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되는 능력들

뇌졸중 및 척수손상 같은 중증 질환으로 입원하거나 수술을 받고 힘든 고비를 잘 넘기면 재활의학과로 의뢰돼 재활치료의 도움을 받는다. 이 환자들에게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당연히 여겼던 움직임들이 하나의 큰 치료 목표가 된다. 혼자 일어나는 법, 몇 걸음 걷는 법, 숟가락을 쥐는 법. 우리가 평소 의식하지 않던 일상생활의 동작들이 치료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재활의학과다. 전에는 몰랐다고들 한다. 두 발로 서서 화장실을 가고, 버스를 타기 위해 뛰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일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우리는 그런 움직임을 ‘능력’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상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재활치료실에 들어오는 순간 그 당연함은 사라진다. 한 걸음을 떼기 위해 온 몸의 힘을 모으는 분,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데 5분을 쓰는 분, 숟가락을 쥐는 법을 다시 배우는 분들을 흔히 만난다. 어제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동작들이 오늘은 간절한 치료 목표가 된다. 걷는 일도, 앉았다 일어나는 일도 특별한 재능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살아오는 동안 몸에 익혀온 움직임 속에서 무의식중에 일상을 누리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잃고 나서야 그 평범한 동작들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능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재활의학은 잃어버린 기능을 되찾게 도와주는 의학의 한 분야이지만 동시에 잊고 지내던 몸의 가치를 다시 알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환자들은 조금씩 나아지며 말한다. “이 정도만 돼도 살 것 같아요.” 예전 같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동작이 삶의 기쁨이 된다. 발끝에 힘이 들어가고,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고, 혼자 의자에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순간 치료실에는 작은 환호가 흐른다. 회복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던 동작 하나를 되찾는 일이다. 우리는 건강할 때 몸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산다. 숨 쉬는 일도, 고개를 돌리는 일도, 가방을 드는 일도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몸이 아프고 나면 그 모든 움직임에는 노력이 붙고, 시간이 붙고, 용기가 필요해진다. 그때야 비로소 깨닫는다. 일상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이 조용히 해내고 있던 수많은 능력 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건강이란 특별히 뛰어난 상태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단을 오르며 숨이 차도 멈추지 않아도 되는 몸, 팔을 뻗으면 원하는 물건을 잡을 수 있는 손. 그것이 우리가 매일 누리고 있는 능력이다. 필자는 한 달 전 갑작스러운 내과질환으로 기름진 음식을 절제하라는 전문의의 엄명을 받고 인생에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식단 조절을 해봤다. 평소 아무 고민 없이 먹던 짜장면, 닭갈비, 제육볶음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오늘 아침, 별다른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면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되는 소중한 능력들을 아프기 전에 한번쯤 떠올려 보는 하루였으면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을 오래 지키기 위해 오늘 하루 단 30분만이라도 몸을 가꾸고 사용해 줬으면 한다. 거창한 운동이 아니어도 좋다. 몸을 쓰는 작은 습관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을 가장 오래 지켜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열면서] 예술이 벽을 통과할 수 있도록

요즘 필자는 감사하게도 예술가들, 창작자와 기획자들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며 관찰할 경험이 잦아졌다. 그 시간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예술가는 어떻게 벽을 통과하는가. 우리는 모두 변화의 벽 앞에 선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벽을 그저 바라보고 어떤 이들은 끝내 그 벽을 지난다. 특히 예술인이 그러하다. 여러 차례의 대화를 통해 필자는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같은 시대를 살며 누구나 불안과 한계를 마주하지만 어떻게 많은 예술인은 끝내 멈추지 않고 그 벽을 통과하는가. 창작을 향한 열망이나 상상의 힘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들과 오래 이야기할수록 상상력은 번뜩이는 재능이라기보다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막힌 지점에서 돌아서지 않는 집요함, 다른 길을 끝까지 묻는 질문, 아이디어를 현실로 끌어오기 위한 진지한 성찰, 그리고 실패를 견디는 인내. 그 모든 것이 상상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인상 깊었던 것은 기술을 대하는 예술인의 방식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위협과 구원의 이분법으로 나누지만 예술가들은 먼저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룬다. 인공지능(AI)과 미디어, 데이터와 가상공간은 찬반의 대상이 아니라 도구이자 협업자다. 그래서 그들의 상상력은 공중에 뜨지 않는다. 철저한 공부와 탐구를 통해 벽을 그저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성질을 분석해 그 위에 새로운 문을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그 문을 열어 벽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문을 열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필자는 다시금 ‘팔걸이 원칙’을 떠올린다. 창작과 권력, 예술과 제도 사이에 유지돼야 할 건전한 긴장과 거리의 원칙이다. 그 거리가 있어야 상상은 숨 쉬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은 성급한 판단으로 닫혀 버리지 않는다. 위험은 행정과 정치가 스스로를 과신하는 순간이다. 현장에서 길러진 예술인의 감각과 그들의 삶의 영역까지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할 때다. 알고 있다는 착각과 평가의 권위가 앞설수록 제도는 ‘곁’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앞’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 조급한 기준과 체점은 예술가들이 벽을 넘기도 전에 멈추게 하고 사회의 상상력은 그만큼 좁아진다. 굳이 체점이 필요하다면 그 주체는 제도가 아니라 현장이어야 한다. 현장에서 창작을 이어온 예술인들이 경험으로 정책과 구조를 바라보고 그 감각으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는가. 그 질문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예술인들의 언어와 형식 앞에서 우리는 미리 판단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다수의 취향과 권위가 먼저 도착하는 순간 벽을 만드는 쪽은 예술가가 아니라 정책이 된다. 먼저 도착해야 할 것은 판단이 아니라 존중이다. 아직 미완이고 실패를 품은 그 시간을 감내하고 기다려 주는 일, 그 과정을 신뢰하는 일. 그것이 이 사회의 한계를 넓히는 가장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힘일 것이다. 기술을 협업으로 활용할지 혹은 자신의 예술 안으로 들이지 않을지 방식은 각기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그 존중의 태도와 철학은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예술인들도 기다리고 있다. 예술을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동시대의 자유이자 미래의 언어로 바라볼 수 있는 행정과 정치인을. 지금까지도 존경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그 정신을 이어갈 사람을.

