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고대 신라인 발자취와 키질석굴

당나라 시대 구자국(현재 쿠차)은 고대 신라, 고구려 역사와 관련이 깊다. 신라 승려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에 구자국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혜초 스님은 727년 11월 쿠차에서 숙박했다. “카슈가르(당시 소륵국)에서 한 달을 걸어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안서도호부가 있고 군대가 많다. 사찰과 승려가 많다. 소승불법과 대승불법이 공존한다. 고기, 파, 부추를 먹는다. 중국 승려는 대승불교를 믿는다”고 왕오천축국전에 기록돼 있다. 혜초는 20세인 724년 중국 광저우를 출발, 상인들의 배를 타고 천축으로 갔다. 돌아올 때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북로를 통해 당나라로 입국했다. 쿠차, 투루판, 둔황, 장안을 거쳐 오대산으로 돌아왔다. 신라 후기 대학자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시험(빈공과)에 합격하고 관리를 했다. 최치원이 귀국 후 쓴 향약잡영(현재 없어짐)에 오늘날 민속놀이인 북청사자놀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수만리를 걸어오느라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구나.” 서역에서 들어온 놀이극을 보고 신라에서 쓴 것이다. 북청사자놀이의 원산지가 당나라 시대 구자국이다. 아프리카에 사는 사자를 신라인들은 본 적도 없는데 사자놀이를 서역에서 가져와 민속놀이로 즐긴 것이다. 최치원은 서역에서 오현, 피리, 횡적 등의 악기가 신라와 고구려에 전해졌다고 적고 있다. 1천300년 전 실크로드의 동쪽 끝 신라와 구자국의 문화 교류를 알려주는 기록이다. 글로벌 마인드였던 당나라는 능력만 있으면 외국인도 고위직으로 출세가 가능했다. 고구려 포로의 후손인 고선지도 절도사로 출세했으니 당시의 포용정책을 짐작할 만하다. 쿠차는 안서도호부 절도사를 지낸 고구려인 후손인 고선지 장군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다. 고선지 장군이 쿠차에서 8세기 중반 군대를 이끌고 험하고 험한 파미르고원과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 연안보, 길기트 등을 점령하고 서역 35개국이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톈산산맥을 넘어가 ‘석국’(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을 점령했다. 이런 공로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군사령관인 안서절도사로 승진했다. 근세 유럽의 군사전략가들이 히말라야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군사작전을 펼친 고선지 장군을 높이 평가해 고선지는 근세 이후 유명해졌다. 쿠차를 출발해 외곽에 있는 2천년 전 한나라 시대 만든 봉화대에 들렀다.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은 뜸하다. 봉화대는 가로 4.5m, 세로 3.5m, 높이 12m 크기로 많은 부분이 무너져 당초 크기의 3분의 1 규모라고 하는데도 매우 크다. 한나라 시대 만든 봉화대를 이후 당나라가 고쳐 사용했다고 하는데 사막의 건조한 날씨에 오랫동안 잘 보존된 것이다. 봉화대 입구의 기념관에 봉홧불 연료로 사용하던 ‘갈대 다발’ 묶음을 전시하고 있다. 설명서를 읽어 보니 봉화 연기가 잘 보이도록 야생 늑대의 똥을 섞어 불을 붙였다는 설명이 재미있다. 정말 늑대 똥 연기가 멀리서 잘 보일지 궁금하다. 쿠차에서 서쪽 사막으로 70여㎞를 가면 절벽의 계곡에 키질석굴이 있다. 상인들이 쿠차로 가기 전에 하룻밤 묵었다 가는 지역이다. 아마 혜초 스님도 이곳을 거쳐 쿠차로 갔을 것이다. 키질석굴은 서기 3세기부터 9세기까지 600년에 걸쳐 조성됐고 석굴 260여개가 절벽에 있다. 키질석굴은 간다라 지방의 그리스풍 조각 양식이 많이 남아 불상 예술사의 중요한 유적이라고 평가해 큰 기대를 갖고 갔는데 완전 실망이다. 고대 그리스의 간다라 미술 양식, 고대 인도 양식의 벽화와 불상은 서구 약탈자들이 대부분 뜯어갔다. 석굴의 벽화는 거의 안 남았고 부처상도 거의 없는 텅 빈 동굴과 다름없다. 일부 남아 있는 불상도 얼굴과 눈이 크게 파괴돼 잘 보존된 둔황석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공군의 베를린 폭격으로 당시 ‘베를린 향토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키질석굴의 인류 유적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고 한다. 키질석굴 정면에 유명한 번역승 ‘구마라집’ 동상이 있다. 구마라집 탄생 1천950주년을 기념해 1994년 설치한 동상이다. 구마라집은 쿠차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 승려로 중국 불교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장안에 있던 전진 왕 부견이 구마라집의 명성과 천재성을 듣고 군대를 쿠차로 보내 384년 그를 납치해 왔다. 구마라집을 강제로 결혼시켜 도망을 못 가도록 협박하기도 했다. 구마라집은 중국에서 불경 번역에 평생을 바쳤다. 반야심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 많은 경전을 번역한 승려다. 우리에게 익숙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다)은 구마라집이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실재(욕계)와 비실재(공)’의 불경의 깊은 뜻을 중국어로 번역한 유명한 문장이다. 구마라집 이전에 산스크리스트어와 중국어 두 개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부처가 설법한 깊은 뜻이 중국어로 번역이 잘 안됐다. 전진 왕 부견은 불교 포교자로서 우리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이다. 부견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승려(순도)를 보내 불교를 소개한 왕이다. 고구려는 선진 문명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율령을 반포해 율령국가 체제로 변경한다. 소수림왕의 다음 왕인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뜻밖에도 키질석굴 10호 굴에 ‘한학련’이라는 연변 출신 조선족 기념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흥미가 있어 한학련 기념전 사진을 찍고자 하니 여직원이 사진 촬영을 못 하게 한다. 한학련은 1946, 1947년 키질석굴의 조사와 발굴, 키질석굴 벽화를 모사해 석굴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왜 이 멀리 타클라마칸사막 깊숙한 곳에 있는 키질석굴에 연변 출신 조선족이 매혹당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타클라마칸사막의 깊은 곳에 고대 신라와 고구려의 흔적이 있고 근세 인물 한학련까지 얽혀 있어 우리 역사와 실크로드의 인연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타클라마칸사막의 구자국 ‘쿠차’

동해항 출발 후 한 달이 지났다. 여행은 후반부로 접어들고 있다. 자동차 주행거리가 1만4천㎞를 지났다. 사막은 매우 넓어 중간에 협곡도 있고, 호수도 있고, 타림강도 흐른다. 길이 수십㎞의 쿠차 대협곡을 지나면 해발 1천500m에 보스텅 호수가 푸른 물을 출렁이고 있다. 오늘 이동할 거리가 길므로 보스텅 호수에는 안 들르고 스쳐 지나간다. 타림강은 쿤룬산맥의 빙하 녹은 물이 사막에서 발원해 사막에서 사라진다. 눈이 많이 녹는 봄, 여름은 수량이 많고 가을 겨울은 물이 거의 없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모습은 다양하다. 사막의 일부 구간은 사하(沙河), ‘모래바다, 모래강’이 있다. 400년경 13년에 걸쳐 천축을 다녀온 후 여행기 ‘불국기’를 남긴 법현 스님은 불국기에서 타클라마칸사막의 사하와 ‘카라부란(검은 모래바람)’에 대해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사하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해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해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가 죽었는지 모르는 죽은 사람의 마른 해골만이 길을 알려주는 표지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마르코폴로(1254~1324)는 700년 전 원나라로 가기 위해 서역남로를 통과했다. 그가 남긴 ‘동방견문록’에 “사막에는 악령의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홀려 길을 잃고 죽어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서운 재난을 피하도록 기도를 위해 실크로드 전 구간에 수많은 석굴을 만들었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남과 북의 폭은 400㎞가 넘는다. 현재 타클라마칸사막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두 개 설치돼 있다. 중국인들은 이 길을 ‘금(金)으로 만든 길’이라고 부른다. 사막 종단 도로 건설에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는 의미다. 인력 손실도 컸다. 반정부 독립운동 시위를 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위구르족 청년들이 고속도로 현장에 투입됐고 사상자가 많았다고 한다. 고속도로 주변 사막의 농경지 주변에 방풍림으로 심은 백양나무와 포플러가 자주 보인다. 농경지로 날아오는 모래를 막고 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나무들이다. 과거 타림분지와 타클라마칸사막 오아시스에는 작은 부족국가가 많이 있었다. 부족국가는 오아시스 크기에 따라 인구도 수백명, 수천명, 많아야 수만명이다. 11세기 이후 기후 변화로 300개 이상의 오아시스 촌락이 없어졌고 지금도 오아시스가 계속 사라진다고 한다. 많은 약소 부족국은 주위 강대국의 세력 다툼에 항상 희생을 강요당했다. 종주국이 바뀔 때마다 언어가 바뀌고, 종족이 바뀌고, 종교도 바뀌어야 한다. 타림분지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위치해 기원전부터 동서양 교역로였다. 중요한 무역로를 차지하면 통행세 징수, 조공 수입 등 나라 재정에 도움이 된다.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고대 중국(한나라 당나라), 유목국가(흉노, 돌궐족, 티베트족, 몽골족) 등 강대국의 싸움터였다. 서구학자와 탐험가 등이 19세기 말 타림분지, 타클라마칸사막의 유적과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서구 탐험가들은 신장지역이 발굴이 안 된 마지막 미지의 유물 보고로 생각하고 모여들었다. 19세기 유럽의 고고학자는 이집트 ‘왕가의 계곡’ 발굴, 메소포타미아 유적 발굴, 성서에 나오는 지역 발굴 등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 더 이상 중동지역은 탐험 대상이 없어졌을 때 다음 목적지가 타림분지 지역이었다. 서구의 탐험가들에게 타클라마칸사막의 사라진 오아시스 도시에 금과 보석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보석을 찾기 위한 탐험을 많이 했으나 귀중한 보석은 찾지 못했다. 그 대신 3000~4000년 전 미이라, 고대 언어로 된 문서, 불교 유적 등을 발굴했다. 위구르족이 많이 사는 서쪽으로 갈수록 공안의 검문이 심해지고 어떤 곳은 20분 이상 지체되기도 한다. 서쪽 도시인 투루판, 쿠차, 카슈가르 등 파미르고원으로 가는 도시들은 위구르족이 70% 이상 사는 지역이다. 촘촘히 설치된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직원들은 한국에서 온 차량을 처음 보기 때문에 번호판 사진을 찍고, 상급자에게 통과 여부를 보고하고 승인을 받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위구르족이 많이 사는 지역의 주유소는 군 막사처럼 철책으로 튼튼하게 보호하고 있다. 주유소는 군대나 교도소처럼 높은 쇠창살로 담을 쳐놓고 입구와 출구의 문이 별도로 설치돼 있다. 위구르족 테러범이 주유소를 점령해 방화 등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내에 있는 주유소는 기름 넣는 데 여권까지 검사한다. 주유소 입구에서 운전자만 남고 다른 탑승객은 내려서 약 50m 떨어져 있는 출구로 걸어가야 한다. 운전자가 기름을 넣고 출구로 나오면 일행은 기다렸다가 다시 차를 탄다. 7, 8월 사막의 땡볕 아래 위구르족 여자와 아이들이 주유소 밖 담장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이 측은하다. 주유소 내부 담에 몽둥이, 삽, 방망이 등 진압용 장비가 걸려 있어 살벌한 분위기다. 주민들 불편함은 무시되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체념하고 잘 순종하는 것 같다. 신장지역에 사는 위구르족은 약 1천200만명이다. 과거는 신장지역의 전체 16개 민족 중 위구르족이 45%를 점유하는 다수 인종이었으나 현재는 한족이 가장 많은 종족으로 추정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아스타나 공동묘지와 베제클리크 석굴

우리는 시간이 없어 투루판 고대 유적 ‘아스타나 공동묘지, 베제클리크 석굴’은 갈 수 없었다. 아스타나 공동묘지는 투루판 외곽에 있는 4세기부터 8세기 사이의 귀족 묘지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아스타나 고분 유물이 있다. 20세기 초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약탈해 온 아스타나 고분벽화가 조선총독부를 거쳐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중국의 창조신화에 나오는 ‘복희와 여와’를 표현한 그림도 있다. 하반신은 뱀의 형상이고 상반신은 ‘복희와 여와’인 벽화다.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1907년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근처에서 8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는 313년 둔황에서 발송됐고 수신지는 ‘사마르칸트’(현재 우즈베키스탄)다. 편지를 갖고 가던 사람이 분실한 편지 8통을 이곳에서 발견했다. 소그드문자로 쓴 8통의 편지는 313년 또는 314년 종이에 쓴 편지다. 종이는 후한시대 채윤이 발명했다. 이 편지는 종이가 발명된 지 300여년도 안 되는 이른 시기의 귀한 편지인 셈이다. 비가 적게 오는 건조한 지역이라 1천700년간 보존된 것이다. 편지는 지금은 사라진 소그드어로 씌어 있다. 소그드 상인의 부인(미우나이)이 둔황에서 수천㎞ 떨어진 사마르칸트에 살고 있는 친정 부모에게 보내던 편지다. 미우나이 여인의 편지는 “부모 말을 안 듣고 남편 따라 중국에 온 것을 후회한다. 남편이 빚만 남겨 놓고 도망가 딸과 함께 살기가 어렵다. 남편 친구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딸하고 둘이 살고 있는데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도망간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도 함께 발견됐다. “당신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개나 돼지의 아내가 되겠다. 가난해 딸과 함께 남의 양 치는 일을 도우면서 어렵게 살고 있다. 당신 빚 때문에 3년 동안 둔황을 못 떠나고 있다. 사마르칸트에 갈 여비 은화 20닢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다. 이 편지는 313년경 소그드 상인이 장안, 둔황, 사마르칸트 등 실크로드에서 광범위하게 국제 중계무역을 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화염산 아래 계곡에 유명한 베제클리크 석굴이 있다. 이곳의 중요한 벽화는 20세 초 독일과 러시아 도굴꾼이 거의 뜯어갔다. 독일이 약탈해 간 인류사적 유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유실됐다. 6년 전 베제클리크 석굴을 갔을 때 남아 있는 부처상 눈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모두 훼손돼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도 일본의 오타니 원정대가 베제클리크 석굴의 벽에서 뜯어온 불상 벽화가 있다. 석굴 벽의 벽화를 칼로 도려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한국에 있다. 베제클리크 석굴의 귀중한 유산한 지금은 사라진 ‘마니교’ 벽화다. 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의 마니가 창설한 종교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의 교리를 혼합한 것으로 선의 신과 악의 신이 투쟁하는 현실에서 선의 신이 승리하도록 선하게 살자는 취지의 종교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 쿠차를 향해 출발한다. 고대 중국은 이 지역을 ‘오랑캐 호(胡)’자를 붙여 호서(胡西) 지역이라 불렀다. 기원전 2세기 한 무제 때 장건은 서역의 월지국과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랍과 페르시아 등 다양한 서역 과일을 중국으로 가져왔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한자 호(胡)자로 시작되는 ‘호도, 호산(마늘), 호마(참깨)’ 등이 서쪽에서 왔음을 상징한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옛날 실크로드 상인들이 ‘침묵의 바다’, ‘죽음의 바다’라며 무서워한 곳이다.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땅’이라 한다.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비구름이 히말라야산맥과 쿤룬산맥에 막혀 비가 안 오는 지형이다. 높은 산맥에 쌓여 있는 만년설과 빙하의 눈 녹은 물이 이 지역의 생명수다. 쿠차로 가는 사막의 중간에 거대한 쿠차협곡과 타림강이 흐른다. 수십㎞의 긴 쿠차협곡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연상케 한다. 차는 해발 1천500m의 험준한 길을 굽이굽이 돌아 조심스럽게 달린다. 광대한 사막의 지형과 모양도 다양하다. 옛날 실크로드 상인과 구법승들이 사막의 높은 산맥과 협곡을 넘어올 때의 고난이 상상된다. 실크로드는 쭉 뻗어 있는 ‘선(線)’의 길이 아니고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점선의 ‘오솔길’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오솔길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오면 수시로 사라진다. 그래서 길을 찾기가 힘들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1877년 ‘실크’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는 비단길과는 거리가 먼 위험한 길임을 경험하고 있다. 실크로드는 상품 외에도 동서양의 문화, 종교, 전쟁, 질병이 이동했던 역사의 길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투루판의 ‘고창고성·교하고성’

