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공사장 빠진 중대시민재해

도심지 공사장을 지날 때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은 단순한 심리적 반응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공사 현장은 다양한 위험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보행자와 통행인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작용한다. 도심지 공사장은 시민이 생활하는 공간과 바로 연결돼 있다. 공사 중 위험은 언제든 밖으로 번져 지나가는 시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지난해 9월 안양시 한 공사장에서 비계 구조물이 차도로 쓰러졌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 순간 도로나 보도를 지나던 시민이 있었다면 큰 인명 피해로 이어졌을 것이다. 시민은 이런 사고가 나면 당연히 중대재해처벌법상 ‘중대시민재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현행 법 체계상으로는 인정되기 어렵다. 중대시민재해란 특정 원료나 제조물, 공중이용시설 또는 공중교통수단의 설계·제조·설치·관리상의 결함으로 인해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경우를 말한다. 쟁점은 그 시설이 아직 공사 중이었는지 아니면 시민이 실제로 이용하고 있었는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공사 중인 건물에서 크레인이 쓰러져 인근 도로의 차량을 덮쳤다고 치자. 시민이 사망했더라도 해당 시설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에 공중이용시설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일부는 공중이용시설은 본래 시민이 이용할 목적으로 설치되는 것이므로 공사 중이라도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행 시행령은 완공된 시설물을 기준으로 정하고 있어 공사 중인 경우는 배제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민이 피해를 입었는데도 중대시민재해로 인정되지 않는 모순이 생긴다. 이는 정부가 시행령에서 중대시민재해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정했기 때문이다. 범위를 좁히면 정부와 기관이 져야 할 관리·감독 책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법이 책임을 피하는 수단으로 쓰인다면 제도에 대한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공사 중 발생한 위험이 공사장 내부를 넘어 외부로 확산돼 시민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중대시민재해로 규정할 수 있도록 법률을 보완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법이라면 책임을 줄일 게 아니라 보호 범위를 넓혀야 한다.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또 다른 참사가 발생했을 때 법은 시민을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자춘추] 詩가 지닌 동력적 힘

시의 역사는 주나라에서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시의 기능은 ‘국혼성환(國魂醒喚)’으로 나라의 혼을 불러 일깨우고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 정신을 승화하며 이상적 생활을 하게 하고 학문을 풍부하게 한다. 또 사회 풍속을 온화하게 바꾸는 역할을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살찌우고 아름답게 꾸미기도 한다. 또 시는 크게 인간 성정을 도야(陶冶)하고 인생을 열어 인도한다. 한 수의 시는 하나의 화려함에 비해 궁전과 같음이 있고 하나의 광선이 사면으로 쏘아 여러 면을 뚫는 것과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읊으면서 머물게 하고 찬상하면서 그치지 않게 한다. 특히 한시에는 현대시에는 없는 간결하고 진경한 리듬이 있어 그것이 독특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즉, 시란 뜻을 분기시키기 위해 사물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공공의 정신을 높여 인간관계를 좋게 하며 사회를 올바르게 비판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부모를 섬기고 국가와 사회 또는 기업 등에 종사하는 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고 보지도 듣지도 못한 수많은 초목이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도 시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수사학의 정형으로 문장 능력을 길러주며 지식을 더 넓고 깊게 습득해 사람의 교양을 높여주기도 한다. 논어에는 시와 관계되는 말이 스무 군데 등장한다. ‘시를 300수 읽은 사람에게는 사특한 생각이란 없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20세기의 석학이자 역사학자인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는 “서구의 기계문명은 극에 달하고 정신문명이 세계를 지배하는데 그 광명이 동방에서 비치리라”고 했다. 이제는 물질문명에 염증을 느낀 서구인을 위시해 아프리카, 남미인들까지 노도와 같이 밀려와 동양문화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영국, 프랑스는 ‘시의 날’을 정해 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국가적으로 시를 장려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시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천자춘추] 한약재, 처방과 시중의 차이점

최근 건강 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약재를 활용한 민간요법이나 자가 건강관리법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주변에서 “○○을 달여 먹으면 몸에 좋다”, “시장이나 마트에서 한약재를 사서 끓여 먹어도 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한의원에서 한의사가 처방하는 한약재와 시중에서 판매되거나 건강기능식품에 들어가는 약재는 관리 체계와 사용 목적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식약공용약재라는 제도가 있다. 이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식품과 의약품 양쪽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농산물로 동일한 약재라 하더라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적용되는 기준과 관리 수준이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한약재를 임의로 복용하는 경우 기대한 효과를 얻지 못하거나 오히려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한의원에서 사용하는 한약재는 의약품용 한약재로 분류된다. 해당 한약재는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우수의약품 제조·관리 기준) 시설을 갖춘 제약회사에서 생산되며 원료의 재배 환경부터 수확, 가공, 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엄격한 관리가 이뤄진다. 또 원산지 확인, 성분 분석, 잔류 농약 및 중금속 검사, 이물 혼입 여부 검사 등을 거쳐 식약처의 기준을 충족한 규격품만이 의료기관에 공급된다. 반면 일반 시장이나 마트에서 판매되는 약재는 대부분 식품용 농산물에 해당한다. 이는 식품으로 섭취하는 것을 전제로 관리되기 때문에 의약품과 같은 수준의 성분 함량, 약효의 균일성, 치료 목적에 대한 안정성까지는 보장되지 않는다. 외형상 같은 약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 품질과 관리 기준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식약처는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의료용 한약재만을 한의원과 한방병원에 공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한의원 역시 법적으로 허가된 의료용 한약재만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한의료기관은 제약회사 등 공신력 있는 유통 경로를 통해 한약재를 공급받고 있다. 이러한 관리 체계는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장치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많은 한약재가 식약공용약재로 유통되면서 일반인이 이를 의약품과 동일하게 인식하고 임의로 복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체질, 증상, 복용량을 고려하지 않은 한약재 복용은 효과가 미미할 뿐 아니라 위장 장애, 알레르기 반응 등 부작용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만성질환을 앓고 있거나 다른 약물을 복용 중인 경우에는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일부 건강기능식품을 맹신하기보다는 성분과 용도를 꼼꼼히 확인하고 필요할 경우 전문가의 상담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천자춘추] AI가 여는 존엄한 돌봄의 시대

