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日 교토의 문인석과 불융통물

불융통물(不融通物)은 거래할 수 없는 물건을 뜻한다. 문화재와 관련한 불융통물은 공용물, 도굴품, 도난품 등으로 출처(Provenance)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엄격히 제한한다. 특히 인체의 유해 등은 절대 거래 불가다. 최근에는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경우 법률적 판단보다 도덕적, 윤리적인 측에서 불융통물로 사고파는 행위를 금지한다. 그럼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인 석인상 등은 어떤가. 일각에서는 무덤 밖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수집 행위를 불법이 아니라고 하지만 관습법적으로 보면 석인상은 무덤의 부속물 또는 일체물로 구성된다. 이와 관련한 한국 대법원의 판례는 분묘에 설치된 석물(비석, 상석, 석인상 등)은 분묘와 일체가 돼 제사 주재자의 소유로 한다(대법원 99다14006)고 판시한 바도 있다. 따라서 옛 무덤의 매장물과 석인상 등은 사고팔 수 없는 것이다. 일본 교토 아리시야마에 있는 보엄원 인근의 두부식당 앞 거리에는 조선시대의 문인석 12구가 도열해 있다. 식당 안 정원에도 3구가 있다. 이 문인석은 얼굴 형태와 크기, 복장 등을 볼 때 조선 초부터 말까지 오백년 역사를 관통하는 시리즈로 구성됐다. 2016년 유학생에 의해 문화유산회복재단에 신고 접수된 이래 수차례 실태조사를 했고 일본 관계자들과 환수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소유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오늘날까지 거리에 두고 있으며 처분할 의사가 있다고 한다. 문제는 문인석을 길가에 도열해 놓은 모습이 일본의 신사에 있는 참도(参道)를 떠올려 무덤의 양옆에서 지키던 석인상(문인과 무인)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고 있으며 음지에서 흑화되고 풍화돼 갈수록 본연의 얼굴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조속히 되찾아 보존 처리와 함께 가치 보전을 해야 할 유산이지만 일본 측은 소유자와의 거래 및 외교 협상을 통해 ‘인도’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한국의 관계기관은 실태조사를 통해 문인석 15구가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은 맞지만 왕릉에 있던 것은 아니고 희소성이나 가치면에서 정부의 외교 협상보다는 민간교류를 통해 환수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독일 로텐바움 박물관은 2019년 조선시대 문인석 2점을 자발적으로 한국에 기증했다. 박물관은 1983년 인사동 골동품상에서 문인석을 구입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박물관의 윤리 기준이 강화되면서 불융통물은 선의취득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에 돌려주자고 결정한 것이다. 윤리가 작동한 사례다. 2001년 일본에서 되찾은 석조유물 70점은 일제강점기 반출된 것이다. 유명한 수집가였던 구사카 마모루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한국의 기업인은 무덤을 지키던 석물은 정원의 조경용이 아니라 고향을 지켜야 하는 수호신이라는 점을 끈질기게 설득해 환수했다는 점에서 유산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인석같이 묘지석도 불융통물로 기증 반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고려시대 문신 경휘의 묘지와 조선 세조의 증손자 금강부수 이주의 묘지 등도 재미동포가 자발적으로 기증한 사례다. 이런 점에서 교토에 있는 문인석은 설령 구입했어도 소장인은 자발적으로 돌려줘야 한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국과의 문화재 협정에서 ‘사유물은 한국에 자발적으로 기증하도록 권장(勸奬)한다’는 합의 의사록에 따라 문인석의 기증을 권장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문화산책] 아파트 공동체에 예술을 입히자

주지하다시피 아파트는 효율적이고 안전할 순 있지만 이웃 간의 소통 부재와 공동체의 해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함께 살지만 서로 모르는’ 지독한 고립은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지고 정서적으로 고립되며 세대가 단절되는 등 심각한 도시 문제의 단초가 된다. 반면 상호 신뢰와 협력이 이뤄지는 공동체는 단순한 이웃 관계를 넘어 사회적 연결망으로서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특히 초고령 시대에 1인 가구가 날로 늘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체의 돌봄, 정보교환, 생활 지원 등의 기능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도시건 농어촌이건 공동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조건이다. 파편화된 아파트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예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세대나 계층을 뛰어넘어 감정적 교류가 일어나는 소통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민이 함께 참여하고 감상하는 벽화, 음악회, 공방 등의 예술 활동은 서로를 이해하는 비언어적 소통의 장이다. 예술은 개방적이어서 다양한 이질적 요소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 간의 관계를 이어주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만드는 사회적 매개로서의 예술은 공간에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한다. 예술은 감정의 공감과 표현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지역적 개성이나 소속감이 약한 아파트에 고유한 이미지와 스토리를 부여함으로써 공동체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드는 것 또한 예술의 기능 중 하나다. 최근 들어 국내에도 아파트에 예술을 입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엘리베이터 홀, 1층 라운지 등의 자투리 공간에 소규모 갤러리나 전시 공간을 조성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갤러리는 그림 전시에 그치지 않고 ‘단지 내 도슨트 투어’나 ‘작가와의 대화’, ‘아티스트 라이브 드로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아이파크 참사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는 단지 내에 아예 미술관을 조성했다. 입주하기도 전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주민은 이를 극복하고 보다 행복한 아파트를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 예술을 떠올렸다.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아트리빙기획단’을 꾸리고 그 결실로 단지 내에 미술관이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이 공간에 재능기부 형태로 ‘인문예술파티’를 열고 ‘할아버지의 콜렉션’을 주제로 한 전시도 개최했다. 아파트 운영 구조의 특성상 비용이 발생하는 서비스는 지속되기 어렵다. 그러나 갤러리 같은 경우는 비용도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 전시공간이 부족한 신진 작가나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면 된다. 판매 기능까지 갖추면 소소한 수익도 가능하다. 주민들이 뜻만 모을 수 있으면 된다. 날로 늘어나는 아파트 공동체 숲에 예술이라는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면 어떨까. 공동체가 살아 있는 따뜻한 도시를 넘어 경기도를 예술이 입혀진 아파트가 있는 지역으로 글로벌 브랜딩도 할 수 있다. 고급스러운 아파트에 산다는 주민의 자부심은 덤이다. 일전에 수원이 깨끗한 화장실로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이목을 끈 바 있음을 상기해 보자.

[문화산책] 호모 루덴스로서 놀이 문해력을 잃지 말아야

연말연시에 한 해의 화두 혹은 주제를 정한다. 올해는 첫 달이 다 가도록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며칠 전에야 겨우 2026년은 호모 루덴스로서 충실하게 살아 보자고 결심했다. 물론 일과 건강의 균형이라는 대전제가 있지만 일상에서 나만의 놀이를 찾아 즐거운 한 해를 보내 보자는 핵심 실천 전략을 세운 셈이다. 호모 루덴스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요한 하위징아가 제시한 개념이다.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와 도구의 인간인 호모 파베르와 함께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인류 문화 발전 과정을 이끌어 온 핵심 원동력이다. 생각하는 힘과 도구의 사용이 인간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 역량이라면 놀이는 인간이 그 힘을 발휘하는 데 도움을 주는 촉진제 혹은 증폭제로 작용한다. 즐거움을 능동적으로 찾아 실행하는 행위인 놀이가 없었다면 힘든 노동을 마친 후 지친 심신을 달래지 못해 인간 생존이 더 어려워졌을 것이고 인류 문명 또한 발달하지 못했을 터다. 놀이의 속성을 보면 인간의 삶과 인류 문화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자유와 자발성을 들 수 있다. 자발적 선택에 의한 놀이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끼며 그를 통해 창의성을 기를 수 있다. 간혹 놀이라는 이름으로 타의에 의한 강제나 강요 행위가 이뤄지기도 하는데 그 자체가 놀이의 형태를 보인다 해도 진정한 놀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인간은 놀이에 몰입하는 동안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이나 제약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이는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긍정 경험으로 작용한다. 함께하는 놀이에는 엄격한 약속과 규칙이 적용되는데 이를 지켜야만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인간이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규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도덕성도 기를 수 있다. 또 승패를 겨루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놀이에는 긴장감이 깃들기 마련인데 이를 해소하는 과정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긴장 해소를 통한 안정감은 인간 삶의 활력으로 작용한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소수의 연구자나 일부 산업 영역에서 그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AI가 보통의 일상 안까지 깊숙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창의성까지 흉내 내는 지식 생성형 AI뿐만 아니라 피지컬 AI까지 일반화되는 시대에는 노동보다 놀이가 인간 생존에 더 필요한 요소일지 모른다. 재화 축적을 위한 지적 활동이나 노동을 AI와 로봇이 담당하게 되면 인간의 남아도는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할지 그 고민의 해답을 놀이에서 찾아보자. 뇌를 도파민에 절여버리는 그런 놀이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움과 창의성, 사회성을 기르고 해방감에 기반한 도전 의식을 촉진하는 놀이를 찾아보자. 그럴듯한 정답을 알려주는 AI가 따라잡지 못하는, 질문을 만들어내는 놀이를 지속한다면 인간은 효율성의 노예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 창출의 주인으로서 인류 문화 발전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놀이의 창조자, 주관자, 실행자로서의 위치는 AI에게 빼앗기지 말자.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필자도 놀이 문해력을 열심히 키워 볼 예정이다.