[아침을 열면서] 문 앞에 선 소상공인

정부는 소상공인을 ‘경제의 뿌리’라 부른다. 골목상권이 살아야 지역이 살아나고 소상공인이 버텨야 국가 경제도 지속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런 공감대 속에서 정부는 매년 다양한 정책자금을 마련해 창업과 경영 안정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소상공인이 실제로 마주하는 현장과 제도 사이에는 여전히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 정책자금을 신청하는 소상공인 중 상당수는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아이템을 시장에 내놓으려는 사람들이다. 혹은 이미 가게 문을 열었지만 매출이 충분히 오르지 않아 잠시 숨을 고를 자금이 필요한 이들이다. 생계의 불안과 가족의 만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며 하루하루 버텨내는 사람들이다. 소상공인들은 소상공인시장공단의 대출확인서를 손에 쥐고도 신용보증기관 창구 앞에 서는 순간 다시 멈춰 선다.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전년도 매출’이라는 하나의 기준이다. 정책은 통과했지만 신용의 문턱에서 다시 좌절을 마주하는 구조다. 막 사업을 시작했거나 업력이 짧은 소상공인에게 전년도 매출이 낮은 것은 실패가 아니라 출발의 증거다. 그럼에도 이 기준은 심사의 핵심 잣대로 작동한다. 결국 정책자금은 지금 가장 절실한 시점의 소상공인에게는 닿지 못하고 일정 규모의 매출이 있는 사업자에게만 의미를 갖는다. 정책의 취지와 현장의 현실이 어긋나는 지점이다. 이 과정에서 소상공인이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좌절이다. “매출이 적어서 안된다”는 말은 단순한 기준 설명이 아니라 “지금은 기회를 줄 수 없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책자금의 본래 목적은 실패를 가려내는 데 있지 않다. 실패를 막아내고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 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기준이 명확하더라도 그 기준이 정책의 목적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재검토는 불가피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책자금을 관장하는 지역 일선 기관에서 느끼는 태도의 문제다. 제도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금융기관에서 떠밀려 이곳까지 왔다는 아이러니한 훈수, 마치 준비가 덜 된 개인의 책임처럼 느껴지는 말투와 시선은 소상공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자금을 요청하러 간 자리에서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 소상공인은 제도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신뢰마저 잃게 된다. 소상공인의 애환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임대료와 인건비, 재료비를 계산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매출이 없던 날의 한숨을 삼키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정책자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다시 도전해도 괜찮다는 사회의 신호이자 국가의 응답이어야 한다. 이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정책자금이 현장에서 왜곡되지 않도록 집행 과정 전반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와 감독에 나서야 한다. 고객 접점 기관의 주관적이고 획일적인 심사가 소상공인을 두 번 울리는 구조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정책자금은 심사의 잣대를 들이대는 제도가 아니라 사업의 특성과 가능성을 함께 살피며 길을 열어주는 제도여야 한다. 창구는 배제의 문턱이 아니라 상담과 안내의 공간이 돼야 하며 일선 기관은 관리자가 아닌 동반자로서 소상공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건네야 한다. 정책의 취지가 현장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제도, 그리고 집행하는 태도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소상공인 정책자금은 단순한 지원금이 아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사회의 약속이며 국가가 미래를 향해 조심스럽게 내미는 손이다. 한 사람의 삶을 지키고, 한 지역의 온기를 살리며, 국민의 일상을 받쳐 주는 이 정책이 차가운 심사가 아니라 가능성을 품는 제도로 작동하길 기대한다.

[아침을 열면서] 시간을 통과해 빛나는 ‘로빈 후드’

영화 ‘로빈 후드의 모험’을 떠올리면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보다 먼저 음악이 스친다. 어디선가 익숙하지만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그 선율. 활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듯 시작해 금관악기가 영웅의 등장을 알리는 웅장한 소리. 이 메인 테마는 오랫동안 영화의 상징으로 기억돼 왔다. 그러나 이 선율은 영화보다 먼저 유럽 정통 클래식의 언어로 이미 완성돼 있었다. 이 선율의 주인공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주로 ‘영화음악 작곡가’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영화계로 투신하기 전 이미 정통 클래식 작곡가로서 독창적인 언어를 완성한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주목받았다. 열한 살에 작곡한 발레 음악을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를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작곡가”라고 극찬했다. 20대에 발표한 오페라 ‘죽음의 도시’는 그를 유럽 음악계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 시기 작품들은 신동을 넘어 치밀한 오케스트라 운용 능력과 확고한 예술적 신념이 이미 무르익었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2024년 발매한 ‘베토벤 소나타 전곡과 소품집’ 첫 음반에 코른골드의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 Op. 11’을 수록했다. 이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며 확인한 것은 분명했다. 할리우드로 건너가기 전 이미 그의 극적 선율과 풍부한 표현력은 완성돼 있었다는 사실. 이 음악적 토대가 훗날 영화음악에서 그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됐다. 1930년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코른골드에게 운명적 전환점을 준 작품은 바로 ‘로빈 후드의 모험’이었다. 이 영화로 그는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지만 그는 오페라나 교향곡을 쓰듯 영화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악보로 바라봤고 등장인물마다 고유의 주제를 부여한 뒤 서사에 따라 변주했다. 이후 ‘씨 호크’ 등에서 펼쳐진 그의 음악 언어는 할리우드 영화음악 역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그는 유럽의 전통을 할리우드 스크린이라는 새로운 문맥 속에서 재편성하며 자신만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삶이 주는 감동은 격동의 시간 속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축적된 시간을 성실히 잇고자 했다는 데 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최근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 ‘골든’ 뒤에도 10년 가까이 인내한 한 음악가의 시간이 숨어 있다. 긴 연습생 생활의 도전, 그 과정에서 겪은 수많은 좌절과 치열한 음악적 훈련이 지금의 자리를 만드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남들에게는 실패처럼 또는 ‘낭비된 시간처럼’ 보였던 무수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결국 축적된 시간을 견뎌낸 단단한 창작자를 탄생시켰다. 우리는 흔히 지금의 위치로 자신을 재단한다. 앞서 있는지, 뒤처졌는지 숫자로 가늠하며 조급해한다. 그러나 코른골드의 삶이 보여주듯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다.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든 상관없다. 치열하게 몰입해 오늘을 살아낸 시간은 언젠가 의미 있는 흐름으로 쌓인다. 그 축적된 시간이 우리를 가장 강하게 빛나게 할 힘이다.