대한민국이 65세 이상 인구 1천만명 시대를 맞이하며 초고령사회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섰다. 누군가는 이를 ‘돌봄의 절벽’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지만 위기 속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따뜻한 기술혁명의 서막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에이지테크(AgeTech)’가 여는 새로운 돌봄의 지평이다. 과거의 노후가 육체의 쇠락과 함께 이동의 자유를 잃는 과정이었다면 미래의 노후는 '피지컬 AI'라는 날개를 단다. 사용자의 의도를 근육 신호로 파악해 걷는 것을 돕는 ‘입는 로봇(웨어러블 로봇)’은 어르신들에게 다시금 산책할 수 있는 자유를 선물한다. 침대에서 휠체어로의 이동을 돕는 이승 로봇과 배설을 돕는 케어 로봇은 가장 내밀하고 힘겨운 순간에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또 가장 사적인 공간인 욕실이나 침실에서는 ‘온디바이스 AI’가 보이지 않는 수호자가 된다. 영상을 외부로 전송하지 않고 기기 자체에서 위험을 감지하는 이 기술은 감시의 공포 없이 24시간 안전을 지키며 어르신이 요양시설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한다. 혹자는“차가운 기계가 어떻게 따뜻한 돌봄을 대신하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술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 생성형 AI가 탑재된 반려 로봇이 어르신의 말벗이 돼 외로움을 달래고 치매를 예방하는 동안, 그리고 로봇이 고된 육체노동을 대신하는 동안 인간 돌봄 인력은 비로소 땀방울을 닦고 어르신과 눈을 맞출 여유를 갖는다. 이것이 바로 기술과 인간이 공존하는 ‘돌봄혁신’의 본질이다. 기술이 육체의 짐을 덜어줄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랑과 정서적 교감이라는 돌봄의 ‘뿌리’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혁신은 신뢰 위에서만 가능하다. 나의 민감한 건강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데이터는 각자의 기기에 남기고 지식만 공유하는 ‘연합학습’ 기술은 안전한 돌봄 생태계의 기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술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향하는 방향을 고민해야 할 때다. 기술은 노약자의 불편한 몸을 일으키는 ‘날개’가 되고 그 여유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사랑은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돼야 한다. 경기도의 ‘사람중심경제(휴머노믹스)’ 실천처럼 기술의 효율성과 인간의 존엄성이 균형을 이루는 세상. 인공지능(AI)이 어르신의 밤길을 밝히고, 사람이 그 곁을 따뜻하게 지키는 존엄한 돌봄의 시대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천자춘추] 반려동물,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인류 역사상 가축화가 가장 빨리 시작된 동물은 소나 돼지가 아닌 개다. 수만년 전 개의 가축화는 늑대로부터 가장 먼저 시작됐으며 이후로 야생 고양이로부터 고양이의 가축화가 이뤄졌다. 가축으로 시작된 개와 고양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외모가 귀엽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애완동물로 불리게 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동물을 단순히 기르는 대상이 아닌 가족이나 친구 같은 존재로 인식하면서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현행 동물보호법상 반려동물 정의는 반려 목적으로 기르는 개, 고양이, 토끼, 햄스터, 기니피그, 페럿 등으로 규정돼 있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와 함께 개 식용문화가 이뤄져 왔고 특히 복날에는 몸 보신을 위해 먹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24년 ‘개 식용 종식법’이 통과되면서 2027년부터 개 식용에 대한 처벌이 시행될 예정으로 해당 문화는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식용을 목적으로 키우는 개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견으로의 인식 전환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반려인구는 1천500만명으로 5명 중 1명이 반려동물을 양육하고 있으며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반려인구 증가는 1인 가구의 증가와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 구조 변화, 그리고 외로움, 우울감, 스트레스 해소 등 정서적 안정에 대한 수요가 맞물린 결과로 해석된다. 하지만 반려동물 양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과 노력, 비용 부담, 소음과 배설물 문제, 행동 문제 등을 감당하지 못해 양육을 포기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기동물 문제 역시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는 가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버리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반려동물을 입양한 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때마다 버려서는 안 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반려동물을 입양하기 전에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반려동물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사정에 따라 유기가 결정된다면 한순간에 유기동물로 전락해 사회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26년에는 반려동물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되기 위해 반려인의 신중한 책임 의식이 더욱 강화됐으면 한다.

[천자춘추] 공자∙소크라테스 메타인지로 통하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인류 정신사의 거대한 전환점이 됐던 기원전 500년을 전후한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Age)’라 명명했다. 이 시기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인류의 스승이 탄생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인(仁)’을 외친 공자와 아테네의 민주정 속에서 ‘진리’를 탐구한 소크라테스가 그 주인공이다. 만약 시공간을 초월해 이 두 거인이 2026년의 대한민국에서 조우한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두 성인이 도달한 지혜의 정점은 놀랍게도 하나의 교차점에서 만난다. 바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파악하는 능력, 현대 심리학이 정의한 ‘메타인지(Metacognition)’다. 정보의 홍수를 넘어 바야흐로 ‘AI의 해일’이 덮치는 이 시대에 두 스승을 소환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손바닥 위 스마트폰으로 인류의 모든 지식에 접속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안다’는 가장 위험한 착각에 빠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광장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의 신탁으로 귀결된다. 동양의 공자 역시 논어에서 제자 자로에게 지식의 본질을 설파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곧 지혜다.” 공자는 자신의 지적 한계를 명확히 긋고 그 경계선 위에서 끊임없이 배우려는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 그것이 곧 지혜의 출발점이라 봤다. 이 두 성인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메타인지의 결핍은 개인의 성장을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소통의 단절과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된다.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건네는 조언은 간명하다. “검색을 멈추고 사색하라.” 챗GPT가 정답을 줄 수는 있어도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소크라테스처럼 끊임없이 “왜”라고 묻고 공자처럼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겸손한 태도로 배움을 청해야 한다. 메타인지는 공감의 도구이자 거짓 정보에 휘둘리지 않게 하는 이성의 방패다.