[문화산책] 브라질 음악과 문화

한 달 전 넷플릭스를 통해 브라질에서 제작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하나가 공개됐다. ‘내 한국인 남자 친구’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브라질 여성 다섯 명의 한국 러브스토리라는데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는 한국의 이미지와는 분명 다를 거라고 기대하며 에피소드 한두 개를 열어 본 기억이 있다. 일단 브라질 여인들의 정서가 확연히 달라 매우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16세기 초에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한 때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관점이 별반 차이가 없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우리와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브라질이라는 나라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편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근 40년이 다 돼 가도 이 나라의 진정한 정체를 파악한 사람조차 쉽게 발견할 수 없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너무 넓은 땅 덩어리와 다양한 문화, 그리고 인종이 섞여 있는 바람에 뭘 보고 왔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더러 전하곤 한다. 그러나 세계의 음악과 문화를 이야기할 때 브라질이라는 나라를 빼고선 현대문화와 세계 각지의 음악에 대해 논하기가 곤란하다. 1960년대 초반 이후 미국 재즈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것도 브라질 음악이고 브라질만의 전유물에서 세계 음악 애호가들이 시공을 초월해 사랑하는 보사노바 역시 브라질의 음악이다. 브라질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OX’류 또는 ‘흑백논리’식 구분 방법을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 ‘문화의 용광로’라는 별명에 걸맞게 브라질에서는 흑백 또는 이 두 가지 색깔에 가까운 형태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회색’이 많다고 보는 것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즉, 우리에게 그나마 친숙한 삼바나 보사노바 같은 음악만 해도 순수한 100% 삼바나 보사노바보다는 ‘삼바를 기본으로 한 브라질 음악’ 또는 ‘보사노바의 향취를 담은 음악’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브라질이라는 나라가 아프리카나 유럽, 심지어 20세기 초반을 정점으로 아시아 이민자들과 그들이 들고 온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특정한 문화 현상이나 형태로 정의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인종만 봐도 순수 흑인이나 백인보다도 혼혈 인종이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브라질은 모든 것이 섞여 버린 혼용의 나라다. 말 그대로 ‘브라질식’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브라질 음악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데에는 미국의 재즈 연주자 스탄 게츠와 브라질 보사노바의 아버지 주앙 질베르토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음악성과 대중성에 비해 그 가치가 여전히 과소 평가된 감이 있다. 이 음악조차 1959년에서 1960년대 초반 미국과 브라질 현지에서 유행하던 대중음악인데 그 이후 파생된 여러 음악도 그렇고, 삼바나 여타 장르의 음악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다. 여전히 우리가 브라질 대중음악과 문화에 대해 정보가 없다는 점은 문화 교류 측면에서 너무 일방적이라 미안함마저 든다. 특히 한국인 남자 친구를 찾으러 날아온 브라질 여인네들에게.

[문화산책] 2026년 새해, 당신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무엇이 있나요

2026년의 열흘이 지났다.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의 스마트폰은 분주하게 나의 ‘취향’을 배달한다. 음악 스트리밍 앱은 지난 청취 기록을 분석해 내가 좋아할 법한 곡들을 치밀하게 선별하고 OTT 플랫폼은 내 취향의 결을 정확히 읽어낸 영상들로 화면을 채운다. 알고리즘이 이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어떤 리듬에 반응하는지 그리고 어떤 서사에 오래 머무는지를 정교한 데이터로 계산해낸다. 이 안락한 큐레이션은 우리를 ‘실패 없는’ 선택의 세상에 살게 한다. 이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묘한 허기를 느낀다.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취향의 안락함’은 편리하지만 동시에 단조롭다. 놀라움은 줄고 예측 가능성은 커진다. 익숙한 취향이 반복되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선택의 주체가 아닌 결과의 소비자가 돼 가고 예술이 지닌 우연성과 긴장은 점점 희미해진다. 낯선 음반 가게에서 우연히 집어 든 앨범 한 장, 제목 하나에 이끌려 펼쳐본 책 한 권 그리고 공연장 구석 자리에서 처음 마주한 이름 모를 연주자의 떨리는 호흡. 플레이리스트 밖에서 마주한 이러한 우연들은 종종 우리의 취향을 바꾸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흔들어 놓는다. 알고리즘은 어제의 나를 분석해 오늘의 나를 설계한다. 내일의 내가 꿈꿀 전율, ‘아직 알지 못하는 나’의 가능성은 그 계산에서 누락되고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실패의 가능성’은 차단돼 버린다. 예술은 탐험이 아닌 안전한 소비로, 감상은 모험이 아닌 확인 절차로 전락한다. 창작자들 또한 선택받기 위해 알고리즘의 문법을 학습하며 파격적인 실험을 외면한 채 검증된 형식으로 수렴한다. 우리가 예술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순간이다. 예술의 본질은 효율에 있지 않다. 예술은 언제나 불편함과 함께 있어 왔다. 이해되지 않는 소리 앞에 멈춰 서는 시간 또는 낯선 이미지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순간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 장면에서 흔들리는가, 나는 왜 이 소리에 마음을 내어주는가. 예술은 우리에게 답이 아닌 질문을 건넨다. 그리고 그 질문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유하고 공감하며 세계를 공유한다. 이제 알고리즘의 궤도 밖으로 걸어나가 의도적인 ‘이탈’을 감행해 볼 시점이다. 스스로 흔들리는 경험을 해 보는 것이다. 낯선 동네의 작은 갤러리에 들어가 이름 모를 작가의 거친 붓질 앞에 서 보고 비인기 독립영화를 찾아보고 소음 가득한 도심의 길거리 버스킹 음악에 귀기울여 보라. 그곳에는 데이터의 연산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인간의 감정과 사유의 세계가 숨 쉬고 있다.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제공하지 않는 경험을 의식적으로 ‘선택’해 보는 일이다. 추천 목록을 잠시 닫고 목적 없는 산책처럼 예술을 만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해도 괜찮은 감상의 시간이다. 효율과 정확함에서 한 발 벗어날 때 예술은 다시 살아 움직인다. 기술이 건네는 안전한 선택지 너머에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예측할 수 없는 울림이 존재한다. 알고리즘 바깥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일, 그 작은 일탈이 우리의 감각을 되살린다. 2026년, 새해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정교하게 분석된 취향에서 벗어난, 나를 당황시키고 마음을 흔들어 놓는 낯선 소리를 하나쯤 허락해 보는 건 어떨까. 그 사소한 균열이 당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아름다운 시작이 될 것이다.