[아침을 열면서] 중요한 것은 ‘회복 계획’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건강 계획을 세운다. 체중 감량 목표를 잡고 주당 운동 횟수를 정하며 건강검진 일정도 체크한다. 목표로 하는 계획만 보면 올해는 유난히 몸을 잘 돌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계획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늘 빠져 있는 것이 있다. ‘회복’에 대한 계획이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분 중에는 새해를 계기로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가 통증 때문에 멈추는 경우가 꽤 많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운동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몸에 가해진 변화가 얼마나 갑작스러웠는지다. 오래 쉬다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면 몸은 그 변화를 바로 따라오지 못한다. 하루이틀 뒤 근육이 뻐근해지고 관절 주변이 욱신거리는 건 몸이 보내는 자연스러운 신호다. 우리는 몸을 늘 ‘사용’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더 움직이고 더 태우고 더 단련하면 건강해질 거라 믿는다. 하지만 몸은 버튼을 누르면 즉시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다. 사용한 뒤에는 반드시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근육과 관절, 신경은 천천히 적응하고 정리된다. 이 과정을 건너뛰면 통증은 쌓이고 계획은 중단된다. 새해에 유독 다치거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운동량을 갑자기 늘리거나 오랫동안 하지 않던 동작을 한꺼번에 반복하면 몸은 경고를 보낸다. 허리가 뻐근해지고 무릎이 욱신거리며 어깨가 굳는다. 그 신호를 ‘참고 넘길 일’로 여기면 몸은 더 큰 소리로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재활의학 전문의들은 우스갯소리로 환자들에게 “운동을 너무 안 하면 성인병이나 대사증후군으로 내과에 가고 너무 많이 하면 재활의학과에 오면 된다”고 말하곤 한다. 필자 역시 새해 초엔 거창하게 운동 계획을 잡아 1년짜리 헬스 이용권을 끊어보기도 하고 그것도 비싼 곳으로 가면 아까워 더 열심히 다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달력의 첫 장을 못 넘기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어떻게 하면 안 갈까 궁리하고, 그러다 또 한 번 가면 그동안 못했던 것의 보상작용으로 근육과 관절에 무리를 줘 또다시 운동을 쉬게 된 뼈아픈 경험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건강계획표에 회복을 넣지 않는다. 운동은 숫자로 남고 체중은 눈에 보이지만 회복은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은 계획이 아니라 공백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공백이야말로 몸이 제 자리를 찾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이 있어야 계획이 오래 간다. 새해가 되면 건강계획표를 빼곡히 채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칸쯤은 비워 두면 어떨까. 특별한 목표를 적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스스로에게 한 가지를 약속해 보면 좋겠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겠다는 것, 쉬는 시간을 게으름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다른 계획을 오래 지킬 수 있는 힘이 된다. 새해의 건강은 무언가를 더 많이 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덜 무리하고 조금 느리게 가는 데서 시작된다. 운동 계획을 세웠다면 그 옆에 회복의 시간도 함께 적어 보자. 어쩌면 올해 가장 중요한 건강 계획은 계획표 속 그 빈칸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침을 열면서] 잘못된 성과주의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늘 더 나아지기를 다짐한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겠다고, 더 빠르게 성과를 내겠다고 말한다. 또는 더 많이 숙고하고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매년 반복되는 결심 속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지만 그것이 조직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돌아볼 여유가 많지 않다. 한 해를 여는 이 시점에서 필자는 묻는다. 선함과 무능함의 사이, 그리고 목표만을 위해 과정이 생략되는 잔인함이 그것이다. 우리가 선함이라는 이유로 미뤄온 결정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감내한 혹독함은 과연 정당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과 구성원의 삶, 신뢰와 연대의 문제와 직결된다. 조직에는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한다. 하나는 선한 태도처럼 보이지만 냉철하지 못한 회피형 태도다. 갈등과 상처를 피하려고, 혹은 혹시 모를 불이익이 두려워 판단을 미루는 내면이다. 이런 마음은 선함처럼 보이지만 결국 행동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고민은 깊어지고 결정하지 않은 시간만 쌓인다. 다른 하나는 결과만 중시하는 태도다. 목표만 이루면 과정 속 부조리와 부당함은 눈감아도 된다고 믿는다. 설명 없는 지시와 무리한 요구도 목표 달성을 위한 불가피한 절차로 포장된다. 그러나 이는 결국 더 큰 비용과 후유증으로 되돌아온다. 결정하지 않는 선함은 판단의 공백을 만들고 결과만 중시하는 사고는 그 공백을 폭력적인 논리로 채운다. 설명은 사라지고 책임은 아래로 흐르며 체계는 사람을 보호하지 못한다. 요즘 규칙과 절차는 형식으로만 남고 목표와 성과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체계를 지탱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신뢰다. 과정을 신뢰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는 작은 부정이나 왜곡도 쉽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며 그 책임은 전가된다. 괴롭힘과 부당한 지시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질문은 방해가 되고 문제 제기는 불충으로 오해받는다. ‘목표를 위해서라면’이라는 말 아래 정도를 벗어난 지시가 정당화되고 책임은 가장 약한 개인에게 전가된다. 과정은 본래 숭고하다. 시간과 존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체계에서 과정은 편법을 덮는 형식으로 변질됐다. 겉으로는 절차가 지켜지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설명과 논의가 사라지고 책임 소재도 흐려진다. 이러한 체계는 잘못된 성과주의에서 시작된다. 숫자와 속도에만 집착하는 리더십은 사람을 수단으로 만들고 단기적 성과만을 좇는다. 성과는 남을지 몰라도 조직 내 신뢰는 빠르게 무너지고 그 회복은 훨씬 어렵다. 더 고통스러운 건 이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어느새 그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다. 부당함이 지시되고 그것이 ‘어쩔 수 없음’이라는 이유로 수행되며 누군가는 고립과 괴롭힘 속에 놓여 있다면 그 체계는 결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과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체계가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부당함이 발생할 때가 아니라 아무도 그것을 불편해하지 않을 때다. 그래서 필자는 온전한 과정을 지향한다. 과정의 숙고 끝에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며 끝을 흐리지 않으려 한다. 성과는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와 조직, 함께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무엇이 정당하고 존중받아야 하는지 성찰한다. 어려운 숙제이지만 그렇게 다시 성장하고 싶다. 우리는 어떤 성과를 이루려 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

[아침을 열면서] 흔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을사년(乙巳年) 끝자락에서 한 해를 돌아보니 이 시간은 유난히 많은 감정을 남긴다.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 전체가 여러 차례 크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국민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국내적으로는 국가 운영의 근간을 위협하는 혼란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불안과 분노, 허탈함을 느꼈다. 익숙하다고 믿었던 일상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한 해를 보내며 다시 배워야 했다. 그러나 혼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여전히 이른 아침 일터로 향했고 누군가는 가게의 불을 켜며 하루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가족의 하루를 조용히 지켜냈다. 사회가 크게 흔들릴수록 삶은 오히려 더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다. 2025년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상처는 분명했고 마음은 지쳤지만 삶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말 없이 이어진 하루들이 서로를 떠받치며 이 시간을 견뎌냈다. 국제사회 역시 격동의 흐름 속에 있었다. 전쟁과 갈등, 경제 불확실성이 이어지면서 세계는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 또한 한때 흔들렸지만 그 와중에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한국을 찾았고 한국은 다시 국제무대의 중심에서 조명받는 장면을 연출했다. 위기는 국가의 취약함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나라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2025년은 한국 사회의 불안과 저력을 동시에 드러낸 기사회생(起死回生),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경제 상황은 녹록지 않다. 국내 증시는 점차 회복 기미를 보이지만 체감경기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차갑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서민의 일상은 긴장의 연속이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숫자와 지표가 전하는 신호와 달리 삶의 현장은 조심스럽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섣부른 낙관도, 끝없는 비관도 아니다. 현실을 중시하며 서로를 소진시키지 않도록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태도다. 사회가 조금 더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사람의 속도를 존중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연말은 늘 평가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정리의 시간이기도 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 해가 실패로 남는 것은 아니다. 버텨낸 하루, 포기하지 않은 선택,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쓴 마음들 역시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한 해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지켜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함께 시간을 건너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다. 2025년 한 해를 보내며 다시 내일을 생각한다. 2026년 새해가 모든 것을 단번에 바꾸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공간은 분명히 남아 있다. 희망은 거창한 약속에서 오기보다 다시 ‘일어서겠다’는 조용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이해하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때 시간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다가온다. ‘흔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던’ 하루들이 쌓여 새로운 시간을 조금씩 밀어 올린다. 내일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건너온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시작은 이미 흐르고 있다.

[아침을 열면서] 연말을 채우는 합창교향곡

한 해가 저물 무렵이면 어김없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이른바 ‘합창교향곡’이 공연장과 방송을 채운다. 왜 우리는 매년 연말이 되면 이 곡을 찾는가. 단순한 관습 이상의 이유가 이 음악에는 분명히 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은 그의 나이 37세 무렵부터 구상돼 수십년에 걸쳐 다듬어진 끝에 1824년 53세에 완성됐다. 이미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지만 이 곡은 그의 고난과 열정을 담아 탄생했다. 이미 여덟 개의 교향곡을 작곡한 후에도 베토벤은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하고자 인간의 목소리를 교향곡 속에 담아 합창과 독창이 어우러진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로 9번 교향곡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목소리를 사용한 최초의 교향곡으로 음악사적 혁신을 넘어 환희와 인류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통과 갈등을 지나서야 느낄 수 있는 연대와 기쁨, 그것이 마지막 악장의 이 합창이 전하는 메시지다. 4악장의 장엄한 종결부를 특히 가사에 귀 기울여 들어 보기를 권한다. 나는 오래전 말버러 뮤직 페스티벌에 여러 번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 페스티벌은 미국의 버몬트 말버러에서 매년 여름 열리는 실내악 중심의 음악 축제다. 약 8주간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음악가들이 함께 생활하며 연습하고 멀리서 찾아오는 관객을 위한 음악회, 다양한 찾아가는 음악회로 진행한다. 그곳에서는 매년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에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예술감독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돌프 서킨, 전설적인 인물 알렉산더 슈나이더의 지휘, 그리고 필자가 존경하는 영원한 스승이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악장 펠릭스 갈리미어와 함께했던 말버러 페스티벌의 여름, 그 베토벤의 ‘코랄 판타지’는 늘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나에게는 삶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게 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4악장에 인용된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는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부쳐(An die Freude)’의 한 구절이다.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도 베토벤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환희’의 메시지를 음악으로 구현했다. 이는 불멸의 작곡가 베토벤의 극한의 예술적 도전이자 고통과 투쟁을 넘어 기쁨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려 하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한 해가 끝나갈 무렵 마음 한 편이 복잡하다. 성취를 돌아보는 동시에 놓친 기회와 아쉬움을 떠올리기도 한다. 우리는 여러 감정을 안고 12월을 맞이한다. 그런 시기에 베토벤은 묻는다. 지금의 음보다 더 즐거운 노래를 부르자고. 고독을 넘어, 갈등을 넘어 환희를 노래하고 함께 합창하며 다시 서로의 목소리를 듣자고. 특히 ‘합창’이라는 형식은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독창이 아닌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함께 만들어내는 음악. 각자의 음색과 높낮이는 다르지만 하나의 조화를 향해 나아갈 줄 아는 품격. 한 해의 끝자락, 이 코랄 판타지를 감상하며 조화와 환희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바란다. 올해도 어김없이 9번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그 선율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무엇이 내게 환희인지 생각하며 그 가치를 다시 음미하기 바란다. 혼자가 아닌 ‘합창’과 ‘함께’로 새해를 맞이하자.

