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문화재 관리, ‘국가유산부’로 통합해야

우리나라 국가유산 정책의 고질적인 병폐인 ‘관리 이원화’가 한계에 다다랐다. 현재 사적지 등 부동산 유산은 국가유산청이 관리하고 동산 유물은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국립박물관이 분할 관리하는 기형적인 체계가 지속되고 있다. 이는 일제가 남긴 유산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승계한 국립박물관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문교부 문화국 내 ‘교도과’로 시작해 1955년 문화보존과로 개편돼 오늘날 국가유산청이 된 두 조직의 출발점부터 달랐던 역사적 비극에서 기인한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은 유일하게 국가유산청이 관리하는데 이는 구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을 개편해 만든 구황실재산사무총국과 문교부 문화보존과가 1961년 통합하면서 문교부 외국(外局)인 문화재관리국으로 출범해 오늘날에 이른 결과다. 현장의 행정적 비효율과 조직 간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국가유산청은 국립박물관의 지역박물관 인프라를 연계·활용하지 못해 별도의 지역 사무소를 따로 두고 있다. 이로 인해 인력과 예산의 불필요한 중복 투자가 지속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분절적 관리가 유산을 역사적 맥락 없이 파편적으로 바라보는 ‘점(點) 단위의 문화재적 관점’에 머물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는 유산을 역사·문화적 공간 및 공동체라는 선과 면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현대적 국가유산의 시대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과거 제국주의 박물관은 유산을 유래지에서 강제로 떼어 내 수탈했다. 현재 국립박물관의 중앙집권적 유물 관리 방식 체계 역시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단절시키고 유물을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수탈적 방식과 본질적으로 궤를 같이한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현재의 국립박물관 정책이 고향을 잃어버린 ‘고아 문화재’를 양산한다고 통렬히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 정부는 인하대 산학협력단에 ‘국립박물관과 문화재청의 통합 방안’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당시 인하대 산학협력단이 제출한 연구보고서는 두 기관의 물리적·기능적 이원화 체계가 국가유산 관리의 전문성을 저하하고 막대한 행정 낭비를 초래한다고 규명했다. 보고서는 유산의 보존(문화재청)과 전시·활용(박물관) 체계를 일원화해 시너지를 극대화해야 함을 역설했다. 해외 주요 선진국의 단일화된 국가유산 관리 모델을 제시하며 ‘두 기관의 전면 통합이 가장 타당하다’는 명확한 정책적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나 부처 간 이기주의와 관료주의 장벽에 가로막혀 15년여가 지난 지금도 통합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 이재명 정부 집권 2년 차를 맞아 더 이상 이 해묵은 과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국립박물관과 국가유산청을 전면 통합하고 이를 ‘국가유산부’로 확대 개편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을 결단해야 한다. 국가유산부로의 개편은 단순히 행정조직을 합치는 일차원적 결합이 아니다. 동산과 부동산 유산의 이원화를 극복해 국가유산의 온전한 생태계를 회복하는 국가적 과업이다. 나아가 유산을 원래 있던 출처지와 역사적 맥락 속으로 돌려보내는 체계적 혁신의 시작이다. 정부는 시대적 소명에 응답해 온전한 국가유산 보존과 민족 문화의 회복을 위한 국가유산부 개편에 나서야 한다. 문화재청장을 지내고 현재 국립박물관장 소임을 하는 유홍준 관장이 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화산책] 퐁피두센터와 국립현대미술관

세계적인 미술관 분관이 여러 개 밀려올 기세다. 우선 프랑스를 대표하는 조르주 퐁피두 국립예술문화센터(퐁피두센터) 분관이 다음 달 정식으로 문을 연다. ‘퐁피두센터 한화’다. 63빌딩 별관 전체를 리모델링해 1천653㎡(500평)의 대형 전시관 2개를 갖춘 지상 4층 규모로 조성됐다. 스페인 말라가와 중국 상하이에 이은 퐁피두의 세 번째 글로벌 분관이다. 퐁피두센터는 비단 서울뿐 아니라 부산에도 세워질 가능성이 있다. 부산시는 총사업비 1천99억원을 투입해 이기대공원에 퐁피두의 분관을 2031년 개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한 세간의 논란은 뜨겁다. 퐁피두센터에 지급하는 브랜드 로열티 65억원을 포함해 총지출액이 126억원으로 해마다 76억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협상 과정과 시의회 심의가 비공개로 이뤄졌다는 지적까지 더해지며 실행이 일단 연기됐지만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퐁피두센터 제2 한국 분관’으로 불러야 할지도 고민거리다. 2023년경에는 인천국제공항공사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해 사전타당성조사 용역을 실시하기도 했다. 루브르도 언젠간 한국에 들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물론 이때도 퐁피두센터가 함께 거론됐다. 퐁피두센터는 4억6천만유로로 추정되는 건물 보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브랜드 라이선싱 전략을 추진해 왔다고 전해진다. 1977년 개관하다 보니 건물이 낡은 탓이다. 전체 보수 비용 중 약 2억8천만유로는 프랑스 정부가 부담하지만 나머지는 퐁피두의 몫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묘책이 해외 분관 운영이고 그 타깃 중 하나가 사우디와 우리다. 퐁피두의 입장에서 한국은 최고의 비즈니스 파트너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스페인 북부의 쇠락한 공업 도시였던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 유치를 통해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변한 이른바 ‘빌바오 효과’가 국가지질공원이자 도시자연공원인 이기대공원에도 적용될지는 지자체가 잘 판단할 문제다. 같은 예산을 작가 지원과 생활문화에 투자할 경우 더욱 다양하고 폭넓은 사람들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최종 판단은 기업이나 지자체의 몫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는 언제까지 세계 유명 미술관을 유치하는 데만 이렇게 논란을 벌일 것인가에 있다. 글로벌 시대에 세계적인 미술관 분관이 들어서는 건 국제 문화 교류의 한 측면으로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러니까 논의의 초점은 해외 미술관이 국내에 들어오는 만큼 혹은 일부라도 우리의 미술관 분관을 해외에 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데 모아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이미 분관 유치를 위한 지자체 간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퐁피두 분관을 2개 유치하면 우리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한 개쯤은 프랑스에 낼 수 있지 않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이 어렵다면 루브르와 바티칸에 이어 방문객 수 세계 3위를 기록하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문화의 성지’로 부상한 국립중앙박물관의 분관은 어떨까. 언제까지 우리는 예술 수입국에 머물러야 할지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횡설수설이다.

[문화산책] 문학책의 해

1993년 범국민적 독서운동으로 선포한 ‘책의 해’는 지난 30여년간 그 명맥이 매년 지속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일상 속 독서문화 확립에 촉진제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처음엔 관의 주도로 시작했으나 민과 관의 협업 체계를 유지했고 지난 몇 년간은 민간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독서율 하락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 사업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책 읽기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연대하고 함께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유아, 청소년, 청년, 어르신 등 생애주기별 독자에게 초점을 맞춘 후 그림책과 문학으로 이어지는 책의 해 사업은 독서 자료인 책과 독자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접근이다. 올해는 ‘문학책의 해’다. 수많은 콘텐츠가 1분 미만으로 소비되는 도파민의 시대에 다시 문학책을 펼쳐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 속 ‘읽기’는 대체로 내게 필요한 정보는 얻는 비문학 영역에 속한다. 단순히 길을 걸을 때도 교통신호 체계나 상업용 홍보문 등 비문학적 문자가 눈에 들어온다. 공부하거나 일을 할 때도 정보가 우선인 비문학적 읽을거리가 우선인 시대이므로 일상 속 비문학 읽기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타인의 삶을 이해하거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입체적 상황에 모두 대처하긴 어렵다. 문학을 읽는다는 건 타인의 삶에 몰입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문학작품 속 인물의 희극·비극에 공감하고 문학적 은유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찰하고 서로에게 깊게 공감하고 기꺼이 포용하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고도의 인지적·심적 단련은 지치기 쉬운 일상에서 우리 스스로 회복탄력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세상이 온전히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문학 읽기는 개인과 공동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문화적 윤활유인 셈이다. ‘책의 해’ 사업이 독서문화 생태계 안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독자, 도서관, 서점, 출판계 등 민간 주체와 정부 산하 유관 공공 기관이 서로 연대해야 한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능동적 문화 소비자이자 비평가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작가는 창의적 생산자로서 참여해야 하고 도서관은 지역 내 지식문화 거점이 돼야 한다. 책방은 동네 문화 사랑방으로, 출판계는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를 완성하는 산실이 돼야 한다. 각 주체가 자발적으로 상생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내고자 할 때 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거시적인 정책 리더십과 예산을 지원해 줌으로써 이들이 지치지 않게 도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독서문화의 뿌리가 사회 깊숙이 내려앉으며 지속성을 갖춘 선순환 구조의 ‘책 읽는 대한민국’이 완성될 것이다. 일상 속 독서문화 활성화는 대한민국이 경제적 풍요를 넘어 전 세계에 영감을 주는 ‘문화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책의 해’를 꾸준히 이어가는 것은 대한민국이 문화적 깊이를 질적으로 향상하는 데 지름길이 될 것이다. 올해 ‘문학책의 해’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개인은 소통에 기반한 정신적 기초체력을 기르고 정부는 문화강국의 초석을 다지기 바란다.

