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장애인권리보장법 통과... 이제부터 시작

4월23일, 대한민국 장애인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꿀 기념비적인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바로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안이다. 이번 법안의 핵심은 명확하다. 장애인을 복지의 ‘수혜자’가 아닌 존엄과 평등을 누려야 할 ‘권리주체’로 바라보겠다는 선언이다. 돌이켜보면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으로 출발한 우리나라 장애인 법제는 오랫동안 시혜성 지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환경의 장벽으로 정의한 이번 법안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다. 그러나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해서 당장 내일부터 장애인의 삶이 마법처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흔히 “법이 통과됐으니 이제 바로 적용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법안 통과는 종착지가 아니라 이제 막 출발선을 끊은 것에 가깝다. 이번 법 역시 앞으로 약 2년간의 촘촘한 준비 기간을 거쳐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왜 법이 통과되고도 이토록 긴 시간이 필요한 걸까. 이를 ‘집을 짓는 과정’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다.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과제는 ‘설계도’에 구체적인 살을 붙이는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 하위 법령을 제정하는 일이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률은 큰 틀의 원칙과 방향성만을 제시하는 일종의 설계도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에 따라 자립을 지원할지, 전달 체계는 어떻게 개편할지 등의 세부적인 알맹이는 하위 규정에 담긴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 공청회, 부처 간 협의, 법제처 심사 등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설계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벽돌을 어떻게 쌓을지 세부 지침이 없다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위 법령이 마련되면 다음으로는 ‘자재와 인력’을 확보하는 예산 편성 및 인프라 구축 단계가 이어진다. 법에 명시된 권리를 현실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결국 예산과 조직이다. 기존 한국장애인개발원을 ‘한국장애인권리보장원’으로 개편하고 시설 거주 장애인의 소규모 자립 공간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려면 예산이 적재적소에 편성돼야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지자체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복지 서비스가 실현되는 진짜 무대는 결국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의 장애인 지원 체계가 어떻게 바뀌는지, 관련 지역 예산이 어떻게 편성되는지 지켜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의 외형과 기둥을 세웠다면 마지막으로 ‘기존 가구 배치’를 조정하는 후속 입법과 법령 정비 작업이 필요하다. 새로운 법이 들어오면 기존에 존재하던 다른 법들과의 교통 정리가 필수적이다. 보건복지부 역시 이번 권리보장법 제정에 발맞춰 기존의 ‘장애인복지법’을 전부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37년간 수십 차례 고쳐 쓰며 복잡해진 기존 법령과 새로운 법이 충돌하지 않도록 법 체계를 매끄럽게 다듬어야만 행정적 혼선을 막을 수 있다. 결국 법의 국회 통과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은 설계도를 이제 막 완성한 출발점이다. 앞으로 남은 2년은 이 설계도 위에 튼튼한 기둥을 세우고 살기 좋은 집을 만드는 작업의 시간이다. 아무리 정교한 설계도도 그 집에 실제로 살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 결국 빈집이 될 뿐이다. 법은 글자로 존재할 때가 아니라 국민의 삶 속에서 실현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선언한 ‘권리의 주체’라는 가치가 2년 뒤 우리 사회에 안착할 수 있도록 정부의 꼼꼼한 행정력은 물론이고 지자체의 예산 편성을 감시하는 시민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기시론] 장애인 ‘삶의 서사’ 만드는 인문교육 강화

모든 사람에게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문학은 필요하다. 장애인에게는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문학적인 접근이 더욱 필요하다. 아픔과 좌절,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성이 달라진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먼저 실존하고 그 후에 스스로를 정의한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정책을 살펴보면 여전히 실존적인 측면보다는 생존적인 측면에 머물러 재활이나 경제적인 자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실정이다. 장애인들에게 사회 복지의 수혜자라는 수동적인 틀을 깨고 존엄한 한 인간이자 주체적인 시민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인문학적인 교육과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장애인에게 인문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한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효과를 낳는다. 장애인에게 인문교육은 단순한 교양 함양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며 자신의 존재를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살게 하는 생존교육이라 할 수 있다. 비장애인들이 평생교육에 참여하는 비율은 30%를 웃도는 반면 장애인의 교육 참여율은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인문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회 자체가 부족함을 의미한다. 장애인들에게 실시하는 인문교육은 16%정도이며 그중에서도 운영되는 프로그램은 문화예술에 치우쳐 있다. 단순 여가나 예술 활동에 비해 철학, 문학, 역사 등을 깊이 있게 다루는 교육의 파이는 크지 않은 편이다. 발달장애인들에게 무슨 인문교육이 필요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것은 비장애인의 입장이라고 생각된다. 발달장애인들도 자신만의 세계로 자신을 정의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027년부터 장애인을 위한 평생교육법이 시행되는데 현재 복지관이나 평생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생활 밀착형 및 예술 융합 인문학이 인기를 얻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어려운 텍스트 위주의 수업보다 영화, 음악, 미술 명화 감상과 결합해 심리를 치유하고 자아를 탐구하는 프로그램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 다양한 인문학적인 접근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 제공해야 한다. 장애인들에게 제공되는 인문교육은 철저하게 통합교육으로 이뤄져야 한다. 현재 운영되는 장애인 평생교육 중 비장애인과 함께 수업을 듣는 통합교육 비율은 17%에 불과하다고 한다. 대다수가 복지시설이나 평생교육기관 내에서 장애인들끼리만 분리돼 진행되기 때문에 인문학이 지향하는 사회적 편견 해소와 보편적 소통, 함께하는 공동체의식이라는 목적을 온전히 달성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장애인 인문교육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통합교육을 지향하도록 철저하게 기획 및 준비가 이뤄져야 한다. 장애인들이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편견이 아닌 스스로의 목소리로 고유한 삶의 서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인문교육을 강화하자는 것이 하나의 구호가 아닌 실제적으로 평생교육현장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삶의 여유가 있는 이들만 누리는 사치가 아니다.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되고 소외된 이들에게 가장 먼저 쥐여줘야 할 세상과의 연결 고리이자 하나의 소중한 권리이며 장애인들에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버팀목이다. 경기도와 지역사회가 장애인 평생학습의 패러다임을 단순 기능 훈련에서 인문학적 가치 중심으로 과감히 전환해 장애인들에게 실시한다면 장애인 스스로 주체적인 삶의 서사를 써 내려가게 될 것이고 장애라는 낡은 장벽을 넘어 존엄한 시민이자 우리의 이웃으로 당당하게 함께할 것이다.