[아침을 열면서] 올해도 고생한 몸에게 인사하기

12월이 되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올해의 결과’와 ‘내년의 계획’으로 향한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도 비슷하다. 올해 무엇을 이뤘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새해엔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하지만 정작 우리를 가장 성실하게 지탱해 온 존재, 바로 ‘몸’에게는 잘 묻지 않는다. 올 한 해 내 몸은 어떤 신호를 보냈고 나는 그 신호에 얼마나 귀 기울였는지 말이다. 12월은 유독 몸의 피로가 크게 느껴지는 시기다. 큰일이 없어도 어깨가 무겁고 이유 없이 허리가 뻣뻣해지는 것 같고 온몸이 쉽게 지친다. 날씨가 추워지면 자연스럽게 움직임이 줄고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몸이 쉽게 굳는다. 여기에 연말 특유의 촘촘한 송년회 일정과 정신적인 긴장까지 더해지면 그동안 무심히 넘겼던 작은 불편들이 하나둘 또렷하게 드러난다. 마치 ‘올해 참 많이 참고 버텼다’라는 사실을 몸이 조용히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몸은 신기하게도 특정 신호를 통해 내 몸의 문제를 끊임없이 알려준다. 예를 들어 통증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이고 열나는 것 역시 염증이나 감염을 알려주는 신호다. 피로를 느끼는 것도 몸에서 보내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는 점이다. “연말이라 바빠서 그래.”, “조금 쉬면 괜찮아지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그 경고를 뒤로 미루곤 한다. 하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는 대개 한 번만 울리고 끝나는 법이 없다. 잠깐의 뻐근함은 생활습관을 조정하라는 메시지이고 반복되는 통증은 과사용을 줄이라는 경고이며 어딘가 불편함이 계속된다면 ‘이제는 정말 돌봐 달라’는 간절한 부탁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몸에게 이렇게 많은 요구를 하면서도 그 요구를 들어주는 일에는 인색했다는 사실을 연말이 돼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12월은 단순히 한 해가 끝나는 달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쉴 자리를 찾아야 하는 시기다. 회의와 약속으로 채워진 일정, 성과를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 가족 행사가 이어지는 바쁜 흐름 속에서 몸은 더 빠르게 지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지친 몸을 돌아보지 않은 채 새해 계획만 세우는 일이 얼마나 무리한 행위인지 깨닫게 된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스스로에게 던져볼 작은 질문이 있다. “나는 올 한 해 나의 몸에게 무엇을 요구했고 무엇을 챙겨줬는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본다면 우리의 연말은 더욱 온전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잠시 몸을 쭉 펴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짧은 산책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몸은 변화된 신호를 보낸다. 무리했던 어깨는 부드러워지고 굳었던 허리는 따뜻함을 되찾으며 마음도 함께 편안해진다. 거창한 변화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동안 외면해 왔던 내 몸의 균형을 다시 세워주는 일이다. 올해도 고생한 몸에게 수고 많았다고, 이제 잠시라도 쉬자고 인사를 건네보자. 그리고 내년에는 좀 더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겠다고 약속을 해보자. 그 약속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더 단단하고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바쁘게 지나가는 이 12월에도 나를 가장 많이 지켜준 존재는 결국 나의 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바쁘다고 한없이 미뤄뒀던 건강검진 예약을 해본다.

[아침을 열면서] 오해의 시대, 진실을 지키는 법

세상은 너무나 똑똑해졌다. 뉴스는 쉴 틈 없이 흘러가고 단편적 의견은 전체를 설명하는 듯한 얼굴로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진다. 그러나 이 빠른 속도가 언제나 진실과 나란히 걷는 것은 아니다. 한 조각의 사실이 전체를 대신하고 생략된 맥락이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알수록 더 아는 것 같지만 실은 진실에서 멀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필자는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그동안의 경험을 잘 녹여 묵묵히 해내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큰 조직과 복잡한 구조 속에서 권한 밖이어서 ‘하지 못한 일’이 어느새 ‘하지 않은 일’로 오해되고 설명되지 않은 한계는 사라진 채 단편적 서사만 남아 빠르게 퍼져 나간다는 사실을. 하나의 단면에 불과했던 이야기는 각색되고 작은 그림자 하나는 의혹으로 자라 전체를 대변하는 듯 굳어졌다. 겉으로 드러난 내용은 간결하지만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층위가 있다. 사람들의 말은 그 층위를 가로지르지 않는다. 맥락은 사라지고 단순화된 ‘하나의 주장’만 남는다. 필자는 이 잔혹한 단순화의 힘을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며 때때로 깊은 충격과 낯섦을 느꼈다. 그것이 기사로 쓰여 세상에 흘러나오는 순간 오해는 더욱 견고해진다. 정정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냥 참고 지나가라”는 조언이 충돌하며 마음은 두 방향으로 흔들린다. 설명되지 않은 사정은 여전히 빈틈으로 남고 누군가는 그 사이에 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인다. 맞다고 단정된 ‘정보의 속도’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보다 빠르게 앞질러 간다. 그때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혹시 나 역시 누군가의 단편만 보고 ‘아, 알았다’고 성급히 판단한 적은 없었는지.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이야기와 해석으로 머릿속은 금세 포화 상태가 된다.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조차 누군가의 선택과 해석이 덧입혀진 결과일 때가 많다. 그래서 필자는 의도적으로 소음을 걷어내는 시간을 마련하려 한다. 책을 읽고, 창밖을 바라보고, 잠시 눈을 붙이며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시간. 이 여백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다시 판단하고 다시 서기 위한 내면의 바탕이다. 잠시 멈추는 일은 현실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정확히 보기 위한 준비에 가깝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백을 “무언가가 자라기 위한 조건”이라 했고 메리 올리버는 “모르는 공간에 있을 때 세상이 더 크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왜곡된 사실과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견뎌야 하는 시간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그 시간을 건너야만 다시 들여다볼 자리가 생긴다. 단정해버린 생각을 풀고 보이지 않는 결을 다시 살피는 그 느린 과정이야말로 진실에 다가가는 길이다. 덜 알수록, 잠시 멈춰 숨을 고를수록 우리는 스스로와 다른 이의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맞다고 단정된 말들이 너무 쉽게 떠다니는 시대에 나를 지키는 방법은, 어쩌면 ‘더 많이 알기 위해 애쓰는 일’보다 ‘모르는 상태를 잠시 견디고 새롭게 채우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서고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나만의 도리인 것이다. 그다음은 “행동하라.”