[문화산책] 파키스탄 크발리를 들어보자

격변하는 최근 국제정세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파키스탄이다. 미국과 이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던 나라다. 여행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훈자 마을을 기억할 것이고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K2 봉우리가 있는 나라로 기억할 수도 있겠다. 히말라야 등정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네팔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파키스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산악인들의 성지다. 물론 e스포츠를 좋아하는 젊은 세대는 파키스탄을 떠오르는 신흥 게임 강국으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의 현대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시작한다. 파키스탄은 최초 영국에서 인도와 함께 독립했지만 종교적인 갈등 끝에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파키스탄은 인도와 끊임없이 국경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인도 입장에서는 중국만큼 신경을 써야 하는 나라가 파키스탄인데 크리켓이나 하키 경기가 국가 대항전으로 열리는 날이면 지금도 이 두 나라는 시끌벅적해진다고 한다. 글쓴이가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입국신고서를 살펴보니 눈에 확 띄는 문장이 있었다. ‘최근 파키스탄을 방문한 일이 있나요.’ 물론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게 돼 있었지만 만일 호기심이나 장난삼아 ‘예’ 칸에 표시라도 하는 날이면 입국 심사에서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 파키스탄 방문 경험을 이유로 입국 비자를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바는 아직 없지만 수년 전 라디오 보도국에 근무하던 지인이 취재차 방문했다는 이유로 인도 입국 심사 때 꽤 고생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파키스탄 역시 최근에 인도를 방문한 일이 있는지 입국신고서에서 물어본다는데 글쓴이가 아직 훈자 마을이나 K2 등 파키스탄을 방문하지 못한 이유는 인도를 자주 들락거리는 전력이 있어서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파키스탄이 월드 뮤직 애호가들에게는 신비하고 오묘한 종교음악 또는 전통 음악이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이 음악 양식을 가리켜 ‘카왈리(Qawwali)’라 하고 파키스탄 현지에서는 ‘크발리’라고 일컫는다. 얼핏 들으면 꽤 주술적인 가락에 오묘한 리듬감이 꽤 자극적인데 이 음악이 월드뮤직으로 서구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되던 1980년대 중반에는 그들에게 꽤 자극적으로 들렸던 것 같다. 특히 영국 음악 애호가들은 이 크발리를 1960년대 중후반 대중음악에서 꽤 인기를 얻던 사이키델릭 또는 애시드 록의 21세기형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정작 이 크발리라고 하는 전통 가창 양식은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바로 ‘알라’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노래다. 2000년대 후반, 당대 최고 크발리 가수였던 파이즈 알리 파이즈가 우리나라 처용문화제에 참가해 크발리를 선보였을 때 전국 각지에서 모였던 음악 애호가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강렬한 타블라 리듬과 손풍금의 멜로디, 화려한 장식음을 더해 열창하는 크발리 가수의 이국적인 목소리를 느끼고 싶다면 파이즈 알리 파이즈와 함께 역대 최고 가수로 손꼽히는 누스랏 파테 알리 칸도 추천한다.

[문화산책] 0과 1이 훔칠 수 없는 것

하루에도 수만 곡의 인공지능(AI) 생성 음원이 음원 플랫폼으로 유입되고 있다. 전 세계 신규 음악 중 무려 40% 넘는 곡이 기계의 연산으로 채워진다고 한다. AI 음원이 음원 차트 1위에 오르는 것이 더는 낯설지 않은 시대다. 기술은 어느새 예술의 영역에 깊숙이 들어왔고 시장에서의 영향력 또한 점점 커지고 있다. 예술 안에서 기술은 늘 양면적이었다. 필자 역시 창작 현장에서 AI의 활용 가능성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는다. 음악 생성 AI는 특정 구간의 편곡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보컬 및 악기의 다이내믹을 손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며 방대한 스타일의 음악을 빠르게 탐색하게 해준다. 이렇게만 보면 AI는 분명 효율적인 도구다. 하지만 이 ‘편리한 혁신’이 누군가의 예술적 영혼을 약탈하는 ‘무기’로 변질되는 순간 문제는 시작된다. 1989년 세상을 떠난 컨트리 뮤직의 전설 블레이즈 폴리. 그런데 그가 부른 적 없는 ‘신곡’들이 그의 이름으로 음원 플랫폼에 등장했다. 이렇게 고인의 안식을 깨우고 생성된 이 노래들의 수익은 유족도, 그의 대리인도 아닌 정체 모를 AI 업로더의 계좌로 흘러 들어갔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다. 한 인간의 예술적 삶을 0과 1의 데이터로 분해해 자본주의의 영리 도구로 전락시킨 인격 침해에 가깝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이 고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부 창작자는 자신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스타일까지 무단으로 학습돼 재생산된 AI 콘텐츠와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자신의 창작물에서 발생한 수익마저 이름 모를 타인에게 편취당하는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의 속도를 법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사이 창작자의 고유한 표현과 예술적 자산은 누구나 사용 가능한 기술적 도구가 돼가고 있다. 과거의 저작권은 누가 작곡하고 연주했는지 그 ‘결과물’에 집중했다. 그러나 지금의 AI는 단순히 작품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스타일’까지 학습하고 재생산한다. 특정 가수의 독특한 음색과 표현력, 특정 곡의 분위기마저 흉내 내며 법의 회색지대를 교묘하게 비켜간다. 창작자의 권리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맞춰 재정의돼야 한다. 미국 테네시주는 아티스트의 목소리와 초상을 무단으로 복제하는 것을 금지하는 ‘엘비스법’을 제정해 ‘목소리’를 명시적으로 보호 대상으로 인정했으며 스포티파이 역시 아티스트의 권리 보호를 위해 ‘아티스트 프로필 보호’를 도입해 인증 시스템을 강화했다. 국내에서도 이에 발맞춘 대응이 본격화되고 있으나 창작자를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조치는 여전히 절실한 상황이다.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술과 기술의 양면성 사이에서 대중의 인식도 올바르게 정립돼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소비하는 AI 음원이 누군가의 시간과 권리를 앗아간 데이터로 만들어졌을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것에서부터 인식의 변화는 시작된다. 죽은 자에게는 예술적 안식을, 산 자에게는 정당한 창작의 권리를 보장하며 기술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을 스스로 존중해야 한다. 창작자의 인격과 권리를 존중하는 대중의 건강한 문제의식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법과 제도도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0과 1의 연산은 순식간에 소리의 껍데기를 복제해낸다. 그러나 단 한 소절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견뎌낸 수많은 밤, 깊은 고뇌와 감각으로 축적된 예술가의 시간은 결코 훔쳐낼 수 없다. 그것은 기술의 문법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예술가의 영혼이자 바로 우리가 지켜야 할 예술의 본질이다.