[경기시론] 지역 살리는 힘은 지역주민에게 달렸다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고용정보원도 2024년 보고서에서 지방소멸 위험이 군 단위를 넘어 광역대도시로까지 번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역의 위기가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비슷한 처방을 반복해 왔다. 길을 넓히고, 산업단지를 만들고, 큰 시설을 짓는 방식이다. 이런 사업은 눈에 잘 띄고 성과를 설명하기 쉽다. 하지만 지역을 정말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건물은 늘었지만 사람은 정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역의 현실은 숫자만 봐도 녹록지 않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4년 지방자치단체 전체 예산은 310조1천억원이지만 통합재정수지는 18조6천억원 적자가 예상됐다. 재정자립도도 48.6%로 전년보다 1.5%포인트 낮아졌다. 지방세만으로 인건비조차 충당하지 못하는 지자체는 104곳, 전체의 42.8%에 이른다. 지역의 기초체력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설계한 사업을 지역에 내려보내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곳은 청년 일자리가 급하고 어떤 곳은 돌봄이 더 시급하다. 또 어떤 곳은 병원시설과 출퇴근 교통망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중앙이 비슷한 틀로 사업을 짜면 실제 필요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무엇을 더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을 만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지역에 필요한 것은 거대한 시설보다 일상을 붙잡아 주는 정책일 때가 많다. 청년이 머물 집, 아이를 맡길 돌봄, 어르신이 다닐 의료시설과 교통 인프라, 주민들이 모일 문화공간과 지역경제가 더 절실할 수 있다. 일본 나오시마섬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탄광촌의 작은 섬이었던 나오시마는 지역 특성을 살린 문화예술 프로젝트와 주민 참여를 바탕으로 새로운 활력을 만들었다. ‘베네세 아트사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연간 50만명 이상이 찾는 세계적인 예술 섬이 됐다. 중요한 것은 대규모 토목사업이 아니라 지역이 스스로 자원을 살리고 주민이 변화의 주체가 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지역의 주도성과 주민 중심 정책이다. 지역 문제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주민이 직접 필요한 것을 말하고 지방정부가 실정에 맞는 해법을 설계해야 정책이 삶에 닿는다. 중앙은 세세하게 지시하기보다 지역이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예산과 권한을 넓혀야 한다. 물론 주민 중심 정책이 만능은 아니다. 의견을 모으는 데 시간이 걸리고 지역마다 행정 역량 차이도 크다. 그래서 중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중앙은 지역을 일률적으로 끌고 가는 주체가 아니라 지역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재정과 제도를 뒷받침하는 조력자가 돼야 한다. 나오시마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단순하다. 지역경제는 콘텐츠만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교통 인프라와 생활환경, 쾌적한 일상 조건이 함께 갖춰질 때 비로소 지역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경제·문화·교통·생활 정책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삶의 경험으로 연결돼야 한다. 지역 소멸은 단지 인구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조건이 무너지는 데 있다. 사람들은 도로가 없어서만 떠나지 않는다. 일자리와 돌봄, 교육과 문화, 의료와 교통, 그리고 삶의 질이 사라질 때 떠난다. 결국 지역을 살리는 힘은 큰 건물이 아니라 주민의 삶을 지키는 정책에서 나온다. 지역의 미래는 중앙정부가 대신 설계할 수 없다. 주민이 중심에 설 때 지역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경기시론] 수원, 문화도시로 도약하길 바라며

6월25일부터 나흘간 수원컨벤션센터에서 ‘화랑미술제 수원’이 열린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 이번 행사는 단순한 지역 전시를 넘어 수원이 경기 남부 문화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흐름이라 생각한다. 화랑미술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아트페어다. 44년의 전통을 이어오며 한국 미술시장의 흐름을 이끌어 왔고 규모 면에서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표적인 미술 행사로 평가받는다. 오랫동안 서울 중심으로 인식되던 이러한 대형 미술제가 수원에서 세 번째 개최된다는 사실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다. 이는 문화의 중심축이 점차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이자 경기 남부권 시민의 문화적 수요와 도시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도시의 성장은 흔히 인구와 산업, 경제 규모로 설명된다. 물론 그것은 도시 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의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또 하나의 축, 즉 문화의 축이 필요하다. 문화는 도시의 품격을 만들고 시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경쟁적으로 미술관과 공연장, 국제 문화행사를 유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제가 도시의 몸을 만든다면 문화는 도시의 정신을 완성한다. 수원은 광교신도시 개발 이후 빠르게 변화해 왔다. 행정과 산업, 주거 기능뿐 아니라 문화 인프라도 함께 성장했다. 특히 수원컨벤션센터는 경기 남부권의 새로운 문화 거점으로 자리 잡으며 각종 전시와 행사, 국제회의를 품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화랑미술제 수원의 개최는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지역 문화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기폭제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민은 수준 높은 현대미술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고 지역 작가와 문화산업 역시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예술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계기가 되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예술은 인간 사회에서 단순한 감상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의 구조와 한계를 탐구했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법칙을 논했다. 그런데 그는 인간의 인식 영역과 도덕의 영역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고 봤다. 그 간극은 심연이어서 서로 넘어갈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선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칸트는 그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로 예술과 미적 판단의 영역을 제시했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서술한 내용이다. 즉, 예술이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를 돌아보면 인간의 이성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진보했고 정보와 지식은 넘쳐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공동체적 가치와 타인에 대한 배려, 도덕적 책임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러한 때일수록 예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사람의 감정을 흔들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하며 공감과 성찰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성과 도덕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힘, 그것이 예술이 가진 본질적 가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원에서 열리는 화랑미술제는 단순한 미술시장의 행사를 넘어선다. 그것은 도시와 시민이 함께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가는 과정이며 삶의 깊이를 더하는 공공의 장이 될 수 있다. 이번 화랑미술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돼 더 많은 시민이 예술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문화 속에서 서로 연결되고 어우러지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또 수원이 경기 남부를 대표하는 문화도시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 바란다.

[경기시론] 공보의 없는 보건소, 이제 역할을 다시 묻다

4월, 농어촌 보건지소 곳곳의 진료실이 비어 있다. 매년 이맘때면 신규 공중보건의사(이하 공보의)들이 부임해 온 자리다. 올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신규 임용 숫자는 단순한 인력 부족을 넘어 오랜 시간 이어온 지역 의료 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현역병보다 두 배 긴 복무 기간에도 처우 개선은 뒤따르지 않는 구조적 모순, 의대 내 여학생 비중 증가,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맞물리면서 특정 인력의 헌신에 기대어 위태롭게 유지해 온 농어촌 의료안전망은 이제 거대한 전환점에 서게 됐다. 그러나 이 위기를 단순히 의사 수 부족으로만 진단하는 것은 절반의 분석에 불과하다. 보건소가 처음 설립된 1956년의 목적은 ‘진료’가 아닌 ‘공중보건’이었다. 결핵 퇴치와 예방접종 등 인프라가 전무하던 시대에 방역과 예방이 본래의 임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건소는 민간 의원과 경쟁하며 ‘저렴한 진료소’로 자리를 굳혔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역설적으로 보건소의 진짜 역할을 증명했다. 진료 기능에 치중한 곳보다 역학조사와 예방 체계를 탄탄히 갖춘 보건소가 위기 상황에서 훨씬 유연하고 강력하게 대응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보건소 재정립의 첫 단추는 과감한 ‘기능 전환’이어야 한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지금, 지역주민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감기약 처방이 아니라 만성질환 관리와 복합적인 돌봄 서비스다. 공보의 한 명의 청진기에 의존하기보다 간호사,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로 구성된 다학제팀이 주민의 건강을 상시 모니터링하는 ‘예방 중심 모델’로 체질을 바꿔야 한다. 특히 3월 본격 시행된 ‘지역돌봄통합지원법’과의 유기적 결합이 핵심이다. 병원을 나선 환자가 살던 곳에서 존엄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 보건소는 민간 의료기관과 지역 복지 시설을 잇는 행정적 연결 거점이 돼야 한다. 물론 진료 공백에 따른 불안은 현실적인 고통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공보의의 빈자리를 공보의로만 채우겠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촉탁제도 확대와 방문 간호 서비스 강화로 공백을 메우는 한편 지역주민의 건강 지표를 분석해 고위험군을 선제적으로 발굴하는 ‘데이터 기반 스마트 보건소’로의 진화가 필수적이다. 데이터는 단순한 수치의 나열이 아니라 행정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사각지대를 밝히는 나침반이다. 표준화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예측 행정은 한정된 보건 자원을 적재적소에 투입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가장 전략적인 해법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위기가 오랫동안 미뤄온 보건소 구조 개편의 결정적 전환점이라는 사실이다. 보건소를 ‘잠깐 들러 약 짓는 곳’에서 ‘내 삶의 건강을 체계적으로 설계해 주는 곳’으로 바꿀 수 있다면 현재의 인력난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 텅 빈 진료실을 보며 한숨 짓는 행정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행정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보건 행정의 혁신은 곧 시민의 생명권과 직결되는 가장 확실한 사회안전망 구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그 빈 공간을 지역주민의 존엄한 노후를 위한 새로운 건강 거점으로 채우려는 대담한 결단이 필요하다. 낡은 것을 버리는 리부트가 아니라 원작의 정신을 살려 오늘에 맞게 되살리는 리마스터. 이는 단순히 시스템의 외형을 바꾸는 작업을 넘어 공공보건의 근본 가치를 현대적 감각과 기술로 복원하는 작업이다. 비어가는 진료실을 주민의 삶을 지탱할 돌봄의 중심지로 다시 채우는 것이야말로 70여년 전 보건소가 처음 세워졌던 본래의 사명에 답하는 길이다.

