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지 않은 모든 삶’에 바치는 빛의 헌사 소설가 임선우 [경기 작가를 해석하다]

실패의 그림자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빛나지 않는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임선우의 첫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민음사·2022년)를 읽으며 나는 “단 한 번만이라도 저렇게 환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만 있다면 삶에 미련이 없을 것 같았어요”라는 문장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생리가 곧 실패로 간주되는 난임 여성, 역할 대행 알바가 된 연극배우, 연출한 영화가 ‘수면제 밈’이 돼 버린 시나리오 작가, 사고로 수영선수의 꿈을 접은 뒤 도벽을 얻은 은행 보안직원, 조회 수가 0에 수렴하는 웹툰 작가까지. 임선우의 소설에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실패는 반짝반짝 빛나는 삶과는 다분히 거리가 멀지만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은 이들의 어두운 삶에 끝내 빛을 깃들게 한다. 어쩌면 주위에서 흔히 볼 법한 좌절의 서사는 임선우 소설 특유의 환상성과 배합되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상성은 우리가 공유하는 일상과 맞닿아 있기에 마냥 낯설지 않다. 두 번째 소설 ‘초록은 어디에나’(자음과모음·2023년)는 헤엄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한 채 슬픔의 해저를 부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초록 고래가 있는 방’의 주인공은 영화 ‘초록 고래’의 처참한 실패 이후 알코올 중독을 겪지만 함께 사는 동생에게조차 이를 내색하지 않는다. 남편을 잃은 뒤 단봉낙타로 변신하는 ‘유미’ 또한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야 비로소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자각되지 못한 슬픔, 표출되지 못한 상실감은 ‘사려 깊은 밤, 푸른 돌’의 주인공이 토해내는 돌로 결정화된다. 그럭저럭 삶을 이어 가지만 내면이 곪아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은 돌을 주고받는 가운데 차츰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된다. 차갑지만 한 줄의 온기가 담긴 푸른 돌의 물성은 고립된 인물들을 연결하는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슬픔과 찬란함이 공존하는 빛은 근작인 ‘0000’(위즈덤하우스·2024년)에서 따스함을 겸비한 사랑의 물성을 전달한다. ‘존재감 제로’의 삶을 살아온 웹툰 작가 ‘나’는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에서 고양이 ‘오후’를 만나 삶에 대한 애착을 깨닫는다. 무기력한 사물처럼 살아온 ‘나’는 오후가 건넨 빛나는 환생 구슬을 받고 다시 살아보기로, 스스로에게 삶을 사랑할 기회를 주기로 결심한다. 살아있음 그 자체만으로 우리가 함께 빛날 수 있음을, 그렇기에 삶은 충분히 사랑하고 지속할 만한 것임을, 임선우는 따뜻한 빛의 시선으로 말해 주고자 한다. 때로는 물결처럼 은은하게, 혹은 도시 전체를 비출 정도로 환하게. 단단한 슬픔과 빛의 온기가 교차하는 임선우의 소설은 ‘빛나지 않은 모든 삶’을 위한 헌사로 읽힌다.

‘만성적 상실’의 임상을 기록하는 시인 권민경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권민경 시의 중핵을 이루는 고통은 대개 내상(內傷)과 관련된다. 첫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문학동네, 2018)에 반복되는 ‘물혹’, ‘종양’, ‘난소암’, ‘갑상선’ 등의 시어는 우리의 몸이 노화와 병듦의 생리적 변화뿐만 아니라 적출과 봉합이라는 인공적 변화에 노출된 대상임을 암시한다. 고통 앞에 무력한 몸, 그 절대적 두려움으로부터 파생되는 이중의 고통은 생명이라면 필연적으로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집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민음사, 2022)에서 권민경은 “내가 읽은 것들에 대해 기록하면 나를 따라 질질 발을 끄는 검은 자음, 모음, 하나하나 나였고 신파였으며 잘린 가지, 뺏긴 목소리, 잘린 갑상선, 난소, 그리고 기타 등등”(‘겨울나무’)이라 말한다. 자신의 고통을 ‘신파’로 지칭한다는 것. 몸의 일부를 떼어내는, 누구나 한 번쯤 겪을법한 고통이 깊은 슬픔으로 내부를 베어내는 상실. 이 공동(共同/空同)의 감각 안에서 고환을 가진 아버지와 난소를 가진 ‘나’, 질과 자궁을 공유하는 개와 ‘나’, 그리고 모든 이종(異種)들은 함께 아플 수 있다. 