[천자춘추] 생태적 실용주의

“로켓맨(Rocket Man)!”, “미치광이 늙다리(Dotard)!” 2017년 봄, 태평양을 가로지른 북미 간 원색적인 비난이 전쟁의 전주곡처럼 한반도 상공을 배회했다. 모두가 불안에 떨던 위기의 정점에서 필자는 역설적으로 그 폭풍의 눈, 파주 민간인통제구역(CCZ) 철책 안으로 짐을 꾸려 들어왔다. 남들은 곧 전쟁이 터질 사지(死地)로 들어간다고 걱정했지만 필자에게는 방치된 채 신음하는 숲이 더 위태로워 보였다. 필자는 그곳에서 호미 한 자루를 쥐고 세상의 소란과는 무관한 나만의 전쟁을 시작했다. 2018년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두 정상이 마주 앉았을 때 세상은 금방이라도 영원한 평화가 도래한 양 들썩였다. 그러나 환희는 짧았고 침묵은 길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 필자가 목격한 것은 하늘을 떠도는 화려한 담론이 결코 이 땅의 잡초 하나, 무너진 둑 하나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차가운 진실이었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손대지 않은 태고의 원시림’이라 상상한다. 하지만 돌보는 이 없는 숲은 평화로운 낙원이 아니라 생태적 균형이 무너진 혼란의 현장이다. 맹렬한 칡넝쿨과 외래식물이 나무의 숨통을 조이고 무관심의 장막 속에서 파괴는 암암리에 진행된다. 척박한 땅에 이끼를 심고 빽빽하게 자란 나무 사이를 솎아 베어 볕이 머물 자리를 만들어주며 나는 확신했다. 무조건적인 방치는 결코 보전이 될 수 없다. 철책 안에 가둬 두고 바라만 보는 것은 이 땅을 생명력 잃은 박제로 만들 뿐이다. 필자는 단절된 보전과 탐욕적 개발, 그 양극단을 넘어서는 길을 제안한다. 바로 생태적 실용주의다. 민간인통제구역의 숲을 기후 위기 시대의 강력한 생태적 안전판이자 지친 몸과 마음을 되살리는 치유 자산으로 경영해야 한다. 군사적 긴장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숲을 건강하게 가꿔 미세먼지와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거점으로 삼고 DMZ의 평화를 개인이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웰니스(Wellness) 로 전환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치를 지역과 함께하는 모델, 그것이 내가 현장에서 시도하고 있는 ‘DMZ숲’의 실험이다. 앞으로 이어질 글을 통해 필자는 추상적 평화론 대신 민간인통제구역이라는 특수한 규제 공간을 어떻게 미래의 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해법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번영의 문제다. 철조망 안에도 나무는 자라고 계절은 흐르며 사람은 산다. 이제 우리의 시선은 상징적인 선(Line)을 넘어 그 안에 실재하는 공간(Zone)으로 향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가능성의 숲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천자춘추] 안전으로 소통·통합

이재명 대통령은 당선 직후 “대통령의 책무는 국민을 통합시키는 것”,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제1책임”이라고 천명했다. 로마가톨릭 교황으로 추대된 레오 14세도 즉위 미사에서 “사랑과 통합으로 전 세계가 화합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바이든 전 대통령도, 현 트럼프 대통령도 당선 직후 “국민 통합을 이루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렇게 세계 지도자들이 국민 통합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통합이 안 돼 발생하는 국민의 분열과 갈등이 국가 사회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국민을 소통하고 통합할 것인가. 국민에게 내 자녀, 가족에게 도움이 돼 비교적 쉽게 당장 동참할 구체적 실천 처방을 제시하고 소통하며 통합할 것을 제안한다. 즉, 안전을 통해 전 국민이 소통하고 안전을 스스로 실천하며 모든 국민이 안전으로 우선 통합하자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평상시 가장 우려하는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세 가지 습관을 기르고 세 가지 약속할 것을 제안한다. 2024년 교통사고로 보행 중 920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이는 우리 국민이 다음 세 가지 습관만 기르면 1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게 할 수 있다. 첫째, 우선 멈추는 습관이다. 차도로 나갈 때, 길을 건널 때 항상 우선 멈추고 차가 오는지 확인하는 습관이다. 둘째, 운전자와 눈 맞추는 습관이다. 녹색불이 들어와도, 손을 들어도 그냥 지나치는 차가 있으므로 항상 차량이 멈췄는지 확인하는 습관이다. 셋째, 차를 계속 보면서 건너는 습관이다. 녹색불이 들어와도 운전자가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을 수 있으므로 항상 차를 보면서 건너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 모두가 다음 세 가지 약속을 실천으로 옮겨 지난해 2천521명을 사망케 한 교통사고를 큰 폭으로 감소시켜야 한다. 첫째, 보행자와 보행자 간 약속이다. 모방 능력이 뛰어난 어린 자녀들에게 무단횡단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는 약속이다. 무단횡단은 어린이 교통사고를 부추기는 범죄 행위이며 자녀를 데리고 하는 무단횡단은 자녀에게 교통사고 나는 법을 알려주는 행위임을 인식하고 나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보행자와 운전자 간 약속이다. 신호등 없는 건널목서 운전자와 보행자가 서로 ‘양보해주겠지’라는 생각으로 먼저 가다가 사고가 발생하므로 이런 갈등을 근원적으로 없애기 위해 보행자가 손을 들면 운전자는 손으로 먼저 가도록 의사 표시하는 것을 서로 약속하자는 것이다. 셋째, 운전자와 운전자 간 약속이다. ‘내가 먼저 양보하겠다’는 생각으로 양보 운전할 것을 약속하자는 것이다. 내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양보하겠다는 생각으로 운전하면 보는 시야가 넓어져 사고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다. 모두 내 자녀,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해 세 가지 습관을 기르고 세 가지 약속을 스스로 실천하며 안전으로 소통해 국민 통합에 기여해야 한다.