[경기시론] 지역 살리는 해법은 의료와 교육

수도권에서도 비교적 주민 만족도가 높은 한 지역이 있다. 이곳에는 시민의 일상적인 질병부터 건강검진까지 책임지는 든든한 지역 종합병원이 자리 잡고 있다. 아플 때 언제든 믿고 찾을 수 있는 의료 기관의 존재, 이것이 지역주민이 온전한 일상을 누리게 하는 정주 여건의 기본이자 핵심이다. 지역의 위기는 단순히 인구 감소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의료 서비스와 교육이라는 삶의 뼈대가 먼저 흔들리고 그 다음 일자리와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순서다. 수도권 중심인 경기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화려한 발전의 이면에는 도시와 농촌, 신도시와 구도심 간 격차가 존재하며 의료 접근성과 교육 기반의 불균형은 도민 삶의 질을 좌우하는 뇌관이 되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의 풍경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진단은 더 정확해지고 치료와 학습은 더 효율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경기도가 추진하는 디지털 전환 정책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기술과 정책이 앞서갈수록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기술은, 그리고 이 정책은 과연 지역주민의 삶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지방 소멸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다. 수많은 지자체가 인구를 붙잡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다. 하지만 도로를 새로 깔고 산업단지를 조성한다고 해서 떠나는 청년의 발길을 돌릴 수 있을까. 지역 혁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가장 절실한 삶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연 내가 사는 이곳은 아플 때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으며 내 아이를 믿고 키울 수 있는 곳인가.” 결국 지역을 살리는 핵심은 정주 여건을 지탱하는 의료 서비스와 교육에 있다. 이 두 축이 흔들리면 어떤 첨단 혁신 정책도 모래성에 불과하다. 먼저 지역 의료 서비스는 주민의 생명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안전망이 돼야 한다.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 필수의료 붕괴는 불안을 키우며 청년과 가족 단위 인구 유출을 부추긴다. 골든타임 내 치료가 가능한 응급의료 체계를 갖추고 필수의료 서비스를 지역 내에서 완결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초고령사회를 맞아 예방과 돌봄이 결합된 지역 밀착형 의료 시스템 구축도 시급하다. 다음으로 지역 교육은 인재를 길러내고 산업을 혁신하는 기반이다. “교육 때문에 떠난다”는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지역의 미래도 없다. 지역 대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지자체와 산업계와 함께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주체로 재편돼야 한다. 정부의 RISE 정책은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하는 시도다. 대학이 지·산·학 협력을 통해 실무 인재를 키우고 이들이 다시 지역에 정착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을 상아탑에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지역과 연결된 핵심 거점으로 바꿔야 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고 청년이 지역에 머무는 구조를 만드는 출발점이 바로 교육이다. 지역 혁신은 수도권 모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모이고 머무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의료가 삶을 지키는 수비수라면 교육은 미래를 만드는 공격수다. 지금 지역 의료 서비스와 교육에 대한 투자는 단순한 복지나 인프라 확충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 생존을 위한 가장 절박하고 확실한 투자다. 지자체와 중앙정부는 건물과 도로보다 지역에서 병을 고치고 사람을 키워내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결국 정책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누구나 자신이 뿌리 내린 곳에서 건강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와 지역사회가 든든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 이제 그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닐까.

[경기시론] 우리 문화의 위상과 자각

며칠 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홍보를 위해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가 한국을 방문했다. 할리우드 영화가 개봉하면서 한국에서 홍보하는 것만으로도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더 나아가 최고의 배우들이 우리나라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홍보 인터뷰를 하는 장면은 조금은 낯설기까지 하다. 한때 우리는 해외 스타를 스크린이나 외신을 통해서만 접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직접 한국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 일정을 소화하며 한국문화를 체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한국이라는 공간이 글로벌 문화 지형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로 올라섰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다. 한국은 지난 수십년간 경제적 성장뿐 아니라 문화적 역량을 꾸준히 축적해왔다. 케이팝, 영화, 드라마를 비롯한 콘텐츠 산업은 이미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 방문객 수는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으며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한국적인 것’에 대한 체험이다. 한국 음식의 다채로운 맛, K-뷰티 산업의 세련됨, 청결한 도시 환경, 편리한 디지털 시스템, 그리고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시민의 친절함까지,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종합적인 문화 경험으로 작용한다. 앤 해서웨이가 인터뷰 도중 한 말도 놀라웠다. 바쁜 일정에 방문하지 못했지만 꼭 가고 싶었던 곳이 별마당도서관이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닌 스쳐 지나가는 이 장소가 외국인에게 이리도 특별한 장소로 여겨진다는 데 대해서는 놀랍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어떠한가. 이처럼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뤄냈지만 정작 그 가치를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익숙함은 때로 소중함을 흐리게 만든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신선한 감동과 영감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문화적 자산은 단순히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고 존중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힘을 갖는다. 타인의 시각에서 우리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외국에서는 우리의 한글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한글의 소중함을 깨닫고 소중히 보존하고 다뤄 왔을까. 외국인에게 한국인은 낯선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실생활에서 그러한가. 한 아파트에서도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외국 방문객들이 가장 칭찬하는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깨끗한 거리다. 그러나 거리가 깨끗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시위와 공연을 하고도 뒷정리를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고 외국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당시만 해도 응원 후 넘쳐나는 쓰레기를 치우느라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무엇인가를 얻는 것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한국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인이 한국을 찾는 것은 아니다.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가 있고 그것이 외국인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문화 위상을 오래도록 유지하려면 그만큼 이를 지키고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우리의 깨끗한 거리, 아름다운 질서 문화, 약자에 대한 배려 같은 것들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한국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자만에서 벗어나 이런 때일수록 다시 한번 타인의 시선으로 우리를 되돌아보고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의 발전을 위해 스스로를 독려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경기시론] 집에서 늙을 권리, 통합돌봄이 답이 되려면