[아침을 열면서] 외교력은 곧 ‘관광력’

세계는 지금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외교력에서 찾는 시대에 들어섰다. 외교는 더 이상 정치·안보만을 담당하는 영역이 아니다.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 문화 확산, 산업 협력, 관광 수요까지 외교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구조가 이미 정착됐다. 한국 정부가 연이어 추진한 정상외교와 중동·유럽·아시아 각국과의 협력 강화, 그리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유치는 한국 외교의 새로운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20년간 K-콘텐츠는 한국을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화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문화원, 공관, 공공외교, 민간 교류 등 외교적 기반이 꾸준히 축적돼 있었다. 일본의 ‘쿨저팬’, 영국의 ‘브리티시 카운슬’처럼 선진국은 외교를 통해 국가 이미지를 만들고 이 이미지를 관광·산업 확장으로 연결해 왔다. 한국 역시 이러한 선진 외교 흐름의 중앙에서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관광은 본질적으로 ‘이미지 산업’이다. 사람들은 비행기표를 구매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어떤 나라를 좋아하고 어떤 나라에 가고 싶은지 선택한다. 이미지 형성의 최전선은 바로 외교다. 특히 올해 한국이 APEC 의장국을 맡으며 제시한 디지털 전환, 기후·에너지 협력, 청년·문화교류 확대 같은 주요 의제는 관광산업과도 긴밀한 연계성을 지닌다. 한국이 국제협력의 중심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 관광객에게는 한국이 더욱 매력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나라로 비친다. 단순한 국제행사 주관이 아니라 한국 관광산업의 신뢰도와 매력도를 강화하는 강력한 국가 브랜드 자산이 된다. 최근 한국 방문 외국인 관광객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2025년 1~9월 기준 약 649만명, 연말까지는 1천800만명 수준이 예상된다. 우리나라도 국가의 외교력이 한층 높아졌다. 그 상승세로 관광대국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전략적 대안이 필요하다. 첫째, 외교와 관광이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해외 공관을 단순 행정기관에서 벗어나 한국 관광·문화의 현지 허브로 전환해야 한다. 한류체험, K-푸드 클래스, 드라마 촬영지 홍보 등 현지인들이 한국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둘째, 콘텐츠와 관광을 연계하는 외교 전략도 중요하다. 드라마·영화 촬영지 투어, 케이팝 공연 연계 관광상품, 지역 축제와 해외문화원의 공동 기획 등은 콘텐츠의 세계적 인기가 실제 방문으로 이어진다. 셋째, 비자·항공 접근성 개선은 외교 의제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무비자 협정 확대, 복수비자 완화, 지방공항 직항노선 확보는 관광객 유입을 단숨에 증가시키는 핵심 요소다. 세계 관광강국은 모두 ‘항공·비자 외교’를 공격적으로 추진해 왔다. 넷째, 지역 관광의 국제화를 위한 지역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지역의 독창적 스토리를 가진 로컬 콘텐츠를 외교사절단 방문, 해외 언론 팸투어, 국제문화포럼과 연계하면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다. 관광객의 흐름을 수도권에서 전국으로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외교는 국가 홍보의 최전선이며 관광은 그 외교적 신뢰가 만들어낸 경제적 결실이다. 관광지는 많지만 외교적 신뢰가 약한 나라가 관광대국이 된 사례는 많지 않다. 한국이 진정한 관광강국으로 도약하려면 외교에서 시작해 관광으로 완성되는 국가 브랜드 전략이 핵심이 돼야 한다. ‘외교력이 곧 관광력’이며 ‘외교의 품격이 대한민국 관광의 미래’를 결정한다.

[아침을 열면서] 실내악이 알려준 ‘삶의 기술’

오랫동안 무대와 강단에서 활동하며 필자는 실내악이 음악가를 성장시키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과정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됐다. 실내악은 듣기와 반응, 그리고 함께 존재하는 법을 경험하게 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음악의 영역을 넘어 삶의 중요한 원리이기도 하다. 먼저 실내악은 ‘듣기’의 깊이가 중요하다. 일상에서 듣는다는 행위는 종종 형식적일 수 있다. 우리는 말을 들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상대의 감정과 맥락은 놓친 채 겉만 받아들이며 무심히 지나칠 때가 많다. 그러나 실내악의 무대에서는 겉핥기식 듣기로는 완성도 있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없다. 동료의 활이 지나가는 미세한 속도, 프레이즈를 시작하는 찰나의 호흡, 음악적 전환점의 미묘한 순간까지 모두 음악의 흐름과 완성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실내악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과 의도를 헤아려 반응하는 ‘진정한 듣기’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듣기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반응’이다. 실내악은 계획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연습에서 수없이 다듬은 부분도 무대에서는 전혀 다른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연습한 내용뿐 아니라 무대에서는 그 순간의 플러스알파, 즉 무대 위의 영감이 더해진다. 누군가 한 음을 조금 길게 잡으면 전체 호흡이 달라지고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나머지 파트가 그에 반응하며 조율에 들어간다. 이 과정은 누가 틀렸는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상황에 맞게 음악을 자연스럽게 완성하는 능력이 바로 실내악의 힘이자 매력이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예기치 않은 순간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형태와 깊이가 달라진다. 필자는 1991년 창단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현악4중주단콰르텟21과 실내악단코리아나 챔버뮤직소사이어티에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 실내악의 이런 원리를 점점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됐다. 해석을 놓고 논쟁하고, 의견이 엇갈리는 과정이 없으면 음악은 완성도가 없고 서로 맞춰지지 않은 해석은 설득력이 약하다. 실내악은 개인의 완벽함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다. 서로 다른 해석, 기질, 이질적인 내용이 어떻게 균형을 이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집단의 예술이다. 이 예술행위가 얼마나 큰 희열과 풍요를 경험케 하는지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이 배움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 실내악을 시작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의 파트에만 집중한다. 다른 파트의 내용이 아직 잘 파악되지 않고 음악의 전체 구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표현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조금씩 귀가 열리고 상대의 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그들은 한 곡을 ‘함께 완성한다’는 성취감과 실내악의 매력을 경험한다. 이 변화는 기술적 능력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 듣고, 이해하고, 반응하며, 함께 책임지는과정의 축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 실내악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실내악은 혼자서는 음악을 온전히 완성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잘 듣고, 충실히 반응하며,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반응할 줄 아는 능력. 이 세 가지는 실내악의 원리이자 매력이고 동시에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실내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은 함께 만드는 기쁨이다.

[아침을 열면서] AI 시대, 말 한마디의 무게

요즘 의학의 발전은 눈부시다. 인공지능(AI)은 의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쳐 환자의 영상 자료를 분석해 더 작은 병변을 찾아내고 빅데이터는 환자의 예후를 예측한다. 특정 분야에서 AI 진단의 정확도는 이미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AI의 기술과 역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의사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진료실에서 진단 결과를 알려주는 짧은 순간 의사의 말 한마디는 그 병을 대하는 환자의 마음을 완전히 바꾼다. “잘 치료해 보겠습니다”라는 말은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 다시 숨 쉴 틈을 주지만 “좀 더 지켜봅시다”라는 말은 때론 불안과 두려움으로 들리기도 한다. 똑같은 의학적 사실이라도 어떤 말로, 어떤 표정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환자의 마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의학이 과학이라면 진료실의 언어는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AI는 데이터에 기반한 객관적인 수치와 분석 자료를 제공해 주지만 ‘어떻게’ 말할지는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의사가 환자와 마주 앉아 눈을 보고 설명하는 일, 그 과정에서 생기는 침묵과 호흡, 공감의 시간은 알고리즘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괜찮습니다”라는 한마디의 온도, “잘 해내고 계십니다”라는 격려의 울림은 여전히 사람만이 전할 수 있다. 의사는 종종 말의 무게를 잊는다. 너무 많은 환자를 만나고 너무 빠른 속도로 결정을 내리며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말을 짧게 줄인다. 필자 역시 진료 직후에 회의가 있거나 외부 행사가 있을 때 가끔은 이 환자를 빠른 설명으로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음을 반성한다. 하지만 환자는 의사의 그 짧은 말 한마디에 온 감각을 기울인다. 그 말이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평가하는 말처럼 들릴 때도 있다. 그래서 말의 정확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말의 방향이다. 그 말이 환자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가, 아니면 다시 열게 만드는가. AI가 진단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면 의사의 역할은 오히려 더 본질적인 곳으로 향해야 한다. 기술은 병을 찾고, 데이터는 예후를 계산하겠지만 환자가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은 여전히 의사의 몫이다. AI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그 속도만큼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의사의 말 한마디는 기술의 시대에 더욱 절실해진다. 의사는 단순히 결과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게’ 돕는 사람이다. 병명보다 사람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데이터보다 감정을 먼저 읽어 내는 일, 그것이 앞으로 의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책무다. 차가운 데이터 사이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 그것이 미래에서 현재로 성큼 다가온 AI 시대에 의사가 지켜야 할 인간의 자존일지 모른다. 기계가 진단을 내릴 수는 있어도 환자의 마음에 닿는 ‘말’을 대신하진 못한다. 그 말의 온도, 그 침묵의 길이, 그 눈빛의 진심이 의학의 미래에서도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아침을 열면서] 경기도뮤지엄, 변화를 묻다