권민경이 형상화하는 몸의 찢김과 통증은 언뜻 치유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망가지고 배제되어 있는 내부로부터 온다. 그러한 점에서 세 번째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문학동네, 2024)의 ‘자연’ 연작에 등장하는 ‘신도시’는 파괴와 재건이 순환하는 몸을 닮아있다. 이 시집의 ‘신도시’, 즉 고양과 일산은 시인의 실제 삶과 기억이 고스란히 누적된 장소다. 하지만 “무덤을 뭉개고 세월 위에 아파트를 짓는”(‘자연―백마’) 개발은 이곳에 뿌리내린 생명들을 “신도시를 만들 때 부록처럼 조경당”(‘자연―나무의 무쓸모’)하는 고통에 몰아넣는다. 다른 시 ‘종일’에는 일산신도시 건설계획 추진과 맞물려 1990년 9월 고양 일대에 발생한 초유의 홍수 사태가 언급된다. 시인은 당시 홍수로 인해 “영원히 아홉 살에 멈춰 있는” 친구 ‘종일’의 죽음을 기억하며 “나는 없는 종일을 영원히 있게 하려/시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한다. 지금은 번듯해진 신도시,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실의 아픔을 증언하고자 시인은 허물어짐을 감내하면서도 말을 빚는다. 현재는 ‘만성적 상실’의 시대다. 기존의 것이 사라졌음을 미처 자각하기도 전에 새로운 것이 공백을 채우는 세계, 무언가를 잘라냄으로써 살아가는 방식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권민경의 언어는 현재 우리가 ‘치유’라고 부르는 삶의 방식에 물음을 제기한다. 잘려나간 줄기 위에 싹을 틔우는 “식물성 힘”(‘자연―복수’)의 강인함을 믿으며, 시인은 보이지 않는 고통의 임상을 섬세히 기록한다.

이야기 속에서 삶을 결심하는 시인 김상혁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김상혁 시인은 이야기로 집을 짓는다. 그에게 이야기는 단순히 줄거리를 지닌 말의 형식이 아니라 삶을 견디고 살아내는 거주의 형식이다. “사육장과 게양대 사이에 앉아서 나는 이 이야기를 지어냈다”(‘유전’)는 첫 시집의 문장은 마치 출사표 같다. 학교는 먹이고 기르는 사육장이자 관념을 주입하는 게양대이지만, 시인은 그곳에서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 자랐다. 이야기는 먹고 늙고 죽어간다는 무심한 사실과 삶에는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는 관념 사이의 간극을 메워준다. 사실 쪽으로 기울면 냉소주의자가, 관념 쪽으로 기울면 낭만주의자가 되겠지만 시인은 양쪽을 매개하는 이야기꾼으로 삶을 바라본다. 김상혁은 누구나 이야기로 집을 지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연히 당신에게는 어떤 집이 있”어서 도적과 한파를 막아줬다면, 동시에 그 집이 “어떤 당신을/ 강도로, 좀도둑으로, 지긋지긋한 아버지로”(‘집은 그럴 수 있다’) 만들지 않는 집이기를 바란다. 집으로 찾아드는 행운과 불행은 우연일지라도, “크든 작든 사람을 닮은 그 무엇의 기쁨과 슬픔”(‘어떤’)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시인은 “하나같이 슬픔의 왕들”뿐인 세상에서 그들보다 덜 슬픈 것 같은 “내가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걸까”(’슬픔의 왕‘) 주저한다. 그러나 슬픔에는 비교할 만한 크기도 무게도 없다. 다만 슬픔들 사이에 아득한 거리가 있을 뿐이다. 그는 타자라는 머나먼 별을 생각할 때 “나의 생각이 별까지의 거리를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도록”(「아내를 지나 양을 지나 염소를 지나’)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시인이 이토록 이야기에 진심인 이유는 이야기가 삶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삶은 늘 “너는 무엇을 더 빼앗길 수 있나?”(‘작은 집’) 을러대며 쳐들어와 끝내 소중한 아이를 데려간다. 그러나 불타는 곳에 남은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가능성’)고 시인은 단언한다.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진실이지만, 나쁜 마음을 고치지 않아 서로를 무너지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다. 우리는 진실 앞에서 무력할지라도, 적어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나쁜 마음을 고치기 위해,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곳에 기쁜 나무를 심기 위해 이야기가 꼭 필요하다. 지금까지 네 권의 시집을 통해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시인의 집 짓기는 삶에 대한 최선의 사랑이었다.