지난달 27일, 전국 229개 시·군·구에서 ‘지역사회 통합돌봄’이 일제히 시행됐다. 이는 초고령사회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 사회가 ‘살던 곳에서 건강하고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라는 시대적 요구에 법적·제도적으로 응답한 역사적인 첫발이다. 시설 대신 정든 집에서 노후를 보내고자 하는 어르신의 소망을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짊어지겠다는 약속이 제도로 구현된 것이다. 현재 통합돌봄은 노인·장애인을 대상으로 30종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2030년까지 60종으로 확대해 전주기 돌봄 체계를 완성한다. 그러나 양적 확대와 달리 지역 인프라와 운영 역량은 여전히 미흡하다. 특히 경기도는 신도시와 인구 소멸 지역 간 돌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어 지역별 맞춤형 대응이 시급하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고 통합돌봄이 실효성 있는 안전망으로 안착하기 위해 향후 정책 운영에서 살펴야 할 세 가지 지점을 짚어 보고자 한다. 첫째, 부처와 기관 간 장벽을 허무는 ‘통합적 거버넌스’ 확립이다. 현재 우리의 인구 행정은 출산, 보육, 주거 정책이 부처별로 나뉘어 추진되는 분절성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통합돌봄 역시 보건의료와 복지 서비스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않으면 수요자는 여전히 서비스 빈틈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가 국가인구재능부(NPTD)를 통해 정책 간 시너지를 높이듯이 우리도 지자체 전담 조직을 단순한 행정 창구를 넘어 예산, 인력, 데이터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을 갖는 컨트롤타워로 격상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서비스 간 단절을 줄이고 수요자 중심의 연속적 돌봄이 가능해진다. 둘째, 데이터 기반의 ‘예측 행정’으로의 전환이다. 최근 시행된 보건의료 데이터 표준화 정책은 기관 간 정보 연계를 위한 기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제는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해 돌봄 수요를 사전에 파악하고 위기 징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지능형 체계 구축을 고민해야 한다. 다만 인공지능(AI)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치트키’로 맹신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데이터는 숫자로 치환되지 않는 삶의 구체적 맥락과 인간적인 고뇌까지 모두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AI나 고도화된 분석 모델은 사각지대를 발굴하고 돌봄의 우선순위를 돕는 효과적인 보조 수단이 돼야 하며 기술이 포착하지 못한 빈틈을 메우고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결국 현장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셋째, 현장의 실천력을 담보할 ‘지속가능한 생태계’ 구축이다. 통합돌봄의 ‘심장’인 재택의료 서비스가 지역별로 큰 편차를 보이는 이유는 인력 부족과 수익성 문제로 의료기관이 참여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방문진료가 일부 의료기관의 선의에만 기대는 서비스가 아닌 제도 안에서 안정적으로 유지 가능한 업무가 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수가 체계와 행정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아울러 농어촌과 도서지역 등 인프라 취약 지역에 자원을 집중 투입해 거주지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 정책의 성패는 결국 현장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 기대수명 84세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단순한 수명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질 향상이며 그것이 통합돌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돌봄은 더 이상 개인이나 가족에게만 전적으로 전가될 수 없는 영역이다. 가족의 헌신과 책임이 돌봄의 근간임은 분명하지만 이제는 국가와 지역사회가 그 무게를 함께 나누는 든든한 버팀목이 돼야 한다. 통합돌봄이 정책의 청사진을 넘어 우리 이웃의 일상 속에 스며들 때 비로소 우리는 존엄한 노후라는 사회적 약속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경기시론] 장애 청년 맞춤형 창업 정책 ‘절실’

올해 초 중소벤처기업부와 재정경제부는 국가창업시대 전략회의를 열고 국가 창업시대 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창업을 통해 일자리 패러다임을 기존의 ‘직업을 찾고 매칭하는 것’에서 벗어나 초개인화 시대에 맞게 스스로 일을 창출하고 만들어 가는 방향으로 전환하자는 관점의 변화로 읽힌다. 이는 급변하는 산업환경과 고용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적 시도로 평가된다. 일자리에 대한 기존의 수동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접근을 통해 일 자체의 의미와 재미를 높이고 사회 전반의 역동성을 강화하려는 취지도 담겨 있다. 현재 정부는 10개 창업도시 조성, 1조원 규모의 재도전 펀드 조성,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 등을 통해 누구나 쉽게 창업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또 청년 창업사관학교와 창업중심대학을 통해 예비창업자부터 도약기 기업까지 단계별 지원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정책 흐름 속에서도 장애인, 이민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맞춤형 창업 지원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일부 지원이 이뤄지고 있으나 주로 컨설팅과 초기자금 지원에 머물러 있어 실질적인 창업생태계 진입까지 이어지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장애 청년의 특성과 현실을 반영한 세밀한 정책 설계와 현장 중심 지원이 더욱 필요하다. 장애 청년들 역시 창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욕구는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더 강할 수 있다. 창업은 장애라는 사회적 편견을 넘어 자립과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유효한 경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창업 참여가 활발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동기 부족이 아니라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반복된 실패 경험과 좌절은 자신감 저하와 불안으로 이어지고 이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결된다. 결국 창업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일 수 있으며 사회적 환경 또한 이러한 선택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장애 청년 창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작은 성공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소규모 창업, 실험적 프로젝트, 단기 창업 체험 등 부담이 작은 단계부터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성취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형성해야 지속적인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장애 청년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을 해결하는 보조공학 기반 소규모 창업을 활성화하고 이를 연결해주는 멘토링 체계 구축도 요구된다. 또 창업 과정에서의 실패를 학습 경험으로 인정하고 이를 재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와 제도 역시 함께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창업으로 일정 소득이 발생하더라도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이 박탈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과 발달장애인을 위한 가족 창업 모델 지원 등 현실적 장치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지원을 넘어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환경과 재도전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기반이 마련될 때 비로소 장애 청년들도 창업생태계 안에서 주체적으로 참여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또 이는 단순한 복지 확대를 넘어 사회 전체의 혁신 역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의미가 크다.

[경기시론] 자연이 되살아나는 ‘쉼의 시간’

대학 재직 시절, 안식년을 맞아 가족과 함께 미국의 한 대학에서 방문교수로 지낸 적이 있다. 그 시간은 내 삶에서 손꼽히는 깊은 휴식의 해였다. 강의에서 벗어나 현지 교수들과 연구 주제만을 놓고 1년 동안 천천히, 그러나 밀도 있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몸과 마음이 회복됐을 뿐 아니라 돌아와서는 더 긴 안목으로 연구와 교육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 2월은 가장 짧지만 가장 깊은 달이다. 겨울의 끝에서 봄을 준비하는 이 시기는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땅속에서는 이미 생명이 다시 솟아오를 힘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쉼을 공백으로 여기지만 자연은 쉼이야말로 회복과 예방의 시간임을 보여준다. 지난달 이어진 산불은 이 교훈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일깨운다. 2025년 3월 경북 의성 산불은 강풍을 타고 안동, 영덕 등으로 확산되며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수많은 가구가 소실되고 주민들이 대피했으며 성묘객 실화가 원인으로 추정된다. 산불은 매년 수백건 발생하고 수천ha의 산림을 앗아간다. 기후 위기로 건조한 기간이 길어지면서 작은 불씨도 재난으로 번지기 쉬워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자원으로 여기며 많이 이용하는 것을 미덕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이제는 산도 사람처럼 ‘쉼의 시간’이 필요하며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자연이 스스로 회복할 여지를 남겨 두는 정책이 중요해졌다. 그래서 제안한다. 매년 2월을 ‘산과 사람이 함께 쉬는 안식월’로 삼자고. 2월은 짧지만 오래 마음에 남는다. 겨울의 끝에서 봄의 문턱을 지키는 이 달은 고요하지만 속으로는 분주하다. 얼어 있던 땅은 풀릴 준비를 하고 나무는 드러나지 않은 잎을 준비한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내 호흡을 더 또렷하게 듣는다. 그래서 2월을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모아 두는 시간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쉬는 날을 뒤처진 시간처럼 여기지만 자연은 멈춤으로 회복하고 다시 자라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숨을 고르는 순간이 있어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쉼은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건조한 바람이 오래 불면 작은 불씨도 번진다. 내 삶도 그렇다. 피로가 쌓이면 사소한 말이 갈등이 되고 무심한 선택이 후회가 된다. 2월은 묻는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니?” 조금 덜 하고, 늦추고, 남겨 두는 용기가 결국 나를 지킨다. 일이 터진 뒤의 수습은 늘 값비싸다. 반면 미리 살피는 마음은 조용하지만 따뜻하다. 2월의 고요 속에서 몸과 관계, 습관을 점검한다. 위험은 커지기 전부터 조심하는 태도가 서로를 지킨다. 2월의 교훈은 분명하다. 멈춤은 퇴보가 아니다. 더 멀리 가기 위한 준비다. 내년 2월에는 하나만 덜어 보자. 불필요한 약속 하나, 날 선 말투 하나, 늦게까지 붙잡던 일 하나. 덜어낸 자리에서 봄은 더 단단하게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안식도 함께 지켜 주자. 2월은 우리를 조금 더 사람답게 만든다. 우리는 자연의 질서를 존중한다고 말해 왔다. 이제는 일정 기간 ‘멈춤’을 제도화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더 오래 안전하게 함께 살기 위한 약속이다. 내년 2월에는 산과 사람이 함께 쉬는 안식월을 선언해 보자. 그 짧은 멈춤 위에 더 안전하고 회복력 있는 봄, 그리고 지속가능한 산림의 미래가 열릴 것이다.