[천자춘추] 경기도 다문화 정책, 지속가능성을 묻다

2024년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265만명을 넘어섰고 경기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다문화는 더 이상 일부 지역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경기도 전역이 함께 마주한 현실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다문화를 받아들이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설계하느냐다. 현장에서 종종 듣는 목소리는 “우리도 힘든데 왜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다문화 정책이 다문화가정을 ‘특별한 지원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김치 담그기, 송편 빚기, 일회성 생계 지원 위주의 정책은 다문화가정의 자립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비(非)다문화가정에는 상대적 박탈감을 남겼다. 이제 발상을 바꿔야 한다. 다문화 정책은 특정 집단을 돕는 복지가 아니라 경기도와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에 대한 투자여야 한다. 특히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이중언어와 다문화적 감수성을 자연스럽게 갖춘 세대다. 이들이 경기도에 뿌리내리고 글로벌 인재로 성장해 우리 사회에 기여한다면 이는 곧 대한민국의 세계화와 국가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 대상도 확장돼야 한다. 지금까지의 정책은 ‘다문화가정에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것’에 집중해 왔다. 물론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비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세계문화를 알리고 세계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정책도 함께 필요하다. 지역 축제, 학교 프로그램, 문화 행사 등을 통해 비다문화가정 아이들 역시 자연스럽게 세계시민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상호 이해이자 갈등을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경기도는 지역별 특성이 뚜렷하다. 판교·분당 같은 첨단산업 지역에는 글로벌 기업과 연계한 국제 교육, 외국인 자녀를 위한 이중언어 교육 인프라가 필요하다. 안산·시흥·화성·평택 등 산업단지 지역에는 한국어 교육, 학습 격차 해소, 직업교육과 연계한 정착 지원이 시급하다. 농어촌지역은 돌봄과 교육 접근성 문제가 함께 고려돼야 한다. 같은 다문화라도 지역에 따라 해법은 달라야 한다. 다문화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속적인 지원’이 아니라 자립과 정착, 그리고 기여다.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경기도에서 성장해 기업과 지역사회, 공공 영역에서 활약하는 인재로 자리 잡을 때 비다문화가정 역시 다문화 정책을 ‘남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우리 지역을 위한 정책’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경기도형 지역 맞춤 다문화 정책은 갈등 관리 차원을 넘어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전략이 될 수 있다. 다문화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대한민국의 세계화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문화 정책의 성과를 체감하게 될 것이다.

[천자춘추] AI 폭풍 속, ‘청년 21만명’의 비명

바야흐로 인공지능(AI) 전성시대다. 이재명 정부는 국가 경쟁력의 명운을 걸고 AI 보급을 폭풍처럼 몰아붙이고 있다. 기업들은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을 외치며 AI 도입에 열광한다. 하지만 이 화려한 기술 축제의 이면에는 ‘고용의 종말’이라는 참혹한 대가가 지불되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 보고서는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지난 3년간 AI 노출 업종에서만 청년 일자리 21만개가 소리 없이 증발했다. 이게 다가 아닐 것이며 경기침체의 결과도 아니다.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보조하는 단계를 넘어 미래 세대가 밟아야 할 사다리 자체를 걷어차고 있는 ‘구조적 재앙’의 전조일 수 있다. 미국 빅테크들이 AI 투자비를 벌기 위해 수만명을 해고할 때 한국 기업은 신입 채용의 문을 아예 폐쇄하고 30대 사원에게까지 희망퇴직서를 내미는 방식으로 ‘조용한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통계상 고용률은 노년층의 단기 일자리로 가려져 멀쩡해 보이지만 정작 청년들이 가야 할 질 좋은 일자리는 AI라는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있다. 버니 샌더스 의원은 “AI는 기술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일갈하며 생산성이 높아졌음에도 노동자가 의료보험료조차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맹비난했다. 그는 기술의 과실이 자본가에게만 쏠리지 않도록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 정부는 어떠한가. 저작권과 윤리 가이드라인에는 공을 들이면서도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의 생존권과 ‘사람 없는 성장’의 병폐에는 지독하리만치 무관심하다. 정부가 AI 보급의 속도 조절 없이 이대로 질주한다면 대한민국은 ‘기술은 일류, 국민은 빈곤’한 역설적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AI 도입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전면 조사하고 기술 수익을 사회 안전망으로 환원하는 ‘AI 상생세’나 ‘노동시간 단축’ 같은 파격적 대안을 수립해야 한다. 정치는 기술의 시녀가 아니라 사람의 수호자여야 한다. ‘기술은 일류, 국민은 빈곤’, 이 역설의 종착역에 도달하기 전에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 골든타임은 지금이다.

