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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8. 용문사 은행나무
정치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8. 용문사 은행나무

천 년의 전설, 천 년의 사랑, 천 년의 기다림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 제공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 제공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용문사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마련이다. 가을이면 더욱 유명세를 타는 용문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크고 나이가 많은 나무이다. 한 자리에 우뚝 서서 1천 년의 세월 동안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뎌낸 은행나무의 당당한 자태를 우러러보면 이내 잡념이 사라진다.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는 높이 42m, 줄기 둘레 14m의 거목인데 수령을 1천1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고의 나무답게 흥미로운 전설도 무성하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맏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심었다는 전설과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랐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살아있는 화석,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공룡시대인 쥐라기 이전부터 지구에 존재해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2~3억 년 전의 화석식물인 은행나무가 거의 모든 생명이 사라진 빙하기에도 멸종되지 않고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환경 적응력 때문이다. 

몹시 춥거나 덥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라도 살아갈 수 있고, 아무리 오래된 나무라도 줄기 밑에서 새싹이 돋아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잎에는 항균성 성분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병충해가 거의 없다. 이런 특별한 능력 때문에 은행나무는 지구에 피붙이 하나 없는 1속 1종의 외톨이 식물이 되었다.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어 꽃필 때 암나무 주변에 꽃가루를 줄 수나무가 없으면 열매가 맺히질 않는다. 늦가을 바닥에 떨어진 노란 열매는 껍질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 때문에 새와 짐승들도 멀리해 이듬해 싹을 틔울 수 있었다. 오직 사람만이 씨를 먹거나 약재로 사용하는데 폐와 위를 깨끗하게 해주며, 진해ㆍ거담에 효과가 있다.

양촌 권근이 지은 정지국사비명
▲ 양촌 권근이 지은 정지국사비명

은행나무는 잎이 넓적한 모양이라 넓은잎나무(활엽수)에 속하는 것이 생각하기 쉽지만 나무 세포의 종류와 모양, 배열이 바늘잎나무(침엽수)와 거의 비슷해 바늘잎나무로 분류하고 있다. 은행잎을 책 속에 넣어두면 책에 좀이 먹지 않으니 옛날부터 우리 선비들이 사랑하지 않았나 싶다. 

 

한때 지구의 여러 대륙에 있던 은행나무 종이 끝까지 살아남은 곳이 중국이다. 최근 들어 양자강 하류의 천목산(天目山) 일대에서 자생지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들을 찾아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은행을 언제부터 심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 때 불교 전파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류는 불교를 도입하면서 활발해졌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 전진을 통해, 백제는 침류왕 원년에 동진을 통해 불교를 도입했다. 불교 전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 은행나무가 들어온 시기를 대략 4세기 말로 추정할 수 있다. 중국의 승려 아도화상이 경전과 불상을 고구려에 들여오면서 은행나무 씨앗도 함께 가져왔을 수 있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유교와도 인연이 깊은 나무이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杏壇)을 중국은 살구나무로 보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은행나무로 해석해 향교나 서원에 반드시 은행나무를 심었다. 오래된 서원에는 어김없이 은행나무가 있는 까닭이다. 

■마의태자와 경순왕의 비가
본명이 무엇인지, 죽은 때가 언제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마의태자에 관한 대부분 이야기는 사실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맏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에서 출발한 것이다. 마의태자는 신라 56대 임금 경순왕 김부(재위 927∼935)와 왕비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927년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신라 56대 임금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성정이 난폭한 견훤보다 왕건 쪽으로 마음을 기울고 있었다. 935년 3월 견훤이 장남 신검을 비롯한 형제들의 음모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태조 왕건의 도움으로 고려로 망명했다. 이러한 사태를 지켜본 경순왕은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신하들과 더불어 나라를 고려에 넘겨줄 것을 결의했다. 

이때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1천 년 사직을 가벼이 넘겨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 이상 죽일 수 없다며 시랑 김봉휴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했다. 이러한 부왕의 결정에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하직 인사를 올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풀뿌리로 연명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마의태자’라는 이름은 그가 베옷을 입고 일생을 보냈다는 데서 유래했다. 아우 범공도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누구의 선택이 올바른 길인지는 감히 누구도 말하지 못하겠지만, 왕건의 대접을 받으며 천수를 누린 아버지보다 고난의 길을 택한 아들들에게 마음이 더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용문사 들머리에 서 있는 한국독립운동발상지 비
용문사 들머리에 서 있는 한국독립운동발상지 비

용문산은 본래 미지산(彌智山)이라 불렸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졌다. 용문산 중턱에 있는 용문사는 649년(진덕여왕 3) 원효(元曉)에 의해서 창건되었다는 설, 신라 신덕왕 2년(913)에 경순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대경대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용문사 경내의 보리사지에 대경대사의 탑비인 ‘보리사대경대사현기’(국보 제543호)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대경대사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용문사 은행나무 오른쪽 산허리에 용문사정지국사탑 및 비(보물 제531호)가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한 정지국사 지천(智泉)의 유골을 봉안한 승탑과 그의 행적과 업적 등을 기록한 탑비로 1398년에 건립되었다. 승탑은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을 계승하고 있다. 양촌 권근(權近)이 지은 비는 탑에서 80미터 아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데, 왼쪽 아랫부분이 조금 깨져나간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겨레의 역사와 함께 한 세월
용문사 은행나무는 11천 년도 넘는 긴 세월 동안 온갖 어려움을 다 겪고도 여전히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 겨레는 지난 1 1천 년 동안 거란과 몽골, 일본과 청, 숱한 침략을 겪었으되 끝내 살아남았고 이 땅을 지켜냈다. 

 

용문사 일주문 옆에 자리한 양평의병기념비와 용문항일투쟁기념비 등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스님과 주민들의 애국심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1907년 8월 24일, 일본군이 천년고찰 용문사에 들이닥쳤다. 용문사를 근거지로 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서다. 헤이그 특사를 파견해 일제의 만행을 알리려 했던 고종 황제는 이 일로 강제로 퇴위 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이 전해지자 양평에서도 항일의병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다. 

양평출신 이연년 의병장과 조인환 의병장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해서 인근 지역의 파출소, 주재소 등을 습격했다. 이처럼 용문사는 항일의병항쟁의 총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던 구국의 공간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양평지역 의병들의 근거지였던 용문사를 습격해 불을 질렀다. 사찰은 이때 모두 불탔으나 은행나무는 홀로 살아남아 일제의 만행을 지켜보았다. 용문산 자락에 있는 상원사 대웅전 옆에 ‘양평의병전투지-상원사’라는 안내판은 그날의 일을 증언하고 있다. 

용문항일투쟁기념비
용문항일투쟁기념비

“…양평의병은 1907년 8월24일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가 용문사를 습격해오자 상원사로 후퇴해 항쟁했다. 이때 상원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흥미롭게도 1907년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활약했던 영평 의병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사진은 영국 기자 맥켄지가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세에 의해 나라가 분단되어 동족끼리 총을 겨누고 산 지 70년이 되었다. 다행스럽게 올해부터 남북이 화해와 협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11천 년 세월 동안 기다림의 미덕을 가르쳐준 용문사 은행나무는 가뭄과 폭염, 눈보라도 묵묵히 견뎌내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단풍을 물들이기를 반복해왔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1천 년을 묵언수행 중이다. 

이경석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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