투루판에 고창고성, 교하고성, 지하수로 카레즈 등 많은 유적이 있다. 현재 투루판 인구는 70만명이 넘는다. 타클라마칸사막 중심에 거대한 현대식 도시가 만들어졌다. 옛날 오아시스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다. 톈산산맥의 물을 끌어와 식수를 제공하고 주변 농지에서 포도, 옥수수 등 농작물을 재배한다. 투루판 인구의 70%가 위구르족이다. 이곳부터 서쪽은 위구르족이 한족보다 많다고 한다. 주요 건물의 상호, 도로표지판은 한자를 위에 크게 적고 아래쪽에 위구르 문자를 병기하고 있다. 투루판은 넓은 포도밭이 산재해 건포도 말리는 흙벽돌 창고를 도로 옆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투루판의 ‘씨 없는 건포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오후 4시 ‘고창(高昌)고성’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섭씨 44도였다. 고창고성은 6, 7세기 고창국의 수도이고 9세기 이후는 위구르 왕국의 수도였다. 고창고성 매표소 앞에 당나라 현장 법사가 죽장을 들고 서 있는 동상이 있다. 고창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지었으며 성곽의 길이는 5㎞다. 전동카트를 타고 폐허가 된 1천400년 전 고창고성 유적을 둘러봤다. 불탑의 초창기 형태인 ‘스투파’는 외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스투파 내부에 있던 불상은 이슬람교에서 우상숭배라는 명분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특히 불상의 눈이 집중적으로 훼손돼 있다. ‘눈’은 영혼의 상징이기에 눈을 파괴하면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다. 15세기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손들이 자기 선조들이 믿었던 불교 유적을 파괴한 것을 보면서 광신적 종교의 무서움에 전율이 느껴진다. 인도에서 시작한 탑(스투파) 양식은 중국, 한국으로 오면서 우리가 절에서 흔히 보는 아담한 ‘석탑’으로 변했다. 629년 가을 현장 법사가 고창국 왕에게 설법했다는 법당 유적은 최근에 복원해 깔끔하다. 고창 왕은 하미에 도착한 현장 법사의 소식을 듣고 투루판으로 모셔 와 국빈급 대우를 했다. 왕은 현장에게 고창국에서 불법을 설법해줄 것을 부탁했다. 현장은 단식투쟁을 하며 단호히 ‘천축으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타협해 한 달만 설법하고 떠나기로 했다. 대신 현장이 공부를 마치고 당나라로 귀국할 때 고창국에 들러 설법하기로 약속했다. 고창 왕은 현장이 떠날 때 동행할 승려, 인부, 말과 비단, 금은보석 등 여비도 듬뿍 주고 인접한의 왕에게 소개장을 써주는 등 현장이 천축으로 가는데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하지만 16년 후인 645년 현장이 귀국할 때 이미 고창국은 당나라에 의해 멸망(640년)한 후였다. 현장은 투루판에 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타클라마칸사막 남쪽 ‘서역남로’를 통해 귀국했다. 고창고성을 쌓은 흙벽돌은 버드나무 가지와 풀 줄기를 찰흙과 섞어 만들었다. 나무가 없는 사막 지역이니 흙이 건물의 주원료다. 고창고성 성벽이 쉽게 망가진 것은 이곳 농부들이 나뭇가지, 풀줄기가 들어간 흙벽돌을 가져다 부숴 비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창국은 왕 국문태가 대외관계를 오판해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고창왕은 실크로드 무역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유목민 강대국인 서돌궐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인근 영세 오아시스 왕국을 압박했다. 고창 왕은 수천㎞ 떨어진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핍박을 받은 오아시스 소국들은 멀리 장안의 당 태종에 구원을 요청했고 당 태종은 장안에서 수천㎞ 떨어진 투루판까지 군대를 파견해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켰고 아들인 고종은 서쪽의 강대국 서돌궐을 655년 정복했다. 당 태종은 645, 647년 두 차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패배했으며 그가 죽기 전 고종에게 향후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 것을 유언했다. 고종은 서쪽의 위협 세력인 서돌궐을 먼저 정복하고 서쪽을 안정시킨 후 동쪽 한반도로 군대를 보내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멸망시킨다. 이때 서돌궐을 무너뜨린 당나라 장군은 소정방이다. 소정방은 백제 침략군 사령관으로 부여에 와서 부여의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자기의 전공을 기록해 놨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일 서돌궐이 쉽게 멸망하지 않았으면 신라의 삼국통일이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창고성을 본 다음 오후 7시경 ‘교하(交河)고성’에 들렀다. 교하는 두 개의 강물이 교차한다는 의미다. 기원전 3세기 투루판에 있었던 차사왕국의 수도가 교하고성이다. 야르나이즈강 가운데 버들잎 모양의 길이 1천600m, 폭 300m의 작은 섬에 수도를 건설했다. 섬 양옆으로 강물이 흘러 성을 보호하는 해자(垓子) 역할을 한다. 약소국 차사왕국은 2천200년 전 강대국 흉노족과 한나라에 각각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 두 강대국에 줄타기 외교를 하다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 작은 오아시스 왕국이다. 어쨌든 2천년 넘게 긴 세월의 풍파를 지나고도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쓴 ‘춘망(春望)’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안에 봄이 오니 수목만 무성하구나. 시국을 생각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도 마음을 놀라게 하고. 봉홧불이 석달이나 계속되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에 해당한다.” 특산물 포도를 재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다. 1년 강수량이 20여㎜로 거의 비가 안 오는 지역인데도 투루판의 면적 70%가 포도 재배 지역이다. 투루판 농민은 지하에 수로로 연결된 ‘카레즈’를 만들어 농사를 짓는다. 수백㎞ 떨어진 톈산산맥의 물을 지하에 땅굴을 만들어 끌어온다. 해수면 이하 저지대가 투루판 면적의 80%가 넘는다. 저지대는 매우 건조해서 증발지수가 매우 높다. 수로를 지상으로 만들면 물이 투루판에 도착도 하기 전에 전부 증발한다. 지하 10m 깊이에 수로를 파 연결한 수로의 전체 길이가 5천㎞라고 한다. 기원전 7세기 이란으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수천년 동안 땅속에 수로를 판 셈이다. 지금도 계속 지하수로를 보수해 포도 재배와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낀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대운하, 카레즈’를 3대 토목사업이라고 자랑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하미에서 투루판으로... 험난한 여정

우리는 ‘서역북로’ 실크로드 길을 지나고 있다. 실크로드 코스 중 가장 험난한 지역이다. 신장(新疆)은 300여년 전 청나라 건륭제가 위구르족이 살던 서쪽 땅을 점령하고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청나라 영토로 편입한 지역이다. 신장의 위구르족에게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지하드 조직과 무슬림 군사 조직이 무기를 지원하면서 독립을 부추기고 있어 긴장이 맴도는 지역이다. 위구르족은 튀르크족(돌궐족) 계통의 종족으로 톈산산맥 북쪽 알타이산맥과 몽골고원에 살았던 종족이다. 전성기는 740~840년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을 통일한 종족이다. 현재는 없어진 ‘마니교’를 국교로 정한 유일한 국가다. 840년 왕족의 내분과 키르기스족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일부 위구르족 지배층이 톈산산맥을 넘어 타클라마칸사막의 투루판, 쿠차 지역으로 도망 와서 다시 ‘위구르 왕국’을 세우고 15세기경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중국은 조선족을 포함해 56개 소수민족이 있다. 위구르족은 현재 약 1천200만명으로 독립 의지가 가장 강한 종족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군대가 내전을 벌이던 1940년 카슈가르를 수도로 ‘동투르키스탄’ 국가를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 군대가 1949년 신장에 진입함에 따라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0세기 말에도 독립을 지지하는 대학생 시위가 카슈가르, 쿠차 등에서 발생하고 베이징 등 대도시에 자살 테러 등이 있었다. 우리가 통과하는 신장 지역은 위구르족 테러 방지를 위한 공안의 검문검색으로 마치 전쟁터를 통과하는 것처럼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미의 특산물로 ‘하미과’가 유명하다. 하미과는 참외와 수박의 중간 크기다. 우리가 먹는 멜론과는 다르다. 하미과는 황제의 진상품으로 유명해졌다. 적당한 당도,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과육과 향기가 독특하다. 하미과가 유명해진 것은 과거 당나라 황제의 식탁에 오른 후부터다. 임금이 어느 지역에서 보내온 것인지 묻자 환관은 엉겁결에 “하미입니다”라고 답한 다음부터 하미 주민은 이 과일을 장안으로 보내는 고생이 시작됐다고 한다. 오늘 우리는 하미에서 투루판까지 400여㎞의 타클라마칸사막을 지나야 한다. 타클라마칸사막은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어려운 곳’, 즉 ‘죽음의 사막’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사막이다. 면적이 33만~37만㎢로 남쪽은 쿤룬산맥, 북쪽은 톈산산맥으로 둘러싸인 ‘타림분지’ 안에 있다. 타클라마칸사막에서 가장 눈에 띄는 풍경은 도로 양옆으로 수십㎞ 이어지는 ‘풍력발전’ 단지다. 대량 설치에 따른 ‘규모의 경제’ 때문에 설치 비용이 우리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과거 타클라마칸사막의 악명 높은 바람을 ‘카라부란’(검은 바람)이라 했다. 사막에서 짐을 실어나르는 낙타는 상인들에게 ‘사막의 배’로 불린다. 낙타는 사람보다 모래폭풍 카라부란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울음소리를 낸다. 상인들은 낙타 옆에 숨어 무서운 모래폭풍 카라부란으로부터 생명을 지켰다고 한다. 낙타는 20여일간 물을 안 먹고도 살 수 있는데 보통 5일에 한 번 먹는다고 한다. 옛날 타클라마칸사막의 주민들은 어린 자녀들 손목에 작은 방울을 달아줬다고 한다. 바람이 불어와 아이를 모래로 덮거나 바람에 날려가면 아이를 찾기 위해서다. 주민들을 힘들게 하던 사막의 바람이 이제는 전기를 일으켜 돈이 되는 신재생에너지가 됐다. 오후 3시경 투루판 외곽에 도착하니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의 붉은 산맥이 보인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붉은 민둥산이다. 명나라 오승은이 16세기 쓴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지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다. 위구르어로 화염산은 ‘붉은 산’이라는 뜻이라 한다. 투루판은 과거 불의 도시 ‘화주(火州)’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연간 일교차가 78도나 된다고 한다. 투루판은 6, 7세기 ‘고창왕국’이 있던 지역이다.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 법사와 고창국 왕(국문태)의 만남(629년)으로 유명하다. 고비사막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하미에 도착한 현장 법사 소식을 고창왕이 들었다. 왕은 현장을 투루판으로 모셔 와 불법을 듣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서유기 소설에 손오공이 ‘우마왕’ 요괴와 싸우기 위해 ‘파초선’을 빌려와 화염산 불을 끄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오후 화염산 매표소에 도착했다. 7월 말 오후 늦은 시간임에도 기온이 섭씨 45도다. 투루판은 해수면 이하 저지대 분지여서 여름철 더위가 혹독한 지역이다. 화염산 매표소 근처에 가보니 높이 20m의 긴 장막으로 화염산을 가려 놨다. 돈 내고 입장권을 끊어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만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의 중국판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실크로드의 관문... 위먼관과 양관

