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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진 칼럼] 속물근성
오피니언 이재진 칼럼

[이재진 칼럼] 속물근성

속물근성의 영어 snobbery라는 단어는,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당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without nobility)라고 기재하여 작위가 없다는 것을 밝혔는데, 이를 줄여서 ‘s.nob’ 썼던 것이 관례가 되어 snobbery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던 것인데, 근대적인 의미는 거의 정반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알랭 드 보통은 현대에서 인간이 불안해하는 원인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고 있다. 타인, 특히 자기가 속한 준거집단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주변의 많은 속물들은 이러한 현대인의 불안을 부추기게 된다. 게다가 사회의 분위기, 매체들은 이를 강화한다. 부자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지위에는 도덕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으로, 게다가 사회진화론자들 입장에서는 적자생존 주장으로 개인들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키워갈 것이다.

과거에 비하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신분이나 지위에 따른 차별이 폐지되고, 자유와 복지가 주어지고 있지만, 타인을 의식하고 그에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을 부족한 인간으로 몰아가는 속물 욕망은 현대인을 더없이 비참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어쩌면 그 욕망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바꿔가며 타인과 닮아가려는 허망한 노력을, 우리는 끊임없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은 이와 같은 종류의 속물근성에 대하여, 탐욕과는 다른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잭슨 앤드 그레이엄이라는 회사가 만들었던 천박한 가구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던 것을 속물근성의 예로 들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도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형의 유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탐욕스러운 성형욕구가 있었던 것이 아닐 것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보편가치로 인한 희생자로 볼 수도 있을 터이다. 여기에는 방송매체도 한 몫을 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감정적 상처가 성형의 욕망을 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성형은 또 다른 성형의 욕망을 불러올 것이다. 성형을 통한 미의 추구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늪이라고 생각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타인의 모습을 흉내내기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있음을 자랑하는 것은, 뒤집어 보면 다른 면에서는 자신이 없음을 숨기는 것이고, 우월감은 결국 열등감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경제학에서 백로효과와 같은 의미로 속물 효과(snob effect)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제품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게 되면 그 제품의 수요가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닮고 싶었던 모습이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되고 나면, 이제는 혐오하는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닐까. 각자 자신의 개성을 아름답게 드러낼 수 있도록 자존감을 찾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불안을 제거하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재진 법무법인 정상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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