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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종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
오피니언 삶과 종교

[삶과 종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

유네스코는 지난 2012년에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해로 지정한데 이어, 올해에는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세계 기념해로 지정하였다. 국법을 거슬러 참수(斬首)된 ‘죄 없는 사형수’의 역설에 전 세계가 공감한 이유는,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 안에서 기득권적 삶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과 인간의 존엄, 생명, 진리,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생애 때문이다.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신부는 19세기 중반의 인물이다. 당시 조선은 혼란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넘어 조선에까지 통상을 요구하며 위협해 왔고, 대내적으로 세도 정치의 등장으로 정치 기강이 흔들리고 국가 운영의 기준인 삼정(三政)이 문란해져서 가혹한 수탈과 지역 차별로 인한 각종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경제력을 쥔 상인 계급의 등장으로 양반 제도가 점점 힘을 잃어 가면서 사회 구조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서학의 유입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지배 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판단,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1836년 1월 조선 천주교회에 가장 시급한 일이 하루빨리 사제를 육성하는 일이라고 여겨 소년 김대건과 두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보내 사제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조선 천주교회는 세 명의 선교사와 100여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는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다. 타국에서 조선의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접한 김대건은 하루빨리 신부가 되어 조선 땅을 밟는 꿈을 꾼다. 1845년, 한양을 떠난 지 10년여 만에 신부가 되었지만 선교사 영입과 더불어 선교활동에 힘쓰다가 조선 입국 7개월 만인 1846년 6월 5일 백령도 해역 순위도에서 체포, 한강 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형(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언도받고 25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김대건 신부가 옥중 취조 때 받은 질문이다. 당시 ‘아니오’라는 말만으로도 풀려날 수 있었지만, 김대건 신부는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답한다. 그리고 차별이 엄격하던 신분 사회에 하느님으로 인해 만민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천주교 교리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박애 정신을 가르친다. 상놈이 양반에게 “형제” 혹은 “자매”라고 부를 수 있고 모두가 공생하는 사회를 꿈꾸면서 말이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 경제적 양극화 등의 위기 속에서, 이기심과 분열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2021년 유네스코의 기념인물에 김대건 신부가 선정된 이유 역시 그의 생애와 정신이 현 인류에 가장 필요한 가치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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