실크로드 관문인 당나라 시대 유적인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보러 갔다. 위먼관은 둔황에서 90㎞ 서쪽에 있다. 당나라 시대 만리장성 서쪽 끝은 명나라가 만든 자위관(嘉峪關)보다 500여㎞ 서쪽인 이곳을 위먼관이라고 한다. 둔황을 조금만 벗어나면 메마른 허허벌판 사막의 연속이다. 위먼관으로 가는 중간에 사막에서 희귀한 자연현상인 ‘신기루’를 목격했다. 멀리 사막 앞에 파란 호숫물이 넘실대는 모습이다. 영락없이 푸른 물이 가득한 호수처럼 보인다. 필자와 아내를 비롯한 일행이 환호성을 지르며 신기루 현상을 자세히 보려고 차를 세우고 내려 사진을 찍는다. 빛이 투과되는지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다. 신기루라는 단어는 인생의 허무함과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할 때 ‘신기루 같은 인생’ 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월 하순 작열하는 사막의 위먼관으로 가는 길은 한산하다. 위먼관에 도착하니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위먼관’ 표지석과 ‘소반반성’ 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다. 매표소에서 위먼관 유적까지 불과 300여m 걷는데도 사막의 혹서에 땀이 줄줄 흐른다. 위먼관은 한나라, 당나라 시대 사용하던 최전방 국경 관문, 군대 주둔지, 사신이 묶어가는 ‘역참’ 시설이었다. 역참은 사신이나 전령 등에게 말을 빌려주고 식사와 숙박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가 ‘사주에 역마살(驛馬煞)이 끼었다’에서 역마살이라는 단어는 역참에서 유래한 것이다. 흙벽돌로 지은 위먼관 망루는 천 수백 년 세월을 잘 이겨내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위먼관의 텅 빈 내부 공간은 지붕은 없어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지붕으로 사용되던 나무로 만든 서까래와 대들보가 삭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위먼관을 감싸는 흙벽의 두께가 어림잡아 2m 이상 돼 적군이 공격해도 끄떡없을 것 같다. 한나라가 처음 만들고 당나라가 보수해 사용했으니 2천년은 됐을 것이다. 위먼관 바로 옆에 유목민들이 침입하면 둔황 사령부에 연락하는 ‘봉화대’ 유적이 들판에 남아 있다. 지금 이곳은 황량한 허허벌판이지만 당나라 시대에는 군인이나 여행객이 이용하는 오아시스와 군인 가족이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위먼관을 나와 70여㎞ 북서쪽으로 이동하면 ‘아단 지질공원’ 또는 ‘마귀성’이라고 부르는 지질공원이 있다. 마귀성 가는 길 옆에 중국 우주군 군대 기지의 긴 철조망을 지나간다. 자동차로 철조망 울타리를 통과하는 데 30분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미뤄 그 면적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본다. 마귀성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바람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기암괴석 바위 지형이다. 바람 불 때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이름이 마귀성이다. 마귀성 관람에 버스로 두 시간 소요된다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 관람을 포기했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중 하나인 양관을 해지기 전에 들러야 한다. 양관은 둔황에서 서쪽으로 70여㎞ 떨어진 국경 관문이다. 사막의 작은 산봉우리에 토성 형태만 남은 당나라 시대 양관의 흔적이 나타난다. 양관은 실크로드의 두 갈래 길,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양관은 과거 당나라에 들어오는 상인, 여행객 등이 입국할 때 출입증을 받고 출국할 때 출입증을 확인했던 관청이다. 매표소 입구에 한무제 때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 동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양관 건물의 정문에 설치된 현판 휘호가 ‘청뇌헌(聽雷軒)’이다. 한밤중에 멀리 사막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뜻이다. 양관의 남쪽에 눈 덮인 쿤룬산맥이 멀리 아스라이 보인다. 쿤룬산맥은 중국인들이 도교의 성지로 신성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쿤룬산맥 아랫길로 ‘서역남로’가 있다. 둔황에서 이틀을 보낸 후 아침 일찍 400여㎞ 서북쪽에 있는 하미(哈密)로 향한다. 성(省) 이름이 ‘간쑤성’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로 변경된다. 서쪽으로 갈수록 건조한 ‘로프사막’의 황량함이 아름다운 고독감과 비장함을 느끼게 만든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방으로 끝없는 광활한 사막만 펼쳐져 있다. 로프사막은 타클라마칸사막과 고비사막이 만나는 중간이다. ‘서역(西域)’은 둔황 서쪽 모든 미지의 땅을 의미했다. 이제부터 서역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오늘 숙박지 하미는 타클라마칸사막 북쪽의 ‘서역북로’가 지나가는 사막 도시다. 하미로 가는 400㎞의 사막길은 오아시스가 거의 없다. 어느 곳은 검은색 사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자갈이 많이 깔린 사막이 나타나기도 한다. 차량 밖 기온은 43도가 넘는다. 이런 혹서의 사막길을 물도 부족한 상태로 수십일 동안 걸어서 간다고 생각하면 그 어려움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대당서역기를 저술한 현장 법사가 서기 629년 가을 하미로 가는 사막길 어려움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인적은커녕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망망한 천지가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밤에는 귀신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5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못해 입과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1천400년 전 현장 법사는 하미로 갈 때 현지인 안내인을 고용해 갔다고 한다. 밤중에 안내인이 강도로 돌변해 위협했다. 현장 법사는 강도로 변한 가이드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주고 혼자서 사막을 걸어 갔다. 도중에 식수가 떨어져 사막에서 물 없이 5일을 걸었다. 현장은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늙은 말을 죽여 간을 먹었다고 한다. 현장 법사, 혜초 스님의 신발은 가죽으로 덧댄 간단한 샌들일 것이다. 현장 법사의 서역으로 가는 그림을 보면 짐을 가뜩 실은 지게를 메고 한 손에 작대기와 염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신장위그루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고속도로에서 중국 공안(경찰)의 검문 횟수가 잦아지고 강도가 높아진다. 신장의 위구르족 테러 문제가 중국에 얼마나 큰 문제인지 피부로 느낀다. 하미까지 400여㎞의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동안 여섯 번 공안의 검문을 받았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둔황석굴과 혜초 스님 ‘왕오천축국전’

둔황 막고굴(莫高窟) 천불동(千佛洞). 천불은 ‘많다’는 의미다. 부처님 모신 석굴은 남쪽 492개, 승려들이 살았던 북쪽 240여개 등 전체 석굴 수는 730여개다. ‘종교와 신(神)’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문화다. ‘신과 종교’는 인류가 창조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라는 말이 있다. 신을 발명한 인간은 신도 인간처럼 선물을 좋아하고 화려한 집에서 살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제물과 공물을 신에게 바치고 많은 돈을 들여 신이 사는 화려한 성전을 건설했다. 자기가 믿는 신이 최고의 신이라 생각하고 다른 신을 믿는 종족과 전쟁을 벌이고 이교도를 박해하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종교의 길’이다. 서쪽에서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 등이 동쪽 중국으로 왔다. 막고굴의 앞면은 작은 개천이 흐르고 뒤쪽은 밍사산 절벽이다.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양옆은 포플러 나무가 무성하다. 이곳 개천의 진흙으로 불상을 만들고 물은 승려들의 식수원이다. 실크로드 여행에서 꼭 한 도시만 가라고 한다면 둔황석굴을 가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둔황석굴의 시작은 서기 366년 ‘낙준’이라는 떠돌이 승려가 밍사산 옆을 지나다 관세음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보고 절벽 바위에 굴을 파고 수도를 시작한 것이 시작이다. 역대 왕조가 492개의 석굴을 조성했는데 당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었다. 당나라 시대 225개, 수나라 97개, 토번(티베트) 시대에 70개가 조성됐다. 둔황석굴은 세 가지 문화적 가치가 있다. 첫째는 진흙으로 빚은 수많은 부처와 보살 소상(塑像)이 약 1천700개라고 한다. 부처 소상은 무게와 크기 때문에 약탈을 면해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부처, 보살 등 소조불(塑造佛)은 근처 개천의 진흙으로 만들었다. 장인들이 진흙에 볏짚, 양털, 꿀, 광물질 등을 섞어 만든 것으로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다. 두 번째는 모든 석굴의 벽면과 천장을 화려한 그림으로 채색한 엄청난 벽화다. 석굴 전체 벽화 길이가 5m 폭으로 계산하면 50㎞에 달한다고 한다. 부처 소상과 벽화의 안료는 공작석(초록색 염료), 청금석(푸른색 염료) 등 서역에서 수입한 값비싼 안료로 만들었다. 세 번째는 17호 장경동 석굴에서 발견된 4만여권의 장서다. 17호굴(관리상 일련번호)은 ‘도서관 석굴’ 장경동(藏經洞·Library Cave )이라 부른다. 둔황석굴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00년 17호 장경동 발견 때문이다. 장경동 석굴은 세 사람이 주역이 있다. 청나라 말기 도교 도사인 왕원록(왕도사),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다. 900년 동안 숨겨져 있던 장경동 17호 석굴을 발견한 얘기는 매우 흥미롭다. 왕도사는 19세기 말 청나라 군인 출신으로 제대 후 도교 도사가 된 사람이다. 1900년 장경동 석굴 발견 당시 왕도사는 폐허 수준인 16호 석굴에서 조수 한 사람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왕도사는 조수를 크게 꾸짖는 일이 발생했다. 조수는 담배를 피우면서 화를 삭이다가 16호 석굴 벽면에 담뱃대를 툭툭 털었는데 벽에서 울림이 있는 공명 소리를 듣게 된다. 왕도사와 조수는 이상하게 생각해 벽을 허물었더니 벽 속에 작은 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 4만여점에 달하는 각종 종교의 경전, 계약서류, 편지, 비단 그림 등이 들어 있었다. 석굴의 폐쇄된 연도는 조사한 결과 1002년이다. 9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타임캡슐이 개봉된 것이다. 인도에 있던 영국인 고고학자 겸 탐험가 스타인은 둔황에서 많은 고문서가 발견된 소문을 들었다. 그는 둔황에 와서 1907년 왕도사를 설득해 7천여점의 문서를 사 갔다. 이후 고문서 소문을 들은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도 1908년 둔황에 도착해 역시 7천여점의 문서를 사 갔다. 장경동 서적은 한자, 산스크리스트어, 티베트어, 소그드어, 호탄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작성된 고대 문서의 타임캡슐이다. 희귀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경전도 있고 히브리어로 된 기독교 기도문 등 다양한 종교자료가 있다. 사서(史書)에 없는 서민들의 실상, 없어진 고대 문자, 사라진 마니교 등 경전 등이 귀중한 ‘둔황학’의 배경이다. 1908년 펠리오가 가져간 서적 중에 혜초 스님(704~787)이 쓴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돼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제목도 없고. 저자 이름도 없고, 앞뒤 표지가 없는 6천여자의 요약본 서류였다. 펠리오는 이 문서를 연구해 1909년 당나라 혜초 스님의 여행기라는 사실을 논문에 발표했다. 1915년 일본 학자 가카쿠스 준지로가 혜초의 국적이 당나라가 아닌 ‘신라’ 승려임을 밝혔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723년경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의 오천축(동서남북과 중앙)과 중앙아시아 40여개국을 다녀온 여행기다. 중국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동인도로 갔다가 귀국은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사막 등을 거쳐 육로로 왔다. 왕오천축국전은 간략한 자료지만 1천300년 전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국가의 풍속, 종교,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다. 원본은 상중하 3권으로 추정되는 데 분실됐다. 혜초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동북부 등을 다녀온 최초의 한민족 모험가이자 세계인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300년 전 20대 신라 젊은이가 혈혈단신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의 무전(無錢)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오늘날 세계로 향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멋진 모델이다. 둔황석굴에 신라 관련 석굴 두 개가 더 있다. 61호 석굴의 벽화 ‘오대산도’에 신라 사찰 송공사와 신라인 5명의 그림이 있다. 355호 석굴은 조우관을 쓴 신라인 2명이 나온다. 경주에서 사신으로 장안에 갔던 관리들이 왕족의 부탁으로 멀리 둔황에 간 흔적이다. 신라인들이 실크로드 중심도시 둔황까지 진취적으로 왕래했던 역사적 흔적을 확인하고 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국제 중계무역 중심지 ‘둔황’으로

유목민처럼 매일 넓은 서쪽의 광야를 횡단하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동차의 주행거리 기록을 보니 9천㎞를 지나왔다. 숙소인 주취안(酒泉)에서 출발, 만리장성과 자위관을 뒤로하고 ‘둔황(敦煌)’으로 향한다. 산 정상이 하얀 눈으로 덮인 치롄산맥이 바로 가까이 보인다. 오아시스 주변의 밭은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려 옥수수, 해바라기를 심은 곳이 많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황량한 사막과 고원이 나타난다. 둔황 가는 중간의 위먼(玉門)시에 들렀다. 오아시스 도시 위먼도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도심의 8차선 도로 폭은 매우 넓고 가로수는 울창하게 자라 도시계획이 매우 잘돼 있다. 도심 중앙의 공원은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어 물을 가득 저장하고 있다. 위먼은 서역의 옥이 들어오는 문이라는 의미다. 서역에서 최고의 명품 옥이 생산되는 곳은 타클라마칸사막 남쪽 도시 ‘호탄’이다. 중국인들의 옥에 대한 사랑은 역사가 깊고 대단하다. 전설에 의하면 옥은 하늘에 사는 용(龍)의 눈물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전한다. 중국에는 옥에 대한 고사(古史)가 많다. 2천400년 전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화씨(和氏)라는 사람이 좋은 옥이 들어있는 원석을 발견해 왕에게 바친다. 화씨는 나쁜 옥을 바쳤다는 오해로 발목이 잘리는 형벌까지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원석은 가공돼 최고의 옥으로 태어난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이다. 화씨벽은 세월이 흘러 조나라에 오게 된다. 당시 강대국 진나라는 조나라의 화씨벽을 갖고 싶어 5개 성과 바꾸자고 강압적인 제안을 한다. 진나라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약소국 조나라의 재상 인상여가 화씨벽을 가져다가 진나라 소양왕에게 바친다. 옥을 받은 소양왕은 약속한 5개 성을 내줄 생각이 없다. 이때 인상여가 왕에게 옥에 매우 작은 흠(하자·瑕疵))이 있다고 말한다. 흠 자국을 알려준다며 왕에게서 옥을 돌려받은 인상여는 옥을 강제로 빼앗으면 벽에 던져 부수겠다고 재치를 발휘해 옥을 무사히 갖고 귀국한다. 사자성어 완벽귀조(完璧歸趙)의 유래다. 현재도 자주 사용하는 완벽(完璧), 하자(瑕疵), 무가지보(無價之寶) 등의 성어가 생겼다. 2천200년 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화씨벽으로 옥새를 만들었다. 진시황은 재상 이사로 하여금 옥새에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하리라)’ 여덟 글자를 새기게 했다. 이 옥새는 진시황의 손자가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에게 바친다. 화씨벽으로 만든 옥새는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 당나라, 5대10국까지 약 1천200년을 사용하다 10세기 중반 분실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왕이 갑자기 죽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면 왕위 승계는 ‘옥새’의 인수인계에서 시작한다. 둔황에 가까이 가면서 왼쪽에 따라오던 치롄산맥은 없어지고 밍사산(鳴砂山)의 모래 산맥이 나타난다. 우리는 오늘 하서회랑의 끝자락 400㎞를 달려와 오후 늦게 둔황에 도착했다. 먼저 내일 오전 방문할 ‘둔황 천불동(막고굴)’ 입장권을 미리 구입했다. 둔황은 실크로드 무역로에 있는 도시 중 가장 큰 국제 중계무역 도시다. 서쪽에서 온 소그드 상인, 페르시아 상인과 장안에서 온 중국 상인이 둔황에서 교역을 했다. 실크로드 3대 간선인 ‘서역북로, 서역남로, 천산북로’ 세 길이 둔황에서 만나고 둔황에서 헤어지는 교통의 요충지다. 오후 6시경 석양 무렵에 둔황 외곽 밍사산과 ‘월아천’에 도착했다. 밍사산은 바람이 불면 고운 모래가 날리면서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금빛 고운 모래가 바람이 불 때마다 움직여 능선 모양이 수시로 바뀐다고 한다. 월아천(月牙泉·웨야취안)은 모래사막 안에 있는 작은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 호수다. 월아천은 수천년간 기후변화, 가뭄 등이 많았는데 한번도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량이 많을 때의 3분의 1 수준이다. 7월 하순 햇볕이 작열하는 모래사막에서 물이 솟아나는 자연 현상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다. 2천년 전 한나라 때부터 월아천에 여행객을 위한 숙소가 있었다. 현재는 도교 사원으로 사용하는 ‘월천각’이다. 아름다운 건물 월천각의 3층 난간에서 월아천을 내려다보며 사진 찍는 관광객이 무척 많다. 7월 하순 밍사산 사막의 낮 기온은 40도가 넘고 모래가 내뿜는 열기로 화상을 입기 십상이다. 관광객은 오후 5시 이후 기온이 떨어질 때 찾아온다. 석양의 모래언덕은 햇빛을 반사해 금빛으로 찬란하다. 오후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은 밍사산 모래언덕 위에 올라가 해가 지는 사막의 낙조(落照)를 즐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필자와 아내는 인파가 적은 월아천 건너편 외떨어진 지역으로 갔다. 아내는 잽싸게 양말을 벗고 월아천 호숫물에 발을 담그고 기념촬영을 하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오후 8시 반 늦게 밍사산에서 내려왔다. 오후 9시경 둔황 시내 한국 식당을 찾아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식당 주인은 조선족 부부인데 압록강 건너편 도시 지안(과거 고구려 수도·국내성)에서 왔다고 한다. 10년 넘게 장사하고 있는데 한국 단체 손님이 일주일에 5~6팀은 온다고 한다. 몽골에서 삼겹살 점심을 먹었는데 중국에서 처음으로 삼겹살, 소주, 김치찌개 등으로 식사를 하니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식당 주인에게 물값이 비싼지 물어봤다. 주인은 만주에 살 때보다 저렴하고 훨씬 풍족하게 물을 사용한다고 답한다. 주변 사막에서 농사 짓는 농민들도 물값 걱정은 안 한다고 한다. 시내를 다니다 보면 관개수로에는 물이 철철 넘치고 물을 저장하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곳곳에 있다. 사막에서 물은 생명의 근본인데 중국 정부의 막대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로 사막 도시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음을 본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만리장성 최서쪽 관문 ‘자위관’