[천자춘추] 질문의 격, 사유하는 인간

인공지능(AI)과 대화하는 일이 낯설지 않은 시대다. 질문을 던지면 몇 초 만에 정리된 답이 돌아온다. 지식에 접근하는 속도만 놓고 보면 인간은 더없이 유능한 조력자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이 편리함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이렇게 많은 답을 손에 쥔 우리는 과연 더 깊이 생각하고 있는가. 필자는 저서 ‘읽기코칭을 배우면 공부가 달라진다’를 통해 리터러시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왔다. 그 핵심은 단순히 읽는 기술이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힘에 있었다. 이 고민은 이제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질문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교한 답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은 질문의 주체가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 왜 불편한지, 이대로 괜찮은지를 묻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질문은 정보의 부족에서가 아니라 세계를 더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 의지가 있는 한 인간은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 AI의 답변 수준은 인간의 질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질문이 단순하면 답은 정보에 머물고 질문이 깊어질수록 답은 생각을 자극하는 재료가 된다. 기술은 생각을 대신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사유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될 뿐이다. 질문에도 격이 있다. 즉각적인 효용을 묻는 질문과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은 그 결이 다르다. 전자는 편리함을 주지만 후자는 사유를 요구한다. 그래서 AI 시대의 리터러시는 정보를 소비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힘에 가깝다. 평생교육 현장에서 만나는 학습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도 지식을 쌓기보다 생각의 기준을 세우라는 말이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기준은 흔들리기 쉬운 시대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인간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역설적으로 단순해진다. 서두르지 않고, 질문을 붙잡고,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다. 편리함이 사유를 대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태도야말로 교육이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일지 모른다. 다가올 미래의 주인공은 가장 많은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질문을 놓지 않는 인간일 것이다. 사유하는 인간, 그 자리를 지키는 힘이 기술의 시대를 건너는 가장 확실한 인간의 조건이다.

[천자춘추] 특별한 일 없음

“해본 것 없음. 가본 곳 없음. 특별한 일 없음”.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삶을 상징하는 대사이다. “작가님은 어디서 영감을 받으세요?” “주변의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요.” “너무 평범하지 않아요? 예를 들면요?” “음… 어디서 본 듯하고, 누구에게 들은 듯하고, 우연히 스친 듯한… 주변에 널린 것들요.” “그런 게 작품이 되나요?” “그래서 평범한 예술가로 사나 봐요.” 비예술계 사람들을 만나면, 예술가에 대한 고정관념 같은 게 있다. 뭔가에 미쳐있는 것 같은 ‘비범함’,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 ‘고독함’ 그리고 고통과 불행마저도 승화시키는 ‘창의성’ 같은…. 하긴 역사에 기록된 예술가들은 고독한 천재 미치광이가 많았으니, 그런 환경에서 예술이 꽃피운다는 환상은 예술가들에게도 있다. 나 또한 대학 시절 끼 많은 동료들에게 기가 죽어 작가가 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의 가치를 깨닫기 전엔 말이다. 어쨌든 나는 ‘특별함’과 ‘새로움’,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예술계에서 보편성을 무기로 운 좋게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평범하고 당연한 것’을 다룬다고 해서 표현 방식 또한 평범한 건 아니다. 비범한 예술계에서 보편적인 것을 얘기하는 만큼, 더 치밀하게 연구하고 관객의 공감대를 얻어야 하는 숙제를 늘 안고 산다. 다시 말해 나는 바다 밑 깊은 해저가 아니라, 파도 바로 아래 사람들이 놓쳐버린 것들을 건드린다. 등잔 밑이 어두운 이치랄까. 매일 먹는 백반을 친숙하지만 한 끗을 다르게 만들려면 나름의 고민이 깊긴 하다. 나는 그 한 끗을 예술계가 아닌 곳에서 자주 찾는다. 경제·정치·사회·과학 등 비예술적 분야의 방식을 자주 작품에 끌어오니 ‘사회적이란’ 평을 듣게 됐다.(그때마다 “예술도 사회니까요”라고 응답한다) 시각예술에서 재료·기법의 한계가 사라진 지 오래됐지만, 음악·무용·문학과 같은 예술이 아닌 비예술 분야의 접목은 예술계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듯하다. 이런 시도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동료 한 명이 물었다. “뭘 알고는 하는 거지?, 리스크가 커.” “처음이니 당연히 실수하겠지. 근데 안 해 본 거 할 때, 욕도 덜 먹더라고.” “그러니까 그냥 하던 거나 하지. 뭐 하러 욕을 사서 먹어, 어리석게.” 하지만 ‘해 본 일’에서만 돌파구를 찾으려 든다면 저들 말대로 하던 거나 하면서 살아야 한다. 먹던 것만 먹고, 가본 곳만 가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삶을 산다면 최소한 ‘사는 게 지겹다’고 말해선 안 된다. 평범한 이야기를 평범한 방식으론 풀어낼 수는 없으므로…. (그건 너무 뻔하다) 무엇보다 나는 재밌게 살고 싶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 이런 대사가 있다. “해왔던 일을 하면서, 안 했던 일을 할 겁니다.” 만년 꼴찌 야구팀의 문제점을 파악한 신임 단장이 내린 처방이다. 하던 대로 열심히는 했는데 매번 제자리만 맴돌다 이젠 ‘좋아질 거란’ 기대마저 없어져 닥치는 대로 사는 중이라면, 지금이 ‘안 했던 일’을 해야 할 때다. 내게 묻는다면, 설치예술가로 언론사에 글 쓰는 일이 가장 최근에 한, ‘안 해 봤던 일’이다.

[천자춘추] 비어 있는 자리에 잠시 서는 일

셋째 주 토요일, 서호천 정화 활동이 있는 날이다. 활동하기 편한 옷을 챙겨 입고 아침 햇살이 막 하천에 내려앉을 즈음 집을 나선다. 자원봉사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16년이 흘렀다. 첫 봉사는 마을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위한 도서 정리와 학습지도였다. 이후 돌봄교실 전래놀이, 학교 주변 순찰, 노인복지관 배식, 취약계층 선물 전달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작은 손길을 보탰다. 처음에는 낯설고 서투르던 봉사가 이제는 한결 익숙해졌다. 지금의 나를 자원봉사로 이끈 데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다. 그것은 늘 곁에 계실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임종이었다. 성인이 된 뒤 맞이한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결국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됐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은 사회에 보탬이 되는 공익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다짐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기부와 자원봉사를 선택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기부로 마음을 전했고 지금은 기부와 자원봉사를 함께하며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현장에서 활동하다 보면 행정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체감한다. 해마다 10만명이 넘는 시민이 자원봉사 현장에서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지만 봉사의 빈자리는 여전히 많다. 시간과 여유, 그리고 마음의 여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일까. 봉사가 때로는 귀찮고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상처받았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기도 한다. 규정이나 계획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사회의 틈을 이름 없는 손길들이 메운다. 그 손길이 모여 마을은 단단해지고 우리의 일상은 좀 더 안전해진다. 최근 들어 자원봉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원봉사자에 대한 제도적 지원과 혜택도 조금씩 마련되고 있다. 반가운 변화다. 덕분에 봉사 현장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봉사는 늘 따뜻하고 보람찬 순간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며 거창한 결심에서 시작되지도 않는다. 누군가 나서지 않으면 비어 있을 자리, 그 자리에 잠시 서는 일이다. 그렇게 채워진 하루가 쌓여 어느새 삶의 방향이 된다.