[경기시론] 생명이 움트는 계절과 애기똥풀

얼마 전 안도현 시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시골 마당에 모여 옛이야기를 듣듯 고즈넉하고 구수한 강연이었다. 강연 말미에 한 청중이 젊은이들에 대한 조언 한마디를 청했다. 과거에 읽었던 시인의 열정적인 시들에 비춰 볼 때 뜨거운 삶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았다. 예컨대 그의 시에서 ‘삶이란/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연탄 한 장),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 같은 표현을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시인은 인연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이제 칠십을 바라보는 시인의 입에서 나온 인연이라는 말은 조용한 무게감이 있었다. 이어 또 다른 청중은 시인의 마음을 배우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시인은 올봄에 작은 꽃 이름 하나 배워 보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이어 예로 든 꽃은 화려하거나 거창한 서사가 있는 꽃이 아니었다. 흔하게 보이면서도 눈길도 주지 않고 발길에 차이는, 보잘것없는 애기똥풀 같은 꽃이었다. 시인이 쓴 애기똥풀이라는 시가 있다. ‘서른다섯 될 때까지/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애기똥풀). 이름을 안다는 것은 명칭을 기억하는 단순한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존재를 나의 우주 안으로 받아들이는 인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고속화된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침이면 짐짝처럼 지하철에 몸을 싣고 점심에는 식당 앞에 길게 줄을 서서 허기를 채우고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야근과 지친 몸을 이끌고 참석하는 회식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잊은 채 하루의 일상에 젖어 살고 있는 지 오래다. 어디 그뿐인가. 스마트폰만 열면 쏟아지는 바깥세상의 소식들은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끝을 알 수 없는 전쟁 보도, 유령처럼 떠도는 경제위기설, 불안한 환경위기론까지. 거대한 담론과 비극적인 뉴스들이 현대인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휘젓고 있다. 이런 소음 속에서 우리는 정작 곁에 와 있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엄동설한의 모진 추위를 견뎌내고 딱딱한 땅 껍질을 뚫고 올라온 봄꽃들의 생명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운 서사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뜻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름다운 봄꽃을 마주할 여유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시인들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를 가까이 하는 것을 경계한 바 있다. 그는 시가 인간의 이성을 흐리고 감정을 과도하게 자극해 국가의 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논리적 이성과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를 꿈꿨던 그에게 시인의 감각적인 언어는 다소 위험한 요소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현대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플라톤이 경계했던 그 ‘시적 여유’가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이 효율과 논리, 수치로 계산되는 빡빡한 틈새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메말라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어 있는 여유, 즉 공백의 미학을 지닌 시인의 시선이야말로 이 살풍경한 시대를 버티게 하는 완충지대가 돼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직 쌀쌀하지만 그래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이제 곧 길모퉁이에 애기똥풀이 고개를 들고 활짝 피어날 것이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이 시대에 마음에 노란 봄꽃 하나 들여놓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애기똥풀의 꽃말은 치유, 회복, 희망이다. 그 밖에도 개나리, 철쭉, 민들레, 매발톱꽃, 제비꽃. 이름없는 수많은 꽃들. 올봄에는 저마다의 의미를 담고 자기 자리에서 사력을 다해 생명을 움트고 피어나는 봄꽃과 인연을 맺어 보려 한다.

[경기시론] 놓칠까 두려운 시대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았을 뿐인데 마음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혹시 지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감정을 요즘 사람들은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라 부른다. 직역하면 ‘놓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포모라는 말은 원래 투자 시장에서 쓰이던 용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자산으로 큰 수익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뒤늦게라도 뛰어들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생기는 심리를 가리킨다. 이 말이 널리 퍼진 것은 소셜미디어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고 무엇을 즐기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과 비교하게 됐다. 화면 너머에는 여행과 맛집, 성공 이야기 같은 타인의 삶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러다 보니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일에서 이미 뒤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자산 시장의 급등락은 이런 불안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벼락거지’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다. 누군가는 집값 상승으로 자산이 크게 늘었고 누군가는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뒤처진 사람처럼 느끼게 됐다. 상승장에서는 뒤처질까 봐 서둘러 뛰어들고 하락장에서는 기회를 놓친 자신을 자책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나를 흔드는 것은 시장의 그래프일까 아니면 타인의 속도계일까. 우리는 어쩌면 타인의 삶을 기준으로 불안을 계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움직인다. 새로운 투자, 새로운 취미, 새로운 공부, 새로운 네트워크까지 무엇이든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포모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치게 만든다. 끝없이 이어지는 정보와 선택지 속에서 우리는 늘 무언가 부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더 많은 것을 해야 할 것 같고,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 같고,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생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기회를 붙잡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고 그만큼 수많은 기회를 놓치며 살아갈 수밖에 있다. 어떤 길을 선택했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길을 포기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얻는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놓치며 살아간다. 삶의 본질은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최근에는 포모의 반대 개념도 이야기된다. ‘조모(JOMO·Joy Of Missing Out)’다. 세상의 모든 흐름을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다.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지나치게 신경 쓰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시간과 일상에서 만족을 찾는 삶이다. 정보와 속도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무엇을 놓칠지 선택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모든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능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삶의 방향을 대신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나만의 ‘기준’을 잃어 버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무엇을 잡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선택했느냐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회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놓쳐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인지도 모른다. 그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경기시론] 장애인 특성 고려한 AI 교육 필요하다

요사이 교육현장에서는 다양한 인공지능(AI)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비장애인들에게는 단순히 AI가 업무 효율을 높여주는 비서이자 도구로 인식되지만 장애인에게 AI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세상과 소통하고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제2의 감각이자 확장된 신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애인에게 AI 교육은 단순한 기술 교육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을 넓히는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교육 현장은 아직 이러한 필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현장을 살펴보면 다양한 AI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한 교육은 여전히 미비하다. 기술 발전 속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그만큼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디지털 격차 역시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장애인들이 AI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비장애인에 비해 현저히 낮은 이유는 단순한 ‘배움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인식과 교육 환경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AI 교육 플랫폼과 코딩 환경은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설계돼 있으며 스크린 리더와의 호환성 부족이나 복잡한 사용자 인터페이스(UI)는 시각장애인 및 지체장애인이 AI 모델을 실습하는 데 큰 장벽이 되고 있다. 또 장애 유형(시각, 청각, 발달 등)에 따라 필요한 교수법과 학습 방식이 다르지만 현재의 AI 교육은 대부분 텍스트와 영상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일부 장애인은 교육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한 AI 실습 장비를 갖추기 위해서는 경제적 부담이 크고 장애인을 전문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AI 전문 인력 또한 부족하다는 이유로 교육 자체가 소홀히 되는 경우도 많다. 장애인에게 AI 교육은 단순한 정보기술(IT) 지식 습득을 넘어 생존과 자립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장애인의 신체적 한계를 기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AI이기 때문이다. 특히 AI 기반 산업은 전통적인 업무 방식에서 요구되던 육체적 노동이나 물리적 이동의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다. AI 데이터 라벨링이나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같은 분야는 장애인이 재택 환경에서도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분야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자립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모든 장애인에게 AI 활용법을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 AI를 활용한 창업과 전문 직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역량 중심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장애인들이 AI 기술을 단순히 소비하는 사용자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문제 해결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기관과 사회 전반의 관심과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AI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편견 없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도구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특정 계층에게만 집중된다면 AI는 또 다른 권력이자 차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장애인에게 AI 교육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과정이 아닌 나도 세상의 중심에서 기여할 수 있다는 존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며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술은 단순히 발전 속도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가에 의미가 있다. AI 교육이 포용성과 접근성을 함께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교육 혁신이 가능하며 우리가 꿈꾸는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경기시론] 경기도 지역혁신: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조건을 설계하자