우리는 간쑤성 하서회랑 황토고원 길을 달렸다. 약 2천200년 전 한나라가 서쪽 변방에 만들었던 ‘하서(河西) 4진’의 도시를 통과했다. 우리가 지나가는 고속도로 옆에 600년 전 만든 만리장성 흔적이 나타났다 없어졌다를 반복한다. 근세 총기류의 발달로 성벽의 용도가 사라져 오랜 세월 방치했기 때문에 흔적만 남아있다.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서역 오아시스의 도시들은 전쟁의 역사를 겹겹이 가졌다. 전쟁의 유산인 만리장성, 봉화대 등은 유명한 관광자원으로 후손들이 돈을 벌고 있다.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전쟁과 싸움’의 유전자가 정말 있는지 20세기 초반 서구의 진화인류학자들이 오지에 살고 있는 원시 종족을 대상으로 장기간 전쟁 실태를 관찰했다. 문명의 혜택이 가장 적은 뉴기니아 오지 산악지대의 종족들,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 사막에 살고 있는 미개한 종족의 전쟁을 조사하는 것이다. 결과는 2, 3년 간격으로 보복 전쟁이 계속 발생함을 기록하고 있다. 식량 부족, 신부 약탈, 부족원 살해 등에 의한 보복과 약육강식 본성이 전쟁 원인이다. 하서회랑을 지나는 7월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고 푸르렀다. 250여㎞를 달려 낮 12시경 만리장성 최서쪽 관문 자위관(嘉峪關)에 도착했다. 관광객을 많이 받기 위해 입장은 2부제로 하고 있다. 주간 입장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30분, 야간 입장은 오후 7시30분부터 밤 12시까지 두 종류의 입장권을 팔고 있다. 자위관 입장료는 110위안(2만원)이다. 중국 문화유적 입장 절차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주차장이 수㎞ 멀리 외곽에 설치돼 있다. 주차장에서 전동카트, 버스 등를 타고 입구에 도착한다. 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한동안 걸어가야 정문이 나온다.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중간에 많은 노점상이 장사를 한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입장권을 끊는 데 30분 이상 걸렸다. 입구에서 5분 이상 카트를 타고 이동한 다음 카트에서 내려 걸어가면 ‘천하제일웅관’ 자위관 현판이 나타난다. 청나라 이후 자위관은 오랫동안 폐허였는데 1987년 중국 정부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재건축한 모습이 오늘의 자위관이다. 성벽 위 폭은 말 다섯 마리가 동시에 다닐 수 있다. 사막에서 유목 기마병이 쳐들어오는 고비사막 서쪽을 향해 총안(銃眼)이 설치돼 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산둥반도 보하이만 바닷가에 접하고 있다.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의 자위관까지 길이는 3천700㎞, 5천㎞ 등 자료마다 달라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최근 중국 자료는 모든 지선, 심지어 고구려의 요동성 등 포함 2만1천㎞라고 발표했다. 현재 남아있는 만리장성 유적은 전체의 20% 미만이고 50% 이상은 흔적도 없다.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지구의 건축물이 만리장성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중국 정부도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고 한다. 한나라 시대부터 만리장성은 한(漢)족과 이(夷)민족의 경계선, 실크로드 상인들의 출입 허가 국경, 죄를 지은 사람을 변방으로 추방하는 경계선이다. 자위관 망루에 서서 멀리 사막에서 말 타고 달려오는 유목민 기마병, 안도의 한숨을 쉬는 실크로드 상인, 구법승 등을 상상해 본다. 자위관 서문 밖은 자갈이 많고 딱딱하고 메마른 사막이 서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현재는 많은 낙타꾼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돈을 벌고 있다. 우리는 만리장성의 자위관을 둘러보고 동쪽과 서쪽의 초소로 이동했다. 자위의 서쪽 끝에 있는 제1초소는 어떻게 생겼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궁금증이 풀렸다. 자위관에서 7㎞ 서쪽으로 가면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제1돈’(제1 초소)이 있다. 1초소 옆에 협곡이 있고 협곡의 깊이는 30여m, 폭은 80m 이상으로 천연의 방어벽이다. 사막에서 말 타고 침략한 기마병들이 협곡을 건너는 장비가 없다면 건너기 어려워 보인다. 이곳 제1초소가 사실상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다. 자위관 동쪽에 ‘헌벽산성’이 설치된 석산이 있다. 최근에 새로 보수한 성벽이 헌벽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 중턱 망루까지 걸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가파른 성벽을 올라가면서 38도 무더운 날씨와 맞물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숙소는 자위관 근처에 있는 주취안(酒泉) 시내 호텔이다. 주취안은 한무제가 만든 하서 4진의 하나다. 술샘의 뜻, 주취안 지명의 유래는 2천200년 전 한무제가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곽거병 장군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술을 보낸 것에서 시작한다. 명장 곽거병은 황제의 하사주(下賜酒)를 받고 전투를 함께한 병사 전체와 먹기 위해 고민했다. 곽거병은 황제의 하사주를 근처 샘에 부은 다음 모든 장병에게 샘물을 나눠 마시도록 했다. 술 몇 병으로 전체 장병의 사기를 높였다는 고사에서 ‘술샘’, 주취안 지명이 유래했다. 현재도 주취안의 술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해서 저녁에 반주로 ‘酒泉’ 상표의 술을 마셨다. 향이 좋은 술은 아마 치롄산맥의 빙하 녹은 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곽거병 못지않게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광’ 장군이 있다. 이광 장군의 ‘중석몰촉(中石沒鏃)’ 고사성어가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록돼 있다. 이광은 활을 잘 쏘는 장군이다. 이광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에 누워 있는 호랑이를 보고 활을 쏴서 맞혔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바위에 화살이 박혀 있다. 이광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화살을 쏘아 보니 화살이 바위에 튕겨나간다. 바위에 화살이 꽂혔다는 중석몰촉은 정신을 집중하면 어려운 일도 이룰 수 있다는 고사성어다. 전쟁이 만들어 낸 술샘과 중석몰촉의 고사를 생각하며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황사 발원지 ‘황토고원’·천혜 요새 ‘하서회랑’ 만나다

천수에서 오전 9시 간쑤(甘肅)성 성도 란저우(蘭州)를 향해 출발한다. 300여㎞ 이동 후 란저우에 일찍 도착했다. 란저우 가까이 접근하면서 황토고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해발 1천~2천m인 황토고원은 40만㎢(남한의 4배)로 매우 넓다. 수천만년 동안 쌓인 황토층의 두께는 평균 50~80m다. 우리나라 봄철 황사(黃砂)의 발원지가 이곳 황토고원과 몽골의 고비사막이다. 황사는 봄철 편서풍을 타고 수천㎞ 떨어진 우리나라로 온다. 황허(黃河)강은 란저우시 중심부를 흘러간다. 황허강의 색깔은 짙은 황토색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황허강은 길이 약 5천400㎞로 중국인들은 ‘어머니 강’이라고 부른다. 황허강변에 어머니 강을 상징하는 ‘모자상’을 설치해 놨다. 우리는 모터보트를 타고 황허강에서 동심의 뱃놀이를 즐기고 찻집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황허강에서 오후 시간을 즐겼다. 란저우의 호텔에서 아침식사로 유명한 특산물 ‘란저우 우육면’을 주문했다. 중국은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의 특성상 지역마다 지역 이름을 붙인 면이 발달했다. 다음 목적지는 570㎞ 떨어진 장예(張掖)다. 간쑤성은 동서 1천65㎞, 남북 550㎞로 매우 큰 성이다. 간쑤성 중간에 900㎞에 이르는 ‘하서회랑(河西回廊) 또는 하서주랑(河西柱廊)’이라고 부르는 천연의 통로가 있다. 하서회랑의 왼쪽은 치롄(祁連)산맥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고 오른쪽은 황토고원이 길게 벽을 형성하고 있다. 하서회랑 길은 실크로드 상인, 구법승, 군인, 외교사절 등이 당나라 장안(長安)에 들어가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통로다. 하서회랑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길이다. 이 길목을 차지하기 위해 한나라와 흉노족의 전쟁, 당나라와 티베트, 돌궐족 등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서회랑의 폭은 넓은 곳은 100여㎞, 좁은 곳은 10여㎞다. 중국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인 자위관(가욕관)을 하서회랑의 폭이 가장 좁은 곳에 설치해 유목민의 침략에 대비했다. 하서회랑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황토고원의 풍경과 색상이 계속 바뀐다. 란저우에서 장예로 가는 중간에 고구려 포로의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가장 출세한 안서절도사를 지낸 고선지 장군이 태어난 우웨이(武威)를 지나간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668년 멸망 후 약 20만명이 포로로 잡혀와 변방 여섯 곳에 분산됐다. 고구려 포로의 후손들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당나라 군대에 입대해 공을 세워 장교나 장군이 되는 것이다. 고선지의 아버지는 당나라 군대의 하급 군인이다. 고선지는 아버지의 군 주둔지인 우웨이에서 태어났다. 고선지는 20세에 벌써 유격대장으로 승진하고 당나라 현종 시대인 30대에 안서절도사로 승진한다. 고선지는 안서부절도사 시절 1만명의 적은 병력으로 749년 빙하로 뒤덮인 5천m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티베트) 군대 기지를 급습해 점령하고 서역 35개 국가가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이러한 공로로 30대에 군사령관인 안서절도사로 승진했다. 고선지라는 인물이 각광받게 된 것은 유럽의 군사학자들이 기원전 3세기 로마제국과 전쟁을 위해 알프스산을 넘어간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프랑스의 나폴레옹보다 험난한 산악 군사작전을 펼쳤다고 평가함에 기인한다. 755년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자 토벌군 부사령관으로 참전 중 누명을 쓰고 756년 30대 젊은 나이에 처형된 풍운아다. 차창 밖에서 황토고원의 다양하고 기이한 색상의 지형을 자주 만난다. 장예 근처에 오랜 세월 바람과 시간이 만든 칠채산 지질공원이 있다. 오후 늦게 도착해 칠채산 지질공원의 전망대로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붉은색의 황량함은 외계인 영화에 나올 법한 이색적인 경관이다. 중국의 국가 공원은 5급, 4급, 3급으로 나뉘어 있고 5등급 국가 공원이 입장료가 가장 비싸다. 칠채산은 4등급으로 입장료가 90위안(약 1만7천원)이다. 비싼 입장료임에도 모든 관광지가 중국인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다. 하서회랑의 주요 도시는 기원전 2세기 한무제가 개척한 ‘하서4진’이 기원이다.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은 한나라 무제가 만든 하서4진이다. 칠채산을 보고 장예 숙소에 도착하니 늦은 시각이다. 다음 날은 장예에서 200여㎞ 이동해 만리장성 인접한 주취안(酒泉)에서 묵을 계획이다. 오후 일찍 도착해 만리장성의 최서쪽 관문인 자위관을 관람할 계획이다. 자위관으로 가는 고속도로 옆 황야에 무너져가는 만리장성 성벽, 초소가 있던 잔해를 자주 만난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14세기 만든 토성이 600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다. 명나라는 몽골족 등 유목민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1372년부터 성벽을 새로이 만들었다. 도로 왼쪽은 6천~7천m에 달하는 치롄산맥의 눈 덮인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인다. 치롄산맥의 빙하 녹은 물이 이 지역의 생명수다. 중국은 치롄산맥의 계곡마다 많은 댐을 설치해 물을 모으고 오아시스 도시의 생활용수, 농업용수 등으로 공급하고 있다. 주취안으로 가는 휴게소에서 랴오닝(遼寧)성이 고향인 조선족 가족 여행객을 만났다. 한국말을 잘하는 교포를 만나니 반갑다.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출발해 3개월 일정의 자동차 여행 중이라고 한다. 소득 상승에 따른 중국 중산층의 여행문화를 보는 것 같다. 향후 중국의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자동차 여행객으로 가득 찬 도로를 미리 보는 것 같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문명·교류의 길 따라... 서안에서 ‘비단길’ 출발

