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천 숨결이 어제보다 보드라워졌다 속살거리는 냇물 따라 눈웃음 짓는 버들강아지들 아, 겨울 땅 가슴 열어준 햇살 물 오른 나뭇가지 사이로 풀빛 바람이 불어온다. 이숙아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원 국제PEN 한국경기지역위원회 운영위원 시집 ‘그리운 이름’ 2025년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크렁크렁 얼음이 운다 물 위에 귀를 대고 숨을 고른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아직도 머물고 있는 이곳 정조대왕이 서릿발 위로 서걱 서걱 걸어오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서러운 넋이 되어 푸른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지금 아버지의 그리움 따라 길게 늘어진 행렬 화성 화산으로 이어진 그날에도 이 물은 그렇게 울었으리라 孝의 눈물은 호수를 이루고 울음은 오래된 책갈피 속에서 아직도 잠을 자고 있다 크렁크렁 만석거에서 얼음이 운다. *萬石渠 : 옛 수원사람들이 쌀 만 석을 생산하기를 바라며 조선 22대 정조 임금이 수원 송죽동 일원에 만든 저수지. 정겸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시집 ‘궁평항’ 등 4권 2017년 경기시인상 수상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더듬더듬 빈약한 나뭇가지 타고 올라가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린 호박처럼 언제나 아찔한 하늘이 내 앉을 자리 공중그네를 타고 높은 아파트 벽에 밥도 그리고 옷도 그리고 아이의 학원비도 그렸습니다 엄마 배속에서 6.25라는 전쟁으로 빼앗긴 안개 속 같은 아버지 얼굴 만나게 되면 나를 알아보실까 넙적한 등으로 덥석 업어주실까 앉을 자리 기웃대며 바람 따라 70여년 봄 햇살처럼 안겨온 아버지라는 이름 주렁주렁 링거 매단 채 가냘픈 모르핀 줄로 이어가며 입원실 창 밖 너머 아무렇게나 붉은 물감 붓질한 석양 속에 남겨질 내 아들의 얼굴을 자꾸 그려보고 있습니다 황영이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제5회 ‘시인마을문학상’ 수상
쉼 없이 흐르던 길 잠시 멈추고 한겨울 맑은 결정체 되어 내 안을 들여다본다 70여 년 흘러온 길 순리대로 거스르지 않고 왔는가 얼마나 맑고 고운 빛깔로 지나왔는가 물길 터주는 모든 주위에 감사했는가 이미 흘러간 시간에 미련과 아쉬움, 남기고 직립의 결정체로 머물며 이 겨울 더욱더 마음 다진다 아, 따뜻한 봄이 되면 더 맑은 소리 더 고운 빛깔로 바다를 향하리라. 심평자 시인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첫눈처럼 포근한 위로가 지친 마음을 감싸 안고 지난날의 무게도 잠시 내려놓는다 흘러간 계절은 후회가 아닌 배움의 진리, 그 길 위에 선 나를 새로운 빛으로 초대한다 저문 해를 뒤로 하고 한해의 끝자락을 접어 책갈피에 꽂아 놓는다 다시 시작을 위한 숨결 어둑새벽 지나 여명의 문 힘차게 열며 더 크게 웃고 더 멀리 날기 위해 해돋이 앞에 선다. 김옥희 시인 ‘문예비전’으로 등단 수원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말발굽 소리 새벽 가르며 보신각 첫 종 울리면 어둠은 물러가고 소망의 빛으로 역사의 첫 장을 여는 새해 시계추는 여전히 돌아가는데 온 세상은 새하얀 눈꽃으로 지난 과오를 덮어준다 서서히 밝아오는 태양 온 세상 희망의 메시지로 붉은 깃털 세우고 푸른 기운 천지 휘돌아 평화의 횃불이 새로운 역사를 엮어가는 번영의 닻 올린다. 붉은 말의 해 한 해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승리의 깃발로 걸어온다. 허정예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국제PEN한국본부 회원 시집 ‘詩의 온도’ 경기시인상·‘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엎드려 숨고른다 나날이 벅차던 꿈 적멸을 견뎌내는 발밑은 수묵화빛 능선은 칼바람에 느낌표로 일어서다. 