[문화산책] ‘보소당인존’ 병풍 환수

문화유산의 환수는 단순히 물건을 되찾는 행위를 넘어 단절된 역사의 맥락을 잇고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숭고한 여정이다. 최근 코넬대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의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 병풍이 고국으로 돌아온 일은 이러한 여정에서 기념비적인 성과로 기록될 만하다. 이번 환수는 기증자인 앤드루 김&완균 라 김 재단과 소장처인 코넬대, 그리고 문화유산회복재단이 3자 계약을 통해 이뤄낸 ‘민간 주도형 환수’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이번 보소당인존 환수의 가장 큰 성과는 소유권 분쟁이 아닌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합의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1962년 유물을 기증했던 앤드루 김&완균 라 김 재단은 문화유산이 가장 가치 있게 보존될 곳은 결국 본래의 고향이라는 대의에 동참했다. 코넬대 역시 학문적 연구와 보존이라는 대학 본연의 목적을 넘어 인류 공동 자산으로서 문화유산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를 보여줬다. 문화유산회복재단은 이 과정에서 미국을 두 차례 방문해 기증 절차를 진행했다. 이는 국외 소장처와의 갈등 구조를 탈피해 기증자와 소장기관이 명예롭게 유물을 반환할 수 있는 ‘우호적 반환 선례’을 만든 것으로 향후 다른 외국의 소장기관 등으로 확산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전 세계에 흩어진 국외 소재 문화유산을 되찾아오는 데 있어 중요한 사례를 얻게 됐다. 환수된 유산의 가치는 헌종이라는 인물이 지닌 예술적 위상에서 출발한다. 헌종은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서화와 인장에 가장 깊은 식견을 가졌던 ‘도장 수집가’다. ‘보소당인존’은 그가 수집하고 직접 각인한 인장을 집대성한 인보(印譜)다. 이번에 환수된 3폭의 병풍은 이 보소당인존의 인장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한 예술품이다. 헌종이 추구했던 고결한 정신과 조선 왕실의 격조 높은 문해(文解)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유산의 생명력은 ‘쓰임’에 있다. 문화유산회복재단은 이번에 돌아온 병풍을 단순한 전시용 유물로 가두지 않고 살아있는 문화자산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가장 먼저 추진해야 할 과제는 ‘완전체의 복원’이다. 국내외에 산재한 나머지 병풍의 소재를 정밀하게 조사·연구해 10폭 병풍이 지녔던 본래의 장엄함을 되살리고자 한다. 또 환수 과정을 기록화해 문화유산 회복 운동의 교본으로 삼는 작업이 병행될 것이다. 기증자의 숭고한 결단이 헛되지 않도록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예우 프로그램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아카이빙은 필수적이다. 인장에 새겨진 한 조각의 글씨와 조형미를 현대적 디자인 자산으로 변모시켜 미래 세대가 체험하고 향유할 수 있는 콘텐츠로 재탄생시켜야 한다. 유산의 가치를 대중화하는 것은 환수운동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이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보소당인존 병풍의 환수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이번 사례는 문화유산 회복이 국가만의 몫이 아니고 민간과 기증자가 합심할 때 얼마나 큰 기적을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였다.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일은 곧 찬란한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다. 돌아온 유산이 내뿜는 문화의 향기가 우리 사회 곳곳에 자긍심과 화합의 씨앗이 되기를 고대한다.

[문화산책] 악기 연주 권하는 사회

2024년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어서며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고령층이 증가한다는 세간의 전망대로라면 고령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날도 머지않았다. 오늘날 노년층은 더 이상 사회적 활동에서 물러나는 ‘갈참’이 아니다. 자기 주도적 학습과 문화예술 참여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또다른 도약의 주인공이다. 인생 중반기의 벨에포크(화려한 시대)인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도 노년층의 삶의 방식과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해석하는 사회문화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적극 권고하고 있다. 액티브시니어 또는 뉴시니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베이비붐세대(1955~1964년생)가 주를 이루는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자기 주도적 성취 욕구가 강하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학습과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으며 스마트 기기 등 디지털 매체와 온라인 정보 활용에 익숙하다. 때로는 단순한 여가를 넘어 전문가 수준의 기량을 갖추기 위해 늦깎이 열정을 발휘하기도 한다. 혈연이나 지역 중심의 관계에서 벗어나 공통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교류 및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기를 즐기는 것 또한 이들의 특징이다. 악기 연주는 뉴시니어의 이러한 성향에 안성맞춤이다. 오카리나, 우쿨렐레, 미니하프 같은 단순한 악기도 상관없다. 악기를 배우는 경험은 단순히 소리를 재현하는 행위가 아니다. 음악을 보고, 듣고, 느끼고, 조절하는 과정이 어우러지는 복합적 활동이다. 악기를 연주하면 노년기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음악을 연습하면 두뇌의 신경세포 집단인 회백질이 늘어나고 좌뇌와 우뇌 사이의 신경세포 연결이 활발해진다. 악기를 꾸준히 연습한 노년층의 뇌 활동이 20대 청년층과 버금간다는 연구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아울러 악기 연주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돌아보고 과거와 현재의 삶을 이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은퇴 이후 음악을 새롭게 시작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젊은 시절 음악과 함께했던 기억을 반추하면서 한동안 단절됐던 자신의 서사를 다시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음악 감상과도 비교된다. 악기 연주를 병행하는 사람은 음악 감상만 하는 사람보다 치매 위험이 33%, 인지 장애 위험은 23% 더 감소한다고 한다. 청각, 시각, 촉각 등 다중 감각의 자극으로 인해 뇌의 신경 회로를 강화하며 뇌 신경망의 재구조화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기분 전환을 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재구성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성장을 멈추지 않는 뉴시니어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술 경험 자체에 내재된 심미적 가치와 이를 통한 내면적 성장이다. 요즘 시니어 전문 사설 음악학원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문화센터나 복지관의 성인반과는 또 다른 수요가 생겨나고 있다는 얘기다. 뉴시니어를 비롯한 노년층에게 악기 연주를 권하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 같아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이참에 경기도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해 보면 어떨까 한다. 건강한 경기도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문화산책] 실질적 독서진흥 정책 필요

인공지능(AI)이 방대한 정보를 편집하며 지식을 생산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하루가 다르게 일상의 편의성과 산업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고성능 AI의 자가발전 속도는 인간의 시간으로는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지식 생산형 AI에 더해 피지컬 AI까지 일반화되면 인간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렇게 그냥 손 놓고 AI와 기계에 사회적·문화적 주도권을 빼앗기고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 기회도 몽땅 넘길 것인가. SF소설이나 영화에서 다루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현실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인간은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인간은 타고난 창의력과 지식화 능력으로 인류 문명을 구축했고 고도화된 AI도 만들어냈다. 다만 타고난 능력이라도 갈고닦지 않으면 기본 수준 이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예리한 칼날도 노상에 방치하면 서서히 녹이 슨다. 정성스레 갈아 칼날을 유지하듯 인간의 주체적 사유 능력 또한 예리하게 벼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AI가 제시하는 답은 언제나 그럴듯하지만 그것이 옳은지 판단하는 힘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최근 세계를 고통에 몰아넣고 있는 중동전쟁에서 학교에 떨어진 폭탄으로 200명에 가까운 어린이가 희생됐다. AI가 오래된 정보에 근거해 폭탄 투하 지점을 설정했고 인간의 철저한 검증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벌어진 참사였다. 만약 AI가 주는 정보를 전문 인력이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쳤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보편적 AI 시대에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핵심 역량은 바로 자기 주도적 문해력, 바로 독서 능력이다. ‘제대로 읽어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정확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은 개인의 생존을 좌우하는 기반 역량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을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일지 모른다. 이런 중요한 능력을 키워내는 교육 방향성을 제시하고 사회문화적·산업적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장기적 차원의 미래 성장동력을 튼튼하게 다지는 길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앞둔 요즘 국가 발전의 뿌리인 지방선거 출마 후보자들이 내건 정책에는 실질적 공약이 보이지 않는다. 획기적인 독서문화생태계 활성화 정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대부분 지난 수십년간 되풀이해 온 ‘독서는 중요하다, 책 많이 읽자’ 정도의 선언적 차원에 머물 뿐이다. AI 시대, 독서는 인간의 생존전략이고 사회의 기본 인프라다. 독서교육전문가가 투입된 체계적 독서코칭을 통해 평가 목적이 아닌 성공적 독서 경험을 구축하도록 돕는 정책이나 책 구입비 개별 지원에 더해 직접 동네책방에 들러 책을 골라 사보는 정기 프로그램 시행, 월 1회 독서 방학과 독서휴가제를 의무 실시해 지역 내 도서관 등에서 방해받지 않는 독서 활동 지원, 다양한 문화 콘텐츠와 접목해 독서를 즐길 수 있는 공공사업 마련 등 일상적이고 실질적 정책 제안이 필요하다. 독서 진흥을 지역 발전의 핵심 정책으로 인식해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하는 지방자치단체장과 교육감 후보가 당선될 때라야 비로소 미래형 인재를 키워 내는, 읽는 사회로의 전환이 이뤄질 것이다.

