다.

 

1945년 당시 정부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상설시장 34개과 정기시장 407개 등 총 441개의 재래시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한반도 전체 인구가 약 2천500만명이었음을 고려할 때 인구 약 5만6천명당 1개 시장꼴로, 극히 적은 수치였다. 일제강점기 아래 간신히 버텨온 열악함이 당시 서민들의 고단했던 삶을 짐작게 한다.

 

그럼에도 시장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공간이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현실 너머의 새 시대를 향한 염원을 품었다. 현재까지 자리를 지켜 온 부천 자유시장과 문산 자유시장. 그리고 서울·대구·부산·제주·김천 등에 자리한 평화시장 등 전국 곳곳의 시장 이름에는 ‘자유’와 ‘평화’ 같은 단어가 유독 자주 등장한다. 이는 시대적 굶주림을 끊고 풍요를 전파하려 했던 민초들의 간절한 바람과 강인한 의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975년 촬영한 시골시장 전경. 국가기록원 제공
1975년 촬영한 시골시장 전경. 국가기록원 제공

 

경기·인천지역의 전통시장도 다르지 않다.

 

화성시 향남읍의 발안만세시장은 3·1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장소이자, 일제강점기 제암리 학살 당시 격렬한 항거가 이뤄졌던 역사적 공간이다. 100년 넘는 세월 동안 그 정신을 이어오며 오늘날에도 시장은 독립과 자유를 염원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인천 신포국제시장 또한 국내 최초의 근대 상설시장으로, 도시의 성장과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통과해 온 살아있는 유산이다. 오래된 가게와 사람들, 익숙한 냄새와 활기는 그 자체로 도시의 기억이며 한국 상업 문화의 원형을 보여준다.

 

유통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대형 마트와 온라인 소비가 일상화된 오늘날에도 전통시장은 여전히 지역 경제의 핵심 축으로 기능한다.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 등에 따르면 현재 경기도에는 총 357개의 시장이 있으며 이 가운데 전통시장으로 등록된 곳은 162개로 나타났다. 세부적으로 일반 상점가(67개), 골목형상점가(101개), 공설시장(25개), 무등록 시장(27개) 등 다양한 형태로 나뉜다. 인천은 56개의 시장(등록 51개, 무등록 5개)을 보유하고 있고 별도로 40개 상점가가 지역 소비 기반을 형성하며 전통시장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김민철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장은 “과거 전통시장은 서민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의 근간이자 정보 교환과 소통의 플랫폼”이었다며 “1970~8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교통과 기술의 발전으로 기능이 쇠퇴하고 거대한 대형 유통 채널과 경쟁이 시작됐지만, 지금까지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정부의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발맞춰 우리 진흥원도 전통시장 디지털화를 중점 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며 “온라인 플랫폼 시장 연구와 벤치마킹 등을 통해 새로운 사업 기획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경인지역 전통시장의 진화 사람 냄새 나는 ‘생활의 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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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만세시장 길목에 세워진 조형물에 ‘횃불 만세운동 본고장’이라는 표기가 눈에 띈다. 3·1운동 당시 화성 발안 지역에서 울려 퍼진 독립의 함성을 기념하는 상징물이다. 금유진기자

 

시대의 풍파 속 수많은 이야기가 스러져갔지만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시장에서 계속됐다. 장터에 앉아 좌판을 깔고 정을 나누며 일상을 지탱해 온 상인들. 그들의 땀과 지혜는 시장을 지역 경제의 가장 뜨거운 활력 넘치는 동력으로 만들었고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끈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도 경인지역에 남은 전통시장들은 삶의 온도를 데우며 지역경제의 역사를 펼쳐내고 있다.