이춘전 시인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세상에 올 때 우리가 가지고 나온 작은 손 우리는 이 작은 손으로 한 세상을 삽니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꽃과 나무를 가꾸고, 꿈을 꿉니다 또 우리는 이 작은 손으로 정을 나누고 사랑을 합니다 세상에 올 때 우리가 가지고 나온 이 작은 손 오늘도 우리는 이 작은 손으로 열심히 한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웃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빛나는 것임을 보여준 이 작은 손 우리는 알았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이렇게 작은 손들이 몰래몰래 만든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는 작지만 아름다운 손을 가졌습니다 맑고 빛나는 종교를 가졌습니다. 윤수천 시인 아동문학가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수상 1976년 동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마음의 나침판을 따라가다 만났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의 마을로 가기 위해 나는 회전목마를 탔다 시나브로 조금씩 쟁여놓은 내면의 풍경을 엿보는 게 좋았다 숨어있던 詩의 표정과 얼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첫 문장을 파과(波瓜)하는 소리를 들었다 글보다 삶이 먼저 詩가 되는 사람들 혈서를 쓰듯, 혈서라도 쓰듯 그렇게 존재의 끝에서 울리는 절명시와 만나고 싶다. 윤형돈 시인 1999년 ‘교단문학’으로 시·수필 등단 ‘한국시학’ 신인상 문학평론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대한민국 독도 문예대전 수상
가을에는 거울을 자주 들여다봐야겠습니다 마음하고 달리 꾀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달리 교만이 얼굴에 검정을 묻히니 가을에는 자랑하던 잎사귀를 떨어뜨리고 나락처럼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낮은 마음으로 성령 안에서 사색하는 아예 손거울을 하나 장만해야겠습니다. 정순영 시인 1974년 ‘풀과 별’ 천료 등단. 부산시인협회장·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세종대 석좌교수 역임. 시집 ‘사랑’ 등 15권. 한국시학상 등 다수 수상.
막내딸이 터를 잡고 사는 호주 시드니 계절이 반대로 지나간다 블루마운틴 세 자매 봉우리 만나고 오는 길 뉘엿 뉘엿 해는 지고 가로등 하나 없는 숲속 마을 어디쯤 별들만 총총히 떠 있다 어릴 적 고향 마을에 쏟아지던 별빛 사라진 지 오래 청정한 시드니 숲에서 별 무리 바라보며 깊은 향수에 잠긴다. 이경자 시인 2004년 ‘문예비전’ 수필 등단 2025년 ‘한국시학’ 신인상 동시 당선 한국문인협회·한국경기시인협회·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2023년 백봉 안익승문학상 대상 수상
둘레길 언덕 아래 솔바람 감아 돌고 여기에 서성이며 멈춘 발길 강물 위에 얼비치는 송이송이 낙화암 내려보며 가슴 저민다 덧없던 한때의 푸른 치마폭 매서운 칼바람을 홀로 견디고 절벽 끝 내려보며 애달파 울었을까 그늘에 숨어 얼굴 붉힌 너 가을빛 하늘에 꽃술 머금고 강바람에 마음 씻는 가녀린 미소 떠나는 가을, 뒷모습 서러운 듯 서녘 하늘에 눈물로 진다 조병하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시집 ‘잊을 수 없어 그리운 것들’
이른 아침잠을 깨우는 찬 서리 옷깃을 여미게 하고 엷은 햇살 받은 창가엔 쪽빛 비추는 희망으로 온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성이며 무심한 듯 밀려오는 긴 한숨 나의 어깨를 살며시 누르고 있다 얼마나 흘렀을까 얼마나 달려왔을까 삶의 시간들, 구름 따라 그림을 그려낸다 황금빛 노을 가득 담아낸 식탁 위 세월의 무게로 빛을 토해내며 행복의 열매로 이 가을 끝에 서 있다. 정의숙 시인 2017년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사무차장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샤갈의 마을에 살면 좋겠네 사시사철 마음만 먹으면 눈비도 내리고 눈비에 젖지 않는 햇살도 내려와 과수나무엔 과일이 주렁주렁 먹지 않아도 배부른 동네 곡괭이를 든 농부와 거꾸로 서서 바이얼린을 켜는 여인이 붕붕 날아다니고 순결한 염소와 파란 얼굴의 남자 눈빛으로 사랑을 속삭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샤갈의 마을은 잠들지 않아 시간과 중력을 벗어난 상상의 자유 그침이 없네 샤갈의 마을에 살면 참 좋겠네 보기 싫은 것들 보지 않고 부당한 간섭 윤리가 망가진 것들의 허세, 뿔 달린 도깨비도 오지 않고 슬픔과 증오도 없는 그대 자비로운 마음속 포근한 눈발에 묻혀 도란도란 밤새 잠들지 않아도 오롯이 꿈들이 살아나는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기청 시인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1977년)으로 등단. ‘현대시문학’ 편집고문 시집 ‘안개마을 입구’, ‘열락의 바다’ 외 시론집 ‘행복한 시 읽기’, 산문집 ‘불멸의 새’ 외