‘탁월한 질문의 설계자’ 소설가 성해나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성해나의 소설은 잘 읽히는 편안한 문장으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에 다다른 독자는 선명한 감동이나 새로운 앎 대신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을 떠안게 된다. 이는 소설 속 인물들이 손쉬운 일반화에 저항하며 우리의 이해를 흔들기 때문이다. 거동이 불편한 농인인 도호 할머니가 악덕 건물주의 면모를 보여줄 때(‘언두’), 우연히 말을 섞게 된 70대 할머니가 스턴트우먼이자 성소수자로 살아온 세월을 들려줄 때(‘화양극장’), 한국계 3세대 미국 이민자가 태극기 집회의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한국적인 환대를 경험할 때(‘스무드’), 몸주신을 빼앗긴 박수무당이 접신 없이 작두에 올라 “진짜 가짜”가 되기를 감행할 때(‘혼모노’) 우리는 인물들에 내재한 균열과 다층성 앞에서 모든 확신과 통념을 내려놓게 된다. 이처럼 독자를 무장해제시킨 작가는 감정도 역사의식도 없는 ‘가짜 이해’가 아니라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경계면에서 솟아나는 ‘진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성해나는 성실하고도 정교한 질문의 설계자라 할 만하다. 특히 역사적 사건을 먼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몸과 장소의 문제로 현재화하여 질문하는 방식은 등단작 ‘오즈’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 특징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몸에 일본군이 새겨넣은 타투(‘오즈’), 가보로 애지중지해 왔으나 친일파 조상의 치부를 드러낸 할아버지의 도검(‘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는 신념으로 설계한 갈월동의 고문실(‘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4·3 학살과 고려인 강제이주의 상처를 담고 있는 제주와 카자흐스탄의 헛묘들(‘괸당’)은 그때와 지금, 저곳과 이곳,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 상처와 상처를 연결하는 살아 있는 질문이 된다. 성해나는 자신의 좌우명으로 ‘더 나아갈 수 있지만 멈춰보는 태도’를 꼽은 적이 있다. 이는 작품을 미결정의 상태로 모호하게 끝맺는 방식과 상통한다. 작가가 더 쓰고 싶은 욕망을 멈춰 세운 지점에서 독자는 자신의 욕망과 대면한다. 야생성을 상실한 호랑이를 만질 때의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처럼 알 수 없는 위험한 타자를 이해의 올가미로 길들이고 싶은 욕망이 거기에 있다. 성해나는 허구에서 빠져나오는 출구에 현실과 연결되는 모럴의 거울을 설치해 두고 독자에게 이야기의 바통을 넘겨준다. 이 모든 이야기와 당신은 무관하지 않다고.

‘외과의사의 외모를 지닌 온정어린 휴머니트스 작가’ 신주희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신주희 소설의 인물들은 전장(戰場)에 있다. 조선족 베이비시터의 본모습이 몹시 궁금한 프로그래머(‘당신은 말한다’), 새로운 터전에서 새 이름을 얻고 싶어 하는 탈북 여성(‘네 개의 이름’), 사고로 뒤집힌 차 안에 묶여 불안했던 삶의 순간들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리는 여자(‘점심의 연애’), 일상적으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히키코모리 청년(‘사막의 뼈’), 아내의 실종과 아들의 실종이 자신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가족(‘미싱 도로시’),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않는 딸을 10여년째 기다리는 아버지(‘극’), 어떤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아기를 사산하는 소녀(‘소녀의 난’), 물속에서 채무자의 눈을 보게 된 채권추심원(‘인어’), 매일 유서를 쓰는 이혼녀(‘허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며 모성을 잃어가는 여자(‘잘 자 아가, 나무꼭대기에서’), 생계를 위해서라면 어떤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는 탈북 청년(‘소년과 소녀가 같은 방식으로’), 뇌수술을 앞둔 엄마와 언제나 이기적인 아버지 앞에 무기력한 딸(‘로즈쿼츠’)이 그러하다. 작가 신주희는 이들의 전쟁 같은 일상을 냉철한 시선으로 추적한다. 마치 영화감독의 시선 같고 폐쇄회로(CC)TV의 시선 같다. 이 시선은 인물들의 마음속으로까지 침투해 작가, 화자(話者), 인물 대상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지대로 진입하기도 한다. 