 

지난 26일 찾은 화성 발안만세시장. 시장 입구로 이어지는 발안 1교 바닥에 독립 운동을 기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금유진기자
지난 26일 찾은 화성 발안만세시장. 시장 입구로 이어지는 발안 1교 바닥에 독립 운동을 기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금유진기자

 

■ ‘만세’의 도시 화성, 경기도 백년 시장에서 피어난 ‘다문화 상권’의 새 얼굴

 

화성시 향남읍에 자리한 발안만세시장. 이곳은 3·1 만세운동의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던 역사의 현장이자 선조들의 독립 염원이 깃든 신성한 땅이다. 발안만세시장이 간직한 100년의 개척 정신은 광복 80년을 맞은 올해, 활력과 다문화적 포용력으로 재탄생한 오늘날의 시장을 생생히 보여준다.

 

1919년 3월31일과 4월5일, 발안장에서는 독립과 자유를 향한 민족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발안 1교 바닥에는 당시 독립운동의 역사를 담은 문구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시장에서 도보 30분 거리에는 일본군이 양민을 학살한 제암리 3·1유적지가 자리해 그날의 아픈 역사를 묵묵히 증언한다. 이곳은 단순히 장터가 아닌 암울한 시대에도 나라의 독립과 지역의 자유를 염원했던 선조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개척 정신의 상징이다.

 

지난 26일 화성 발안만세시장에서 만난 식료품점 운영자 모하마드 샤밈씨(오른쪽)와 조카 모하마드 쟈말씨. 금유진기자
지난 26일 화성 발안만세시장에서 만난 식료품점 운영자 모하마드 샤밈씨(오른쪽)와 조카 모하마드 쟈말씨. 금유진기자

 

과거 농수산물 위주의 5일장이던 발안만세시장은 이제 상설시장으로 변모하며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특히 향남읍 주변 중소기업 공장에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늘면서, 시장은 이색적인 다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중국 식품점, 할랄 푸드코트, 태국, 인도,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등 다양한 국가의 요리와 식재료를 만날 수 있다. 지난해 ‘발안만세시장 세계음식문화특화거리 선포식’은 이러한 변화를 공식화하며 문화와 역사가 어우러진 지역 상권 활성화의 모델을 제시했다.

 

만세시장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방글라데시 출신 모하마드 샤밈(42)은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다. 만세시장에 자리 잡은 이유를 묻자 그는 “시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활기가 넘친다. 시장 이름이 ‘만세’여서 기분이 좋았고, 국적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이곳에서 저도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다”고 답했다.

 

샤밈과 같은 외국인 상인의 존재는 이제 낯설지 않다. 실제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에 따르면 경기도 시장 내 외국인 운영 점포는 524개에 달한다. 이는 전통시장이 단순한 내수 공간을 넘어 국경을 초월한 다문화 경제 허브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발안만세시장은 3·1운동이라는 한국의 역사와 각국의 이색적인 상점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사진은 시장을 찾은 주민 조귀엽씨(오른쪽)와 친구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금유진기자
발안만세시장은 3·1운동이라는 한국의 역사와 각국의 이색적인 상점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사진은 시장을 찾은 주민 조귀엽씨(오른쪽)와 친구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금유진기자

 

평생을 발안만세시장과 함께한 주민 조귀엽씨(80)는 시장이 주는 특별함이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랑방’이라는 의미다. 그는 “야채도 싱싱하고 값도 좋지만, 동네 사람들하고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느끼는 시장만의 활기는 집까지 배달해주는 편리함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라며 “팍팍했던 옛날부터 지금까지 삶을 함께 해온 소중한 일상”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경기도의 전통시장은 오랜 역사와 함께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진화하고 있다.

 

양평 용문천년시장은 2019년 시설현대화 사업을 통해 고객 편의시설과 특화 상품을 강화했고, 안양 아크로상가 인근 시장은 올해 시설환경개선 공모사업을 통해 사용자 경험을 높일 예정이다. 과천 굴다리시장처럼 소규모라도 지자체 보호 속에서 주민 친화적 정서를 유지하며 활성화되는 시장들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 시장은 전통시장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고객 편의와 체험 중심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미래형 시장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26일 찾은 인천 중구 신포시장 입구의 모습. 김샛별기자
지난 26일 찾은 인천 중구 신포시장 입구의 모습. 김샛별기자

 

■ 항구도시 인천의 자부심, 상인회와 꽃피우는 ‘국제시장’의 꿈

 