[문화산책] 문화 강국 이란을 다시 보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는 이란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아무리 중립의 위치에서 바라보려고 해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일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온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핵 개발이나 테러 지원, 그리고 인권 문제에 관해 이란은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래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많을 수밖에 없지만, 이란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와는 국가 관계가 좋았던 편에 속한다. 현대사에서는 1970년대부터 일궈 나갔던 경제 유대가 그 증거이며, 서울에 있는 테헤란로와 테헤란에 있는 서울로가 두 나라의 관계를 증명한다. 2007년에는 우리나라 드라마 ‘대장금’이 90퍼센트를 훌쩍 넘는 시청률을 찍어버린 나라가 이란이다. 이처럼 이란 역시 오랫동안 우리에게 호감을 보이는 나라 중 하나다. 이란의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문득 화려한 옛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란이라는 나라가 현대사에서 이렇게 커다란 굴곡을 겪고 있는지 안타깝다. 그 비슷한 감정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옛 앗시리아 왕국의 유물을 감상할 때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다가 이란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현대사 속 이란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나라였다. 팔레비 왕조 시절의 마지막 영화였다고나 할까. 당시 이란은 이슬람 문화권 국가들 사이에서도 파격적인 개방을 선도했다. 호메이니 혁명은 말이 종교 혁명이지, 사실상 미국에 의존하는 왕조에 대항했던 민중 봉기나 다름없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게 종교를 앞세운 독재의 시작이자 국가 전체가 암흑기로 들어가는 시작이었음은 이란 국민도 몰랐을 것이다. 이어 벌어진 이라크와의 전쟁은 여기에 불을 붙인 격인데, 지금의 사정은 이란이라는 나라가 자초한 선택의 실패가 극단으로 다다른 형국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왜 이란이 이 시행착오를 연속해서 선택했는지 그 이면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자존심을 들여다본다면, 우리가 이란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란은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 독특한 나라이자, 아랍어와는 상당히 다른 페르시아어를 사용한다. 여기에 문화와 예술까지 살펴보면 이란은 차원이 다른 역사와 깊이를 갖고 있는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븐 바투타와 루미를 배출한 역사가 있고, 아름다운 음악 전통을 갖고 있는 이란에서는 오랫동안 궁정 음악이 사랑받고 있었다. 전통 음악 중에는 ‘마후르(Mahour)’와 ‘타스니프(Tasnif)’처럼 서양 음악의 기원과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 양식도 있고, 이란에서 좀 더 영역을 확장하면 옛 페르시아 제국부터 내려오던 ‘다스트가(Dastgah)'라는 독특한 양식도 있다. 이란은 여타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음악과 예술에 대해 조금 더 자유로움을 부여했고, 전통에 보다 자유로움을 부여하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예술의 시계가 공식적으로는 1979년 이후 멈춰버렸지만, 이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이란은 훨씬 더 개방돼 있고 불법 유통이긴 하지만 실제로 미국 대중문화 역시 편하게 즐기는 편이라고 한다. 검열이나 심의 위원회가 있었던 우리나라 시대처럼,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들을 사람들은 다 듣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란 사람들은 결코 소비적인 서구 문화를 쫓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가운데 자신들의 전통과 결합한 새로운 형식이나 시대 음악을 추구하는 중이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지만, 2000년도에 공식적으로 출범한 이란의 한 레코드사 사장이 기억났다. 세계 전통 음악의 특성을 인류학과 음악학으로 풀어내던 그 지인의 현명함에 감탄하면서 몇 시간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이 처용 문화제가 한참 열리던 울산에서였는데, 음악은 일상의 패턴을 가장 잘 반영하는 예술의 형태라고 주장하던 그 친구가 그립다. 전쟁이 끝나도 이란 금수 조치가 해제되어야 할 것이고, 이란에 대한 시각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 친구를 다시 보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내일이라도 당장 미 트럼프 대통령이 무슨 변덕을 부릴지도 모르는 판국이기에 더욱 그가 그립다.

[문화산책] 탱크 앞, 꽃 한 송이

잠실종합운동장에 거대한 탱크 한 대가 들어섰다. 총을 든 군인이 시민을 위협했고 모두가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 순간 한 아이가 꽃을 들고 군인 앞에 다가갔다. 총을 겨누던 군인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27년 전인 1999년 6월25일,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내한 공연의 한 장면이다. 이는 단순한 퍼포먼스 공연이 아니었다. 당시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유일한 분단국가였던 한국에서 인류가 서로에게 가한 폭력을 보여주고 전쟁으로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로해주며 간절히 전한 평화의 메시지였다. 2026년 현재, 우리는 반복된 전쟁의 시대에 놓여 있다. 중동의 전면전과 5년째 이어지는 동유럽의 비극은 물리적 파괴를 넘어 인류가 쌓아온 보편적인 윤리와 정신적인 토대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전쟁은 가시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분쟁에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남은 인간의 존엄마저 앗아가며 거대한 정서적 황무지를 남긴다.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데는 수십년이면 족할지 모르나 무너진 인간의 존엄과 윤리, 신뢰와 정서를 회복하는 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알 수 없다. 현재를 사는 우리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까지 계속될 지독한 상흔이다. 이러한 비극 앞에서 정치는 명분을 찾고 경제는 손익을 계산한다. 차가운 계산기와 거창한 이데올로기로 앞에서 개개인의 파편화된 슬픔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예술은 다르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유대인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독일 장교를 만나 쇼팽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 짧은 선율은 총탄보다 강한 생명력을 보여줬다. 논리가 닿지 못하는 심연에서 ‘인간성’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내 세상을 연결하고 정서를 공유하는 예술의 생명력이다. 예술의 힘은 전시관의 액자를 벗어나 포탄이 빗발치는 도시 한구석에서도 그 빛을 발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이 한창이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역은 공습을 당해 사망자가 속출했고 아름다웠던 도시들은 파괴됐다. 어느 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곳에 의문의 벽화들이 그려졌다. 전쟁의 화염으로 파괴된 벽면에 그려진 체조 선수, 탱크 트랩에서 시소를 타는 어린이, 그리고 유도 경기에서 어린이에게 패배하는 한 성인 남성의 모습까지. 바로 얼굴 없는 화가로 유명한 뱅크시(Banksy)의 손길이었다. 그는 무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를 시각적 저항으로 승화시키며 그의 메시지를 전했다. 예술은 아픔을 잠시 잊기 위한 마취제가 아니다. 물리적 장벽과 무력 앞에서 황폐해진 일상의 틈새에 평화와 희망이라는 씨앗을 심는 능동적인 행위다. 파괴된 일상을 복구하는 것이 정치와 경제, 행정과 자본의 몫이라면 무너진 인간의 존엄을 되살리는 것은 오직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영역이다. 2026년 오늘, 우리는 다시 예술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예술이 단지 개인의 취향을 충족하는 화려한 장식품이나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는 자극적인 소비재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 예술은 본연의 역할로써 우리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고 감각을 깨우는 심미적 형상을 보여주며 정서적인 위안을 제공한다. 그러나 전쟁의 비명과 갈등의 신음이 세상에 가득한 지금, 예술은 안온한 위안을 넘어 아픔을 직시하고 시대에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의 꽃 한 송이가 차가운 총구를 거두게 했듯이 인간의 내면이 붕괴되는 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파괴된 황무지 위에 예술이라는 이름의 꽃 한 송이를 피워야 하는 이유다.

