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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종교] 본래면목
오피니언 삶과 종교

[삶과 종교] 본래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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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 철학박사

선사(禪師) 약산을 3년 동안 주방장 소임으로 시봉했던 한 승려가 있었다. 약산은 당대의 대선지식인 석두희천의 법을 이은 선사다. 한번은 약산이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 머무른 지 얼마나 되었는고?” 그 승려가 답했다. “3년입니다.” 이에 약산이 “나는 전혀 그대의 얼굴을 모르겠군.” 그 승려는 약산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절을 유감없이 떠났다.

선의 세계에서 언어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로 사용된다. 여기에서도 약산의 질문은, 단지 ‘여기’라는 공간에 접한 적이 있는지 또는 ‘여기’에 존재하는 법을 배웠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스승이 무언가를 질문할 때의 언어는 범상한 것이 아니므로 주의 깊게 들어서 어디를 강조하는지를 간파해야 한다.

스승은 자비의 마음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제공해 다시 “나는 그대의 얼굴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즉 “그대 자신의 본래면목을 발견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본래면목은 영원 전부터 갖고 있던 얼굴이며 영원토록 가질 얼굴이다. 그러나 그 승려는 스승의 사랑과 질문의 의미도 알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유감스러웠다. “나는 3년 동안 그 분을 위해 음식을 마련했는데,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어찌 된 것인가. 그는 모욕적으로 생각하고 그 절을 떠났다. 그는 스승을 만났지만, 중심을 놓쳐버렸다. 3년은 중심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스승은 그동안 제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승려는 3년 동안 스승과 함께 있었고, 그곳에서 요리를 했고, 스승의 법문을 들었다. 이제 스승이 질문할 때가 이르렀다. “이곳에 머무른 지 얼마나 되었는고?” 그는 ‘얼마나’라는 말은 이해했지만 이곳, 즉 ‘여기’라는 말은 놓쳤다. 스승은 ‘얼마나’에 강조를 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강조를 두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애정어린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많은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대의 얼굴을 전혀 모른다네.” 이 말은 3년 동안 여기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디에 그대의 얼굴이 있는가? 스승은 계속 그대의 본래면목을 말하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불꽃이 하나의 불꽃으로 온전히 전해지듯 스승의 가슴에 비치는 얼굴을, 스승은 몇 년 동안 여기에 있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햇수를 세서 무엇을 할 것인가? 분명 스승의 그 질문은 이 순간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삶의 매 순간 깨어 있음을 강조해 경책하는 것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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