2026년 봄이 시작됐다. 한 해의 시작은 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경기도 지역혁신(RISE) 사업 역시 이제 2차 연도에 접어들며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금은 성과를 나열하기보다 지난 1차 연도의 방향을 차분히 되짚어볼 때다. 우리는 과연 지역에 사람을 남기기 위해 충분히 고민하고 진지하게 노력해 왔는가, 아니면 또 하나의 잘 수행된 사업이라는 말로 서로를 안심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경기도는 수도권이라는 이름 아래 과밀과 경쟁의 상징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안으로 돌리면 전혀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 도심과 외곽, 산업단지와 주거지, 성장 지역과 소멸 위험 지역이 동시에 공존한다. 청년은 많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일자리는 있지만 삶의 기반은 불안정하다. 경기도의 문제는 사람이 없는 지역이 아니라 사람이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구조에 가깝다. 사람이 머문다는 것은 단순히 주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 안정적인 주거, 예측 가능한 생활 리듬, 안전한 이동, 그리고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최소한의 품위가 보장될 때 비로소 정주는 가능해진다. 여기에 더해 사람은 빵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머물게 하는 힘은 언제나 기본요건 위에 놓인 감성에서 비롯된다. 공간의 질감, 빛과 소음의 밀도, 걷고 머물 수 있는 여백, 관계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장면들. 이러한 환경적 조건이 결여된 지역은 결국 다시 떠나게 된다. 1차 연도 RISE는 대학과 지자체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동반자가 돼 지역혁신을 실험한 시기였다. 의미 있는 출발이었지만 이제는 한계도 분명하다. 프로그램 수, 참여 인원, 예산 집행률 중심의 평가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경기도 RISE가 주목해야 할 핵심 주체는 성인학습자다. 이들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정책 대상이 아니라 이미 지역에 삶의 기반을 두고 있거나 떠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기 교육이나 자격증이 아니다. 다시 배울 수 있고, 다시 일할 수 있으며,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지속가능한 확신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교육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삶이 존중받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도 괜찮다는 정서적 신뢰가 함께 형성돼야 한다. 따라서 지금 경기도에는 새로운 형태의 파일럿 정책이 필요하다. 지역형 공동숙소와 학습·작업공간을 결합한 통합 실험이 그것이다. 이는 삶의 조건을 하나의 장면으로 설계하는 정책 실험이다. 공동숙소는 하루의 리듬이 만들어지는 생활 공간이어야 한다. 채광과 소음, 공용 공간의 비율, 휴식과 집중이 공존하는 구조, 지역의 풍경과 연결되는 개방성까지 고려돼야 한다. 숙소 내부에 소규모 학습·재교육 공간과 작업 공간을 함께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동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학습과 노동이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만드는 설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잘 설계된 공간은 사람에게 계속 해볼 수 있겠다는 감각을 남긴다. 정책 설계의 핵심은 결합이다. 주거는 중장기 체류를 전제로 한 안정성을 갖춰야 하고 학습은 역량 중심의 재교육으로 전환돼야 하며 작업공간은 지역 산업과 프로젝트, 창업과 프리랜서 노동으로 이어지는 실질적인 소득 경로와 연결돼야 한다. 동시에 이 모든 조건은 인간적인 규모와 심미적 완성도를 갖춰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는 순간 정주는 목표가 아니라 구호에 머문다. 이러한 파일럿 정책의 성과는 취업률이나 수료율로 평가될 수 없다. 경기도 RISE 2차 연도의 진정한 성과 지표는 지역 정주율이다. 6개월, 1년, 2년이 지난 뒤에도 이들이 여전히 이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일상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정책의 성패를 가른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무엇이 사람을 떠나게 했는지를 기록하는 과정 자체가 다음 정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지역형 공동숙소와 학습·작업공간 파일럿은 건축 사업이 아니다. 이는 경기도가 사람의 삶을 기능이 아닌 장면으로 이해하겠다는 정책적 선언이다. 사람들이 떠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남을 수 있는 조건, 그리고 남고 싶어지는 풍경을 설계하는 일이다. RISE 2차 연도는 바로 그 설계를 시작할 시간이다. 경기도의 지속가능성 전환은 얼마나 많은 사업을 했는가보다 얼마나 인간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이 머무는 지역은 언제나 기본이 단단하고 일상이 아름다운 곳이다. 경기도 정주의 미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경기시론] 도박에 갇힌 아이들... ‘회복’ 향한 용기를

최근 우리 사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게임의 경계를 넘어 도박이라는 위험천만한 늪에 빠져들고 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가정의 붕괴와 사회적 범죄로 이어지는 등 그 파급력이 심상치 않다. 스마트폰 하나면 언제 어디서든 도박판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에서 판단력이 미성숙한 아이들은 ‘한번만 더’라는 굴레에 갇혀 본인도 모르는 사이 범죄자로 전락하고 있다. 청소년 도박이 무서운 이유는 돈을 잃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법 사금융에 손을 대거나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채 방황하며 결국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이스피싱, 중고 거래 사기, 금품 갈취 등 또 다른 범죄에 가담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는 한 아이의 인생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응해 경기남부경찰청은 혁신적이고 포용적인 정책인 고백(Go-Back)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처벌이 아닌 ‘보호’와 ‘치유’에 있다. 고백(Go-Back)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도박에 빠지기 전의 건강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도 적극 참여해 힘을 보태고 있다.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은 도박 문제로 고통받는 청소년이 자수하거나 보호자가 신고하는 경우 형사처벌에 있어 최대한의 선처를 보장하는 것이다. 다만 단순히 훈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치유센터 등 전문 기관과 연계해 심리상담과 중독 치료를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는 낙인 찍히는 것이 두려워 숨어 지내던 아이들에게 퇴로를 열어줌으로써 중독의 고리를 끊고 다시 학교와 가정의 품으로 건강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도박의 늪에 빠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청소년은 우리 사회의 근간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린 나이에 도박의 짜릿함에 매몰돼 인성이 파괴되고 범죄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도박은 개인의 의지로 끊기 힘든 ‘질병’과도 같다. 특히 나이 어린 청소년들이 이러한 질병을 혼자 극복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도박빚을 지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행하려 하거나 돈을 요구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협박을 받는 경우 아이들의 삶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이들의 실수를 비난하기에 앞서 어른들과 사회공동체가 그들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안전망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 아이들의 자진 신고를 적극 유도하는 이 프로젝트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또 부모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갉아먹는 도박의 연쇄 작용은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 주변에 도박으로 인해 방황하거나 빚의 늪에서 허덕이는 청소년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가까운 경찰서를 찾아 도움을 청하도록 인도해줄 것을 당부한다. 한 순간의 용기 있는 ‘고백’이 아이를 어두운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고 우리 사회를 다시 밝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의 밝은 미래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환한 웃음 속에 있다.