중국 역사상 13개 왕조의 수도였던 서안(西安)에서 이틀 동안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안까지 7천500㎞를 달려왔다. 이번 여행 거리의 약 3분의 1을 이동한 셈이다. 7월 서안의 여름 햇살은 무척 뜨겁다. 우리는 서안성에서 아침 일찍 고대 실크로드 상인들이 다녔던 ‘천산남로’ 길로 출발한다. 실크로드(비단길)는 비단처럼 아름답거나 편안한 길이 아니다. 1877년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고대 중국과 로마의 가장 대표적인 교역품이 비단인 점에 착안해 ‘실크로드(Silk Road)’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붙였다. 도로라기보다는 오아시스, 사막, 산맥을 통과하는 ‘오솔길 흔적’이라는 표현이 맞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면 길은 없어진다. 실크로드 개척자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장건이고 실크로드 전성기는 당나라 시대다. 실크로드는 당나라와 동로마제국 사이의 무역, 종교, 철학, 문화의 소통 길이다. 동서 교역에서 소그드 상인(사마르칸트 등 상인)들이 서기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500여년간 활약했다. 실크로드는 ‘육상 실크로드’, ‘해상 실크로드’ 크게 두 길이 있다. 육상 실크로드는 세 길이 있다. ‘서역남로, 천산남로, 천산북로’다. 우리는 서안에서 출발해 하서주랑과 둔황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길 천산남로를 통과할 것이다. 오전 9시 호텔을 출발, 서안성 서문에 있는 실크로드 기념 조형물에서 출정식을 한다. 실크로드 조형물은 쌍봉낙타를 타고 서역으로 떠나는 승려, 소그드 상인, 출정하는 군인 등을 실물의 2배 크기로 1992년 설치한 것이다. 오늘 저녁 숙박지는 산시(陝西)성 서쪽의 ‘천수(天水·현 중국어 표기 톈수이)’다. 서안 외곽의 고속도로 톨게이트 이름이 진시황의 궁전 이름인 ‘아방궁’이어서 눈길을 끈다. 관중평야를 지나며 크고 작은 도시, 평야의 무성한 옥수수, 밀, 유채밭, 농촌 마을이 보인다. 작은 도시에도 30, 40층 고층 아파트가 많다. 제대로 분양이 되는지 궁금하다. 현재 중국은 미분양 아파트 수가 1억여채로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서안을 조금 벗어나면 강태공의 낚시터로 유명한 ‘위수(渭水·웨이수이)’강을 옆으로 지나서 간다. 3천년 전 주나라 문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은 짐승을 한 마리도 못 잡고 우연히 위수에서 낚시하는 강태공을 만났다. 문왕이 “낚시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걸었다. “물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습니다”라고 강태공이 대답했다. 그때 강태공 나이 72세다. 처음 만난 문왕과 강태공은 긴 대화 끝에 의기투합해 재상으로 등용된다. 강태공의 전략으로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중국을 이뤘다. 학창 시절부터 꿈꿨던 실크로드 종단을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하고 있으니 감개무량하다. 실크(비단)라는 이름 때문에 ‘무역의 길’이 강조되지만 불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마니교 등 ‘종교의 길’, 전쟁하러 출발하는 ‘전쟁의 길’, 페스트 등 질병이 오갔던 ‘재난의 길’이다. 당나라 장안에서 출발한 상품의 최종 목적지는 이스탄불, 페르시아, 이집트 등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다. 반대로 서쪽에서 온 상품은 당나라, 신라, 일본 등이 목적지다. 실크로드 상인들은 중간에 재난과 위험을 피하고 장사가 잘돼 돈을 벌게 해달라며 실크로드 중간 곳곳에 사찰과 석굴을 건축해 신에게 기도하고 많은 공물을 바쳤다. 신라의 계림(경주)에서 출발, 서해 당진항에서 중국 산둥반도를 거쳐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는 길도 실크로드 지선(支線)의 하나다. 신라시대 청해진(현재 완도)에서 당나라와 신라, 일본까지 국제무역을 했던 해상왕 장보고도 실크로드 무역상의 한 사람이다. 실크로드의 개척자는 2천2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장건이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는 흉노족의 계속되는 침략과 공물 요구 때문에 전쟁을 준비한다. 한무제는 흉노족의 침략으로 서쪽으로 쫓겨간 월지족이 흉노족에 원한이 많다는 정보를 접한다. 기원전 139년 서쪽의 월지족과 군사동맹을 체결, 흉노족을 양쪽에서 협공하라는 한무제의 명령을 받고 장건이 서역으로 출발했다. 장건은 서역으로 가는 길에 흉노족에 붙잡혀 1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한다. 장건은 흉노족의 내분을 틈타 탈출해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근처에 살던 월지족 왕을 만난다. 그런데 월지족 왕이 흉노족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 장건은 13년 만에 빈손으로 귀국했다. 장건은 월지족과 동맹은 못 했지만 복숭아, 수박, 포도, 무화과 등 서역 과일을 한나라에 가져오고 한혈마(汗血馬)고 불리는 천마(天馬)가 대원국(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에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흉노족은 한나라의 공격과 종족의 내분으로 멸망한다. 서쪽의 흉노족을 굴복시킨 한무제는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 고조선의 후예인 평양의 위만조선을 기원전 108년 멸망시키고 낙랑군 등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다. 낙랑군은 서기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의 낙랑군 함락과 관련해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읽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로맨스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낙랑군에는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소리가 나는 북(자명고)이 있어 고구려는 평양성 함락이 어렵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에게 자명고 파괴를 부탁하고 호동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고국을 배신한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어 낙랑군이 함락됐다는 얘기다. 한반도의 고대 역사는 실크로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생각한다. 오후 천수에 도착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인 ‘맥적산 천불동 석굴’을 관람할 계획이다. 천수에 도착했을 때 비가 심하게 내린다. 맥적산 석굴은 산 중턱에 설치된 계단을 타고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비 때문에 계단이 미끄러워 폐쇄됐다. 맥적산 석굴은 유목민 왕조인 북위가 5세기에 조성을 시작한 오래된 석굴이다. 바위벽에 촘촘히 있는 석굴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문화혁명(1966~1976년) 시대에 석굴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망가져 홍위병 침입이 어려워 보존이 잘됐다고 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당나라 수도 장안과 명나라 서안

■ 당나라 장안(長安)과 명나라 서안(西安) 명나라 시대 ‘평요고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산시성(陝西) 성도 서안(西安·현 중국어 표기는 시안)으로 향한다. 오늘은 500여㎞를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관중평야에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옥수수는 식용유, 사료, 바이오연료, 가공식품 등 다양한 수요가 있는 작물이다. 중국 사람은 ‘책상다리’ 빼고는 모든 것을 튀겨 먹는다는 유머가 있다. 엄청난 식용유 생산 원료와 돼지, 오리 등 사료로 필요한 것이 옥수수다. 얼마 전까지도 ‘장안의 명물, 장안의 화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자 ‘안(安)’자는 ‘평화’의 의미로 장안(長安)은 ‘장구한 평화’의 의미다. 500여㎞를 달려 오후 늦게 천년 고도(古都) 장안에 도착했다. 내륙도시 장안의 7월 하순 날씨는 습도가 매우 높고 무덥다. 서안(西安)’ 명칭은 1370년 명나라가 몽골족 원나라를 쫓아내고 서안성을 만들 때 ‘서경(西京)’(서쪽 수도)과 ‘장안(長安)’의 앞뒤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서안은 중국 13개 왕조가 수도로 삼은 역사가 겹겹이 쌓인 도시다. 당나라 시대 장안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분해 지었는데 당나라의 내성(內城)이 현재의 서안성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지은 현재의 서안성 면적은 당나라 시대 장안 면적의 10분의 1 규모다. 서안에 남아 있는 당나라 시대 건축물은 현장법사를 위해 세운 ‘대안탑, 소안탑’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대 건축물은 ‘서안성과 종루’ 등이다. 서안성 성곽 길이는 12㎞다. 서안성의 폭은 자동차 4대가 동시에 다닐 정도로 넓다. 성 위에 자전거를 빌려주는 가게가 많고 기념품 노점상, 간식 가게도 많다. 성벽 위 12㎞는 자전거 타기에 좋은 코스다. ■ 진시황제 병마용 서안 동쪽에 있는 진시황 병마용을 보기 위해 오전 8시 출발한다. 숙소에서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여름방학이라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과 학부모 등 가족 여행객이 미리 도착해 줄을 서 있다. 1974년 농부가 발견한 후 벌써 50년이 지났다. 세계 유명 관광지 모두가 ‘과잉 관광(Over Tourism)’으로 고통을 받는데 이곳이 최악의 인구 과잉 관광지다. 1인당 입장료가 180위안(3만5천원)으로 과거보다 많이 올랐다. 중국인 4인 가족의 경우 약 14만원으로 비쌈에도 관광 인파가 몰린다. 인산인해로 입장하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렸다. 병마용 근처에 진시황 무덤이 있다. 진시황의 무덤은 높이 88m의 거대한 토산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지하에 수은이 흐르는 강이 있고 침입자를 막기 위한 살상용 장치가 있다. 수많은 처첩, 시녀가 순장됐다. 미래 과학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개봉하지 말라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로 진시황의 무덤은 발굴을 안 하고 있다.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10년도 안 돼 망한다. 역사가 사마천은 진나라 단명(短命)에 “성공에 취하면 망하고, 사람을 얻으면 흥한다”고 사기에 기술했다. 중국을 뜻하는 영어 China는 진나라 ‘Chin’(진)에서 유래됐으니 진나라 이름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 점심은 명나라 시대 유적인 종루 옆 만두전문점 ‘동아반점’에서 만두 코스로 했다. 12종류의 만두가 코스로 나오는데 우리는 양이 적어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 현장법사의 대안탑, 자은사 당나라의 현장법사 유적이 있는 대안탑과 자은사에 들렀다. 현장 스님은 당 태종 때 승려로 17년간 인도를 다녀온 후 ‘대당서역기’를 쓰고 귀국 후 많은 불경을 번역한 위대한 승려다. 천축(인도) 출발 당시 임금은 당 태종인데 서쪽의 돌궐족과 당나라가 전쟁 중이라 외국으로 출국을 금지하고 있었다. 현장은 26세인 629년 장안을 몰래 출발해 인도로 향한다. 현장은 대단한 기억력과 메모광이다. 머물거나 도착한 곳에 대한 정보를 메모하고 기억했다가 대당서역기에 상세하게 적어 놨다. 현장은 645년 천축에서 불상, 불경, 사리 및 중국에 없는 귀한 물품 520상자를 가지고 귀국했다. 당 태종은 대단한 안목의 왕이다. 현장에게 17년 동안 여행기를 기억이 있을 때 완성토록 명령했다. 현장이 기술하고 제자 ‘변기’가 받아 써서 3년 만에 완성된 책이 ‘대당서역기’다. 1천400년 전 135개 오아시스 국가의 기록을 남겨 과거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 고원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장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당 태종의 아들인 고종이 649년 ‘대안탑’을 건립하고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자은사’를 건립했다. 1천400여년 오랜 세월을 이겨내고 우뚝 서 있는 대안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초등학생 시절 감동을 줬던 소설 ‘서유기’(명나라 오승은 소설)에서 현장법사는 ‘삼장법사’로 나온다. ‘삼장’은 세 가지 불법 ‘경장, 율장, 논장’ 3장에 능통하다는 불교계 최고 찬사다. ■ 회족거리 먹자골목 저녁식사하러 재래시장인 회족(回族) 거리로 갔다. 양고기 꼬치구이를 굽는 매캐한 연기와 관광 인파가 생동감이 넘친다. 이곳의 특산물인 생소한 ‘뼝뼝면’을 시켰다. 매콤하지만 비벼 먹는 맛이 괜찮다. 뼝뼝면 값은 30위안(5천800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양꼬치 굽는 향기에 이끌려 샤슬릭 식당에 들렀다. 작은 양꼬치 10개에 30위안이다. 맥주 안주로 최고인데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 식당은 술을 안 판다고 한다. 회족은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에 중국에 온 아랍 상인, 페르시아 상인들의 후손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장사하러 와 눌러앉은 상인의 후손이다. 중국에 약 1천만명이 살고 있으며 서안에 약 6만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하루 종일 서안 시내를 돌아다녔다. 유럽인, 미국인, 일본인 등이 거의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중국과 미국의 무역전쟁, 중국의 간첩법 시행 등 여러 원인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명나라 고성 ‘평요고성’으로

■ 중국 변방 ‘다퉁’의 ‘K-푸드’ 한국 식당 현공사를 다녀와서 다퉁(大同) 시내 숙소에 늦게 도착했다. 다퉁의 한국 식당을 검색해 보니 ‘수얼가’(서울식당)라는 식당이 나온다. 중국의 변방에 한국 식당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수얼가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시켰다. 김치찌개라기보다는 설탕 국물에 가깝다. 배가 고파 웬만하면 먹을 텐데 저녁식사는 포기했다. 식당의 젊은 여자 주인에게 “한국 음식 조리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한국 음식을 과거 먹어본 적이 있냐”고 물어봤다. “한국 음식 조리법은 인터넷에서 배웠다. 한국 음식을 먹어보거나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10년 전인 2014년 한류가 유행할 때 무턱대고 한국 식당을 개업했는데 현재까지 10년 동안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K-푸드’로 먹고사는 사람이 내몽골 변방에 있다니 한류의 힘이 대단하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양고기 꼬치구이로 저녁을 대신했다. 유목지대와 가까워 많은 노점상이 양고기 샤슬릭 구이를 팔고 있다. 샤슬릭 요리에 들어가는 향신료 양념이 타는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거리에 자욱하다. 일요일 아침 일찍 산시(山西)성 다퉁을 떠나 약 400㎞ 남쪽 ‘평요’로 향한다. 화북평야의 넓은 들판에 옥수수밭이 끝이 없다. 화북평야에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가 있다. 과거 ‘오고타이 칸’(제2대 몽골 황제)이 금나라를 정복했다. 오고타이 황제는 농사짓는 농부를 쫓아내고 화북지방에 초지(草地)를 조성해 양, 말, 소 등을 키우도록 부하에게 지시했다. 당시 재상이던 야율초재가 농토를 보전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초지를 만들어 양과 소를 키우는 것보다 나라 재정에 도움이 된다고 황제를 설득해 초지 조성을 철회했다는 일화가 있다. 왕에게 간언을 잘하는 신하와 간언을 잘 듣는 왕이 만나면 성공의 역사를 만든다. 평요로 가는 고속도로 양옆은 넓은 폭의 가로수숲이 계속 조성돼 있다.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만리장성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가 없다. 현재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20% 미만이고 50% 이상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북방 유목민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가 축성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확장 연결한 것이 최초의 만리장성이다. 현재 관광객이 보는 베이징 근처 바다링(八達嶺), 하서회랑의 자위관(嘉峪關)은 명나라가 세운 것이다. 중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에 따라 등급을 붙여 4등급, 5등급 휴게소라는 표시를 도로변에 붙여 놨다. 우리는 시설이 좋은 5등급 휴게소 간판을 보고 들어간다. 우선 5등급 휴게실은 시설이 크고 식사 메뉴도 다양하다. 특히 화장실이 청결하고 사용료를 안 받는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통해 휴게소를 청결하게 만들려는 인센티브 정책이다.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장前 관세청장 ■ 타이항산맥 우타이산과 혜초 스님 험준한 타이항산맥을 종단해 남쪽으로 달린다. 고속도로 왼쪽에 중국 4대 대승불교 성지의 하나인 우타이(五臺)산이 나타난다. 우타이산은 문수보살이 현신하는 산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반야경을 편찬한 보살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이 피부병을 고치러 전국을 순회하던 중 강원도 오대산 상원암 가는 계곡에서 동자로 현신한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을 고쳤다는 설화도 있다. 천축을 다녀온 신라의 구법승 혜초 스님(704~787년)은 우타이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했다. 혜초 스님의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둔황석굴에서 발견됐다. 책 제목 ‘왕(往)오(五)천축국’은 ‘동·서·남·북·중앙’ 5개 천축(天竺) 지역을 다녀왔다는 뜻이다. 혜초는 16세에 신라 계림에서 당나라에 유학 와 스승의 권유로 20세인 723년 중국 광저우에서 해로(海路)로 인도로 갔다. 혜초는 4년간의 천축 여행을 마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북로, 둔황, 시안(西安)을 거쳐 우타이산 건원보리암으로 다시 돌아왔다. 필자는 혜초 스님이 1300년 전 중국으로 귀환했던 길을 역순으로 여행할 계획이다. ■ 명나라 시대 축성한 ‘평요고성’ 오후 늦게 평요(平遙)고성에 도착했다. 평요고성은 1370년 명나라 때 축성한 성으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이라고 한다. 성곽의 길이는 6㎞, 성 위는 마차 두 대가 다닐 정도의 넓이다. 구운 벽돌을 쌓아 만든 성이다. 성곽에 올라가는 요금은 100위안(1만9천원)으로 매우 비싸다. 성곽 입장료가 비싸니 성곽 위에 올라가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변방에 위치한 관계로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게 파손이 안 돼 명, 청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도시라고 한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뎌낸 고건물, 상가, 관청, 민가 건물 등이 고풍스럽다. 우리는 청나라 시대의 여관인 평요객잔에서 묵는다. 청나라 전통가옥의 구조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관 바로 옆에 공자를 모시는 문묘와 대성전 건물이 있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 건물은 저녁식사, 전통문화 공연 등 상업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요고성 안에 3천700채의 상가와 민가가 있는데, 모두 명, 청 시대에 만들어진 고(古)건물이다. 긴 세월 동안 전란과 화재를 피하고 잘 보존한 점에 경외감이 든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시내 중심에 현(縣) 청사가 있고 청사에서 현감과 형방, 포졸 등이 죄인을 취조하는 공연을 한다. 현청사 안은 현감 근무실, 군대 연병장, 감옥, 식당 등 과거 시설을 잘 보존하고 있다. 현청사 입장료는 40위안(약 8천원)으로 비싸다. 중국은 관광업무를 담당하는 중앙부처 이름을 종전 ‘여가국’에서 ‘관광여가국’으로 변경했다. 중국의 관광지 입장료가 비싼 이유는 과거 ‘외국인은 비싸게, 내국인은 낮게’ 이중적 차등 요금제를 적용했는데 현재는 내국인 입장료를 외국인 요금으로 인상해 통일했다고 한다. 재정 수입 확대를 위한 자본주의 경제의 단면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중국 내몽골에서 산시성 ‘다퉁’으로