[문화산책] 문화재 환수, 정성적 해법 제안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하 국외재단)은 2026년 1월 기준 국외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은 29개국, 약 25만6천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 수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05년 처음 도쿄대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실태를 발표하면서 국외 소재 현황은 7만4천434점이었다. 이를 인용해 당시 공중파에서 ‘위대한 유산 74434’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국외재단의 연도별 현황 자료를 보면 2020년 이후 평균 1만점 이상이 추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 약 11만점이 있으나 쇼비대학의 하야시 요코 교수는 ‘한반도에서 유입된 유물이 30만점에 이를 것’이라고 한 점에 비춰 아직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 결과다. 일본의 경우 공공기관이 아닌 개인 소장이 80%에 이른다는 점에서 현황 조사의 어려움이 있다. 1945년 광복 후 약 1만3천점을 12개국으로부터 환수했다. 환수 방식은 다양하다. 일본과의 정부 협상을 해 ‘반환’받고 미국과 수사 공조를 통해 ‘압수’하고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의궤는 ‘대여’하고 독일의 로텐부르그박물관은 문인석을 자발적으로 ‘기증’하고 경매 등 시장에 나온 것을 ‘구입’하기도 한다. 민간은 ‘기증’, ‘기탁’, ‘구입’ 의 방식으로 1천여점 을 환수했다. 최근의 환수 경향을 보면 과거 불법적으로 반출된 것을 정부 협상 등을 통해 반환받기보다는 시장에 나온 개인 소장품을 경매 등의 방식으로 구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6·25전쟁 때 미국으로 반출된 ‘신흥사 시왕도’와 ‘송광사 오불도’는 불법 취득 사례가 밝혀짐으로써 협상을 통해 반환됐지만 ‘앙부일구’,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등은 구입한 사례다. 그러나 구입 환수 과정에서 문제점이 나타난다. 2017년 프랑스 경매에 나온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1866년 병인양요 때 반출된 것으로 의심돼 과거 약탈품을 구입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최근 프랑스 상원의회에서 1815년(빈회의)부터 1972년(유네스코 문화재 협약) 사이에 획득한 유물 가운데 약탈, 도굴, 강압에 의한 매매 등의 경우 반환한다는 ‘문화재 반환 프레임워크 법안(Loi—cadre)’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는 ‘비싼 구입’이다. 최근 방송사 보도에 따르면 국외재단은 경매에서 앙부일구는 예상가의 18배, ‘강노초상’은 31배, 덕온공주 ‘동제인장’은 9.5배 비싸게 구입했다고 한다. 대체 불가한 유산의 중요성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없다는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정부’의 개입은 상대에게 호재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정량적 해결’보다는 민간을 활용한 ‘정성적인 해법’을 제안한다. 정부는 예산이라는 굴레에 묶여 제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중요한 유산이 예산 몇 10만원 차이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사례나 예상가보다 높은 비용으로 구입하는 이유도 ‘정량적 해결 만능이 낳은 결과다. 손재형 선생은 ‘국보 세한도’를 돌려받기 위해 전쟁의 한복판인 도쿄로 가서 100일 동안 소장인을 만나 문안 인사를 한 결과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 맞다”며 한 푼도 받지 않고 돌려준 사례를 돌아봐야 한다. 문화재는 사물이지만 유산은 정신이자 역사다. 유산은 ‘정신적 인격체’로 ‘정성’을 다해야 빛이 난다.

[문화산책] ‘팝업스토어 성지’ 성수동의 교훈

성수동이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한때 성수역 3번 출구에 들어가려면 대기줄을 서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뜨겁다.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각광받고 있다. 2024년 1분기 성수동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는 5년 전에 비해 약 5배 증가한 총 21만명에 달했다. 2025년 상반기 성수동의 외국인 카드 결제액은 1천315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226.3% 늘었다. 영국의 여행전문지 ‘타임아웃(Time Out)’이 성수동을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 38곳’ 중 4위로 꼽는 등 국제적 위상 또한 크게 높아졌다. 시대의 조류에 밀려 쇠락해 가던 영세 수제화 공장과 인쇄소 밀집지역에 일어난 상전벽해의 놀라운 변화다. 성수동의 변신은 5, 6년 전만 하더라도 MZ세대들에게 인기 높은 트렌디한 카페와 복합문화공간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제는 팝업스토어를 빼놓고 얘기하기 어렵다. 성수동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팝업스토어의 ‘성지’로 불린다. 몽키숄더 용하당, 망빙고 가챠샵, 아사이 팜, 믿음꽁꽁마켓 등 개성 넘치는 이름의 수많은 팝업스토어들이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2주일 정도의 주기로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2023년 한 해 동안 성수동에서는 총 341개 브랜드가 팝업스토어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검색량을 보더라도 ‘성수 팝업스토어’는 홍대 등 다른 주요 상권을 압도한다.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수동 방문 목적 중 팝업스토어가 42.96%로 가장 높다. 성수동의 팝업스토어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순환주기가 매우 짧다. 연간 평균 80~120개의 브랜드를 수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새로움과 몰입적 경험을 쫓는 MZ세대의 소비 성향과 맞아떨어져 반복적 방문을 확대 재생산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문 경험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유된다. 그 결과 팝업스토어 성수동의 유명세는 온라인을 타고 글로벌로 확산되고 있다. 지역에서 문화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인구 유출을 막고, 청년을 비롯한 새로운 정주인구를 유입하기 위한 방책으로 문화만 한 게 없다. 기존 거주민들에게도 문화는 풍요로운 삶과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준다. 여행자를 끌어들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것 역시 문화다. 그래서 요즘 전국의 지자체는 지역에 문화를 입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문화를 입힌다고 능사는 아니다. 개성, 즉 지역의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이를 부각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느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화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주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성수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기존 상인과의 경쟁 및 상권 불균형 초래 등 여러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민간이 운영하는 팝업스토어가 성수동의 지역 정체성을 수제화 공장지대에서 젊은이들의 소비문화 공간으로 바꾼 핵심 동력이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대목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도시재생사업이 아니라 민간과 공공이 함께 만들어가는 거버넌스다. 지방정부는 일방적으로 지역성을 지정하고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대신 붉은 벽돌 지원 사업, 언더스탠드에비뉴 조성,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소셜벤처 육성 등의 정책을 통한 측면 지원에 힘을 쏟았다. 물론 임대료 상승 등의 문제를 생각하면 지속성은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 인기가 쉽게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장소성으로 거듭나야 하는 지역이 적지 않은 경기도는 성수동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 다른 지역을 모방하기보다 먼저 민간의 문화적 동향을 면밀하게 살펴야 하며 그것이 지역의 정체성을 정초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지역민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 지역 실정에 맞는 민관 협력 거버넌스 구축에 대한 고민이 병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문화산책] 성평등과 공존시스템 구축을