[경기시론] ‘제로’의 시대... 설탕세가 꼭 답일까

요즘 음료수를 사기 위해 마트에 가면 잠깐 멈칫하게 된다. 냉장 진열대 한가운데를 차지한 것은 대부분 ‘제로’라는 이름이 붙은 제품이다. 이제는 설탕을 넣지 않은 제로 음료를 마셔야만 할 것 같은 세상이 됐다. 물론 수요는 공급을 낳는다. 그러나 이 변화를 소비자의 자발적 선택에 따른 결과로만 보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과다한 설탕 소비가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감미료 역시 몸에 좋지 않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제로 음료의 급속한 확산 뒤에는 한쪽의 건강 이미지를 앞세운 기업의 적극적인 마케팅이 작용하고 있다. 편향된 홍보로 형성된 수요를 자율적 시장의 결과로만 보기는 어렵다. 지난달 28일 대통령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설탕 사용을 억제하기 위한 방안을 언급하면서 ‘설탕부담금’(설탕세)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담배처럼 설탕에 부담금을 부과하고 그 재원을 지역 공공의료 강화에 재투자하자는 구상이었다. 비만과 당뇨, 심혈관질환 증가라는 문제의식 자체는 타당하다. 당류 과다 섭취가 사회 전체의 의료비 부담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국가 개입의 명분도 존재한다. 위해 요인을 줄이고 비용을 공공 영역으로 환원하겠다는 접근 역시 정책적으로 합리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세금은 국가 운영의 수단이지 국민의 생활 방식을 교정하는 규율 장치가 돼도 되는가라는 점이다. 간접흡연처럼 타인에게 일방적 위해를 가하는 담배는 억제의 대상이지만 개인의 체질과 생활에 따라 필요 수준이 다른 설탕은 조절의 대상이다. 이 차이를 무시한 채 동일한 규제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세금은 사회적 비용을 관리하는 도구다. 그러나 특정 성분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순간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설탕세가 도입되면 설탕이 빠진 자리를 대체당이 채우면서 제로 음료와 무설탕 간식은 여전히 단맛을 제공한다. 하지만 대체당의 장기적 건강 영향에 대해서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설탕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또 다른 위험 요인을 확산시킨다면 그 책임은 가볍지 않다. 청소년 보호를 명분으로 도입됐던 강제적 셧다운제와 게임시간 선택제 역시 개인의 일상적 선택을 국가가 직접 규율하려 한 정책이었다. 게임 규제와 식습관 규제는 다르지만 두 정책이 공유하는 한계는 같다. 개인의 선택을 제도로 통제하려 했고 실효성 논란 끝에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식습관은 세금으로 교정될 문제가 아니다. 가격을 올리면 설탕 섭취가 줄어들 수는 있지만 그 자리를 무엇이 대신할지는 정책이 통제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부담이 고르게 나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세금이라도 소득이 낮을수록 체감 부담은 크다. 반면 건강한 대안식품은 여전히 비싸고 접근성도 낮다. 세금만 올리고 선택지를 넓히지 않는다면 건강 개선보다 생활비 부담만 커질 수 있다. 설탕세가 의미를 가지려면 전제가 분명해야 한다. 세금은 국민의 선택을 처벌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관리하는 장치여야 한다. 걷힌 재원은 공공의료 강화, 영양 교육, 학교급식 개선이나 저소득층 신선식품 지원 같은 환경 개선에 쓰여야 한다. 덜 달게 먹도록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몸에 맞게 덜 달게 먹어도 불편하지 않은 조건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국민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지원이 개인의 일상적 선택을 세금으로 교정하려는 시도로 바뀌는 순간 정책의 성격은 달라진다. 설탕세 논쟁은 결국 설탕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선택을 어디까지 관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경기시론] 경기도교육청, 장애인 교원 적극 임용을

매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장애인 고용의무 불이행 기관을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법정의무 고용률은 민간사업주 월평균 상시근로자가 100명 이상일 경우 민간 부문 3.1%, 공공 부문은 3.8%다. 이 법정의무 고용률을 지키지 못해 고용부담금을 내고 있다. 장애인을 채용하지 않고 고용부담금을 내고 있는 공공기관 중 대표적인 곳이 교육청이다. 2024년 전국 교육청에서 장애인 교원을 채용하지 않아 1천220억원의 부담금을 냈고 경기도교육청은 다른 교육청에 비해 더 많은 부담금을 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경기도교육청 장애인 의무 고용 채용률은 2025년 기준 1.69%로 법정의무 고용률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23년부터 내년 납부 예정 금액이 무려 1천억원 이상에 이른다고 한다. 경기도교육청에서 장애인 교원을 채용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교원임용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는 장애인 수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원자 또한 적고 지원을 해도 합격률이 높지 않아 교원으로 채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매년 장애인 교원 임용과 관련한 사회적인 관심이 있을 때마다 거의 동일한 이유와 상황을 말한다. 이제부터라도 경기도교육청은 장애인 교원 지원을 위한 조례 개정 임용 촉구 등의 방법이나 장애인 교원 임용 불이행으로 인한 고용부담금이 아닌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장애인 교원을 임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을 선택하기 바란다. 먼저 경기도교육청은 장애인 교원 지원 예산을 332억원 이상 편성했으나 실제 장애인 교원 지원 예산은 1천800만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원 지원 예산을 부담금을 내는 데 사용하기보다 장애인 교원들이 학교현장에서 교직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장애인 교원을 위한 근로지원인제도를 현실성 있게 선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또 장애인 교원임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장애인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보다 교원양성기관을 대학과 협력해 적극 도입하기 바란다. 경기도 유일의 국립대학과 경기도교육청이 협력해 사회적인 책임성과 경기도교육청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장애인 교원을 양성하는 사범대학을 설치하기 바란다. 이를 통해 경기도교육청에 필요한 장애인 교사를 집중 양성하도록 해 장애인 교원을 다양하게 선발 및 임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 교원들이 겪고 있는 장애의 특성상 교과목을 담당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 비교과에 해당하는 교사를 양성하는 초개인화 및 맞춤형 교원 양성 전략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 유일의 국립대학에서 장애인 교원을 임용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정을 수행하면 장애인에게 교원에 임용될 수 있는 기회 제공, 직업적 자립을 통한 삶의 만족도 증진, 사회적 적인 민주시민의 공동체 의식이 함양될 것이다.

[경기시론] 혁신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새해가 되면 늘 더 빠른 변화를 이야기한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고 사회 전반에는 뒤처지지 않기 위한 조급함마저 감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살아가는 사회와 지역, 그리고 대학이 진정으로 마주해야 할 질문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혁신(Innovation)은 언제나 기술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변화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바이오와 콘텐츠, 미래 모빌리티 산업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 이들 산업은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과 인재, 그리고 지역이 다져온 산업 기반 위에서 서서히 성장해 왔다. 최근 주목받는 피지컬 AI와 감성 AI 역시 마찬가지다. 몸을 가진 기계, 감정을 읽고 반응하는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다. 수십 년에 걸친 연구 과정 속에서 축적된 기술과 방대한 데이터, 그리고 인간의 신체와 감정, 경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고급화된 기술로 이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혁신은 단절이 아니라 축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방향 없는 속도는 일시적인 성과를 낼 수는 있어도 지속가능한 미래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기술은 빨라질수록 더욱 분명한 질문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기술을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러한 기술의 축적과 전환의 과정에는 언제나 지역대학이 함께해 왔다. 대학은 새로운 기술을 가장 먼저 도입하는 공간이기보다 기술을 인간의 삶 속에서 해석하고 사회적 의미로 확장해 온 혁신의 장이었다. 인공지능 역시 이제는 얼마나 똑똑한가보다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공존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인간의 경험과 가치로 연결하는 힘,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역대학이 아닐까. 이제 지역대학은 단순히 인력을 배출하는 기관에 머물 필요가 없다. 지역 산업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경험과 역량을 미래 전략으로 전환하고 새로운 산업 질서를 실험하는 지역 혁신의 거점으로 그 기능을 해야 한다. 같은 기술이라 하더라도 어떤 정체성과 철학을 가진 대학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시간에 흘려보내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혁신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반드시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이 있다. 대학에서 길러낸 청년들이 과연 이 지역에 머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졸업과 동시에 지역을 떠나야 하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아무리 정교한 기술과 산업 전략도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혁신은 결국 사람이 지역에 남아 삶을 이어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청년이 머물 수 없는 지역은 기술을 품을 수 없고 미래 역시 지속되기 어렵다. 이를 위해 교육과 산업, 그리고 삶의 조건은 하나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한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지역 기업의 실제 일과 맞닿아야 하고 졸업 후에도 지역 안에서 성장의 경로를 함께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은 기업과 함께 교육과 일을 설계하고 지역사회는 청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주거와 문화, 일상의 조건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특히 기술 집약적 산업이 모여 있는 경기 수도권에서 예술과 디자인, 콘텐츠 역량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기술을 꾸미는 요소가 아니라 기술을 사람의 감각과 감정으로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자산이기 때문이다. 피지컬 AI와 감성 AI의 시대에 기술의 완성도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2026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혁신이 아니다. 기술을 넘어 사람과 지역에 책임지는 혁신의 정체성이다. 지역대학을 단기적 성과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국가와 지역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핵심 플랫폼으로 바라보는 성숙한 결단이 지금 우리 사회에 요구되고 있다. 이것이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게 남겨야 할 우리의 약속이다.