푸른 세월을 엮어 씨줄과 날줄로 베틀을 놓았다 반 백년 한 땀 두 땀 이어온 무늬들이 우리 삶의 역사로 아롱지고 서로의 다름을 품으며 소박한 우주를 열었고 평범 속에서 비범을 찾아 사랑의 역사를 새겨 왔다 새벽에 두드린 노크소리 날아든 화환과 꽃다발은 살아온 세월을 증언하듯 넓은 가슴으로 감싸안는다 행운과 고난을 껴안아 지켜 낸 꿈 당신과 나 그 존재만으로 더 무엇을 바라리오. 임종순 시인 ‘문파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아주문학상 수상 시집 ‘풍경이 앉은 찻집’
하늘에서 맑은 물 떠오고 억새꽃 붓으로 곱디고운 가을 풍경 담아 본다 펼쳐진 여백에 촉촉하게 물 바르고 빨강 노랑 파랑 물감 풀어 다채로운 색 입히면 섞이고 스며들어 번져갈 때 아름다운 가을이 익어간다 완성된 시절 인연 앞에 마주 서니 걸어온 삶의 여정이 보인다. 양길순 시인·화가 ‘한국문인’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수원문학아카데미·경기여류문학회 회원 시집 ‘자운영꽃 그리움’ 제3회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내 취향이 때로는 호기심의 답변이 아닐까 두려웠는데 모임 좋아하고 시간의 흐름을 기념하고 술 한 잔하고 어떤 무리에 속한 느낌은 안정감 주는 어머니 품처럼 한때 나는 인생의 속도를 늦추면 눈에 보이는 불편한 진실이 싫어서 바쁘게 벽에 기대는 즐거움으로 살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공통의 문화가 생기는 것처럼 내 방황은 부정적인 생각들의 파티에서 비롯된 발걸음 나는 내 침으로 그대를 분해시키고 싶을 때가 있는데 결핍은 굶주림과 욕망을 유발하는 벽을 종교인 것처럼 김어진 시인 2017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옳지, 봄’, ‘붉은 수염의 침대에서 자다’, ‘담쟁이는 벽을 종교인 것처럼’ 등 아라작품상·리토피아문학상 수상
낙엽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언제나 그대 뒷모습입니다 낙엽 밟던 그 골목길 바스락대는 추억이 숨결처럼 다가와 빛바랜 사진처럼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지요 차가운 바람이 손끝을 스칠 때면 햇살 한 줄기, 그대 어깨에 살며시 머물던 그 온기 시간의 틈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 이따금 내 마음 흔들어 놓습니다 말 대신 침묵으로 채운 그리움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단풍나무처럼 눈 감으면 내 기억 속의 온기로 여전히 그대가 거기 있습니다 김옥희 시인 ‘문예비전’으로 등단 수원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
바다 건너 어스름한 잿빛 담은 홍성 오서산 공제선에 빛 들면 언덕 이어진 오솔길 이슬 밟고 길게 늘어진 사래밭 농사일 시작되는 여명 어제 느슨하게 풀어져 소진되었던 체력 곤한 잠에 충전되어 새벽바람 코끝에 달달하다 짜깁는 시간 속에 들어와 하루 연결되어 달이 되고 해를 넘길 때마다 은빛으로 바랜 머릿결 석양 노을에 비낀 여정 태엽을 감아 돌린다 마지막 타는 촛불 더욱 밝은 빛 뿜어내듯 시인의 눈 속에 모인 서정 차곡차곡 쌓아 깊이 있는 삶에 감사하며 소망의 언덕 뒷짐 지고 걷는다. 이경화 시인·목사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집 ‘고목나무에 핀 새순’ 안면도 ‘빛가운데 교회’ 담임목사
풀숲 강아지 꼬리에 앉을까 말까 작은 고추잠자리 가을 물 빨갛게 들었다 발그레 물든 꽃 사과열매 교실창문에 다닥다닥 매달려 까르르 웃고 있는 소녀들 같다 마당 가 대추열매도 봉숭아 물들인 할머니 손톱만큼 붉게 익어가고 여름 내 홀로 붉던 배롱나무 가지에 가을바람 살짝 물든다 이 가을 나도 품 넉넉한 사람에게 물 들고 싶다. 황영이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제5회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