1908년 뉴욕,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는 여성들의 함성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들려왔다. ‘빵’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장미’는 평등한 인간으로 존중해달라는 의미였다. 매년 3월8일 ‘세계여성의날’을 맞이할 때마다 그들이 외쳤던 빵과 장미가 오늘날의 여성들 손에 온전히 쥐어졌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로부터 120여년이 흘렀음에도 확실히 “그렇다”란 답을 내리기엔 부족한 점이 많은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니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분명 여성도 남성도 모두 만족스러운 접점을 찾게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 여성사의 시계가 1908년 뉴욕보다 더 이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앞으로 세계적 남녀평등 실현 선도국으로 성장한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우리나라 여성사의 시작점은 1898년 서울 북촌에서 울려 퍼진 ‘여권통문(女權通文)’이다. 당시 개화사상가들에 의해 여성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독립신문 등도 여성의 권리 찾기와 남녀평등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여성 교육이 언급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에 의해 이화학당 등 여학교가 설립됐고 1898년 9월1일 여성 300여명이 서울 북촌에 모여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始通文)’을 발표했다.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집안에만 거처하며 남의 절제만 받으리오”라는 서슬 퍼런 선언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그들은 근대화된 정치에 여성들도 참여할 권리, 남성과 평등하게 직업을 가질 권리, 여성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서구의 참정권운동보다도 앞선 시기에 여성 스스로 존엄을 외치고 교육권과 직업권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선구적 사건이었다. 우리 민족 역사의 주요 장면에서도 여성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임진왜란 당시 부녀자들이 치마를 짧게 잘라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며 병사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고 1919년의 3·1운동의 주역으로 겨우 열일곱 살 학생이었던 유관순과 수많은 여성이 만세운동을 조직해 전국적 확산을 이뤄냈다. 가깝게는 2024년 12월 불법 계엄을 일으킨 내란 우두머리를 탄핵하는 과정에서 응원봉을 들고 목이 터지도록 정의를 외치거나 내리는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 자리를 지킨 ‘키세스단’ 등이 바로 그들이다. 남성은 없었고 여성들만 있었다는 게 아니다. 여성들이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로 공적 공간에 등장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주역으로 활약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2026년 현재,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어떤가. 법적 평등은 어느 정도 갖춰졌으나 경력단절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 여전한 가사노동의 불균형, 디지털 공간으로 확장된 새로운 형태의 성폭력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평등의 지점이 여전히 멀리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남녀평등의 가치는 ‘여성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넘어 구조적 체질 개선을 목표로 도약해야 한다. 2026년의 여성 정책이 지향해야 할 지점은 명확하다. 여성을 수혜의 대상으로 삼는 시혜적 관점에서 벗어나 남녀 모두를 돌봄과 노동의 주체로 보면서 ‘공존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문화산책] 음악, 브라질 사람들의 희로애락

브라질은 K-컬처 소비 국가 중 단연 으뜸이다. 인구 자체가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하지만 그 인구 가운데 한류에 푹 빠진 사람의 비율이 꽤 높다는 건 브라질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매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감정마저 든다. 글쓴이는 그런 의미를 담아 지난 회차 기고에서 브라질산 리얼리티 프로그램 이야기를 한 이유도 있다. 세대와 거주지역에 관계 없이 골고루 한류를 즐기는 브라질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브라질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런 이유로 지난 회에 이어 이번에도 브라질 이야기를 준비했다. 브라질에서 2월 중순 리우 카니발이 개최됐다. 언제나 그렇듯 시끌벅적한 이 축제는 가톨릭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카니발이라는 단어를 ‘사육제’로 번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톨릭문화에서는 부활절을 앞두고 주일을 제외한 40일 정도를 사순 기간으로 정한다. 이 기간에는 금육과 금식 등 세속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야 하는데 브라질에서는 이 스트레스를 미리 풀어주고 육식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축제를 즐긴다. 이 전통이 리우 카니발의 기원이다. 사순 시기는 매년 조금씩 달라진다. 이런 이유로 리우 카니발도 매년 그 개최 시기가 조금씩 다른데 올해 사순 기간이 2월18일 재의 수요일부터 4월5일까지 주일 제외 40일이니 리우 카니발은 그 전주 금요일인 2월13일부터 다음 주 화요일인 2월17일까지 역순으로 계산하면 된다. 브라질의 이런 카니발문화는 유독 큰 규모에 유난히 시끌벅적한 탓에 매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마치 카니발이 벌어지는 일주일만 살겠다는 듯 브라질 국민의 1년은 모두 카니발에 맞춰져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해 번 돈을 저 일주일, 아니 고작 닷새에 모두 쓰는 삶이 올바른지 심각한 의문을 가지는 한국인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삶의 가치를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에 두고 나머지 51주 한 해를 열심히 사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치를 높이는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까. 이 태도와 관점이야말로 우리가 브라질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카니발과 마찬가지로 브라질 음악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역시 상대성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브라질 음악은 특정 장르가 특정 시대에 유행했다기보다 선조들이 남긴 음악 전통에 조금씩 살을 입히고 치장을 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때로는 미국의 대중음악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 중에는 보사노바처럼 1960년대 미국 전역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심지어 최신 유행 스타일이 과거의 전통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우도 있다. 삼바가 그랬고 포루, 쇼루, 그리고 파고지 등 브라질의 음악은 정체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브라질 사람들은 자신의 음악을 특정 장르화하지 않은 채 모두 뭉뚱그려 ‘브라질 대중음악’이라고 부르거나 약자 ‘MPB’로 표기한다. 브라질 사람들에게 음악은 삶을 가장 즐겁게 만들어주는 존재여야 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카니발문화든 축구도 마찬가지다. 브라질 사람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인간을 즐겁게 만드는 존재여야 한다.

[문화산책] 트렌드를 움직이는 ‘K-헤리티지’

한때 우리에게 전통문화는 보존과 계승이라는 무거운 단어 안에 박제된 유물이었다. 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의 문화재는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었고 그 가치를 배우는 것은 일종의 엄숙한 과업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통은 박물관의 적막을 깨고 거리로, 시장으로 나와 우리의 일상을 주도하는 ‘힙한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을 압도하는 이른바 K-헤리티지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전통의 화려한 귀환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그 중심에 선 국립중앙박물관의 행보는 가히 독보적이다. 문화상품 브랜드 ‘뮷즈(MU:DS)’의 2025년 매출액 약 413억원, 연간 관람객 650만명 돌파라는 기록은 전통이 더 이상 박물관 속 유물로만 머물러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세대를 아울러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를 책상 위에 두고 민화 속 호랑이 키링을 가방에 달고 다니는 요즘 전통은 자신의 감각을 드러내는 세련된 방식이 됐다. 이제 전통은 소유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특별한 일상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선다. K-헤리티지는 정적인 보존 정책의 영역에서 동적인 문화 전략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이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 공연을 열고 블랙핑크는 앨범 발매 기념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문화유산 오디오 도슨트와 음원 리스닝 세션을 진행한다. 전통 공간이 동시대 플랫폼으로 전환되는 장면이다. 이 과정에서 유물은 현대 대중문화의 감각으로 재해석되는 현재형 콘텐츠가 된다. 이러한 흐름은 공연예술계에서도 선명하게 포착된다. 서울시무용단의 ‘일무’가 세계 현대무용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뉴욕 댄스 앤드 퍼포먼스 어워드(베시상)를 수상한 것이 대표적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제례악의 의식무 형식을 현대적 무대 언어로 재구성한 한국 무용이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컨템포러리 예술로 인정받았다. 전통이 오늘날의 감각으로 충분히 재해석될 수 있음을 국제 무대에서 입증한 기념비적인 사례다. 그러나 전통을 억지로 글로벌 콘텐츠라는 틀에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해외시장의 취향에 맞춘 과도한 변형은 오히려 전통이 지닌 맥락과 깊이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 고유의 형식과 미학, 서사 구조를 충분히 이해한 뒤 그것을 동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우선돼야 한다. 전통의 리듬과 호흡을 오늘의 관객이 향유할 수 있도록 참여와 경험의 구조로 설계할 때 비로소 과거의 유산은 생명력을 얻은 현재의 콘텐츠가 된다. 물론 급격한 변화 앞에는 우려 섞인 시선도 존재한다. 상업화에 대한 경계나 본질 훼손에 대한 논쟁은 우리가 끊임없이 마주해야 할 숙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변화를 거부하고 멈춰 선 전통은 생명력을 잃고 결국 잊힌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은 전통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기 위한 ‘창작의 진통’에 가깝다. 결국 K-헤리티지의 미래는 과거를 얼마나 완벽하게 보존하느냐가 아니라 그 유산을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유물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그 속에 잠든 고유한 미학을 현대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전략적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문화 본연의 멋을 현재의 감각으로 드러낼 때 K-헤리티지는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트렌드를 이끌 것이다. 박물관의 유리벽을 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숨 쉬는 전통이 결국 시대를 움직인다.