중국 내몽골 ‘엘렌하오터’를 출발해 남쪽으로 460㎞ 떨어진 산시성 ‘다퉁(大同)’으로 향한다. 시베리아와 몽골고원 통과까지 약 5천500㎞를 달려왔다. 오늘부터 중국 영토의 실크로드 시안, 난저우, 둔황, 투루판, 쿠차, 타클라마칸사막, 카슈가르, 파미르고원을 지나갈 것이다. 오늘 중국 내몽골 자치성 고비사막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7월 고비사막의 한낮 기온은 매우 높다. 광대한 사막의 하늘은 높고 푸르다. 우리나라 봄철 황사(黃砂) 발원지를 지나고 있다. 놀라운 것은 460㎞에 이르는 고비사막의 고속도로 양옆으로 무성한 ‘가로수 숲’이 조성돼 있다. 한 그루씩 심은 가로수가 아니라 넓은 폭으로 ‘가로수 숲’을 조성해 놨다. 소나무, 포플러나무, 백양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도로 옆에 넓게 숲처럼 조성돼 있다. 멀리서 물을 끌어와 매일 물을 줘야 나무가 자라는데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다. 사방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넓은 사막의 텅 빈 하늘에 새 한 마리 안 보인다. 몽골고원, 고비사막의 원시적 자연의 기(氣)를 흠뻑 받으며 달린다. 황량한 사막의 단순함과 광대함은 세속의 마음을 비우게 만들고 우리 마음도 자연의 일부로 순화되는 것 같다. 몇 시간씩 텅 빈 광야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내몽골 고비사막을 400㎞ 이상 지나 산시성 다퉁 가까이 왔다. ■ 뉴욕타임스 선정 세계 10대 위험한 건물, ‘현공사’ 숙소로 가기 전 다퉁시 외곽에 있는 타이항산맥 헝산의 ‘현공사’로 향한다. 오늘은 토요일 오후다. 현공사 입구부터 중국인 관람객이 인산인해다. 뉴욕타임스가 2010년 ‘세계에서 가장 기이하고 위험한 건물 10선’을 선정했다. 헝산 현공사는 피사의 사탑,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등과 함께 선정돼 유명해졌다. 1400년 전 선비족이 북위 시절에 세운 오래된 사찰이다. 토요일이라 중국인 관광객이 너무 많아 절 목조건물까지 못 올라가고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만 봤다. 당시 이곳 다퉁은 흉노족 이후 몽골고원의 강자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수도였다. 중국이 오랑캐라고 부르던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불교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현공사는 유불선(儒佛仙) 세 종교의 성인인 공자, 부처, 노자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세 사람 성인을 한곳에 모시고 기원하면 복을 세 배 받을 것이라는 유목민의 단순한 생각이 엿보인다. 절을 지탱하고 있는 현공사 나무 기둥은 30m의 가느다란 나무를 오랫동안 기름에 절여 만들었다. 기둥이 낡으면 수시로 교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위 절벽 하단의 빨간색 ‘장관(壯觀)’ 글자는 당나라의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태백(李太白)이 이곳에 와서 쓴 글씨라고 한다. 이태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음미해 본다.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타이항산은 고사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전설이 깃든 산이다. 아주 먼 옛날 태행산과 왕옥산 산속에 사는 90세 노인이 높은 산을 넘어 다니는 것이 불편해 산을 평평하게 깎아 길을 내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람이 노인을 우공(愚公), 즉 어리석은 사람이라 불렀다. 노인은 동네 사람의 비웃음에 굴하지 않고 내가 못 하면 아들, 손자, 손자의 손자 등 계속하면 언젠가 길을 낼 수 있다고 말하며 산을 깎기 시작했다. 태행산 산신령이 우공의 우직함에 감동해 산을 옮겨 주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라 한다. ■ 비단이 ‘로마’로 가게 된 역사적 사연 로마의 명장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저)’의 비단 사랑은 대단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당시 최고급 사치품인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위신을 과시했다. 당시 로마의 귀족 여인 사이에 비단옷이 대유행이었다. 속이 비치는 비단옷을 많이 입어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은 풍기문란을 걱정하며 여성의 비단옷 착용을 금지했으나 소용 없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비단이 어디서 오는지, 누에가 뽕잎을 먹고 만드는지를 몰랐다. 어떻게 비단이 험난한 대륙을 지나 로마제국 수도로 팔려 갈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건은 한나라 건국자 유방의 평성의 치욕을 뜻하는 ‘평성지치(平城之恥)’다. 한 고조 유방은 항우를 토벌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영웅이다. 기원전 200년 한 고조 유방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러 ‘평성’(현재의 다퉁)에 왔다. 당시 흉노족 선우(왕) ‘묵특’은 4만 군사로 맞선다.묵특의 유인계에 빠진 유방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했다. 유방은 묵특선우의 부인에게 뇌물을 바치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해 목숨을 부지했다. 패배한 유방은 흉노족과 형제지간(한나라가 형, 흉노가 아우) 화친을 맺는다. 유방은 공주를 흉노왕에게 시집(‘화번공주’의 시초)보내고 매년 엄청난 양의 비단, 은화, 곡식 등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한다. 흉노족이 받은 비단은 초원의 길을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로마제국까지 간 것이다. 한나라에서 흉노족에 시집간 화번공주 중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이 있다. ‘왕소군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취해 날갯짓을 멈추고 땅에 떨어졌다’는 비유가 유명하다. 화공이 뇌물을 안 준 왕소군 초상을 추하게 그려 흉노왕에게 시집가도록 선발된 것인데 떠나는 날 임금이 절세미인임을 알고 초상화를 잘못 그린 화공을 처벌한 일화로 유명하다. 2천여년 전 흉노족의 비단 역사를 생각하며 다퉁에 도착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중국 내몽골 변방 도시 ‘엘렌하오터’

■ 중국 입국의 복잡한 행정절차 중국 최변방 고비사막 국경도시 ‘엘렌하오터’에서 중국 통과를 위한 복잡한 행정절차를 마쳐야 한다. 중국은 외국인의 자동차 여행을 금지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경우 제한적으로 허가한다. 우리는 서울에서 출발 전에 중국 컨설팅회사와 접촉, 우리 자동차의 중국 입국 허가 절차를 미리 마쳤다. 중국 컨설팅회사를 통해 5개 중앙부처(총참모부, 공안, 해관총서, 외교부, 문화관광부)의 허가를 받아 놨다. 컨설팅회사를 통해 중국 자동차 번호판 발급, 자동차 등록, 자동차보험 가입 등 여러 절차를 마쳐야 한다. 중국은 ‘국제운전면허증’이 통용되지 않는 나라다. 컨설팅회사를 통해 중국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여행 준비 과정에서 국가 간 자동차의 자유로운 여행을 지원하는 ‘제네바국제조약’이 있고 우리는 ‘가입국’, 중국은 ‘미가입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중국은 외국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와 소수민족 인권 및 환경 문제 등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외국인의 자유로운 자동차 여행을 통제한다. 입국허가 당시 사전에 우리 차가 지나갈 코스를 중국 정부에 신고했다. 우리 차량이 신고 지역을 벗어나는지 감독하는 감독관 한 명이 내몽골 국경부터 탑승해 함께 여행해야 한다. 이 사람은 ‘류 선생’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조선족이라 의사소통이 자유롭다. 중국 영토를 벗어날 때까지 류 선생의 급여, 숙식비 등 제반 비용도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 입국허가, 운전면허증 발급 등 중국 입국 비용이 상상 이상으로 거액이다. 옛날 실크로드 상인이 오아시스를 통과할 때 통행세를 냈던 것처럼 중국에 통행세를 낸다고 생각하고 있다. 엘렌하오터에서 한국에서 자동차부품 ‘터보’를 가져온 조선족 박씨를 만났다. 이미 울란바토르에서 중고 부품을 교체했기 때문에 터보는 예비용으로 가져가기로 한다. 박씨의 ‘터보’ 부품 공수 여비를 우리가 부담한다. 중국 입국 다음 날 중국 세관에서 자동차를 찾아왔다. ‘자동차 번호판’, ‘운전면허증’도 나왔다. 이틀 동안 쉬면서 빨래도 하고 시내에서 발 마사지도 받는다. 컨설팅회사의 한 사장이 베이징에서 이곳으로 와 통관 업무를 대행해 줬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오랜만에 푸짐한 중국 요리와 바이주를 먹는다. 컨설팅회사 사장에게 “한국은 여러 명의 남자 중에 여자가 한 명 있으면 여자를 ‘홍일점’이라고 한다. 중국은 이런 상황에서 여성을 어떻게 부르나”라고 질문하자 ‘봉황’이라 한다고 했다. 사장은 오랫동안 외국인 자동차 여행 업무를 해 왔는데 여성 입국자는 내 아내가 처음이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험난한 장거리 자동차 여행 참가에 존경한다고 말한다. ■ 공룡화석 보고 ‘고비사막’ 고비사막은 공룡화석의 보고다. 지금은 척박한 사막이지만 아마 2억~3억년 전에는 초목이 우거지고 많은 공룡이 살았던 지형으로 추정된다. 엘렌하오터 외곽의 ‘공룡 지질학박물관’은 1920년대 러시아 지질학자들이 공룡화석을 발굴했던 장소인데 중국이 대규모 야외 공룡 박물관을 만들었다. 수십마리의 공룡뼈가 뒤엉켜 있는 어마어마한 공룡화석 매장지와 공룡알 화석이 인상적이다. 변방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고비사막의 오지여서 평일 관람객은 필자와 아내뿐이다. 공룡에 관심이 많은 서울에 있는 어린 손자들이 생각난다. ■ 내몽골(중국)과 외몽골(몽골)의 차이점 몽골이 독립하기 전인 100년 전 ‘자민우드’와 ‘엘렌하오터’는 같은 몽골족 마을이다. 현재 두 지역은 국경 철책선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됐다. 중국 땅은 나무를 많이 심어 녹음이 울창하고 시내 도로가 6차선 뻥뻥 뚫리고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도시의 가로수, 공원의 나무는 고무 호스로 하루에 몇 번씩 물을 흠뻑 준다. 400㎞ 이상 멀리서 물을 끌어와 변방의 고비사막에 초현대식 오아시스 도시를 건설해 놓아 두 도시가 비교된다. 시내에서 대낮에도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가 자주 난다. 처음에는 폭탄 터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결혼식, 생일날, 개업일 등 번성하라는 의미로 밤낮으로 폭죽을 터뜨린다. 주민들은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큰 해바라기 씨앗을 잘도 까먹는다. 몇 사람만 있어도 목청이 크고 소란스럽다. 언어가 ‘사성 구조’여서 목소리가 크다고 한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 군대가 많은 당나라 군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아랍인들은 중국인 포로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처음 듣고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구글, 카카오톡, 네이버 등 외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가 서울에서 가져간 무전기 ‘워키토키’는 반경 5㎞까지 통신이 된다. 워키토키로 서로 간 연락을 하기로 했다. 간첩죄가 엄하게 적용된다는 소문에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SNS는 적게 사용할 생각이다. 중국 여행을 동행하는 감독관 류 선생은 지린성 출신 51세의 조선족 남자다. 류 감독관은 우리들 여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정부 당국에 보고한다고 한다. 류씨 앞에서 중국 정치 얘기, 시진핑 주석 얘기 등 예민한 것은 입도 벙긋하지 말아야 한다. 여행하면서 남의 감시를 받는것은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심리적 스트레스다. 아내는 중국의 심한 감시에 신경이 날카롭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을 통과하다