[문화산책] 환수·반환... 한일 정상회담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모든 이가 희망과 기대를 말하지만 새해 벽두부터 들려오는 뉴스는 어둡다. 지구촌 곳곳이 전쟁으로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유라시아, 중동, 동남아와 서남아시아 그리고 중남미로 확산되고 있다. 아프리카는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있다. 국지전이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제2차세계 대전이 끝나고 1954년 국제사회는 전쟁 등 무력 충돌에 의한 문화재 보호를 목적으로 헤이그협약을 체결했다. 그럼에도 2003년 이라크전쟁에서 바그다드국립박물관 등이 약탈 당했고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 중에도 파괴와 약탈이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은 헤이그협약의 유용성을 의심하게 한다. 강력한 보호 수단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45년 10월 창설 당시 유엔 가입국은 51개국이다. 현재는 193개국이 가입했다. 새로 가입한 142개국은 독립국이 다수다. 독립국은 여러 과제 중 하나로 문화유산의 원상 회복을 추진했다. 수십년에서 수백년 지배를 받은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 ‘문화유산’은 핵심적 요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은 유네스코에 역할을 부여했고 유네스코는 1978년 ‘문화재반환촉진정부간위원회(ICPRCP)’를 구성해 식민지에서의 약탈 문화재 반환을 촉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국의 환수 노력에 비해 약탈국의 반환 성과는 미미하다. 한국은 1989년 위원국으로 참여하고 두 차례 의장국을 수임했지만 일제강점기 피해에 대해 이렇다 할 결실이 없었다.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과거 피점령지에서 약탈한 문화유산의 반환이 진행되고 있다. 근래에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베트남 등의 피해 유물도 반환하고 있다. 물론 가해국의 반환에는 피해국의 환수 노력이 있기에 가능하다. 더구나 국제사회가 자국의 이익을 높이기 위해 외교적 수단으로 문화유산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사례를 보면 2014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서 조선 국새와 어보를 반환한 점이나 한국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시 푸틴 대통령이 정상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한 선물로 19세기 조선 검을 기증했다. 일본 정부는 네 차례 한국 정부에 반환했다. 1958, 1965, 1991, 2011년이다. 테라우치 문고, 조선왕조실록 등은 반환보다는 기증 등의 방식으로 환수했다. 정부의 반환 요구에 일본 정부가 ‘인도’한 결과다. 동아시아의 정세가 매우 유동적이다. 중국과 대만 갈등에 일본이 가세하고 미국이 양다리 외교를 함으로써 역내 외교적 현안이 증폭되고 있다. 일본이 고립될 수 있는 상황에 몰릴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한국 대통령은 중국에 이어 일본을 방문한다. 역내 안정과 평화 기반 확립, 국제사회의 변동성 대응 등 많은 과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외교 역량을 극대화해 민족의 숙원인 ‘오구라 수집품’을 환수할 기회다. 네 차례 일본 정부의 반환은 외교적 변동성이 큰 시기에 한국 정부의 환수 노력에 의해 성취됐다. 2010년 아사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이 조선왕조 도서 반환에 서명한 것이 최근의 사례다. 환수 의지 없이 반환은 없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일본 정상에게 오구라 수집품 중 하나를 재현해 선물하고 진품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면 어떨지 기대해본다.

[문화산책] 제2경기아트센터 조성해야

2029년 서울 여의도공원에 제2세종문화회관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1천800석 규모의 대공연장을 비롯해 중공연장과 전시장, 전망대 등을 갖춘 복합문화시설이다. 최근 들어 서울 말고도 인천, 대구, 부산 등 곳곳에서 대형 공연장 건립 프로젝트가 적극 추진되고 있다. ‘2024 등록공연장 현황’ 및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경기도에는 전국 공연장의 13.6%인 186개가 있다. 427개소(31.3%)를 보유한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전국 공연장의 객석은 50만7천700석으로 파악되는데 경기도는 이중 16.3%인 8만2천853석을 가지고 있어 서울에 이어 2위다. 이렇게만 보면 경기도의 공연장은 비교적 충분한 수준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인구 1천명당 경기도의 공연장 수는 0.0136개로 서울(0.0458개)의 3분의 1, 전국 평균(0.0267개)의 절반 수준이다. 인구 1천명당 객석 수 역시 경기도는 6.03석으로 서울(13.52석)의 절반 이하, 전국 평균(9.93석)의 3분의 2에 불과하다. 인구 대비 객석 비율이 가장 높은 제주(27.52석)는 차치하고라도 광주(6.68석), 부산(6.78석)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경기도의 공연장은 수적인 면에서는 전국 상위권이나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전국 평균 이하다. 1천400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인구에 공연 서비스를 제공할 만한 충분한 수준의 공연장 및 객석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다. 문화예술 인프라의 수도권 집중이라는 패러다임의 그늘에 가려진 경기도 공연 인프라가 열악한 실정이다. 더욱 문제는 경기 북부와 남부의 불균형이다. 남부에는 총 134개의 등록 공연장이 있는 반면 북부지역은 52개에 불과하다. 시·군별로도 북부는 평균 5.2개를 보유하고 있어 6.4개의 남부와 비교된다. 1천석 이상 대형 공연장도 북부 6개, 남부 14개로 남부지역 편중이 뚜렷하다. 경기도가 새로운 공연장이 필요한 이유는 비단 이러한 열악한 여건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공연장, 특히 문예회관이라 불리는 공공 공연장들이 대관 중심 업무 외에 지역예술인 협업, 시민참여 프로그램, 생활예술 연계형 운영 등 지역 밀착형 복합문화거점로서의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외로움, 고립, 정서 위기 등 사회 문제를 해결 또는 완화하는 이른바 ‘제3의 장소’로 진화하고 있기도 하다. 누구나 와서 머물며 즐기면서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경기도는 이런 공연장을 보유하고 있는가. 무턱대고 공연장을 짓는 시대가 지난 것은 분명하다. 우후죽순 생겨난 문예회관을 두고 ‘세금 먹는 콘크리트 더미’라는 비판은 여전히 성찰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과는 별도로 시대와 지역이 요구하는 새로운 공연장을 건설하는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경기아트센터는 1991년 이후 34년간 경기도 대표 문화시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광역 문화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지속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시설부지율은 39.89%로 규정인 40%를 꽉 채우고 있어 증축이 불가능하다. 쉽게 바꿀 수 없는 공연장 건축의 특성상 첨단 공연시설을 설치하는 것도 녹록지 않다. 새로운 공연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면 공연장의 경쟁력은 날로 하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무엇보다 경기 남부(수원) 편중으로 인해 경기도민 전체를 포괄하는 광역 서비스 제공에 한계가 있다. 서울을 비롯해 다른 지역이 하니까 경기도도 무턱대고 따라 하자는 게 아니다. 제2경기아트센터 건립에 대한 중지가 모아지기를 기대한다.