[천자춘추] 공공체육시설과 복지·상생 균형

공공체육시설은 ‘체육 복지’의 상징이다. 저렴한 이용료와 높은 접근성은 운동을 시작하기 어려웠던 시민들에게 문턱을 낮춰줬고 고령자, 장애인, 청소년 등 체육 소외계층의 일상적 신체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역할만 놓고 본다면 공공체육시설 확대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환영받아야 할 정책이다. 그러나 최근 곳곳에서 제기되는 민간체육시설의 어려움 또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동일 생활권 내에 유사 종목의 공공시설이 들어서면 상대적으로 높은 임대료와 인건비를 감당해야 하는 민간시설은 가격 경쟁에서 버티기 어렵다. 코로나19 이후 간신히 회복 단계에 들어선 민간 체육산업에 또 하나의 구조적 부담이 더해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의 핵심은 ‘공공이냐 민간이냐’의 선택이 아니다. 공공체육시설이 민간체육시설의 역할까지 대체하려 할 때 갈등이 발생한다. 공공은 복지와 입문, 민간은 전문성과 특화 서비스라는 역할 분담이 명확해야 한다. 공공시설은 기초 체력 증진과 건강 회복 중심으로, 민간시설은 퍼스널트레이닝, 재활, 선수 육성 등 고도화된 수요를 담당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공공에서 민간으로 이어지는 ‘연계 모델’도 고민해야 한다. 공공시설에서 운동을 시작한 시민이 일정 단계 이후 자연스럽게 민간시설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지자체가 매개 역할을 한다면 이는 경쟁이 아닌 상생의 구조가 된다. 공공시설의 일부 프로그램을 민간에 위탁하거나 공동 운영하는 방식도 충분히 대안이 될 수 있다. 체육은 복지이면서 동시에 산업이다. 복지를 앞세운 정책이 산업의 기반을 무너뜨린다면 지속가능할 수 없다. 이제는 공공체육시설 확대라는 양적 논의에서 벗어나 민간과 함께 성장하는 질적 설계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체육 정책의 성공은 시설의 숫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살아남는 구조에 달려 있다.

[천자춘추] 생활폐기물 공공처리 기반 구축을

2026년 1월부터 수도권에서는 생활폐기물을 바로 매립할 수 없다. 이제는 폐기물을 소각한 뒤 나오는 소각재나 선별 후 남는 잔재물만 매립해야 한다. 매립량을 줄여 매립지 사용 기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한 조치다. 공공 소각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수도권 지자체들은 당분간 민간 처리업체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급한 불을 끄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따르면 수도권 66개 지자체 중 33곳은 기존 공공 소각시설에서 처리하고 나머지는 전부 혹은 일부를 민간시설에 맡길 것으로 예상된다. 공공 소각시설을 이용하는 지자체도 시설 정비 기간에는 민간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민간시설을 이용하는 지자체 수와 위탁 물량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2023년 수도권 가정생활폐기물 통계를 기준으로 보면 현재 매립되는 폐기물을 전량 민간에 맡길 경우 약 138만t의 종량제 폐기물이 민간에서 처리돼야 한다. 이는 종량제 폐기물의 약 40%를 민간시설에 의존하게 된다는 뜻이다. 생활폐기물 처리를 민간시설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폐기물 처리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 처리비 상승으로 청소 재정 적자가 커지고 설비 고장 등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처리시설 부족으로 인한 대란 위험도 높아진다. 수도권 외 지역의 민간시설로 보내는 물량이 늘어날수록 지역 간 갈등도 불거질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어 작은 불씨도 큰 정치적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 그렇다고 수도권 내 민간시설만 고집하면 처리비 급등 등 시장 불안이 더 커질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은 민간시설을 불가피하게 활용하되 발생지 처리원칙에 맞는 공공처리 기반 구축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우선 수도권 외 지역의 시설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양에 대해서는 반입협력금제도를 적극 활용해 민간 처리시설 주변 지역 주민을 지원해야 한다. 공공처리 기반 구축을 위한 구체적 로드맵이 나와야 한다. 단순히 “공공 소각장을 늘리겠다”는 선언만으로 신뢰를 얻기 어렵다. 종량제 봉투 전처리 시설을 도입해 봉투 안의 재활용 가능한 폐기물을 최대한 선별·재활용하는 방안을 병행해야 한다. 특히 종량제 봉투 내 폐비닐을 선별해 열분해 시설에서 기름으로 전환하면 소각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줄이는 동시에 기존 소각장의 가동 여력 및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수도권매립지에 시범시설을 설치해 검증한 뒤 수도권 각 지자체에 전처리 시설 설치 의무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생활폐기물 직매립 금지가 수도권 폐기물 관리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자원순환을 강화하는 전환점이 되기 바란다.