[경기시론] 권력과 행복

2026년 1월, 뉴스에서는 유난히 ‘선고’라는 단어가 자주 들린다. 한때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이들이 구속되고 법정에 서는 장면이 반복되고 그들의 운명에 대한 결말이 하나둘 이달에 내려지고 있다. 시계를 불과 1년1개월 전으로만 되돌려 봐도 그들은 오늘과 같은 상황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권력, 언제나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지위는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진다. 권력을 그토록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행복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묻게 된다.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과연 행복한 일일까. 권력을 누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고대 그리스는 이미 오래전에 깊은 성찰을 남겨뒀다. 시칠리아 섬 시라쿠사에 살던 다모클레스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왕 디오니시우스를 부러워하며 말한다. 왕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와 권력, 영광을 모두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왕은 하루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직접 체험해 보라고 제안한다. 보석으로 장식된 옷, 진귀한 음식이 가득한 연회, 분주히 오가는 하인들. 다모클레스는 처음에는 황홀함에 취한다. 그러나 왕좌에 앉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그는 숨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낀다. 자신의 머리 위에는 날카로운 칼이 단 한 가닥의 말총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 순간부터 왕의 자리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었다. 다모클레스는 단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었고 결국 공포에 질려 권좌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다시는 그 자리를 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 일화는 권력이란 달콤함과 동시에 늘 파멸의 가능성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자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다른 이야기는 소아시아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 왕에 관한 것이다. 그는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거머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다.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라 확신하던 그는 현자 솔론에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당연히 자신의 이름이 나오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솔론은 조국을 위해 싸우다 명예롭게 죽은 사람, 부모를 위해 헌신하다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 형제를 행복한 사람으로 꼽는다. 불쾌해진 크로이소스가 항의하자 솔론은 이렇게 답한다. “어떤 인간도 죽기 전까지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운명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모욕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10여년 뒤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왕국이 멸망하고 처형대에 선 크로이소스는 그제야 솔론의 말을 떠올리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고 전해진다. 다모클레스와 크로이소스는 모두 왕이라는 자리가 곧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렸던 것은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잠시 반짝이다 사라지는 권력의 달콤함에 불과했다. 오히려 솔론의 말처럼 공동체를 위해 책임을 다한 삶, 사랑을 실천하며 마무리된 인생이 더 행복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높이 올라갈수록 위험은 커지고 휘두른 힘만큼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권력은 누리는 대상이 아니다. 선택의 무게, 판단의 결과, 그로 인해 영향을 받는 수많은 사람의 삶까지 함께 짊어져야 하는 자리다. 즉, 짐을 짊어진 자리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특권으로 착각하는 순간 다모클레스의 칼은 이미 머리 위까지 내려와 있을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책임을 다했는가에 의해 비로소 판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기시론] 의료데이터 표준화... 진보인가, 감시인가

병원에서의 문진 중 흔한 사항이 있다. 술은 얼마나 마시는지, 담배는 얼마나 피우는지 등 기호 또는 습관에 연계된 질문이다. 대개 진료기록 한 줄로 남거나 의사의 기억 속에 머무를 형식적 정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제 이 질문의 무게가 달라진다. 보건복지부가 음주와 흡연 행위를 상태로 정의해 국가가 정한 의료 데이터 표준 항목으로 공식 지정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31일 시행된 ‘보건의료데이터 용어 및 전송 표준’ 고시 개정안은 의료기관 간 진료정보를 보다 정확하고 일관되게 주고받기 위한 기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번 개정으로 음주·흡연 상태를 비롯해 연명의료 의향, 처방일시 등 4종의 정보가 ‘핵심교류데이터’에 새롭게 포함됐다. 이는 해당 정보들이 환자가 어느 병원을 찾든 진료의 연속성과 안전성을 위해 공유돼야 하는 ‘필수 요소’로 분류됐다는 의미다. 표면적으로는 명백한 ‘진보’다. 의료정보가 표준화되면 불필요한 중복 질문이나 검사가 줄어들고 응급 상황에서도 환자의 과거력을 보다 신속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이번 개정에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임상의료용어 체계인 ‘SNOMED CT’와 약물 분류 표준인 ‘ATC’ 체계가 적용돼 국내 의료데이터의 국제적 호환성이 강화됐다. 여기에 앱이나 클라우드 환경에 적합한 차세대 의료정보 전송 표준인 FHIR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디지털 환경에서의 활용 가능성도 한층 넓어졌다. 다만 기술적 진보가 곧바로 의료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표준화는 진료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의료를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전환한다. 데이터가 정교해질수록 의료 서비스의 정확성은 높아질 수 있지만 개인의 생활정보가 제도 속에서 다뤄지는 범위 또한 자연스럽게 확대된다. 음주와 흡연정보는 건강 관리에 중요한 참고 자료인 동시에 다양한 보건 정책에서 활용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의료데이터는 숫자와 코드로 구성된 중립적 정보처럼 보이지만 사회적 합의와 정책적 판단의 결과에 따라 어떤 항목을 기록하고 교류 대상으로 삼을지를 결정한다. 음주와 흡연을 핵심 교류 항목으로 지정한 이번 개정은 질병 예방과 진료 효율성을 높이려는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개인의 기호와 생활 습관에 관한 정보가 공적 시스템 안에서 더욱 구조적으로 관리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책적 변화이기도 하다.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개인의 건강정보가 보험이나 복지제도와 연계돼 활용되는 사례도 존재한다. 국내에서도 의료데이터 활용 범위를 둘러싼 논의가 점차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요한 것은 데이터 활용의 목적과 한계를 어디까지 설정할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다. 의료정보가 진료의 참고 자료를 넘어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의료는 본래 개인의 상태와 맥락을 인권과 함께 고려하는 영역이다. 표준은 판단을 돕는 도구일 수 있지만 환자 개개인의 복합적인 삶을 단순한 지표로 일관화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다. 데이터는 환자를 보호하고 진료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활용돼야 하며 그 자체가 삶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돼서는 곤란하다. 이번 표준 고시 개정은 단순한 기술적 조정을 넘어 우리 사회가 의료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 나갈지를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더 많이 기록하고 더 넓게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과정에서 데이터 활용의 원칙과 책임에 대한 논의 역시 함께 성숙해져야 한다. 표준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의료데이터가 정교해질수록 이를 다루는 사회의 태도와 균형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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