[문화산책] 동네 책방과 도서관 지켜야 할 이유

얼마 전 업무 및 여행 목적으로 보름 정도 제주도에 머물게 됐다. 일은 일정 초기 며칠 사이에 모두 마쳤고 이후엔 쉬엄쉬엄 휴가를 즐겼다. 제주도에 꽤 많이 오가면서 주요 관광지를 섭렵하다시피 했기에 이번엔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을 어슬렁거리거나 곳곳에 숨어 있는 듯한 책방과 도서관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녔다. 여행지의 낯선 동네 도서관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채 그간 미뤄뒀던 책을 찾아 읽거나 숙소에서 온종일 뒹굴뒹굴하며 책방에서 사 온 책을 읽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제주도의 다양한 동네 책방과 도서관이 없었더라면 이미 몇 번이나 방문했던 관광지를 다시 오갈 뿐인 시시한 휴가를 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대통령이 주관하는 지역민과의 소통 시간과 대국민 정부 보고회가 화제다. 독서문화 생태계에서 일을 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그와 관련한 내용을 더 관심 있게 찾아보게 된다. 그런데 여행자도 즐길 수 있는 책방과 도서관이 지역에 없어 동네 사람들조차 책을 접하기 어려운 곳들이 있다는 내용이 언급돼 놀랍고 안타까웠다. 물론 전국 어디에서나 온라인 서점 및 쇼핑몰에서 책을 주문할 수 있고 집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가면 어디든 도서관이 있겠으나 내 집 가까이에 동네 책방과 도서관이 없다니. 같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그만큼 문화적 인프라가 부족한 곳이라면 대도시민에 비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대대손손 계속 지역 안에서 삶을 유지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디지털 환경이 일상화된 요즘 터치 한 번으로 전 세계로 연결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분석한 ‘읽고 싶어 할 법한 콘텐츠’를 내가 원한 그것으로 착각해 무심결에 클릭하게 된 세상이다. 인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디지털 환경의 압도적 효율 앞에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투입해야 접할 수 있는 동네 책방과 도서관은 얼핏 시대착오적 유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디지털화가 심화할수록 오히려 이 물리적 사유의 거점들이 우리 삶에 더욱 절실한 존재일지 모른다. 디지털이 복제할 수 없는 인간적 경험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방과 도서관은 사회학자 레이 올덴버그가 말한 ‘제3의 장소(third place)’로서 현실 안에서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고 공동체의 활력을 증진하는 대표적인 장소다. 이 공간들은 디지털 기술이 제공할 수 없는 인간적 경험과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손에 든 책 한 권이 사유의 방향을 바꾸는 경험, 서가 사이를 느리게 걸으며 얻는 사색은 디지털 시스템이 제안하지 못하는, 인간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회복시킨다. 디지털에 잠식되지 않는 인간적 사유의 영토로서 동네 책방과 도서관이라는 비효율적 공간을 지켜내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숭고한 저항일지 모른다. 인류 역사와 문화 발전 과정에서 벌어진 수많은 오류 안에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끈 바로 그 힘 말이다. 인간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사유의 성소로서 동네 책방과 도서관의 가치를 잘 헤아려 정부도 보다 많은 지원책을 고민해 주기 바란다.

[문화산책] 캐럴, 지리·기후 반영된 전통음악

세계 어느 지역이든 그 지역만의 전통 음악에는 문화가 녹아 있다. 지난번 연재에서 소개해 드린 스페인 플라멩코에도 당연히 이베리아반도 사람들만의 문화가 담겨 있으며 우리가 플라멩코를 표현할 때 ‘낭만과 정열’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스페인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지중해 특유의 기후 역시 담겨 있다. 우리가 러시아 전통 음악을 연상한다면 왠지 시베리아까지는 아니더라도 혹독한 추위와 장엄한 설원, 그리고 남성 합창 등을 떠올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북반구를 기준으로 음악이 기후와 지리를 잘 반영하다 보니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전통 음악 중에는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북유럽 음악과 전통 문화도 있다. 한 예로 북유럽 설화나 민담에서는 매우 무서운 초자연적 존재들이 등장한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민화에 등장하는 도깨비만 해도 사람들과 좀 친숙한 편이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건지 변덕도 심하고 기분이 좋으면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도 하며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금은보화도 종종 선사하는 초자연적 존재다. 하지만 북구 민화 속에 등장하는 괴물들은 초지일관 사람을 잔인하게 잡아먹을 뿐이다. 북유럽 사람들이 겨울을 반영해 상상하고 창작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북구 설화나 민담에 담은 교훈은 간단하다. 북구 사람들에게 한겨울 어두운 밤에 바깥으로 나가는 행위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짓이라는 경고의 의미다. 북유럽 사람들은 집 밖에 나가는 일 또는 혹독한 자연의 무서움을 알리기 위해 민담이나 설화에 무서운 초자연적 존재를 설정했다. 재미있는 부분은 민담 속에 등장하는 괴물은 사람이 문을 열어놓지 않는 이상 절대로 먼저 집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설정이다. 집 안은 안전한 곳, 그리고 따뜻하고 가족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민요조차 차갑다 못해 음산하기도 하지만 가족과 집을 주제로 할 경우 일반 민요나 그 어느 지역 전통 음악보다도 훨씬 따스하고 정겹다. 그리고 그 결정판이 바로 연말연시에 함께 듣고 부르는 캐럴이다. 북유럽에서는 언어마다 표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북유럽 언어권에서는 성탄절을 ‘율(Joul)’, 캐럴을 ‘율송(Joulsong)’이라 부른다. 이 북유럽 사람들조차 캐럴 속 겨울은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연말연시로 묘사한다. 캐럴 또는 율송은 종교를 떠나 가족과 이웃, 그리고 한 해 동안 수고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연말연시 한정 특별 전통 음악이다. 북반구로 한정한다면 캐럴이 겨울, 연말연시 등을 상징하는 노래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캐럴이 기후에 영향을 받는 전통 음악 중 예외라는 사실도 잊지 말자. 캐럴이 흐르는 연말연시는 남반구 사람들에게는 한여름이다. 또 북반구이면서도 낭만과 정열의 나라이자 플라멩코를 즐기는 스페인에서는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대부분이 지중해성 기후라 1년 내내 눈을 볼 수 없지만 카탈루냐 캐럴 ‘성모의 아들’처럼 교회 음악과 겨울 분위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노래도 있다. 올해는 종교와는 무관하게 우리네 마음을 좀 더 따스하게 나눌 수 있도록 세계 곳곳에 세계 각지의 다양한 캐럴이 좀 더 많이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문화산책] 배리어프리, 예술에 문턱은 없다

예술은 늘 우리 삶에 위로와 용기를 건네 왔다. 그러나 그것을 향한 문턱이 누구에게나 넘기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질문해 왔는가. 누구나 함께 예술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외면한 채 우리는 연주와 관람이 가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연장과 정책, 예술 환경을 조성해 왔다. 예술의 가치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때 비로소 확장된다. 그럼에도 접근성과 포용성은 오랫동안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돼 왔다. 장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도 존재한다. 예술의 장벽은 물리적인 구조가 아니라 인식의 높이에서 만들어진다. 장애예술은 오랜 시간 ‘복지 지원’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었다. 관련 공연과 축제, 창작 지원 사업은 종종 ‘감동’과 ‘희생’의 서사가 덧씌워진 홍보용 이벤트로 소비됐고 장애예술인은 예술의 독립적 주체가 아닌 ‘도와야 할 사람들’로 인식됐다. 예술에의 접근성을 고려하는 것은 선택 또는 선의의 영역에 머물렀으며 그 결과 장애예술 생태계는 ‘창작—제작—유통—향유’로 이어지는 순환적 프로세스를 구축하지 못했다. 장애예술이 단발성 사업과 예산의 변동에 종속돼 예술로 존재해야 할 것들이 행정적 소모성 이벤트로 전락하는 현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가장 높은 장벽이었다. 최근 열린 ‘제1회 경기 배리어프리 페스티벌’은 이러한 오래된 구조에 질문을 던진 축제였다. 장애예술인의 무대를 ‘특별한 행사’로 분리하지 않고 예술을 둘러싼 환경과 경험의 방식을 다시 설계했다. 공연장에는 수어 통역과 실시간 자막, 점자 프로그램북, 휠체어 접근 동선은 물론이고 감각 과민 관객을 위한 릴렉스존과 촉각 기반 터치 투어까지 마련됐다. 접근성은 친절과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예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며 공연 인프라 설계의 기초다. ‘배리어프리’는 특별함이 아닌 ‘예술의 기본 조건’임을 선언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날, 그 메시지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전국 최초의 인재양성형 장애인 오케스트라인 ‘경기 리베라오케스트라’와 가수 ‘예린(그룹 ‘여자친구’ 출신)’이 함께 신곡을 작업했다. 필자는 이 작업의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그들과 함께 창작의 호흡을 맞췄다. 12월 중순 정식 발매를 앞둔 창작곡 ‘나의 하늘을 담아’는 이번 페스티벌 무대에서 처음으로 관객과 만났다. 공공 축제가 완성된 작품만을 소비하는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창작이 태어나는 실험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화려한 무대 장치나 규모가 만든 감동이 아닌 서로의 세계가 연결되는 경험이 만들어 낸 울림이었다. 예술은 누군가를 감동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 속에서 존재 이유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 연결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이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건강한 미래다. 배리어프리는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장치나 복지의 언어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문턱을 낮추는 일이 곧 세상을 여는 일이라는 믿음이며 작은 실천이 예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확신이다. 예술이 각자에게 닿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예술은 더 넓고, 더 깊고, 더 섬세하게 설계돼야 한다. 예술의 문을 조금만 더 열면 무대는 훨씬 넓어진다. 작은 변화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결국 더 많은 사람에게 예술의 순간을 허락한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다.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 진실을 잊지 않는다면 장벽 없는 예술을 향한 길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장애예술’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사회를 꿈꾸며.