[천자춘추] ‘붕정만리’ <鵬程萬里> 뜻 새기는 한 해

필자의 이름에 ‘붕새 붕(鵬)’ 자가 있다. 어려서는 ‘붕’의 뜻을 몰라 ‘영붕’이라는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받았고 발음도 어려워 부모님에게 투정을 부리곤 했다. 병오년 새해 아침 할아버지의 큰 뜻을 헤아리며 이 글을 쓴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각자의 마음속에 크고 작은 다짐을 새긴다. 그러나 다짐이 뜻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시야를 넓히고 장도를 내다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중국 고전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붕정만리(鵬程萬里)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북해의 거대한 붕새가 한번 날면 구만리를 간다고 한다. 단순히 먼 거리를 날아간다는 의미를 넘어 작은 구속을 벗어나 큰 도약을 이루는 존재의 확장, 바로 그 도전정신을 상징한다. 오늘의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 앞에서 때로는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하지만 붕새의 비상(飛上)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비전은 정확하다. 높이 날아오르면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하고 멀리 가려면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작은 연못에서는 결코 큰 날개를 펼칠 수 없듯이 고정된 시각과 좁은 사고로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이길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이자 자신과 공동체를 향한 더 큰 비전이다. 붕정만리는 다 함께 가는 길을 뜻한다. 붕새가 바람을 타고 상승하듯 자신의 뜻도 사회의 바람과 맞물릴 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서로를 북돋우며 더 나은 방향을 향해 연대할 때 자신과 공동체는 한층 높은 단계로 도약한다.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 기운을 받은 올해가 바로 그 시작이 돼야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며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때 우리의 미래는 더욱 단단해진다. 새해의 첫걸음을 위해 붕정만리를 떠올린다. 크게 보고 멀리 생각하며 널리 함께하는 정신이야말로 불확실성의 시대를 견뎌낼 지혜다. 2026년 한 해가 붕새의 장대한 날갯짓처럼 힘차게 펼쳐지기를, 그리고 모든 이의 걸음이 구만리의 여정처럼 넓고 깊게 뻗어가기를 기원한다.

[천자춘추] AI 시대, 소통의 본질

“인공지능(AI) 아나운서가 등장하는 시대, 인간 아나운서의 역할은 무엇인가.” 최근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 면접에서 나온 질문이다. 많은 지원자는 “AI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성 있는 소통은 인간만의 몫”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AI와 인간의 차이를 말할 때 흔히 감정의 유무를 떠올린다. 그러나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이 AI보다 더 진정성 있게 소통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진정성이란 무엇이며 인간 소통의 핵심은 무엇인가. 관련 조사에 따르면 국민 네 명 중 한 명은 생성형 AI 사용 경험이 있으며 목적의 69.5%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라고 답했다. Z세대 구직자 조사에서는 73%가 ‘실제 사람 대신 AI에게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조사에서 60대 응답자의 80% 이상은 ‘AI를 친구나 조언자처럼 느낀 적 있다’고 반응했다. 이는 인간 소통의 약점과 소통 구조 변화를 보여준다. AI는 대화에서 질문을 던진다. “요즘 지치고 힘들다”는 말에 “왜 그런지 조금 더 말해줄 수 있나요”, “언제 가장 힘든가요”라고 묻는다. 단순한 질문이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질문조차 쉽게 건네지 못할 때가 많다. 질문은 관심이며 질문 없는 대화는 공중에 흩어진다.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는 소통이 완성되지 않는다. 불통의 상당수는 판단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기보다 자신의 경험을 투사하거나 감정의 무게를 재단한다. “그 정도로 힘든 건 아니잖아”라는 말이나 자신을 앞세우는 반응으로 상대의 마음을 지운다. 말은 오갔지만 마음이 닿지 않을 때 관계는 멀어진다. 반면 AI는 판단 없이 끝까지 듣고 반복 확인해 주며 질문으로 대화를 이끈다. AI를 대화 상대로 느끼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경청자가 부족한 사회’라는 신호다. 들을 거리는 넘치지만 들어줄 사람이 부족한 것이다. 말없이 공감하는 눈빛, 따뜻한 미소가 오히려 절실하다. 결국 소통의 핵심은 태도에 있다. AI의 대화 기술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공감과 선함을 더할 때 진정성 있는 소통이 완성된다. 말과 마음을 함께 읽는 태도, 그것이 AI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소통의 본질이다.

[천자춘추] 정책자금’ 제3자 부당개입 근절

요즘 소상공인들은 ‘정책자금 안내’ 현수막이나 인터넷 광고에 많이 노출된다. 서류 준비할 것이 적지 않다는 말에 제3자 컨설턴트는 어느새 구세주처럼 등장한다. 문제는 그 대가다. 과도한 수수료를 요구하거나 특정 금융상품 가입을 조건으로 내거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이뤄지는 정책자금 제3자 부당 개입의 한 단면이다. 다만 모든 외부 컨설팅을 부당 개입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전문 컨설팅을 통해 소상공인이 경영을 개선하고 사업을 성장시키는 것은 컨설팅 본연의 역할이기도 하다. 문제는 도움이 ‘합리적인 비용’의 범위를 넘어설 때다. 정책자금을 빌미로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거나 컨설팅이 소상공인의 자립을 돕기보다 의존을 키우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소상공인에게 정책자금 신청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경험이 아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로 인한 서류 작성의 어려움과 디지털 환경에 대한 부담은 ‘혹시 잘못 신청해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제3자는 소상공인의 실제 상황과 다르게 신청서를 포장하거나 대출 신청과 심사 과정에 부당하게 관여하며 과도한 대가를 요구한다. 경기 침체기일수록 이런 구조는 더욱 쉽게 작동한다. 지난해 12월 중소벤처기업부가 제3자 부당 개입을 근절하기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관계기관과 공조에 나선 것은 이런 현장의 문제를 반영한 조치다. 그러나 단속이나 처벌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제3자가 개입하는 이유는 정책자금제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소상공인이 체감하는 부담과 정보 접근성의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법의 한 축은 접근성 강화다. 정책자금 안내는 더 쉽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돼야 하며 디지털 환경에 익숙지 않은 소상공인도 도우미의 지원을 통해 충분히 이해하고 신청할 수 있어야 한다. 제3자에게 ‘속지 말라’는 경고보다 혼자서도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 축은 소상공인 스스로의 역량 강화다. 정책자금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고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는 제안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외부 컨설팅이 필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할 수 있는 힘이 쌓일수록 부당 개입의 여지는 줄어든다. 정당한 컨설팅은 소상공인의 성장을 돕지만 과도한 비용에 기대는 구조는 부담만을 만든다. 제3자 부당 개입 문제는 어느 한쪽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구조적 문제다. 소상공인의 역량이 높아지고 정책의 접근성이 개선될수록 제3자 부당 개입은 자연스럽게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천자춘추] 신탁부동산, 전세들면 안 된다