인천은 일찍이 개항을 통해 세계와 연결된 도시다. 항구와 공항을 모두 갖춘 이 도시는 전통시장조차도 국제적인 기운을 품고 성장했다. 항구도시라는 특수한 배경 속에서 인천의 시장들은 태생부터 역동적인 국제성을 안고 발전해 왔다. 특히 상인회를 중심으로 변화의 물결을 헤쳐나가며 항구도시 특유의 고유성을 살려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자 1890년대 말 개설된 중구 신포국제시장은 그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다. 이곳은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개항 초기 ‘새로운 항구’라는 뜻의 신포시장에서 2010년 신포국제시장으로 명칭을 변경하며 국제적 위상을 더했다. 중국인 상인들이 새로운 채소를 팔고, 어시장과 닭전 거리 등 전문화된 상점이 몰리면서 시장은 새 모습을 갖춰나갔다. 닭강정, 공갈빵, 오색만두, 쫄면 등 다채로운 먹거리로 발길을 끄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신현기 인천신포국제시장 상인회장은 “신포시장이 개항의 역사와 함께한 시장에서 이제는 국제시장으로 자리 잡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천이 항만과 공항을 모두 갖춘 독특한 지역임을 설명하며 “이런 이점 덕분에 한국의 전통시장 중 외국인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곳이 바로 신포국제시장”이라는 자부심을 내비쳤다. 국제시장 타이틀에 걸맞은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책임감도 크다는 그는,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아 25년째 건강기능식품을 판매하며 시장과 삶을 함께하고 있다.

 

지난 26일 인천 중구 신포시장에서 방문객들이 점포를 둘러보고 있다. 김샛별기자
지난 26일 인천 중구 신포시장에서 방문객들이 점포를 둘러보고 있다. 김샛별기자

 

신 회장을 비롯해 시장의 중추 역할을 하는 상인들은 대부분 50대에서 70대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시장과 함께하며 지역 경제를 이끌어온 이들이다. 그는 “이곳 상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여전히 부지런하게 손님들을 대하고 있어 배울 점이 많다”며 존경을 표했다.

 

신포국제시장이 위치한 중구는 2026년 7월 제물포구로 행정구역 개편을 앞두고 있어 상인회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시장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방안을 선제적으로 모색한다. 신 회장은 “‘제물포구 상권발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상인들이 모여 더 큰 틀에서 상권을 활성화하고 지역 경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방안을 찾고있다”고 밝혔다. 상인 개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시장의 운명을 공동으로 고민하고 책임지는 상인회의 집단적 움직임이 인천 전통시장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

 

1980년대 인천 남동구 소래포구어시장 모습. 소래포구전통어시장 상인회 제공
1980년대 인천 남동구 소래포구어시장 모습. 소래포구전통어시장 상인회 제공

 

인천의 또 다른 대표적인 시장은 소래포구전통어시장이다. 1960년대 초 개설된 이곳은 2017년 대형 화재로 큰 아픔을 겪었지만, 현대화 사업을 거쳐 2021년 재개장하며 더욱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곳의 역사는 1930년 염전 개발과 함께 시작된다. 일제가 소금 수탈을 위해 건설한 협궤열차가 인천과 수원을 오가면서 사람이 모여들었고, 포구가 발전하며 소형 어선들이 새우와 생선 등을 팔며 명성을 얻게 됐다. 소래포구는 아픔을 딛고 일어선 상인들의 끈끈한 공동체 정신과 어우러져 오늘도 인천의 싱싱한 바다 내음을 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지난 26일 인천 남동구 소래포구어시장 모습. 김샛별기자
지난 26일 인천 남동구 소래포구어시장 모습. 김샛별기자

 

이처럼 경기도와 인천의 전통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 광복 이후 80년간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한 부분을 담당하며 서민 경제의 든든한 기반으로 뛰어왔다. 숱한 위기 속에서도 불굴의 상인 정신과 공동체의 지혜로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이 시장들은, 오늘도 지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미래를 향한 힘찬 개척의 길을 밝히고 있다.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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