[문화산책] 피탈 문화유산 원상회복 흐름

지난달 27일 영국이 ‘도덕적인 근거에 따른 배상을 가능하게 하는’ 법률 개정을 했다. 주요 내용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박물관들이 도덕적인 이유로 소장품 반환을 쉽게 하는 것이다. 이 법령은 2022년 ‘자선단체법’의 일부로 통과됐지만 보수당의 반대로 보류됐다가 이번에 개정된 것이다. 다만 대량의 소장품 반출을 우려해 대영박물관, 국립미술관 등 16개 기관은 이번 법률 대상에서 제외돼 벨기에, 프랑스 등과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나 대표적인 약탈국으로 진전된 결정이다. 또 지난달 15일에는 바티칸 박물관이 캐나다 원주민으로부터 강압적으로 수집한 유물을 반환하면서 “대화와 존중, 형제애의 구체적인 표시”라며 입장을 발표했다. 이 유물은 1925년 교황이 바티칸에서의 전시회를 위해 세계 각지의 유물을 수집한 10만점 가운데 일부로 수집 과정에서 강압적 요소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2022년 캐나다를 방문한 교황은 당시 캐나다 전역의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원주민 학생의 학대 등에 대해 사과한 바 있다. 교황의 사과 이후 원주민 지도자들은 관련 유물의 반환을 요구했다. 우리의 유산도 돌아왔다. 지난달 14일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은 소장하고 있던 ‘시왕도’(1798년 작)를 신흥사에 반환했다. 이 조선 불화는 6·25전쟁 시기에 미국으로 반출된 것으로 2020년 미국 LA카운티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시왕도 6점이 반환된 후 두 번째다. 소장처인 미국 박물관은 전쟁 중에 타의에 의한 반출이라는 점에서 자진 반환했다. 이처럼 과거 불법적인 수단에 의해 취득한 문화유산의 자발적 반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전쟁 중에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막대한 피해를 본 점을 반성하면서 1954년 ‘문화재’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된 헤이그협약(무력 충돌 시 문화재 보호에 관한 협약)이 체결된 이후 1970년 유네스코협약(문화재의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 수단에 관한 협약), 그리고 1998년 워싱턴회의(나치 약탈 미술품의 반환 회의)까지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는 전쟁 중 피해 회복과 예방에 관한 문제였다. 반면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의 피탈 문제는 유엔이 유네스코에 맡겨 1978년 문화재 반환촉진정부간위원회(ICPRCP)가 설립된 이후 ‘반환 권고문 위원회’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탈식민화하려는 국가의 ‘정체성’ 회복 차원에서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피탈 유산의 반환 요구는 높아갔고 약탈국들은 외교적, 문화적 수단으로 ‘유물 반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더구나 세계화의 빠른 진전으로 정부 중심의 협상에서 민간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다자 간 협상이 성과를 내고 있고 이제 대표적인 약탈국인 영국, 프랑스, 벨기에가 법령으로 반환을 촉진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소장자 세대교체, 정보의 디지털화, 세계화 등으로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유엔이 창설될 때 참여한 국가는 51개국으로 현재 198개국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142개국은 문화유산의 원상 회복 요구가 더욱 높아질 것이고 세상의 변화는 이를 더욱 촉진할 것이다. 대표적인 피해국인 한국의 원상 회복 노력이 공공외교 영역으로 추진돼야 하는 배경이다.

[문화산책] 문화적 도시재생 유감

문화예술정책이 중앙정부 주도에서 지역 주도로 변화를 시작한 지 어언 30년에 가깝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문화기본법과 지역문화진흥법의 제정은 문화자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반이 됐다. 이에 따른 괄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로 지역문화재단이 전국적으로 촘촘하게 설립됐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현재 17개 광역지자체 모두에 문화재단이 설치돼 있으며 기초자치단체 226곳 중 절반이 훌쩍 넘는 143곳이 문화재단을 보유하고 있다. 지역문화재단은 각 지역에서 문화의 생산과 향유, 전문인력 양성, 문화공간 운영 등을 담당하는 중추적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역의 문화재단이 그동안 일궈온 성과는 혁혁하다는 표현이 모자를 정도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한편에서는 재단 간 사업 구조와 운영 방식 그리고 사업의 결과물이 점차 동질화되는 문제 또한 제기되고 있다. 생활문화사업을 비롯해 법정문화도시에서 이름을 바꾼 대한민국문화도시도 지역별 특성화 측면에서만큼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문화적 도시재생사업도 마찬가지다. 근대유산, 역사시설, 학교, 군유휴시설, 폐산업시설 등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버려진 유휴공간을 문화적으로 되살려 보자는 것이 문화적 도시재생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용도폐기되면 흔적도 없이 철거되고 전혀 새로운 건물을 지음으로써 장소성과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반성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문화적 재생의 경우 수익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보니 아무래도 민간보다는 공공이 주체가 될 수밖에 없고 그 중심에는 대부분 문화재단이 있다. 수원의 ‘111CM’, 부천의 ‘아트벙커B39’, 김포의 ‘보구곶 작은미술관’ 등 공공에 의해 추진되는 경기도내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지는 전국 최다 수준이다. 장소나 건물마다 가진 역사와 정체성을 살리겠다는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이러한 시설이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다는 데 있다.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당초 기대와 달리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고 관심에서 멀어지는 곳들도 적지 않다. 빵이나 호두과자 같은 공산품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지역의 문화, 특히 시설은 그 지역만의 특별함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지역문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찍이 조직사회학자 디마지오와 파월은 이렇게 조직이나 사업이 유사해지는 현상을 제도적 동형화(institutional isomorphism)라 이름 붙였다. 이들이 파악한 원인은 예리하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조직이 생존하거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른 제도와 유사한 구조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동형화는 때로는 강압적으로, 모방에 의해, 규범에 따라 이뤄진다. 중앙정부의 정책 지침, 공모사업, 평가 체계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강압에 해당한다. 모방은 타 지역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거나 중앙정책의 모범 모델을 차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전문가나 연구기관의 조언 및 컨설팅은 일종의 규범으로 작동한다. 그러고 보면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을 비롯해 지역문화재단의 사업이 유사해지는 걸 문화재단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자율성의 결여, 평가시스템의 획일화, 전문가들의 안일함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지역문화가 특성화되는 길은 자명하다. 지역문화재단에게 자율성을 좀 더 부여하고, 평가시스템을 유연하게 하며, 전문가나 연구기관이 엄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조언하면 된다.