“제작비가 3천만원인데 수조 속에서 사람이 사는 장면을 찍으려면? 수중촬영팀과 장비가 필요한데... 이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는데.” 대학원 시절 독립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가장 자주 듣고, 했던 말이다. 시나리오 속 한 장면이 현실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끝자리에 ‘0’ 하나가 필요했다. 우리는 “발품 팔러 가자”는 자조 섞인 말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창작의 의도보다 숫자의 한계가 먼저 우리를 가로막던 시절이었다. 요즘 들어 그때의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후 필자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경기도 문화의 얼굴이자 가장 유망한 브랜드로 성장시킬 분야라 믿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 볼수록 제도와 구조의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통합 운영의 현실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분리 독립’의 필요성을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라 경기도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향한 애정 어린 과제로 받아들이게 됐다. 경기도립 박물관과 미술관의 역사는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개관한 경기도박물관과 2006년 문을 연 경기도미술관은 도 직영 사업소로 시작했지만 2008년 이후 순차적으로 8개 기관이 경기문화재단으로 위탁됐다. 8개의 도립 박물관·미술관을 동시에 위탁 운영하는 곳은 전국에서 경기도가 유일하다. 문제는 이 통합 운영이 효율을 앞세운 구조 속에서 각 기관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문화재단의 연간 예산은 총액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예술인 지원, 생활문화, 예술교육, 복합문화공간, 박물관, 미술관 운영까지 모두 소화해야 한다. 이 구조 속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이 수준 높은 전시를 기획하려 해도 예산은 늘 ‘분배의 논리’에 갇힌다. 작품 구입비는 턱없이 부족하고 전시는 소규모로 축소된다. 좋은 기획안이 나와도 초기 기획이 실행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홍보와 마케팅 인력, 예산 또한 중앙의 뮤지엄들과 비교할 수 없다. 블록버스터 영화와 독립영화의 차이에 비유하면 정확하다. 기획력이나 열정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와 자원의 차이가 만든 격차다. 세계적 관심을 모으는 K-굿즈의 흐름 속에서도 경기도 뮤지엄이 그 대열에 서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예산의 제약이 곧 기획의 제약으로, 다시 도민의 문화 향유 기회의 한계로 이어진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한 친구가 부모님이 해외에서 사온 과자를 친구들에게 두 개씩 나눠 주다 마지막 친구에게 “엇, 하나만 남았네”라고 말하던 장면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분배의 강박이 누군가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박물관·미술관 운영도 그와 다르지 않다. 정해진 틀 안의 통합 운영만으로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제 역할을 다하기 어렵다. 이제는 각 기관이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전문성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 행정적 효율이 아닌 문화적 창의성을 중심에 둔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느 나라를 여행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매력적인 장소 중 박물관과 미술관을 빼놓을 수 없다. 그곳은 도시의 품격이자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의 얼굴이다. 경기도립 박물관과 미술관 역시 도민의 자부심이자 경기도의 대표 브랜드로 기억될 수 있어야 한다. ‘분배식 예산 중심의 운영’을 반복할 것인가, ‘창의와 자율의 문화기관’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제는 선택의 시간이다.

[아침을 열면서] 청년 미래 삼키는 ‘욕망의 덫’

캄보디아에서 한국 청년들이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에 연루된 사건은 단순한 ‘해외 범죄 뉴스’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그 가치의 기반을 잃어버렸는지를 보여주는 치명적 징후다. “월 수백만원 보장”, “숙식 제공”, “단순 업무”라는 달콤한 홍보문구는 사실상 감금과 협박, 폭력이 일상화된 범죄의 덫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청년들이 ‘피해자’로 끌려갔지만 시간이 지나며 또 다른 친구와 지인을 모집하는 ‘범죄의 매개자’가 됐다는 사실이다. 이 비극적 전환은 단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돈의 속도’만을 성공의 척도로 삼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문제의 근원은 무지나 순간의 실수가 아니다. 일부 청년 세대들은 반복된 좌절과 구조적 박탈을 겪으며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체념이 내면화돼 있다. 정직한 축적의 시간은 조롱받고 실력의 성장보다 ‘단기간의 역전’이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이 허탈감과 절망의 균열 사이로 범죄조직은 파고들었다. “친구 한 명의 삶을 20만원에 거래했다”는 언론 보도는 돈이 도덕을 대체하고 인간관계가 ‘가격표’로 환산되는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성공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존경받는 리더, 기업가, 예술가들이 남긴 발자취를 돌아보면 그들의 성취는 어느 날 ‘운 좋게’ 얻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견딜 수 없는 시간, 버텨야 하는 불확실성, 기여와 신뢰의 축적이 기반이었다. ‘정당한 축적’이야말로 사회적 신뢰를 탄탄히 하는 토대이며 이것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약자와 청년 세대다. 노력 없는 부(富)가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사회는 신뢰 기반을 잃고 공동체는 도덕적 붕괴를 낳는다.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성공이란 무엇이며 인간다운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청년들이 정당한 노력을 통해 삶의 기반을 쌓을 수 있는 사회는 제도만으로 부족하다. 그것은 사회가 ‘무엇’을 가치로 여기는지에 대한 집단적 선택이 있어야 한다. 경쟁을 부추기고 스펙을 강요하며 결과만 평가하는 문화 속에서 ‘정직한 시간의 축적’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도(正道)를 걷지 말라. 돌아가는 길이 더 빨리 성공한다”는 왜곡된 신호의 결과를 보여 줬다. 달콤한 유혹은 언제나 감미로운 말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끝에는 존엄의 상실이 기다린다. 돈은 잃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무너진 양심과 관계는 회복이 어렵다. ‘어떻게 돈을 버는가’보다 ‘왜 그것이 삶의 기반이 되는가’를 일깨워야 한다. 교육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을, 경쟁이 아니라 의미를 다뤄야 한다. 사회가 신뢰의 토대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비극은 언제든 반복된다. 캄보디아의 사건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깊은 병폐를 드러내는 경고장이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정당한 삶의 방향 선택이 중요하다. 유혹의 돈은 순간이지만 쓰디쓴 대가는 평생을 따라온다. 이 경고를 외면하면 수많은 청년이 욕망의 덫에 걸려 파멸로 추락할 것이다. 모두가 과도한 욕심의 굴레를 벗고 정직한 삶의 가치를 다시 새겨야 할 때다.

[아침을 열면서] 정화된 밤, 어둠 속 피어나는 빛처럼...

