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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율 칼럼] 이제 다시 기술이다
오피니언 이재율 칼럼

[이재율 칼럼] 이제 다시 기술이다

아시아의 경제발전을 이야기할 때 ‘기러기 편대이론(Flying Geese Model)’을 예로 들 때가 있다. 즉 기러기가 마치 편대를 이루며 날아가는 것처럼 기술발전이 가장 앞선 일본이 선두에 서고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이어 중국과 베트남 등이 기술적 분업구조를 이루며 성장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초기에 일본의 기술을 이전받으면서 경공업→중·화학공업→첨단IT산업으로 급속하게 발전을 거듭하다가 TV, 에어컨, 냉장고, 선박 등 완성품을 중심으로 일본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올해 2분기 세계 TV시장에서 우리 기업 점유율이 43%를 차지했다. 20%인 일본기업의 두 배가 넘는다. 스마트폰시장에선 우리 기업 점유율이 38.5%로 세계 1위다. 일본은 점유율이 6%에 불과하다.

일전에 만난 국내기업 간부가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가 실무자 시절, 부품을 구매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일본 부품업체들이 서로 오려고 합니다. 이제 완성품 분야에서 기술혁신은 일본이 우리를 따라잡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의 위상과 경쟁력은 과거와 확실히 달라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을 과소평가해서는 금물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기업은 부품·소재·장비 분야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매년 반도체 장비의 70%, 디스플레이 장비의 50%, 디스플레이 부품·소재의 40%를 일본기업에서 수입하고 있다. 또한 세계 1위인 일본의 강소기업은 1천500여개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일본에는 종합전자부품의 교세라, 세라믹콘덴서의 무라타 제작소처럼 독자적인 세계 유일의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즐비하다. 이에 반해 우리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중소·중견기업이 10여개도 안되는 실정이다.

첫 중국은 일반 제조업종은 물론 첨단 IT업종에서도 우리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스마트폰, 스마트TV와 같은 고기능성 제품에서는 아직 우리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TV, 에어컨, 냉장고, PC시장에서 중국의 약진은 눈부시다. 생산량을 기준으로 이미 우리 기업을 앞지른 지 오래다.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 강화는 곧 우리 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하락시키고 국내 조립공장의 중국이전을 촉진할 것으로 우려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품·소재·장비 분야 글로벌 중견기업, 강소기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 또 이러한 기업들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 둘째, 첨단기술형 벤처기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기술만 있으면 기업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자금조달 방안 마련과 이들 기업이 중소기업, 중견기업으로 클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셋째,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첨단R&D 클러스터를 확대해야 한다. 세계 500대 기업이 입주하고 우수한 인재를 손쉽게 공급할 수 있는 최상의 입지여건을 갖춘 글로벌 클러스터를 조성해야 한다.

더 이상 여유부릴 시간이 없다. 우리의 잠재성장률도 예전 같지 않다. 우리의 경쟁 상대 일본은 우리가 뚫기 어려운 기술의 장벽을 갖고 있고, 또 다른 상대인 중국은 기러기 편대이론에서 말하는 국제분업을 무색케 하는 블랙홀이다.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뛰어야 한다. 과학기술인 양성을 통해 기술혁신의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이공계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고 특성화고 출신이 대접받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비록 중국에 조립 완성품시장을 넘겨주더라도 부품·소재·장비 산업을 통해 비교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장기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면서 중국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이다.

이재율 경기도 경제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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