[문화산책] 日 교토의 문인석과 불융통물

불융통물(不融通物)은 거래할 수 없는 물건을 뜻한다. 문화재와 관련한 불융통물은 공용물, 도굴품, 도난품 등으로 출처(Provenance)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엄격히 제한한다. 특히 인체의 유해 등은 절대 거래 불가다. 최근에는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경우 법률적 판단보다 도덕적, 윤리적인 측에서 불융통물로 사고파는 행위를 금지한다. 그럼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인 석인상 등은 어떤가. 일각에서는 무덤 밖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수집 행위를 불법이 아니라고 하지만 관습법적으로 보면 석인상은 무덤의 부속물 또는 일체물로 구성된다. 이와 관련한 한국 대법원의 판례는 분묘에 설치된 석물(비석, 상석, 석인상 등)은 분묘와 일체가 돼 제사 주재자의 소유로 한다(대법원 99다14006)고 판시한 바도 있다. 따라서 옛 무덤의 매장물과 석인상 등은 사고팔 수 없는 것이다. 일본 교토 아리시야마에 있는 보엄원 인근의 두부식당 앞 거리에는 조선시대의 문인석 12구가 도열해 있다. 식당 안 정원에도 3구가 있다. 이 문인석은 얼굴 형태와 크기, 복장 등을 볼 때 조선 초부터 말까지 오백년 역사를 관통하는 시리즈로 구성됐다. 2016년 유학생에 의해 문화유산회복재단에 신고 접수된 이래 수차례 실태조사를 했고 일본 관계자들과 환수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소유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오늘날까지 거리에 두고 있으며 처분할 의사가 있다고 한다. 문제는 문인석을 길가에 도열해 놓은 모습이 일본의 신사에 있는 참도(参道)를 떠올려 무덤의 양옆에서 지키던 석인상(문인과 무인)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고 있으며 음지에서 흑화되고 풍화돼 갈수록 본연의 얼굴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조속히 되찾아 보존 처리와 함께 가치 보전을 해야 할 유산이지만 일본 측은 소유자와의 거래 및 외교 협상을 통해 ‘인도’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한국의 관계기관은 실태조사를 통해 문인석 15구가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은 맞지만 왕릉에 있던 것은 아니고 희소성이나 가치면에서 정부의 외교 협상보다는 민간교류를 통해 환수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독일 로텐바움 박물관은 2019년 조선시대 문인석 2점을 자발적으로 한국에 기증했다. 박물관은 1983년 인사동 골동품상에서 문인석을 구입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박물관의 윤리 기준이 강화되면서 불융통물은 선의취득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에 돌려주자고 결정한 것이다. 윤리가 작동한 사례다. 2001년 일본에서 되찾은 석조유물 70점은 일제강점기 반출된 것이다. 유명한 수집가였던 구사카 마모루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한국의 기업인은 무덤을 지키던 석물은 정원의 조경용이 아니라 고향을 지켜야 하는 수호신이라는 점을 끈질기게 설득해 환수했다는 점에서 유산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인석같이 묘지석도 불융통물로 기증 반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고려시대 문신 경휘의 묘지와 조선 세조의 증손자 금강부수 이주의 묘지 등도 재미동포가 자발적으로 기증한 사례다. 이런 점에서 교토에 있는 문인석은 설령 구입했어도 소장인은 자발적으로 돌려줘야 한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국과의 문화재 협정에서 ‘사유물은 한국에 자발적으로 기증하도록 권장(勸奬)한다’는 합의 의사록에 따라 문인석의 기증을 권장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문화산책] 아파트 공동체에 예술을 입히자

주지하다시피 아파트는 효율적이고 안전할 순 있지만 이웃 간의 소통 부재와 공동체의 해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함께 살지만 서로 모르는’ 지독한 고립은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지고 정서적으로 고립되며 세대가 단절되는 등 심각한 도시 문제의 단초가 된다. 반면 상호 신뢰와 협력이 이뤄지는 공동체는 단순한 이웃 관계를 넘어 사회적 연결망으로서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특히 초고령 시대에 1인 가구가 날로 늘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체의 돌봄, 정보교환, 생활 지원 등의 기능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도시건 농어촌이건 공동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조건이다. 파편화된 아파트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예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세대나 계층을 뛰어넘어 감정적 교류가 일어나는 소통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민이 함께 참여하고 감상하는 벽화, 음악회, 공방 등의 예술 활동은 서로를 이해하는 비언어적 소통의 장이다. 예술은 개방적이어서 다양한 이질적 요소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 간의 관계를 이어주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만드는 사회적 매개로서의 예술은 공간에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한다. 예술은 감정의 공감과 표현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지역적 개성이나 소속감이 약한 아파트에 고유한 이미지와 스토리를 부여함으로써 공동체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드는 것 또한 예술의 기능 중 하나다. 최근 들어 국내에도 아파트에 예술을 입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엘리베이터 홀, 1층 라운지 등의 자투리 공간에 소규모 갤러리나 전시 공간을 조성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갤러리는 그림 전시에 그치지 않고 ‘단지 내 도슨트 투어’나 ‘작가와의 대화’, ‘아티스트 라이브 드로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아이파크 참사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는 단지 내에 아예 미술관을 조성했다. 입주하기도 전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주민은 이를 극복하고 보다 행복한 아파트를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 예술을 떠올렸다.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아트리빙기획단’을 꾸리고 그 결실로 단지 내에 미술관이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이 공간에 재능기부 형태로 ‘인문예술파티’를 열고 ‘할아버지의 콜렉션’을 주제로 한 전시도 개최했다. 아파트 운영 구조의 특성상 비용이 발생하는 서비스는 지속되기 어렵다. 그러나 갤러리 같은 경우는 비용도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 전시공간이 부족한 신진 작가나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면 된다. 판매 기능까지 갖추면 소소한 수익도 가능하다. 주민들이 뜻만 모을 수 있으면 된다. 날로 늘어나는 아파트 공동체 숲에 예술이라는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면 어떨까. 공동체가 살아 있는 따뜻한 도시를 넘어 경기도를 예술이 입혀진 아파트가 있는 지역으로 글로벌 브랜딩도 할 수 있다. 고급스러운 아파트에 산다는 주민의 자부심은 덤이다. 일전에 수원이 깨끗한 화장실로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이목을 끈 바 있음을 상기해 보자.