자궁 속 태아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소녀의 난’(‘모서리의 탄생’)은 시선(視線)이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텍스트다. 현대사회의 군상을 감정이입 없이 전시하는 그의 소설은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의 소설을 닮았다. 난무하는 폭력에 시달리는 삶의 참혹함을 마치 외과의사처럼 치밀하게 해부하는 자연주의 문학의 근저에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을 모색하려는 휴머니스트의 열정이 잠재해 있기 마련이다. 그의 장편소설 ‘영과 영원’(교유서가)은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으로 나경희와 최승구, 마나와 이성호, 해나와 오재 그리고 노라 등의 캐릭터로서 과거와 현재의 삶을 속박하는 굴레를 탈피하지 않으면 미래(아기)란 없음을 강렬히 피력한다. 올해 출간된 장편소설 ‘친애하는 나의 종말’(북다) 또한 기성세대가 엮어낸 종교적⋅교육적 억압 구조가 미래세대들을 어떻게 해(害)하는지를 역력히 보여준다. 작가는 청년의 미래에 많은 기대와 관심을 기울인다. 상류계층 진입을 꿈꾸지만 지금 당장은 ‘스펌’을 팔아야 하고(‘홀로, 코스트코’), ‘마사지 서비스’를 팔아야 하는(‘브라질리언 왁싱’) 청년층의 곤궁한 삶을 작가 신주희는 경쾌한 문체, 다정한 시선, 넘치는 활력으로 그린다. 작가는 청년을, 미래를 사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이야기들 ‘깊고 담담한 소설가’ 송지현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과거사에 대해 문제가 되었을 때 송지현 소설가와 대담을 한 기억이 있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쓸 계획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우리의 삶 또한 역사라는 취지의 현답을 들려주었다. 그의 말대로 송지현의 소설은 지금 여기의 삶들에 대해 쓴다. 아무리 유예하려 해도 결국은 현실에 수납되어 가는 청년들(‘펑크록 스타일 빨대 디자인의 연구’), 그마저 수납되지 못한 사람들의 후일담(‘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들이 그렇다. 소설은 ‘고현학(modernology)’이라는 박태원의 언급처럼,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가 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고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괴롭게 하는가를 인지한다. 흥미로운 것은 무거운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자해한 언니를 응급실에 업고 가던 엄마가 손이 저리다고 하자 슬그머니 엄마에 등에서 내리는 언니(‘선인장이 자라는 일요일들’)에 대한 묘사처럼 마치 읽는이들이 인물들의 고통에 정동하는 것을 저지하기라도 하듯 그때마다 무심함을 가장한 농담들이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진지하면 지는 것이다(Why so serious?)’라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삶에 대한 태도와 연동된다. 동시에 이는 ‘코즈믹 호러(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우주적 스케일에 대한 공포)’와 같은 현실의 고통을 두고 유쾌함의 외연으로 내면의 슬픔을 은폐하는 방어적 기제로서 일종의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기성세대의 믿음과 달리, 아무리 애를 써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적응하라는 불가능한 요구에 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양식은 진지한 응답이 아닌 냉소의 형식이다. 송지현의 첫 번째 소설집의 표제는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이다. 에필로그는 본편의 뒷이야기를 뜻한다. 이야기의 다음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농담같은 현실에 농담으로 대응하는 그들의 삶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두의 바람과 달리 희망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가는 또 다른 소설집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통해 “오늘이 당연하게도 내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삶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어쨌든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믿음이 있는 한 송지현의 이야기도 당연하게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이를테면 여전히 현실에 수납되길 거절하는 사람의 방식으로.