음악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대신 이야기해준다. 한 음 한 음이 마음의 결을 따라 흐를 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주 잊고 지냈던 다양한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랑과 상실 같은 감정이 서로 교차하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며칠 전 필자는 20세기 초의 걸작 아널드 쉔베르크의 ‘정화된 밤’을 연주할 기회를 가졌다. 이 곡은 독일 시인 리하르트 데멜의 시 ‘두 사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달빛 아래 숲길을 함께 걷는 한 남녀의 마음속에서 교차하는 절망과 희망, 죄와 용서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음악으로 그려낸다. 특히 여자가 “나는 당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털어놓는 장면에서는 낮게 울리는 현악기의 떨림이 숲을 차갑게 감싸며 긴장감을 높이고 남자가 그녀를 안으며 용서를 전할 때는 화성이 점차 밝아지며 첫 새벽빛이 숲 사이로 스며드는 듯한 따스한 온기를 전한다. 이러한 순간마다 우리는 단순히 시 속 장면을 떠올리는 것을 넘어 인간 내면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함께 느끼게 된다. 작곡가 쉔베르크는 시 속 이야기만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흔들림과 구원의 순간을 그의 음악 속에 깊이 녹여낸 셈이다. 이 작품은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조성의 경계를 넘어 다채로운 화성과 색채감으로 음악적 깊이를 한층 확장한다. 쉔베르크는 선율과 화성을 유기적으로 엮어 전통적 음악 조성의 틀을 뛰어넘고 곡의 흐름에 따라 감정이 섬세하게 움직이도록 작곡했다. 낮게 시작하는 조용한 선율에서부터 긴장감이 서서히 쌓이는 전개,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의 화성 변화까지 모든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되며 음악 속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곡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음악 속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며 단순한 감상을 넘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쉔베르크의 작품은 듣는 이를 음악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며 순간순간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필자는 코리아나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얼마 전 동료들과 함께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여러 번 연주했던 곡이었지만 이번에는 특히 새롭게 다가왔다. 연주를 준비하며 음 하나 하나와 음 사이의 숨결, 그리고 연주자들의 작은 감정선까지 함께 나누며 이 곡이 단순한 기술적 과제를 넘어 인간의 마음을 나누는 음악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음악이 단순히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넘어 마음의 울림과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정화된 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절망 속에서도 서로를 통해 빛을 발견하고 어둠을 지나 점차 정화돼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데멜의 시가 인간의 약함과 불안을 솔직하게 고백했다면 쉔베르크의 음악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용서와 구원의 가능성을 노래한다.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와 좌절을 경험하며 살아가는데 이 곡은 그런 순간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희망을 찾고 마음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전해 주고 있다.

[아침을 열면서] 도시와 섬 잇는 의료

바다를 건너 섬에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묘한 울림을 준다. 배가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나아갈수록 도시는 점점 멀어지고 바다 풍경이 익숙해질 무렵이 되면 섬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난다. 바람은 부드럽고 공기는 맑다. 하지만 그 고요한 풍경 속에도 채워야 할 빈틈이 있다. 바로 전문 의료에 대한 접근성이다. 섬에는 대체로 보건지소가 있고 규모가 더 작은 섬에는 보건진료소가 있다. 보건지소에는 공중보건의와 간호사가, 보건진료소에는 의사 없이 간호사만 근무하며 주민들의 기본적인 건강 관리를 담당한다. 이를 통해 혈압과 혈당을 확인하고 예방접종이나 간단한 처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문 진료가 필요한 순간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도시의 병원으로 나가기 위해 서해 최북단 5도에서 하루 1~2회 운항하는 정기선을 타고 나서는 일은 쉽지 않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의 경우 닥터헬기를 띄우기도 하지만 이 또한 기상조건이나 고비용 등으로 제한적 운용이 불가피하다. 자연히 통증이나 증상이 있어도 참고 지내는 경우가 많고 치료의 적기를 놓치는 일도 적지 않다. 이런 이유로 대학병원 의료진의 섬 봉사활동은 단순한 자원봉사가 아니다.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봉사는 진료의 차원을 넘어 섬 주민들에게 “도시와 연결돼 있다”는 신뢰감을 주는 일이다. 의료진이 찾아와 상태를 살피고 다음 단계의 치료를 연결해주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료 생태계를 만들어간다. 필자는 운좋게도 병원 사회공헌지원단의 일원으로 10여년간 섬 의료 봉사를 수행하고 있다. 인하대병원은 대청도의 주치병원으로서 매년 몇 차례씩 방문 진료를 하고 있고 어르신들에게 관절주사나 영양수액제, 투약 등을 제공한다. 섬에서의 봉사는 의료인의 초심을 일깨운다. 병을 고치는 기술만으로는 환자의 삶을 지탱할 수 없다. 의료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이며 그 안에는 공감과 연대가 있다. 섬 봉사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도움’보다 ‘함께함’이다. 섬의 의료 현실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균형의 축소판이다. 대도시에 집중된 의료 자원, 전문 인력의 편중, 의료 접근성의 차이는 지역 간 건강 격차로 이어진다. 수도권보다 지방, 대도시보다 소도시 주민들의 기대수명이 더 낮은 것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특히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섬 지역에서는 단순한 의료 지원을 넘어선 지속적인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인프라가 충분히 작동하려면 의료인뿐 아니라 행정적 지원, 지역사회의 관심, 그리고 보건정책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 막연히 공기가 맑은 시골지역에 살면 장수한다는 것은 먼 옛날의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다. 최근 대학병원과 지역 보건지소를 연결하는 원격화상협진이 확대되고 있다. 대학병원 교수가 영상으로 섬의 응급환자나 중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현지 의료진과 함께 치료방법을 상의하고 결정하는 체계는 시공간의 한계를 크게 줄인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공지능 기반 진단 지원, 이동형 검사 장비, 응급 이송 체계 등과 연계돼 ‘섬에서도 끊김 없는 진료’가 실현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문득 생각했다. 섬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결코 외딴곳이 아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그 거리는 바닷길보다 좁다. 의료의 역할은 병을 고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과 지역, 도시와 섬을 잇는 다리이자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섬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 남긴 울림은 단순한 봉사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공동체의 방향, 그리고 의료가 나아가야 할 진정한 가치였다.

[아침을 열면서] 예술의 자유와 낭만합격

예술가는 왜 자유를 원하는가. 권력이나 시장의 요구에 맞추는 순간 예술은 숨을 잃는다. 자유는 존엄이며 허용된 표현만 허락되는 사회는 예술을 장식품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국가는 예술을 길들이려 한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재정을 풀고 성과와 관객 수를 들이대며 관리 가능한 창작만 선호한다. 그럼에도 지원은 필요하다. 시장만으로는 예술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지시가 아닌 기반이다. ‘배고파야 예술가’라는 신화와 ‘상업적 성공만이 지속가능’이라는 통념은 창작을 왜곡한다. 자유와 열망으로 무명 시절을 버틴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예술이 존재한다. 씨 뿌림과 열매 맺음의 과정은 생략할 수 없다. 정책은 이 낭만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창작을 뒷받침해야 한다. 얼마 전 ‘낭만합격’이라는 신조어를 들었을 때 잠시 생각이 멈췄다. 단순히 시험에 합격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역시 설명을 듣고 나니 감흥의 다른 말이었다. 과정의 짜릿함, 나만의 추구, 현실적 기준보다 감성을 중시, 즉 ‘멋있다’는 뜻을 담은 새로운 표현이었다. 경쟁과 압박 속에서도 자신만의 속도를 잃지 않으려는 세대의 감각이 담겨 있었다. 예술과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답과 효율만 좇는 방식으로는 결코 ‘낭만합격’할 수 없다. 1980~90년대 초반 홍콩 누아르에 열광하고 90년대 노상에서 퍼지는 인기 가요 속에서 우리는 시대의 감각을 공유했다. 90년대 중반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찬란한 시작, 한류 열풍,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연대, 거리를 밝힌 촛불의 기억은 모두가 주인공이 된 경험의 장이었다. 공동체가 하나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자유의 열기가 만든 감동이었다. 낭만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늘 고독했다. 오늘날 세계적 예술가들도 무명과 결핍 속에서 버텼다.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다면 오늘의 성취도 없었을 것이다. 정책은 그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중앙은 원칙을 세우고 지자체는 다양성을 살려야 한다. 즉, 중앙·광역·시·군 정책이 지역 특수성을 존중하되 큰 틀에서 방향을 함께하지 않으면 새로운 물결은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정책은 중앙·지자체뿐 아니라 현장과 행정, 창작자와 사회가 함께 호흡하는 생태계로 작동해야 지속될 수 있다. 화려해 보이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현주소는 참담하다. 영화, 드라마, 연극, 전시, 신인 발굴과 꾸준한 육성 프로그램의 결핍 속에서 투자 중단과 예산 삭감, 창작자 부당 보상이 만연하다. 오리지널 지식재산권(IP)의 부족과 지원의 불균형 속에서 예술은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직된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 ‘멋있을 수 있는 기회’, 즉 낭만을 상상하고 펼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정책은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 예술의 자유와 낭만을 현실에 담아내야 한다. 대담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살아야 낭만이 숨 쉬고, 낭만이 숨 쉬어야 자유가 의미를 가진다. 정책이 그 숨결을 보호할 때 다음 세대는 말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또 하나의 낭만합격을 지나고 있었다.”

