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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칼럼] 反日 축구•복싱•정치, 그 허망한 역설
오피니언 김종구 칼럼

[김종구 칼럼] 反日 축구•복싱•정치, 그 허망한 역설

‘반일’로 나눠야 했던 영웅·매국노
실패한 역사, 정치는 여전히 답습
‘민생’한댔다가 갑자기 꺼낸 ‘반일’

1997년 9월 28일.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과 만났다. 고정운이 우리 진영에서 공을 빼앗겼다. 골키퍼를 넘은 공이 우리 네트에 꽂혔다. 반격에 나선 서정원이 한 점을 만회했다. 곧이어 이민성이 중거리 슛을 날렸다. 일본 골 네트가 출렁했다. 2 대 1 역전승. 캐스터가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고 외쳤다. 차범근 감독이 영웅이 되는 순간이었다. 영웅의 조건은 간단했다. 일본에서, 일본 축구를 무찔렀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가 떴다. ‘차범근은 일본에 지지 않는다’.

그가 곧 추락한다. 일본과의 2차전이 서울에서 열렸다. 승부는 시작 1분 만에 기울었다. 나나미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귀화 선수 로페스에게 또 먹혔다. 0 대 2 패배. 그 순간 일장기 1만개가 경기장에 휘날렸다. 광복 이후 서울서 나부낀 가장 많은 일장기다. 차 감독이 퇴장하며 기자들을 뿌리쳤다. 그 순간 그는 매국노였다. 차범근은 한국 최고다. 1차전에도, 2차전에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겼을 땐 ‘도쿄대첩’의 영웅, 졌을 땐 ‘상암참사’의 매국노였다.

1975년 6월 7일. 와지마 고이치는 복싱 영웅이었다. 일본 국민은 그를 ‘불꽃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7회, 그의 턱에 유제두의 양 훅이 작렬했다. 겨우 일어났지만 더 비참해졌다. 고개가 꺾이는 강펀치에 완전히 고꾸라졌다. 규슈 고쿠라 체육관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유제두가 소감을 말했다. “조국을 위해 힘껏 싸웠습니다.” 순간 영웅이 됐다. 이때 조건도 간단했다. 일본에서, 일본 영웅을 때려 눕혀서다. 카퍼레이드 하고, 청와대에서 300만원도 받았다.

그도 곧 추락한다. 7개월 뒤, 와지마와의 리턴매치가 치러졌다. 초반부터 무기력하게 얻어맞았다. 결국 마지막 15라운드에 무릎을 꿇었다. 링 사이드엔 일장기만 날렸다. 유제두가 매국노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분노한 여론을 달랠 출구가 필요했다. 약물 중독설, 중앙정보부 개입설이 그즈음 나왔다. 46년이 지나도 증명 안 된 ‘설’이다. 유제두는 훌륭한 복서였다. 1975년에도, 1976년에도 같은 그였다. 하지만 일본에 이겼을 땐 영웅, 졌을 땐 매국노였다.

반일, 어디 스포츠만 이런가. 역사, 문화, 경제가 다 이런 식이다. 반일을 대입해 전투력을 높인다. 중간지대란 없다. 반일(反日)과 친일(親日)만 있다. 반일은 좋은 것이고, 친일은 나쁜 것이다. 요사이 정치가 즐겨 써 먹는다. 반일은 좋은 정치, 친일은 나쁜 정치다. 그게 또 나왔다. 이번엔 이재명 대표다. 한미일 3국 동해 연합훈련을 겨냥했다. -일본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인정할 수 있다. 북중러 결속을 자극할 수 있다. 일본을 한반도에 끌어 들이는 자충수다-.

국민의힘이 장단을 맞춰 주고 있다. -허황된 말로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 DJ·노무현 정부 때도 욱일기 입항은 있었다. 욱일기는 안 되고 인공기는 되느냐-. 어느 쪽이 옳은지 가려 보라고? 선택하고 말고 할 가치도 없다. 주장과 반박 모두 식상하다. 귀에 담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질질 끌려간다. 이런 게 반일이다. 언제든 그어 대면 큰 불로 옮아간다. 근현대 정치에서 이만큼 인화성 좋은 불쏘시개도 없다. 이번에도 발화 사흘 만에 모든 이슈가 묻히고 있다.

이 대표, 민생(民生)한다고 하지 않았나. “물가·환율·금리 등 어려운 경제 현실 개선을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8월29일·최고위). “민생에는 여야가 없다”(9월13일·민생대책위원회 출범식). 그 뜻에 지지를 보낸 국민이 꽤 된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반일을 꺼냈다. 민생 말한 지 겨우 한 달이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 위기는 그때 그대로다. 바뀐 게 있다면 하나다. 이 대표를 포위한 환경이다. 성남FC·쌍방울 수사가 팍팍해졌다. 이래서 나오는 ‘방탄 반일론’이다.

축구? 반일로 다그치다가 일본에 추월 당했다. 복싱? 반일로 몰아 세우다가 일본에 뒤처졌다. 과거에 묶인 축구·복싱이 미래로 가는 축구·복싱에 당한 굴욕이다.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온 반일의 역설이다. 하물며 당리당략에 빠진 정치다. 그들의 논쟁이야 오죽하겠나. 감히 예상해 본다. 며칠 또는 몇 주 뒤 우리는 자문할 것이다. ‘결론 없을 반일 논쟁을 왜 또 했던 거야....’ 그러면서 깨달을 것이다. ‘논쟁으로 득 본 이는 이재명 대표밖에 없구나....’

어제 아침자 경제면 기사가 이거였다. -‘코스피, 2200마저 붕괴됐다’ ‘환율, 하루 만에 22.8원 뛰었다’ ‘IMF, 생계비 위기(the cost-of-living crisis)를 경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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