광대한 고원과 사막 ‘서두르면 라싸에 못 간다’ 몽골 느림의 지혜 느껴 사막의 대륙성기후 용감한 전사 만들어 고려말 침략∙약탈 아픔도 몽골의 마지막 밤 변방 자민우드서 숙박 곳곳에 한국 식당 눈길 ■ 몽골고원을 통과해 중국으로 향하다 우리 차는 몽골고원을 통해 중국으로 내려가고 있다. 몽골의 영토는 동서 2천500㎞, 남북 1천400㎞에 이르는 광대한 고원과 사막으로 이뤄져 있다. 몽골고원은 해발 고도 1천m에서 1천500m 사이 건조한 고원 지역이다. 영토는 넓은데 인구는 350만명 수준으로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다. 넓은 영토에 사는 사람에게 공간, 시간의 개념은 좁은 영토에 사는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광대한 사막에서 삶의 지혜는 느림, 기다림, 여유로움이다. ‘서두르면 라싸에 못 간다’는 티베트 속담이 있는데 광활한 대지에 살아가는 느림의 지혜다. 과거 초원과 사막의 유목민은 사계절 초지를 이동하며 살기 때문에 정주민 국가처럼 도시가 없다. 당연히 성곽이나 건물 등 역사적 유적도 없다. 연간 강수량이 20~50㎜이고 주로 여름철에 비가 오기 때문에 사막에 초지(草地)가 곳곳에 형성돼 있고 초원에는 유목민 ‘게르’ 천막이 자주 나타난다. 가끔 소나 말들이 도로를 무단횡단하기 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가축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현재 몽골은 지하자원 매장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몽골의 자원을 탐사한 일본 기술자는 “몽골인들은 보석과 황금이 묻힌 땅 위에 오두막집을 짓고 산다”고 비유했다. 미래 잠재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다. 사막의 정중앙에 길게 뻗어 있는 길은 환상적인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다. 거대한 평원, 나무 한 그루 없는 600여㎞ 먼 거리의 단조로운 광야의 경치를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 고비사막의 황량한 생태계 우리 차는 남쪽의 고비사막으로 들어선다. 몽골의 남쪽과 중국의 북쪽에 있는 고비사막은 동서 1천400㎞, 남북 800㎞의 광대한 사막이다. 몽골 말로 ‘고비’는 ‘사막’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면 ‘인생의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7월 중순 사막의 한낮 기온은 40도를 넘어서고 있다. 겨울은 영하 20~30도로 떨어진다고 한다. 대륙성기후 사막에서 살아가는 삶의 척박한 환경을 말해준다. 몇 년씩 비가 안 오고, 혹한이 엄습하고, 갑자기 질병이 돌아 살기 어려워지면 생존을 위한 주변국 침략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유목민 전사의 호전성, 잔혹성, 공격성은 척박한 환경과 생태계가 만든 것이다. 두세 살에 말을 타고 어린 시절부터 사냥과 전투를 치르면서 자연히 용감한 전사가 될 수밖에 없다. 고비사막은 지리적으로 비가 안 오는 곳이다. 우리 땅은 삼면이 바다이고 1년 내내 수시로 비가 내리고 해외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항구가 있어 사람 살기에 적합한 입지임에 감사함을 느낀다. ■ 대륙의 중심국과 주변국 한반도의 비애(悲哀) 역사의 발전에는 ‘중심국, 주변국, 중간의 ‘반(半)주변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역사상 아시아 대륙의 중심국은 항상 중국이다. 가끔 몽골고원을 통일한 ‘유목제국’이 중심국이 된다. 고대 중국은 유목민을 ‘북적(北狄), 서융(西戎)’ 등 의도적으로 야만인으로 비하하면서 두려움으로 고비사막 경계선에 만리장성을 쌓아 지켰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항상 강대국의 주변국으로 약소국의 비애를 겪으며 살아왔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도 새로운 대륙의 통일왕조가 생기면서 시작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은 몽골 침략(1231~1270년)이다.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였다. 무신정권 실권자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본토는 39년 동안 몽골 군대와 장기간 전쟁으로 전 국토가 유린됐다. 우리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중기 이전 대부분 목조 유적이 몽골의 약탈 또는 화재로 사라졌다. 현재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은 몽골 침략 이후 고려 말에 지어진 것이다. 다시 16세기 말 일본의 임진왜란으로 고려 후기 지어진 건물은 또다시 대부분 소실된다. 현재 남아 있는 목조 유적은 대체로 임란 후 숙종, 영조 때 건축된 것이다. 고려 무신정권이 몽골과 전쟁 중 강화도에서 만든 팔만대장경이 고려의 대표적 유적이다. ■ 고비사막 국경 도시 ‘자민우드’와 ‘엘렌하우터’ 모든 공항은 출국과 입국이 24시간 가능한데 육상 국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은 오후 8시 이후 야간과 토요일, 일요일은 국경 개방을 안 한다. 부득이 몽골의 최남단 변방 자민우드에서 하룻밤 숙박하고 다음 날 일찍 중국 국경을 통과할 계획이다. 고비사막의 자민우드는 중국에 들어가는 화물차 기사들의 하루 숙박지다. 몽골 변방에도 한국 식당 등 한국 상호 가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란다. 다음 날 아침식사는 한국 상호 ‘카페베네’ 커피숍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해결하고 오전 9시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한다. 오전 내내 기다리며 중국 입국 수속을 마치니 낮 12시가 넘었다. 세 번째 국가인 중국에 들어오니 내심 안도감이 든다. 중국 국경 내몽골 고비사막에 엘렌하우터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엘렌하우터시는 고층아파트, 넓은 가로수, 시내 공원 등 사막 속의 녹색 오아시스 도시다. 수백㎞ 멀리서 물을 끌어오는 중국 정부의 투자 덕분이다. 반면 바로 인접한 몽골의 자민우드는 나무가 거의 없는 메마른 도시다. 가난한 몽골과 잘사는 중국의 풍요로움을 잠시 비교하게 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약소국 ‘몽골’의 근세 역사를 생각하며

오후 테를지국립공원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데 행복한 뉴스가 전해져 일행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일행이 울란바토르 자동차정비소를 전부 뒤져 중고 부품 터보를 구해 고장난 터보를 교체했다고 한다. 모두가 부품 교체에 환호했다. 오늘 저녁식사는 테를지국립공원 근처 식당에서 몽골 전통 요리 ‘후르헉’ 요리를 먹는다. 후르헉 요리는 양 한 마리를 분해해 커다란 양철통 속에 넣고 불에 달궈진 700~800도 뜨거운 돌을 양철통 속에 계속 넣어 익힌 몽골 전통요리다. 자동차 수리 소식에 모두가 귀한 한국 소주를 마시며 “가자! 이스탄불”을 합창한다. 이제는 몽골고원과 고비사막 통과에 걱정이 없어졌다. 점심으로 삼겹살에 이어 저녁에 양고기 후르헉을 먹게 되니 배가 불러 귀하게 준비한 후르헉 요리를 거의 남겼다. 숙소는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호텔이라 매우 깨끗하다. 오랜만에 밀린 빨래를 했다. 건조한 사막성기후라 속옷을 빨아 걸어 놓으면 금세 마른다. ■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는 몽골고원의 분지로 해발 1천300m 이상에 있는 도시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란 뜻이다. 1911년 청나라 멸망 후 몽골은 왕국으로 독립했다. 1919~1920년 중국 군대가 침략했다. 수흐바타르 장군이 러시아군 도움으로 중국 군대를 격퇴했다. 붉은 영웅 수흐바타르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도시 이름을 울란바토르로 바꿨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한자 우매할 ‘몽(蒙)’을 사용해 야만인으로 비하하는 ‘몽고(蒙古)’로 부르는데 몽골인들은 이 호칭에 자존심이 상한다고 한다. 몽골공화국과 우리가 1990년 국교 수립 후 우리나라에 국호를 ‘몽골’로 표기해 달라고 외교적으로 부탁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 한국 브랜드 편의점, 커피숍 등이 매우 많다. 몽골 국민 가운데 한국을 다녀간 사람이 매우 많아 한국 브랜드의 가게가 잘된다고 한다. 몽골인의 꿈은 한국에 가는 것인데 한국 입국비자 받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생아의 70%가 엉덩이에 ‘몽고반점’을 갖고 태어난다. 몽골인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낀다. 유전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실제로 우리 민족과 가장 닮은 종족은 만주 여진족, 일본인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 몽골의 티베트불교 역사 아침 일찍 울란바토르 시내 중심부를 통과해 고비사막 방향으로 향한다. 오늘은 몽골 남쪽 고비사막 국경도시 자민우드까지 약 680㎞를 가야 한다. 일정이 빡빡해 티베트불교 사찰인 ‘간단 사원’ 지붕을 멀리서 보며 지나간다. 몽골고원 초원을 가는 도중 마을에서 많은 티베트불교 사원을 자주 보게 된다. 몽골이 16세기 티베트불교 도입 후 몽골 주민 대다수는 티베트불교 신자다. 안내를 맡은 앙케 양에게 언제 절에 가는지 물어보니 음력 설날, 경조사 등 특별한 날에만 간다고 한다. 우리에게 대승불교는 익숙하지만 티베트불교는 낯설다. 1571년 몽골의 왕(알탄 칸)이 당시 활불(活佛)로 소문났던 티베트 라싸의 승려 소남 갸초를 몽골로 초청하고 달라이라마 명칭을 하사했다. ‘달라이’는 ‘바다’라는 뜻으로 달라이 라마는 ‘지혜의 바다’, ‘전 세계의 스승’이라는 의미다. 티베트불교는 환생과 윤회를 믿음으로 한다. 현재 인도에 망명한 티베트불교 수장은 14대 달라이라마다. 현재 몽골공화국 영토는 과거 몽골제국의 영토에서 북쪽의 초원지대인 바이칼호 주변 초원은 17세기 러시아에 빼앗기고 남쪽의 내몽골 스텝 초원은 중국에 빼앗겼다. 과거 몽골제국의 3분의 1로 줄어든 가장 척박한 ‘외몽골’ 사막지대가 현재 몽골이다. 근세 몽골은 러시아의 위성국가로 있다가 1991년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됐다. ■ 몽골고원, 고비사막의 광야를 달린다 한가롭게 몽골고원의 단조로운 초원을 보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몽골 사람은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하다. 과거 초원에서 외롭게 혼자 살다가 오랜만에 친구나 손님을 만나면 독한 술을 밤새워 마신다고 한다. 오늘 사막의 일기예보를 찾아보니 가시거리가 무한대로 나온다. 몽골 사람의 평균 시력이 3.0이고 최고 좋은 사람의 시력은 5.0이라는 말이 있다. 고비사막의 넓은 광야는 야성미와 장엄미의 멋진 조합이다. 수백㎞의 단조로운 초원과 사막을 지나가고 있다. 내려놓음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평안한 마음이다. “배움의 추구는 날로 더해가는 것이고 도(道)의 추구는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무위(無爲)에 이르게 된다.” 경계선이 없는 끝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2500년 전 중국 노자의 말이 불현듯 가슴에 와닿는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기마 유목민·칭기즈칸 고향 ‘몽골고원’

■ 몽골 스텝 지대의 호전적 기마 유목민 영국의 세계적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역사를 두 가지 특징으로 표현했다. ‘유목민과 정주민의 전쟁’, ‘자기가 믿는 신이 최고라는 종교와 종교의 전쟁’이다. 세계 역사를 흔들었던 기마 유목민의 고향은 몽골고원 서쪽 오논강과 외팅겐 지역이다. 다르항 근처에 몽골족들이 신성시하는 오논강과 외팅겐산이 있다. 오논강 근처는 과거 돌궐족의 수도였고 칭기즈칸 출생지와 초기 몽골제국 수도였던 카라코람이 있다.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정복한 종족은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이다. 이들은 몽골고원을 통일한 다음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지역, 카스피해 북쪽 초원을 정복해 대제국을 일궜다. 남쪽으로 중국을 수시로 침략해 만리장성을 축성하게 했다. 만주 지방 고구려 전신인 부여를 멸망시킨 것도 흉노족이다. 유목민은 큰아들이 결혼하면 분봉해 멀리 떠나보낸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와 가장 늦게까지 산다. 부친의 후계자를 정하는 관습은 부모와 가장 늦게까지 생활하는 막내아들이 상속받는다. ‘옷치킨 제도’라고 부르는데 ‘화로’를 끝까지 함께한 막내가 상속권을 갖는다. 막내는 부친이 죽으면 남아 있는 부친의 개인재산, 남은 병력을 상속받는다. 친어머니만 제외하고 아들들은 죽은 아버지의 살아있는 부인, 죽은 형제의 배우자도 상속받는다. 한나라 시대 흉노 왕에게 시집간 중국의 4대 미녀 왕소군도 남편인 흉노 왕이 죽은 다음 전처 아들과 다시 결혼해 자녀를 둔 비극의 여인이다. 한나라 왕실에서 편히 살았던 왕소군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말한 환경이 이해된다. 복잡한 결혼동맹과 막내 상속제도는 왕의 사망 후 형제들. 씨족 간의 권력 다툼이 많이 발생하는 구조다. 몽골초원은 전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호전적 사회구조다. ■ 테를지국립공원 오후 한가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테를지국립공원으로 향한다. 거리에 인파가 매우 많다. 동행하는 앙케씨(장지사장 비서)에게 이유를 물어 보니 몽골의 국가 축제인 나담축제가 어제 끝났다고 한다. 축제 기간 6일이 국경일이라고 한다. 나담축제 기간에 몽골인들은 대부분 휴가를 간다. 휴가는 가족 모두가 초원에 가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오는 게 일반적인 형태라고 한다. 우리가 바닷가, 산으로 휴가를 가는데 몽골 도시인들은 초원으로 휴가를 간다. 나담축제 관광객을 위한 노점상들이 도로 옆에 매우 많다. 테를지국립공원은 독특한 바위 지역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관광객 숙박을 위한 게르(천막), 리조트, 카페 등 완전 난(亂)개발이다. 10년 전 여름 테를지국립공원에 별을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당시 한적한 국립공원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지역이 관광객 유치를 위한 난개발 상태다. 우리 일행도 전망 좋은 카페에서 휴식을 취한다. 한국에서 나담축제를 보러 온 관광객을 카페에서 많이 만난다. 도로 사정은 안 좋고, 소득 증가로 자동차가 빠르게 증가하다 보니 울란바토르뿐만 아니라 외곽 지역도 교통체증이 심하다. 몽골인들의 운전 습관은 매우 험하다. 아무 데나 말 타고 다니던 습관이 자동차 운전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동행하는 몽골인에게 자동차 면허시험을 어떻게 보는지 물어봤다. 시험을 안 보고 돈 주고 면허증 사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광대한 초원에 흩어져 사는 사람이 대도시 자동차학원에 등록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현실은 이해가 간다. 후진국이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합리한 사회 현상의 하나다. ■ 몽골의 영웅 칭기즈칸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100만명을 죽이면 황제나 영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호전적으로 유명하다. 국립공원 가는 길에 있는 칭기즈칸기념관에 들렀다. 기마상 높이는 40m로 미국 자유의 여신상처럼 머리 쪽으로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 있다. 말 머리 방향은 칭기즈칸의 고향 오논강을 향하고 있다. 머리 쪽에 사진 찍는 전망대가 있어 사람이 많이 밀린다. 지하 1층은 몽골제국의 칭기즈칸 후손들 초상화, 전쟁 무기 등이 전시돼 있다. 칭기즈칸은 1206년 몽골의 대칸(황제)에 올랐다. 이 동상은 몽골 건국 800주년이 되는 2006년 건립이 시작됐다. 전설에 의하면 칭기즈칸이 전쟁 중에 이곳에 떨어진 말 채찍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는데 그 사이 적군이 쏜 화살이 스쳐 지나가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13세기 몽골제국 전성기 정복한 유럽과 아시아 대륙 영토지도가 벽에 있다. 13, 14세기 약 100년은 팍스 몽골리카 시대다. 유라시아의 광대한 초원에 평화가 찾아오고 무역과 교역이 발달했던 시대다. 한 번이라도 자랑스러운 위대한 역사가 있는 국민은 자부심이 크다. 칭기즈칸 리더십 서적이 한때 크게 유행했었다. 칭기즈칸은 혈족과 부족에 충성하는 유목민 사회에서 능력과 실력으로 사람을 대우했다. 칭기즈칸 초창기 친구인 4명의 맹우에 노예 출신도 있다. 노예 출신 등용은 몽골고원 평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게 된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종전에는 각자 장군이 나누고, 일부만 상납하는 게 당시 관행이다. 칭기즈칸은 모든 전리품을 전체로 총괄해 모은 다음, 전공에 따라 전리품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병사들이 씨족, 부족에 충성하지 아니하고, 칭기즈칸 개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꾸었다. 몽골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있던 1991년 이전까지 공산당은 칭기즈칸을 ‘인민의 착취자’로 낙인찍어 비판의 대상이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몽골은 국민 통합을 위해 영웅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필요가 인민의 착취자에서 국가의 최고 영웅으로 돌변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죽은 지 수백년이 지난 후 영국의 넬슨 제독, 일본의 도고 제독의 평가로 유명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 성역화 등 재조명으로 국민 영웅으로 다시 탄생했다. 위대한 영웅도 후세가 업적을 제대로 평가해 줘야 영웅이 된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의 유명한 말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바이칼호에서 몽골고원으로