[문화산책] 눈높이 독서 정책이 필요하다

2023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이 1년간 책을 한 권이라도 읽었음을 보여주는 종합 독서율의 경우 43.0%, 종합 독서량은 연간 3.9권으로 2021년 결과보다 4.5%, 0.6권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2년 주기 통계 결과가 계속 하락 추세였기에 독서율 감소에 대한 우려나 출판시장 불황에 관한 소식은 이제 더 이상 ‘뉴스’라고 말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국가가 나서 ‘누가 얼마나, 무엇을 읽었나’를 조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독서 기반 지식화 능력이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거나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요한 기본 역량이기 때문이다. 국가검진을 통해 국민 건강을 챙기는 것과 비슷하다. 읽기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있고 좋은 책을 선별한 능력도 있고 고급 문해력도 갖춘 충성 독자는 읽기의 즐거움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기에 덜 걱정스럽다. 그러나 어쩌다 책을 찾아 읽는 간헐적 독자나 독서와 담을 쌓은 비독자를 위한 독서 콘텐츠는 어떻게 기획하고 만들고 제안해야 할지 보다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20여년 전 서울시와 함께 진행했던 초중고 대상 독서문화 사업이 떠오른다. 충성 독자 지원뿐만 아니라 비독자를 찾아내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다양한 독서 기회를 제공했는데 교사 연수, 학교별 맞춤 도서와 독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교실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서가를 제작해 ‘찾아가는 도서관 서비스’도 운영했다. 교사, 작가, 문화기획자와 협업해 진행했으며 성과도 좋았다. 특히 어느 고등학교에서 진행한 비독자 대상 열혈 분투기가 기억에 남는다. 학교 도서관 이용 기록을 조사해 비독자, 간헐적 독자를 찾아낸 후 일대일 관심 쏟기를 실행했다. 책을 한 번도 대출 안 했던 비독자에게 이동 서가와 함께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관심사와 눈높이에 맞는 책을 추천하고 일주일 후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에너지가 많이 들었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결과 1년 후 변화가 일어났다. 비독자가 간헐적 독자가 되고 충성 독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정말 놀라웠다. 독서의 즐거움과 유익함을 경험하지 못한 비독자나 아직 몸에 익지 않은 간헐적 독자는 책 읽기 과정이나 성취에 관한 배경지식이 비활성화돼 있기에 독서로의 진입 과정에서 인지적·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따라서 더욱 세심하고 친절하게 눈높이에 맞는 독서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정부도 제4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에 이런 고민을 담아 ‘비독자의 독자화’를 목표로 2028년까지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비독자 대상으로 다양한 주제의 독서클럽을 운영하거나 지역 기반 독서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추상적 캠페인은 지양하고 실제 독서 수행형 사업으로 전환하는 등 현실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의 여지가 있고 비독자에 치중하다 보니 충성 독자를 너무 잡은 물고기 취급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비독자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끊임없이 다양하게 이뤄지는 독서 기회 제공은 분명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국민독서실태조사도 무엇을 얼마나 읽었느냐보다 어떻게 읽느냐에 방점을 두고 문항을 설계하면 좋겠다. 그래야 더욱 실체적 독서 정책을 수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문화산책] 낯설지만 아름다운 음악

우리가 세계 각지의 음악, 일명 세상의 모든 음악을 즐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정 지역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음악의 특성이나 형식, 그리고 내용이 신기해 좋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 음악이 낯설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분명 음악 속에 담긴 그 지역만의 문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 음악의 특성이나 형식, 무엇보다도 귀로 즐기는 음악 고저장단에서 아름다움을 직관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느끼기엔 확실히 낯설다. 게다가 사전 지식이 없다면 이런 음악들은 낯설다 못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한 예로 스페인 플라멩코는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남부 안달루시아의 일개 지역 음악이었다. 현지 토착 음악에다 오랜 세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집시들이 바다를 만나 해안에 주저앉아 구전으로 전승하던 음악이 우리가 아는 그 플라멩코다. 그 음악 속에는 집시들이 지중해 북쪽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얻어온 여러 지역의 음악 전통도 녹아 있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온 무어인들, 정확히는 아랍문화권 음악 전통도 담겨 있다. 이렇다 보니 정작 스페인 현지에서는 플라멩코가 오랜 세월 천대받았다. 문맹률이 높은 집시들이 어쩔 수 없이 구전으로 전승하다 보니 악보가 없으며 유럽 사람들은 물론이고 스페인 현지인들조차 이민족, 이교도들의 음악이라며 플라멩코를 오랫동안 멸시했다. 문제는 이 스페인 국가대표 전통음악 플라멩코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듣다 보면 낯설고 힘들어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낭만과 정열의 음악이라더니 막상 한두 곡 넘어 한 시간 가까운 공연이나 음반 한 장을 끝까지 듣기가 힘들다고 많은 사람들이 하소연한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낯선 음악을 마음 편히 즐기기 위해서는 그 음악의 배경을 이해하거나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 듣는 방법도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동원했는데도 영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개인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이상한 건 절대 아니니 플라멩코 말고 다른 음악을 찾아 들으면 된다. 플라멩코에 익숙해지는 일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에게 원래 난도가 높다. 왠지 하다가 만 듯한 아랍 음악 식 마무리나 유독 음의 떨림이 많고 장식음이 많이 들어가는 모습이 낯선 건 서양 음악에 이미 익숙해진 우리의 귀 때문이다. 그 서양 음악이 흔히 클래식이든, 대중음악 또는 팝이나 가요의 형태이든 말이다. 원래 세계 각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음악의 대부분은 소리의 고저장단에다 장식음을 많이 붙여 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렇게 서서히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호기심과 도전으로 바꾼다면 우리는 어느새 플라멩코 음악 속에서 낭만과 정열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익숙해지면 새로운 지역 음악에 도전해 보자. 세계 각지의 음악 이름은 대부분 리듬에서 따온 것이 많으니 리듬에 익숙해지면 음악도 금세 친숙해질 수 있다. 역사가 깊은 음악일수록 자연이나 동물들의 소리를 모방한 것이 많다. 아프리카든 호주든 몽골이든. 일단 낯선 음악을 용기 내어 즐겨보자.

[문화산책] 시작을 연주하는 ‘국악관현악’

10월, ‘제3회 대한민국국악관현악축제’가 성대히 막을 올렸다. 그중 첫 무대는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였다. 대규모 개막식의 웅장함 대신 절제된 호흡과 단정한 울림으로 무대를 채웠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깊었다. 악기들이 서로를 덮지 않고 조심스럽게 길을 내어 주며 한 호흡을 만들어 갔다. 관현악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오히려 독주와 대화의 경계에서 음악은 살아 있었다. 그 절제 속에는 “국악관현악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숨어 있었다. 국악관현악은 늘 두 가지의 긴장을 안고 있다.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과 새로운 시대의 감각에 닿아야 한다는 요구다. 이 두 축의 균형이 맞춰질 때 음악은 생명이 된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는 그 경계 위에서 절묘한 균형을 보여줬다. 전통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연주자 개개인의 감각과 호흡을 허락했다. 그것은 완벽히 조율된 합주가 아니라 서로의 여백을 존중하며 만들어낸 집단적 리듬이었다. 그 여백이야말로 국악관현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1965년 3월, 첫 국악관현악단인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국악기를 서양 오케스트라처럼 배치하고 지휘자가 이끄는 새로운 형식의 앙상블이었다. 서양 오케스트라의 구조를 빌리되 국악기의 음색과 장단으로 한국적 교향악을 만들고자 했다. 그 역사도 어느덧 반세기를 넘어섰다. 이제 우리는 전국 어디서든 ‘국악관현악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 국악관현악의 오늘은 그 긴 여정의 결과이자 또 다른 출발점이다. 국악관현악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다.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진행형의 예술이다. 서양 오케스트라처럼 정밀한 조율 속에서 질서를 세워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질서 속에 ‘예측 불가능한 순간’을 남겨 두는 용기가 필요하다. 국악의 본질은 그 틈에서 빛난다. 악보는 출발점일 뿐 진짜 음악은 리허설과 공연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연주자들이 서로의 눈빛과 호흡으로 만들어 내는 그 공동의 흐름이 음악을 살게 한다. 국악관현악축제는 단지 전통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다. 한국 음악의 현재를 실험하고 각 지역의 국악관현악단이 품고 온 다양한 소리와 문체, 감각을 한 자리에서 느끼는 축제의 장이다. 각 악단이 지닌 개성과 색채, 그리고 ‘다름’이 모여 우리 국악관현악의 지형을 풍성하게 한다. 그 다채로운 차이와 개성의 총합이 곧 미래의 자양분이 된다.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공연은 그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대규모 편성과 장엄한 울림이 아니어도 감각의 섬세함과 관계의 균형이 음악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국악관현악의 미래는 새로운 악기나 기술이 아니라 더 깊이 듣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의 확장에 달려 있다. 우리는 종종 국악관현악의 미래를 기술과 규모의 문제로 논의하지만 진정한 미래는 장비나 편성의 확장만이 아니라 감각의 정밀함, 관계의 섬세함 속에서 자란다. 더 크고 더 복잡한 무대가 아니라 더 깊이 들을 줄 아는 사회가 필요하다. 국악의 본질은 바로 그 ‘감각의 공동체’ 속에 있다. 기술의 시대에 ‘감각의 원점’을 되묻는다. 국악은 과거를 재현하는 예술만이 아니다. 전통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다시 써야 하는 이야기다. 무엇을 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묻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지금의 국악관현악이 다음 세대로 건너가기 위한 또 한 걸음이 아닐까. 축제가 끝난 뒤에도 귀에는 그 울림이 남는다. 전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여는 언어다. 국악관현악은 완성된 형식이 아니라 여전히 써 내려가는 악보다. 그 악보 위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이 소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이 바로 국악관현악이 다시 ‘시작’을 연주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문화산책] ‘오구라 수집품’ 환수가 과제