[아침을 열면서] 고향의 멋, 맛

풍요로움을 나누는 추석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고 가족과 정을 나누는 명절은 단순한 연휴가 아니다. 살아온 뿌리와 정체성을 되새기며 세대 간의 기억과 문화를 잇는 소중한 시간이다. 고향의 멋과 맛은 그저 음식이나 풍경만은 아니다. 세월을 견뎌온 삶의 방식과 전통,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송편을 빚던 부엌의 풍경, 지글지글 전 부치던 냄새, 정성껏 차려진 차례상에는 조상의 지혜와 부모 세대의 손맛이 배어 있다. 고향의 맛은 단순한 미각의 향수가 아니라 가족의 기억이자 지역의 정체성을 잇는 문화 자산이다. 하지만 도시화와 생활 방식의 변화로 전통적인 명절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명절은 간소화되고 고향 대신 여행지를 택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추석의 의미가 점점 흐려진다. 소중한 고향의 명절을 어떻게 지키고 이어갈 것인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역의 전통문화와 향토자산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주민과 방문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지역 박물관, 문화센터, 마을 공방 등을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닌 ‘체험형 문화 플랫폼’으로 운영하고 귀향인들이 고향문화를 체험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추석 연휴를 향토 음식 만들기, 마을 음악회, 세대 공감 토크 같은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연계한다면 고향은 단순히 ‘들렀다 가는 곳’을 넘어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변화할 수 있다. 고향을 찾는 귀향객들이 자연스럽게 지역의 홍보대사가 되도록 유도하는 전략도 중요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 이벤트, 체험 후기 공유, 지역 특산물 소개 등 온라인 홍보 콘텐츠를 통해 고향의 멋과 맛은 확산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 소비를 넘어 지역경제, 관광산업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주민은 일상의 삶 속에서 전통을 지키고, 고향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명절이면 돌아오는 귀향객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마을의 변화를 함께 이야기하며, 정을 나누는 환대는 고향의 품격과 추억을 소환하는 중요한 요소다.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지역 공동체 스토리를 기록하고 나누는 일은 고향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동력이다. 고향을 찾는 방문객의 자세 또한 중요하다. 단순히 음식과 풍경을 즐기는 관광객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정체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공감하는 손님’이 돼야 한다. 마을을 거닐며 과거의 흔적을 느끼고 어른들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추억을 공유하는 경험은 고향과의 정서적 유대를 더욱 깊게 만든다. 자신이 경험한 고향의 빛을 사진과 글로 남기고 온라인을 통해 나누는 것도 고향 사랑의 한 방식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추석은 그 둘을 연결하는 시간이다. 고향의 멋과 맛을 지키고 전하는 일은 모두의 몫이다. 올 추석, 고향의 멋과 맛을 온전히 느끼고 그 가치를 함께 지키는 작은 실천을 시작하자. 향수(鄕愁)는 상(床) 위에 차려진 음식만이 아니라 고향을 잇는 마음도 담겨 있다.

[아침을 열면서] K-클래식의 현재와 미래

한국의 클래식은 K-클래식으로 일컬어지며 최근 국제콩쿠르에서 가장 주목받는 국가가 한국이다.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 보고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적으로 총 58회의 콩쿠르가 열렸고 79개의 1등 상 중 한국 국적 수상자가 17%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각각 9%)을 제치고 단연 가장 높은 비중이며 1·2·3등을 포함한 상위 입상자를 합산해도 한국이 14%로 중국(12%)과 러시아(8%)를 앞선다. 국제콩쿠르의 한국 수상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입상할까. 부모님의 뜨거운 조기교육열에 힘입어 어린 나이부터 꾸준히 힘든 연습을 하고 국내 콩쿠르에서 다수의 입상 경력을 쌓는다. 어린 나이에 국제콩쿠르에서 입상할 정도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음악 영재는 동기 부여가 잘돼 있어 연습을 힘들어 하지 않을까. 안데르스 에릭슨 교수는 베를린음악학교 바이올린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바이올린 독주자가 될 ‘최우수학생집단’과 그다음 집단인 ‘우수’, ‘양호’ 집단으로 나눠 연구했다. 놀랍게도 세 집단 모두 연습을 힘들어 했으며 동기 부여나 선천적 재능의 차이는 없었다. 오로지 차이는 혼자 하는 연습 시간뿐이었다. 최우수학생집단은 18세까지 평균적으로 7천400시간, 20세까지 1만시간의 연습을 했다. 시간을 단축해주는 지름길도 없었고 적은 연습량으로 전문가 수준에도 달한 ‘천재’도 없었다.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연주자들은 20세까지 1만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연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콩쿠르에 우승하면 세계적인 연주자로서의 삶은 보장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저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소설가를 “링에 올라오는 것은 쉬워도 오래 버티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하며 직업소설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자격’이 요구된다고 했다. 젊은 음악가가 국제콩쿠르라는 링에 올라서는 것은 소설가보다 훨씬 어렵지만 일단 링에 올라가면 소설가보다 버티기는 좀 더 수월해 보인다. 하지만 20, 30년전 콩쿠르에 등용된 수많은 음악가 중 세계적인 연주자로 활동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음악가에게도 버티는 데는 어떤 종류의 ‘자격’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필자는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교수의 저서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서 답을 찾았다. 그는 역량을 자원(Resources), 프로세스(Process), 우선순위(Priorities)로 나눴다. 음악가에게 자원은 재능, 선생님에게 배운 지식, 콩쿠르 우승 경력 등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로세스란 어떻게 생각하고, 과거에 배운 음악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을 더하며, 다른 연주자들과 교류하면서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예종 총장을 지낸 김대진 교수가 가리즈피아노콩쿠르 심사를 회고한 영상이 있다. 4명의 한국 연주자와 4명의 유럽 연주자가 연이어 나왔는데 한국 연주자들은 연주 능력은 탁월했으나 같은 복장을 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연주한 반면 유럽 연주자들은 서로 다른 복장을 하고 개성 있는 연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다. 한국 연주자들이 배운 그대로의 ‘모범답안’ 수준의 연주를 개성 없이 한 셈이다. 배운것에 더해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프로세스를 개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삶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결정을 내리는 우선순위도 필요하다. 어떤 연주자에게는 음악의 완성도나 연주 자체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우선순위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연주자에게는 관객의 환호와 호응, 혹은 연주료 등이 더 중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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