[문화산책] 호모 루덴스로서 놀이 문해력을 잃지 말아야

연말연시에 한 해의 화두 혹은 주제를 정한다. 올해는 첫 달이 다 가도록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며칠 전에야 겨우 2026년은 호모 루덴스로서 충실하게 살아 보자고 결심했다. 물론 일과 건강의 균형이라는 대전제가 있지만 일상에서 나만의 놀이를 찾아 즐거운 한 해를 보내 보자는 핵심 실천 전략을 세운 셈이다. 호모 루덴스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요한 하위징아가 제시한 개념이다.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와 도구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와 함께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인류 문화 발전 과정을 이끌어 온 핵심 원동력이다. 생각하는 힘과 도구의 사용이 인간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 역량이라면 놀이는 인간이 그 힘을 발휘하는 데 도움을 주는 촉진제 혹은 증폭제로 작용한다. 즐거움을 능동적으로 찾아 실행하는 행위인 놀이가 없었다면 힘든 노동을 마친 후 지친 심신을 달래지 못해 인간 생존이 더 어려워졌을 것이고 인류 문명 또한 발달하지 못했을 터다. 놀이의 속성을 보면 인간의 삶과 인류 문화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자유와 자발성을 들 수 있다. 자발적 선택에 의한 놀이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끼며 그를 통해 창의성을 기를 수 있다. 간혹 놀이라는 이름으로 타의에 의한 강제나 강요 행위가 이뤄지기도 하는데 그 자체가 놀이의 형태를 보인다 해도 진정한 놀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인간은 놀이에 몰입하는 동안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이나 제약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이는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긍정 경험으로 작용한다. 함께하는 놀이에는 엄격한 약속과 규칙이 적용되는데 이를 지켜야만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인간이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규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도덕성도 기를 수 있다. 또 승패를 겨루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놀이에는 긴장감이 깃들기 마련인데 이를 해소하는 과정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긴장 해소를 통한 안정감은 인간 삶의 활력으로 작용한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소수의 연구자나 일부 산업 영역에서 그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AI가 보통의 일상 안까지 깊숙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창의성까지 흉내 내는 지식 생성형 AI뿐만 아니라 피지컬 AI까지 일반화되는 시대에는 노동보다 놀이가 인간 생존에 더 필요한 요소일지 모른다. 재화 축적을 위한 지적 활동이나 노동을 AI와 로봇이 담당하게 되면 인간의 남아도는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할지 그 고민의 해답을 놀이에서 찾아보자. 뇌를 도파민에 절여버리는 그런 놀이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움과 창의성, 사회성을 기르고 해방감에 기반한 도전 의식을 촉진하는 놀이를 찾아보자. 그럴듯한 정답을 알려주는 AI가 따라잡지 못하는, 질문을 만들어내는 놀이를 지속한다면 인간은 효율성의 노예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 창출의 주인으로서 인류 문화 발전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놀이의 창조자, 주관자, 실행자로서의 위치는 AI에게 빼앗기지 말자.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필자도 놀이 문해력을 열심히 키워 볼 예정이다.

[문화산책] 브라질 음악과 문화

한 달 전 넷플릭스를 통해 브라질에서 제작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하나가 공개됐다. ‘내 한국인 남자 친구’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브라질 여성 다섯 명의 한국 러브스토리라는데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는 한국의 이미지와는 분명 다를 거라고 기대하며 에피소드 한두 개를 열어 본 기억이 있다. 일단 브라질 여인들의 정서가 확연히 달라 매우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16세기 초에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한 때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관점이 별반 차이가 없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우리와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브라질이라는 나라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편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근 40년이 다 돼 가도 이 나라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한 사람조차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너무 넓은 땅 덩어리와 다양한 문화, 그리고 인종이 섞여 있는 바람에 뭘 보고 왔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더러 전하곤 한다. 그러나 세계의 음악과 문화를 이야기할 때 브라질이라는 나라를 빼고선 현대문화와 세계 각지의 음악에 대해 논하기가 곤란하다. 1960년대 초반 이후 미국 재즈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것도 브라질 음악이고 브라질만의 전유물에서 세계 음악 애호가들이 시공을 초월해 사랑하는 보사노바 역시 브라질의 음악이다. 브라질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OX’류 또는 ‘흑백논리’식 구분 방법을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 ‘문화의 용광로’라는 별명에 걸맞게 브라질에서는 흑백 또는 이 두 가지 색깔에 가까운 형태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회색’이 많다고 보는 것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즉, 우리에게 그나마 친숙한 삼바나 보사노바 같은 음악만 해도 순수한 100% 삼바나 보사노바보다는 ‘삼바를 기본으로 한 브라질 음악’ 또는 ‘보사노바의 향취를 담은 음악’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아프리카나 유럽, 심지어 20세기 초반을 정점으로 아시아 이민자들과 그들이 들고 온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특정한 문화 현상이나 형태로 정의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인종만 봐도 순수 흑인이나 백인보다도 혼혈 인종이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브라질은 모든 것이 섞여 버린 혼용의 나라다. 말 그대로 ‘브라질식’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브라질 음악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데에는 미국의 재즈 연주자 스탄 게츠와 브라질 보사노바의 아버지 주앙 질베르토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음악성과 대중성에 비해 그 가치가 여전히 과소 평가된 감이 있다. 이 음악조차 1959년에서 1960년대 초반 미국과 브라질 현지에서 유행하던 대중음악인데 그 이후 파생된 여러 음악도 그렇고, 삼바나 여타 장르의 음악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다. 여전히 우리가 브라질 대중음악과 문화에 대해 정보가 없다는 점은 문화 교류 측면에서 너무 일방적이라 미안함마저 든다. 특히 한국인 남자 친구를 찾으러 날아온 브라질 여인네들에게.

[문화산책] 2026년 새해, 당신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무엇이 있나요

2026년의 열흘이 지났다.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의 스마트폰은 분주하게 나의 ‘취향’을 배달한다. 음악 스트리밍 앱은 지난 청취 기록을 분석해 내가 좋아할 법한 곡들을 치밀하게 선별하고 OTT 플랫폼은 내 취향의 결을 정확히 읽어낸 영상들로 화면을 채운다. 알고리즘이 이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어떤 리듬에 반응하는지 그리고 어떤 서사에 오래 머무는지를 정교한 데이터로 계산해낸다. 이 안락한 큐레이션은 우리를 ‘실패 없는’ 선택의 세상에 살게 한다. 이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묘한 허기를 느낀다.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취향의 안락함’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단조롭다. 놀라움은 줄고 예측 가능성은 커진다. 익숙한 취향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선택의 주체가 아닌 결과의 소비자가 돼 가고 예술이 지닌 우연성과 긴장은 점점 희미해진다. 낯선 음반 가게에서 우연히 집어 든 앨범 한 장, 제목 하나에 이끌려 펼쳐본 책 한 권 그리고 공연장 구석 자리에서 처음 마주한 이름 모를 연주자의 떨리는 호흡. 플레이리스트 밖에서 마주한 이러한 우연들은 종종 우리의 취향을 바꾸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흔들어 놓는다. 알고리즘은 어제의 나를 분석해 오늘의 나를 설계한다. 내일의 내가 꿈꿀 전율, ‘아직 알지 못하는 나’의 가능성은 그 계산에서 누락되고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실패의 가능성’은 차단돼 버린다. 예술은 탐험이 아닌 안전한 소비로, 감상은 모험이 아닌 확인 절차로 전락한다. 창작자들 또한 선택받기 위해 알고리즘의 문법을 학습하며 파격적인 실험을 외면한 채 검증된 형식으로 수렴한다. 우리가 예술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순간이다. 예술의 본질은 효율에 있지 않다. 예술은 언제나 불편함과 함께 있어 왔다. 이해되지 않는 소리 앞에 멈춰 서는 시간 또는 낯선 이미지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순간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 장면에서 흔들리는가, 나는 왜 이 소리에 마음을 내어주는가. 예술은 우리에게 답이 아닌 질문을 건넨다. 그리고 그 질문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유하고 공감하며 세계를 공유한다. 이제 알고리즘의 궤도 밖으로 걸어나가 의도적인 ‘이탈’을 감행해 볼 시점이다. 스스로 흔들리는 경험을 해 보는 것이다. 낯선 동네의 작은 갤러리에 들어가 이름 모를 작가의 거친 붓질 앞에 서 보고 비인기 독립영화를 찾아보고 소음 가득한 도심의 길거리 버스킹 음악에 귀기울여 보라. 그곳에는 데이터의 연산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인간의 감정과 사유의 세계가 숨 쉬고 있다.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제공하지 않는 경험을 의식적으로 ‘선택’해 보는 일이다. 추천 목록을 잠시 닫고 목적 없는 산책처럼 예술을 만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해도 괜찮은 감상의 시간이다. 효율과 정확함에서 한 발 벗어날 때 예술은 다시 살아 움직인다. 기술이 건네는 안전한 선택지 너머에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예측할 수 없는 울림이 존재한다. 알고리즘 바깥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일, 그 작은 일탈이 우리의 감각을 되살린다. 2026년, 새해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정교하게 분석된 취향에서 벗어난, 나를 당황시키고 마음을 흔들어 놓는 낯선 소리를 하나쯤 허락해 보는 건 어떨까. 그 사소한 균열이 당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아름다운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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