바이칼호에서 달콤한 짧은 휴식을 보내고 우리는 몽골고원으로 내려간다. 지난해 7월 초 한여름 서울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 스코보로디노, 바이칼호 등 고(高)위도 ‘한대 지방’을 통과해 달려왔다. 이제는 중국의 시안까지 직선으로 약 3천㎞를 내려갈 계획이다. 한대기후에서 스텝기후, 반사막기후, 사막기후, 온대기후 등 며칠 동안 많은 기후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러시아 ‘울란우데’에서 몽골 국경 도시 ‘다르항’으로 가야 한다. ■ 극동 시베리아 중심 도시 울란우데 화창한 햇볕을 맞으며 오전 8시 바이칼호 숙소를 힘차게 출발한다. 어제 오후 정비소에 맡겨 놓은 일행의 자동차를 찾기 위해 ‘울란우데’ 정비소로 향한다. 서울에서 140㎞ 떨어진 정비소라면 무척 먼 거리라 생각하지만 광대한 대륙성 분위기에 적응한 우리는 가까운 거리로 생각한다. 정비소 기사는 구멍 난 ‘터보’ 주위를 감싸 임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고쳤다고 한다. 어제 일행은 경기도에 사는 한 동생에게 전화해 새 부품 ‘터보’를 구입, 4일 후 중국 내몽골 국경 도시 ‘엘렌하오터’로 가져오도록 연락했다. 우리 차가 몽골고원을 제대로 통과하는 것이 당면 목표다. 중국 내몽골 국경에서 서울에서 가져온 새 ‘터보’로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할 계획이다. 몽골로 출발 전 울란우데 시청 앞에 있는 레닌 동상을 구경하기 위해 시내로 향한다. 레닌이 1924년 사망 후 후계자 스탈린은 레닌 우상화를 위해 소련 내에 수만개의 레닌 동상을 설치했다고 한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개방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레닌 동상은 철거됐다. 울란우데 시청 앞에 설치된 레닌의 머리동상은 1991년 철거를 계획했다가 당시 철거비가 너무 많이 들어 포기했는데 지금은 울란우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역사의 재미있는 반전이다. 레닌 시신은 모스크바 붉은광장 레닌묘에 ‘미라’로 만들어 안치돼 있다. 울란우데부터 동쪽의 태평양, 사할린섬까지의 영토를 ‘극동 러시아’로 부른다. 극동 러시아의 인구는 겨우 800만명이다. 매년 인구가 줄어들어 영토 관리에 위기를 느끼는 지역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연해주 지역은 19세기 중반 청나라로부터 강탈한 영토이고 사할린 남쪽의 섬들은 일본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 후 빼앗은 영토다. 모스크바로부터 거리가 멀고 인구가 줄어들면 미래 이 지역은 지정학적 분쟁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다. ■ 몽골고원의 스텝 지대 울란우데에서 남쪽으로 넓은 초지로 조성된 지리학상 ‘스텝’ 지대다. 이곳 스텝 지역을 중심으로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셀렝게강’이 바이칼호로 흘러 들어간다. 지리학에서 스텝 지역은 나무는 띄엄띄엄 자라고 초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남쪽 몽골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양, 말,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 풍경을 보면서 자동차 여행의 지루함을 잊고 있다. 러시아의 남쪽 국경 세관이 있는 국경 도시 ‘캬흐타’까지 260㎞를 달려야 한다. 캬흐타는 1727년 중국과 러시아 간 국경을 확정한 ‘캬흐타조약’을 체결한 지역인데 오늘 통과한다. 오늘 러시아 남쪽 변방의 세관에 출국 신고를 하고 몽골공화국의 세관에 입국 신고를 해야 한다. 세관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내심 걱정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시베리아 대평원은 추운 한대기후지만 북극해로부터 실려 온 수증기로 인해 여름은 비가 자주 오고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린다. 강수량이 충분해 산림지대와 초원지대가 형성돼 사람이 거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북극해로부터 멀리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몽골고원의 남쪽 지역은 비가 적게 오는 반사막, 사막기후로 변하고 있다. 바다는 수억년 전 생명 탄생의 고향인데 지금도 수증기를 증발시켜 육지에 비를 내려 인간 생활에 가장 큰 도움을 준다. 우리처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영토는 신의 축복을 받은 지역이라는 감사한 생각이 든다. 1년 중 7, 8월은 사막에도 비가 오는 우기(雨期)여서 몽골고원 초원은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고려청자의 비취색을 닮은 하늘, 연초록색 초원, 지평선 멀리 야트막한 구릉, 하얀 뭉게구름 등 대자연의 아름다운 조화가 여행의 피로를 날려 보낸다. ■ 러시아, 몽골 ‘육상국경’ 통과하기 2주일 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해관(海官)으로 입국했는데 오늘은 러시아 남쪽에 설치된 육상국경을 통과해야 한다. 군대 초소, 경찰 초소와 출입국 기관, 세관 등 많은 정부 기관의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번 자동차 여행에 육상국경을 여덟 번 통과해야 하는데 오늘이 첫 번째다. 가장 먼저 국경으로부터 30여㎞ 후방의 군부대 검문소에서 여권을 검사한다. 군대 초소 앞에 앉아 무한정 기다린다. 40여분을 기다리니 통과하라고 여권을 돌려준다. 군대 초소를 통과해 수십㎞ 달려가니 경찰 초소 검문소를 만난다. 이후 캬흐타에 있는 세관에 도착한다. 우리는 자동차가 무사히 빨리 통관하는 것이 관심사다. 세관 직원들이 자동차가 러시아 입국 당시 신고 서류와 출국 차량이 동일한지 조사한다. 이러한 자동차 확인 과정에 무척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자동차 여행이 만만치 않음을 국경에서 다시 한번 체험한다. 관세법상 자동차는 ‘휴대전화’로 분류된다. 처음 출국할 때 가져온 차를 중간에 팔거나 다른 차로 바꾸면 안 된다. 사고가 나 폐차하게 되면 해당 국가의 ‘폐차 확인서’를 발급받아 서울에 가져가야 한다. 몽골 국경에서 자동차 입국 신고, 차량 검사에 1시간이 걸렸다. 두 나라 국경 통과에 4시간이 걸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오후 9시다. 국경에서 숙소인 몽골 도시 ‘다르항’까지 160㎞를 달려야 한다. 캄캄한 밤중에 갈 길은 먼데 몽골의 도로 형편은 시베리아 못지않게 구멍이 파인 포트홀이 많고 편도 1차선 좁은 도로다. 화물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여서 속도 내기도 어렵다. 문제는 일행의 차가 수리했음에도 언덕길은 잘 못 가고 평지나 내리막길에는 80㎞로 달려가는 수준이다. 일행의 차는 임시방편 운행을 하고 있다. 향후 1천㎞ 이상 몽골고원을 어떻게 통과할지 걱정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바이칼호, 샤머니즘 전설∙춘원 소설 ‘유정’ 배경

■ 한민족 정신세계의 시원(始原) 먼 옛날 한민족은 서쪽에서 출발해 시베리아 초원, 몽골고원을 통과하고 만주 평야를 지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이동했을 것이다. 수천, 수만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민족 이동은 늦게 온 민족은 서쪽의 발달된 선진문명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일찍 정착한 후진 주민과의 투쟁, 지배, 화합 과정을 거쳐 한민족을 형성하고 한민족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민족의 형성 과정에서 많은 전설과 설화는 구전으로 전해졌다. 한민족의 시원(始原)은 어디인가, 한민족의 공통된 정신세계는 무엇인가. 궁금한 질문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한민족의 원시적 사상은 유목민에게서 전수된 ‘텡그리신’과 샤머니즘 무속신앙이다. 과거 천신, 하느님은 같은 의미다. 하늘에 있는 ‘하느님’은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절대적 ‘초월신’, 윤리와 도덕을 상징하는 ‘인격신’ 등 복합적 의미로 우리의 정신세계 기저를 이루고 있다. 샤머니즘은 모든 생명체, 무생명체, 죽은 조상 등 모든 곳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이다. 고대사회에서 ‘하늘, 하느님’을 비롯해 영혼과 소통하는 역할은 샤먼(무당)이 담당한다. 유목사회의 칸, 중국의 황제는 하느님의 아들, 천자(天子)로 호칭하면서 백성들에게 정치적 통치권 위임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하느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의 특권이고 하느님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는 사상은 공자의 유학을 통해 동양의 통치 이념으로 발전했다. ‘하늘이 노한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하늘의 명령, 하늘이 복을 내린다, 지성이면 하늘이 감동한다’ 등은 고대 원시 신앙인 텡그리신, 천신 사상과 관련이 있다. 우리 애국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하느님도 여러 의미의 혼합이다. 샤먼(무당)은 하늘, 하느님, 죽은 혼령 등 많은 영적 존재와 소통한다. 샤먼은 영적 존재와의 소통 능력을 지닌 중간자로서 민중의 점성술, 복을 빌고, 질병의 치유, 미래의 예측 등 고대사회뿐 아니라 현재도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다. 시베리아와 바이칼호는 한민족 샤먼의 전설과 설화의 시원이다. ■ 한국인에 친숙한 바이칼호 시베리아 중심부에 있는 바이칼호는 한국 사람들에게 두 가지 이유로 익숙한 곳이다. 첫 번째 이유는 먼 옛날 한민족이 바이칼호 주변 시베리아 평원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민족이동 학설’이다. 당시 함께 이동한 무속인 샤먼(무당)의 영적인 성지가 알혼섬 외곽의 절벽 돌산 밑에 있는 작은 동굴이라고 한다. 세계 무속인 행사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우리나라 무속신앙 연구자 등 많은 사람이 이 지역을 찾는다. 필자도 4년 전 추운 겨울철 이곳을 가봤다. 무속인 성지는 바이칼호 내부의 섬인 알혼섬에 위치한 작은 돌산인데 부랴트 몽골인들이 매우 신성한 지역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시베리아, 몽골고원을 비롯한 유목민의 옛날 전통 신앙은 ‘텡그리신’, 이곳은 무당들이 영적인 기를 받는 기가 매우 센 지역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하나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배경이 바이칼호다. 소설 유정은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돼 당시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4년 전 추운 겨울 바이칼호에 가게 된 배경도 50여년 전 학창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춘원의 소설 유정의 배경을 보기 위함이다. 유정의 내용은 삼각관계 러브스토리다. 1933년 당시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시베리아 바이칼호로 주인공 최석이 도피하고 바이칼호에서 사망하는 소설이다. 50대 이상 연령층은 소설 또는 영화로 ‘유정’을 기억하고 있다. 춘원 선생이 왜 바이칼호를 소설의 엔딩 배경으로 삼았는지 내용을 소개한다. 춘원 선생은 1892년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최고의 인기 소설가다. 191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신한일보’ 주필로 내정돼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미국으로 가는 중간에 바이칼호를 간 것으로 추정된다. LA로 가기 위해 서울에서 출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해 러시아 모스크바를 거쳐 배편으로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 미 대륙을 기차로 횡단해 LA로 가는 여정의 계획을 세웠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코스이지만 1914년은 이렇게 미국으로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춘원은 시베리아의 ‘치타’(자동차 고장 정비를 위해 들렀던 도시)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고 한다. 치타에 머물고 있을 때 아마 바이칼호를 관광했을 것이고 바이칼호에 대한 강한 인상으로 19년 후 연재소설의 배경을 바이칼호로 설정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춘원 선생은 치타에 머물다 여비 부족으로 귀국했다. 나이 든 사람은 기억하는 고인이 된 여배우 남정임씨는 1966년 개봉된 영화 유정이 데뷔작이다. 남씨는 영화 유정으로 은막의 스타가 됐고 예명을 ‘남정임’으로 정한 것도 소설 유정의 여주인공 남정임 이름을 따온 것이다. 4년 전 겨울철인 2월, 얼음으로 덮인 바이칼호와 알혼섬 주변을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얼음 두께가 1m 이상 얼면 차량 통행을 허용한다고 했다. 당시 아침 기온 영하 30~40도, 해가 뜨는 낮 기온은 영하 20도의 추위인데 겨울옷을 많이 껴입고 여행했던 기억이 새롭다. 알혼섬 민박집에서 며칠 숙박하면서 북반구 겨울 하늘의 총총한 별을 봤던 감동이 진하게 남아 있다. ■ 행운의 여신이여! 남은 구간도 도와주소서 오전 6시 일어나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바이칼호 백사장을 여유롭게 산책한다. 바이칼호의 공기는 달고 가볍다. 산소가 많은 태곳적 청정지역이기 때문이다. 호숫가에는 백사장도 펼쳐져 있고 맑은 물속에 검은 몽돌이 많이 있다.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러시아인도 있는데 여름철 수영하러 놀러 온 것 같다. 몽골계 민박집 여주인이 아침식사에 본인이 키우는 젖소에서 금방 짜왔다는 따듯한 생우유를 가져와 맛있게 먹었다. 러시아인 남편과 함께 민박집을 운영하는데 팔려고 내놨다고 한다. 오늘은 절기상 7월15일 서울 기준 초복(初伏)이다. 서울은 무더위로 고생하는데 이곳은 가을 날씨처럼 선선해 저녁은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 낮 기온은 피서하기에 매우 쾌적하다. 처음 만나 서먹서먹하던 일행의 성격도 알게 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불규칙적인 식사, 지방질 많은 음식, 소화불량, 설사로 여러 명이 고생하고 있다. 내일부터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을 통해 중국의 내몽골 국경으로 가야 한다. 앞으로 순탄한 여행의 흐름을 타면서 남은 구간을 안전하게 완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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