10월21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집권당 자민당의 총재가 총리로 선출됐다. 1885년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이후 첫 여성 총리다. 일본 정계가 보수적임에도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이를 계기로 변화를 기대하는 바도 있지만 반면 다카이치 총리가 ‘제2의 아베 총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라 아베 정권이 내건 평화헌법 개정, 독도 영유권 주장 강화, 과거사 부정 등 극우 노선을 유지할 경우 한국, 중국 등 아시아권의 갈등을 부추기고 나아가 국제사회의 혼란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이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에서 보일 외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더구나 이번 내각의 출범은 26년 만에 공명당이 자민당과 연립정권에서 탈퇴하고 더 극우적인 일본유신회가 참여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일본 정계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자민당과 달리 공명당은 야스쿠니신사 참배 반대, 과거사 청산 등에 있어 지속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입장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정치 환경이다. 실제로 2010년 8월 일본 왕실 도서관인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 등 도서’ 환수를 위해 일본 각 정당의 대표를 면담하는 과정에서 공명당은 반환에 동의했다는 사실은 필자가 현장에 있었기에 잘 알고 있다. 한국의 이재명 정부와 일본의 다카이치 정부는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의 동반자로 가기 위한 출발대에 섰다. 일본 정부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가 분명히 있다. 강제징용, 군 성노예 위안부 그리고 문화재 반환 문제 등이다. 여기에 최근 도발하는 독도 영유권 문제는 분명 역사의 시계를 1905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1905년 일본 초등 교과서에도 ‘독도’는 조선 영토라고 분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그해 11월 체결된 을사늑약 이후 헛된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광복 이후 네 차례에 걸쳐 한국 문화재를 반환했다. 가장 가까운 사례는 2010년 8월10일 일본 총리가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고 ‘조선왕조도서’ 1천205권을 2011년 반환했다. 경술국치 100년으로 집권 민주당이 과거사 청산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1991년에는 조선왕실 복식인 ‘영친왕 일가 복사 및 장신구’ 333점을 반환했다. 이때는 한국 정부가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해 과거 공산권 국가와 수교하면서 일본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한국 정부의 반환 요구에 응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약탈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1965년 한일 문화재협정으로 1천326점이 ‘인도’됐다. 1958년 4월에는 창녕의 옛 무덤에서 출토된 106점을 일본이 일방적으로 ‘반환’하는 일이 있었다. 이는 나포된 일본 어민을 풀어 달라는 선제적 조치의 일환이라는 평가가 있다. 지금 가장 큰 과제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오구라 수집품’의 환수다. 한국 정부는 도쿄박물관이 독립행정기구라는 점에서 북관대첩비 소장처인 야스쿠니신사와 조선왕조실록 소장처인 도쿄대의 반환 선례를 참고해 외교 협상과 민간의 환수운동이라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

[문화산책] 케데헌이 보여주는 ‘K-컬처 미래’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글로벌 인기가 뜨겁다. 공개 직후 93개국에서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를 달성한 데 이어 최근에는 ‘오징어게임’의 흥행 기록을 넘어섰다. 케데헌의 사운드트랙은 미국 아이튠즈 앨범 차트 1위를 비롯해 빌보드 200, 스포티파이 차트에서 선전하고 있다. 케데헌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건 단지 흥행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이 더욱 주목되는 건 K-컬처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거대한 문화적 흐름의 열차에 본격적으로 올라탔다는 징표, 즉 지속가능성에 대한 강력한 힌트를 보여 주고 있다는 데 있다. 일찍이 문화비평가 호미 바바는 현 시대의 문화를 혼종성의 문화라고 규정한 바 있다. 바바에게 있어 혼종성은 단순한 문화적 요소들의 기계적 결합이 아닌,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접점에서 발생하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문화의 변환 과정이다. 이 속에서 원본과 복사본, 중심과 주변, 지배와 피지배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은 해체되며 기존의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의미와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케데헌에서는 바바의 문화적 혼종성이 다양한 측면에서 구현되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의 전통 무속에서 차용한 ‘혼문’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혼문은 악마들을 인간 세계에서 차단하는 보호막 역할을 하며 주인공 걸그룹(헌트릭스)은 노래와 춤을 통해 이 혼문을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시각적으로도 동서양이 혼합돼 있다. 남산타워, 북촌 한옥마을, 낙산공원 등 서울의 명소들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우리의 전통음식, 옷, 노리개, 한의원 등이 첨단 케이팝 아레나와 교차된다. 무당의 신칼을 비롯한 무구, 작호도 같은 민화적 요소들도 케이팝 아이돌의 패션과 절묘하게 공존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복합적이다. 주인공 루미는 악마 사냥꾼 어머니와 악마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종적 정체성의 소유자다. 악역인 사자 보이즈의 리더 진우 역시 원래 인간이었으나 귀마(악마들의 왕)와의 계약으로 악마가 됐다. 장르 역시 어반 판타지, 뮤지컬, 슈퍼히어로, 퇴마, 액션, 코미디 등 다양한 요소가 혼합돼 딱히 정확하게 특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K-컬처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보다 확실한 척도는 참여자 면면에 있다. 우선 제작사가 미국의 소니픽처스애니메이션이다. 연출은 한국계 캐나다인인 매기 강과 ‘위시 드래곤’의 연출자인 크리스 아펠한스가 공동으로 맡았다. 각본에는 두 연출자 외에 단야 지메네스와 한나 맥메찬이라는 외국인이 참여했다. 트와이스의 멤버가 ‘테이크다운’을 비롯해 몇 곡을 부르긴 했지만 음악 담당 역시 외국인이다. 성우진에 배우 이병헌을 비롯한 몇몇 한국 이름이 눈에 띄는 데 이례적일 정도다. 일각에서는 모처럼 성공적인 한국 소재의 애니메이션이 미국 회사와 외국인들에 의해 주도됐다는 점에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K-컬처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인이 제작의 주체가 돼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다양한 주체에 의해 만들어질 때 K-컬처의 지속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이미 케이팝 아이돌의 상당수는 외국인들로 구성돼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바바는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들이 만나 협상하고 재구성되는 과정 속에서 문화적 혼종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 담론의 공간에서 정체성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문화 간의 위계적 관계가 해체되고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다. 이를 위해선 주체 역시 다양성 혹은 애매성이 요구된다. 케이팝의 성공은 문화적 혼종성에서 비롯됐다는 여러 사람의 주장을 되새겨볼 때도 이제는 주체의 혼종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점에서 케데헌은 K-컬처가 보다 넓은 문화적 혼종성의 바다를 향한 항해를 본격화했다는 신호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문화산책] 국보 환수 TF가 필요하다