요즘 주택전세 피해가 급증하고 전세사기 문제까지 비화해 큰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데 이는 제도적인 잘못이 근본 원인인 경우가 있다. 그중에서도 급히 개선해야 할 것이 신탁부동산의 전세 관련 문제다. 신탁이란 부동산을 위탁자가 수탁자에게 소유권을 이전하고 수탁자에게 신탁 목적을 위해 관리·처분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소유자는 수탁자이며 신탁 목적은 매우 다양하므로 ‘관리처분’의 방법을 등기부의 일부인 ‘신탁원부’라는 장부로 별도 비치한다. 신탁부동산의 법률관계는 복잡하므로 등기부에 ‘거래를 할 때에는 신탁원부를 보라’는 뜻의 부기등기가 돼 있다. 신탁부동산에 대해 소유자인 수탁자와 직접 전세계약을 하면 별 문제가 없으나 보통은 신탁원부에 ‘임대차계약은 위탁자에게 위임하는 데 동의할 수 있고, 보증금반환의무는 수탁자가 아니라 위탁자가 부담한다’는 신탁조항을 둔다. 문제는 이 조항이다. 부동산 소유자 등이 자금을 융통할 때 근저당을 설정하면 저당권자가 향후 가압류나 경매 시 소액보증금 최우선 변제 등의 사유로 채권 확보에 애로가 예상되므로 금융기관은 저당을 설정하기보다 수탁자에게 소유권을 이전시켜 분쟁의 소지를 차단한다. 이것이 ‘담보신탁’인데 저당을 설정하는 대신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 핵심이다. 즉, 실질은 부동산 담보지만 저당 대신 소유권을 이전받는 형식이다. 따라서 신탁부동산에 전세 들어가는 것은 선순위의 저당권이 있는 부동산에 전세 들어가는 것과 같다. 더구나 신탁원부상에 이 같은 신탁조항이 있으면 결국 부동산(주택)의 소유자는 수탁자이지만 보증금반환 책임은 부담하지 않고 위탁자가 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부당하고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택임대차보호법은 보증금반환 채무를 소유자가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임차인에게 불리한 약정은 효력이 없다’는 강행 규정을 두고 있다. 이에 비춰 보면 신탁부동산 전세에 소유자인 수탁자가 보증금을 책임지지 않고 위탁자에게 반환채무를 부담하게 하는 것은 이 원칙에 반하며 사회적 약자인 세입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담보신탁’에서 수탁자가 보증금 채무를 부담하거나 그 보증금을 융자에만 사용할 것을 조건으로 동의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현재 신탁부동산에 전세를 들어가며 보증금 회수가 곤란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천자춘추] 경기도서관은 실험 중

세상에 없던 도서관을 표방하며 경기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개관 두 달. 27만명이 방문했다. 도서관을 걷다 보면 서로 다른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인스타 핫플”이라는 환호가 있는가 하면 “여기는 도서관이 아니다”라는 비판도 거세다.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일상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불편한 침범이다. 지난해 10월25일 개관한 경기도서관은 나선형 구조로 전 층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두루마리를 본떠 설계한 공간은 자료실을 칸칸이 분리하지 않았고 이용자를 연령과 목적에 따라 선명히 구획하지도 않았다. 어린이와 어른이 같은 동선 위에서 마주치고 전시 공간과 게임 공간이 가까이 놓이며 책을 읽는 자리 옆에서 보드게임이 펼쳐진다. 2층에서 터져 나온 아이들의 웃음과 소음은 순식간에 전 층으로 번지고 지하 오픈 공간의 강의와 음악 소리는 4층까지 울린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도서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방문객은 계속 늘고 있다. 주말이면 8천명 가까이 찾고 평일에도 3천명에 이른다. 방문 이유 또한 다양하다. 젊은 연인들은 데이트하듯 머물고 세대가 함께 손잡고 와 음악회를 듣기도 한다. 쉬는 날 아빠와 게임을 하러 오기도 하고 퇴근 후 엄마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들르기도 한다. 인공지능(AI) 도구로 작업하고 숏폼을 제작하려는 젊은 이용자도 눈에 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도서관을 ‘사용’하고 있다. 방문자가 많다는 것은 도서관이 시민의 일상 깊숙이 들어왔다는 신호다. 책과 공부만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을 넘어 누구나 편안하게 다양한 이유로 찾아오는 공공공간이 돼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요구가 엇갈린다. 책 읽는 공간과 보드게임 공간이 함께 있어도 되는지, 아이 공간과 어른 공간을 분리해야 하는지, 전시는 얼마나 조용해야 하는지, 다리를 뻗고 잠든 이용자를 어디까지 제재해야 하는지…. 상반된 요구 속에서 도서관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움과 공존할 수 있을까. 누구의 요구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균형점을 찾는 일은 가능한가. 이것이 ‘세상에 없던 도서관’을 내건 경기도서관이 풀어야 할 숙제다. 사실 어느 한 기관이 완벽한 잣대로 서로 다른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답은 단속이나 방임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공존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다.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내는 능력은 인간의 강점이며 그 힘이 모일 때 우리는 그것을 집단지성이라 부른다. 경기도서관이 마주한 논쟁은 ‘정숙이냐 자유냐’의 선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운영자와 시민이 함께 묻고 목적이 다른 이용자들이 합의하고 수정해 가는 과정 속에서 정교한 운영 시스템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경기도서관의 공존 실험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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