올해는 광복 80주년, 한일 문화재협정 60주년이다. 광복 이후 분단국이 되고 전쟁의 참화를 겪었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 대한민국은 세계10대 강국이 됐다. 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 순위도 종합 10위다. 무형유산은 4위, 기록유산은 아시아 으뜸이다. 80년간 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에는 ‘문화’가 있다. 문화는 혼란기를 견딘 버팀목이고 분열을 막아준 정체성의 뿌리다. 700만 재외동포에게 문화는 구심력이다. 21세기 들어 K-한류가 세계인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드라마를 시작으로 케이팝이 확산되고 한국 음식까지 유행하더니 최근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전 분야로 심층 확대되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그토록 원하던 문화강국 대한민국이 정말로 실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문화산업의 원천인 문화유산은 불귀의 객이 돼 우리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2025년 현재 국외에 있는 문화유산은 약 25만점이고 광복 이후 환수는 약 1만3천점이다. 이 중 국보로 지정된 것은 단 6건이다. 국보의 환수는 정부와 민간, 재외동포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지정된 국보 중 1965년 한일문화재 협정으로 ‘한송사지 석조보살상’과 뼈항아리인 ‘녹유골호’가 돌아왔다. ‘상지은니묘법연화경’은 재일동포 김대현 선생이 구입해 고국에 기증했고 ‘금영측우기’, ‘조선왕조실록’, ‘북관대첩비’는 민간의 자발적인 활동이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도쿄국립박물관에는 오구라 수집품 1천30점이 있다. 그중 39점은 중요문화재 또는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에 반출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정부가 국보 등으로 지정한 한국 문화재는 약 150점에 이른다. 서산 부석사 불상처럼 지방문화재로 지정한 사례는 제외한 결과다. 21세기 들어 약탈 문화유산의 원상 회복을 촉구하는 피해국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가해국의 반환 노력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를 촉진한 것은 1998년 워싱턴에서 열린 나치 약탈미술품 반환 회의다. 이때 소장 기관이 출처를 입증할 책임이 있다는 원칙이 확립됐다. 국제박물관협의회는 박물관 윤리강령으로 합법적 소유권(2-2), 출처와 주의 의무(2-3), 출처지와의 협력(6-1), 반환(6-2), 원상회복(6-3), 피점령국에서 유래한 문화재(6-4) 등을 채택했다. 최근 주목할 사안은 개별 사안별 반환을 넘어 법과 제도를 통한 반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벨기에는 2023년 식민지 유물반환법을 제정하고 르완다 등 과거 식민지 약탈 유물 8만4천점을 반환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과거사에 대해 국왕이 사과하면서 인도네시아, 스리랑카의 유물 반환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올해 9월 1815년부터 1972년까지 약탈, 강제 이송, 절도 등에 의한 유물의 반환을 위해 반환법을 제정하고 있다. 2017년 마크롱 정부 이후 부분적으로 이뤄진 반환을 법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1866년 강탈 당한 외규장각 의궤가 포함된다. 따라서 지금이 광복 80년 동안 못다 이룬 국보 환수의 최적기다. 외규장각 의궤의 완전한 반환은 물론이고 오구라 수집품을 환수할 ‘국보 환수 태스크포스(TF)’가 필요하다. 민관 협력은 국보 환수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문화산책] ‘자살’을 ‘살자’로 바꾸는 사회

9월 정부는 범부처 차원의 ‘2025 국가 자살 예방 전략’을 발표함으로써 ‘고의적 자해(자살)’가 개인적 비극을 넘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실제로 ‘2024년 사망 원인 통계 결과(통계청)’에 따르면 국민 사망 원인 중 자살이 10대부터 40대까지는 1위, 50대와 60대에서도 2위와 4위를 기록하고 있다.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니 그 결과가 정말 충격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인구 10만명당 국가 간 연령표준화 자살률에서도 26.2명의 우리나라가 평균치(10.8명)의 두 배를 넘겼고 2위인 리투아니아(18명)와 비교해도 거의 10명이 더 많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살에 내몰리는 사회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80년간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5만3천배로 증가하며 경제 선진국 대열에 오르고 있고 기대수명도 83.5세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건만 하루에 39.6명이나 자살하는 사회라면 건강한 국가로 성장했는지 의문이 든다. 더 늦기 전에 정부와 온 사회가 힘을 합쳐 그 원인을 분석하고 효과적 대책을 수립,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 자살 예방 전략에 따르면 자살 사망자는 사망 전 평균 4.3개의 스트레스에 복합적으로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심리 불안·트라우마·우울·양극성 장애 등의 정신적 요인, 파산·빚·취업난·실직 등에 의한 경제적 요인, 만성질환·장애 같은 신체적 요인, 가족 간 불화·직장 내 갑질·남녀 문제·외로움 등의 대인 관계적 요인이 자살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인데 왜 극복하지 못하냐며 개인의 의지 박약 문제로만 보면 자살률 1위의 상황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 풍요로움을 이룬 만큼 사회안전망 차원의 복지 문제를 많이 해결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경제·사회적 불평등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고 다양한 가치로 파편화된 실전 사회에 필요한 절대 생존 기술은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개인에게만 극복의 책임을 돌리는 건 후진적 발상이다. 그렇기에 정부도 ‘2034년 기준 자살률 17명 이하’를 목표로 고위험군 집중 대응, 위험군 적극 발굴 및 맞춤형 지원을 통한 고충 해결, 범부처 및 지자체의 선제 대응 시스템 구축, 민관 협력 등을 통한 생명 보호 정책 시행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을 아무리 촘촘하게 펼쳐 놓은 들 빈틈이 모두 메워질 리 없다. ‘자살’을 ‘살자’로 바꾸려면 국민 각자가 서로 관심을 주고받으며 삶의 지지대로서 함께 버텨주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직접적 해결 방안이 아닐까 한다. 나의 작은 관심과 사랑,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살아갈 힘을 주는, 굵은 동아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내려 준 삶의 동아줄도 놓치지 말고 꽉 잡자.

[문화산책] 음악에 담긴 문화 정체성

글로벌 시대에는 아군이 없다. 각자도생의 시대다. 지역으로 나누든 분야로 나누든 국가 또는 민족 단위로 확실한 생존 방식 또는 무기가 없다면 살아남기 힘들다. 세계는 미국이 시작한 관세 관련 쟁점으로 시끄럽고 각국의 내부 사회 문제로 외부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다. 그나마 여력이 있는 나라들은 국가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전방위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아마 문화, 특히 대중문화 분야는 21세기 들어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는 훌륭한 무기가 된 것 같다. 20세기까지는 국제화 또는 보편성이라는 이름에 맞춰 세계 표준을 지향했다면 21세기 현대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시대가 됐다. 물론 세계 각국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는 정체성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영어 가사를 첨가해야 하던 시절에서 이제는 한국어 가사를 조금이라도 넣어야 세계 음악 팬들로부터 인정받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얘기다. 글쓴이는 1980년대 중반부터 대중문화 분야에서 화두가 됐던 ‘월드뮤직’을 소재로 음악 속 문화를 지금까지 살펴보고 있다. 장르와 시대를 막론하고 특정 시대의 음악 속에는 그 시대만의 문화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를 수도 있고 보편적인 정서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 문화 또는 정서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야 하고 그 동의가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것은 ‘고전’이 된다. 우리가 이른바 ‘클래식 음악’ 또는 이름 그대로 ‘고전음악’이라고 부르는 장르 속 음악들이 이런 예에 속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며 지금까지 존재하는 음악 중에는 특정 시대나 장르로 구분하기 어려운 음악이 있다. 예를 들어 음악 형식이든 정서든 특정 지역에서만 발생하고 특정 지역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정서를 담은 음악이다. 글쓴이는 월드뮤직에 대해 항상 이렇게 정의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간 본연의 정서인 희로애락에 호소하는 음악이다.” 지구 반대편 안데스산맥의 장례 음악을 우리가 듣고서 농번기 축제 때 마을 사람들이 신나서 함께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음악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를 잠깐 생각해봐야 한다. 바로 리듬과 멜로디, 우리 식 표현으로는 장단과 가락이다. 이 요소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기쁘고 슬픈 감정,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분노가 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지역 전통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음악, 모든 장르에 적용된다.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지역 또는 시대, 그리고 문화권에 따라 그 정체성이 음악으로 확립된다. 이때 언어의 장벽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음악은 소리로 표현되는 예술 형태인 만큼 먼저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가사 내용을 번역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많은 시대다. 번역 애플리케이션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정확도가 꽤 높은 정보를 미리 얻을 수도 있다. 이쯤 되면 문화를 통해 일으킬 수 있는 가치 창출은 단순히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산이 된다. 세계는 확실히 보편성과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문화를 요구한다. 어렵지만 세계는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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