‘뜨거운 열정과 따뜻한 서정성을 겸비한 작가’ 김혜빈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김혜빈 소설의 장소는 독특하다. 그의 캐릭터들은 비무장지대 마을의 인쇄소(‘등에 불을 지고’), 아일랜드 이탄지(‘그라이아이’), 침습형 뇌 컴퓨터 제작연구소(‘순환 순수 역학’), 모형 제작소(‘솔리터리 크리처’), 3D 영상 제작사(‘레드볼’) 등에서 활동한다. 캐릭터들도 심상치 않다. 인쇄소가 불타면서 첫 책 출간이 미뤄진 신진 소설가, 태어날 때부터 백발인 소녀들, 자신의 이름을 바꾼 늑대인간, 캐리어에 담긴 아기, 버추얼 휴먼 진이가 등장한다. 장소와 캐릭터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감을 준다. 하드보일드 문체인 김혜빈의 서사는 시간과 공간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커다란 스케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늘 묵직한 주제에 도달한다. 근미래에 실제 펼쳐질 수 있는 장면들에는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갈등과 고민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캐릭터들은 공히 ‘화상 자국’ 같은 천형을 안고 있다. 김혜빈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잔잔한 흐름으로 구성된 ‘단지 그것을 위한 베개’에서도 사시안을 가졌거나 얼굴에 반점을 지닌 인물이 나온다. 이 캐릭터들의 원천은 젠더 갈등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그라이아이’), 냉대의 시선과 의도치 않은 모멸감을 일상적으로 느껴야 하는 소수자(‘솔리터리 크리처’), 무한경쟁과 암투로 자유를 잃어가는 직장인(‘레드볼’), 공포어린 재앙에 과잉 기술로 맞서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문명인(‘순환 수수 역학’)이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 김혜빈 서사의 베이스다. 그의 소설은 강렬한 주제의식, 스피디한 문체, 스릴 넘치는 플롯으로 장착되어 긴장과 감동을 선사한다. 2024 경기예술지원 선정작 ‘단지 그것을 위한 베개’(교유서가)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단지 그것을 위한 베개’에서 세 친구 구나⋅용인⋅다희는 다세대주택 2층에 입주, 남편이 죽은 뒤 홀로 생활하는 아랫집 주인 지타와 일상에서의 사소한 불편과 소소한 희망을 함께 엮어간다. ‘배추밭에 얼굴을 묻을 때’에서도 ‘나’(시내)와 엄마는 경기도 외곽 신도시아파트로 이사 와 중학교 동창 호준이를 우연히 만나 텃밭을 일구며 서로 조금씩 다가간다. 무심한 듯 세밀하게 그 마음들의 이동 경로를 짚어가는 따뜻한 소설을, 그는 쓴다. 낮고 작은 이야기도, 광활한 이야기도 다 쓴다. 열정과 서정성을 두루 갖춘 작가 김혜빈은 매일 독보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슬픔과 함께 하는 ‘순한 시인’ 박한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이파리 가득한 가지 사이에 송혜희가 없다.”(‘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 주세요’) 시집을 펼치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시인을 신뢰해도 좋겠다. 누군가의 실종을 알리는 현수막 앞에서 바쁜 걸음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간절한 사연이 부가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며 그들의 사라짐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움직임을 멈추고 “‘좀’이라는 글자에 추월당한 채” 생각한다. ‘좀’이라는 단 하나의 음절에 내포된, 하지만 너무나 거대한 질량이 응축된 슬픔의 중압에 대해. 박한은 2018년 지용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2023년 첫 시집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을 펴냈다. 시집은 “네가 영원히 하선해버린/그 하루를 인양하기 위해”(‘빈 배-육지의 노래’), “나는 이제 함부로 눈을 뭉치지 못하겠지”(‘나는 이제-10월29일 이태원’)라는 진술과 함께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들과 그들의 예기치 않은 부재를 고스란히 견뎌내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기억에 새긴다. 또한 각자의 삶에 과적된 무게로 이미 “구겨”(‘깡통을 줍는 노인’)질대로 구겨지거나 “흉터를 흉터로 부축하는”(‘서울전파사’)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의 슬픔들과 마주 않는다. 도무지 총량을 가늠할 수 없는 이 슬픔의 압력에 가끔은 고개를 저을 법도 하지만 시인은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순한 골목’)라는 선언으로 자신을 찾아와 두드리는 온갖 슬픔들을 온전히 감싸안기로 한다. 박한은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지만 슬픔에는 저항하지 않는, 아니 애초에 저항할 수 없는 ‘순(順)’하고 ‘순(純)’한 시인’이다. 시인은 우리의 곁에 산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슬픔의 심연에 “제대로 착륙하기 위해선/더 많이 기울어져야 한다고”(‘퍼스트 맨’) 다짐하는 사람이다. “잃어버린 한 음을 찾기 위해” “상처투성이”의 “무릎”(‘세밑’)을 가진 시인의 옷은 “그래서 늘 상복”(‘저녁의 매무새’)이다. 언제까지나 슬픔과 함께 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른다. 다만 첨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여정에 함께 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슬픔에 더 많이 기울어져야 한다.

‘곡쟁이’ 시인 권선희…동해 경전(經典)에 바치는 지극한 헌사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시인 권선희는 ‘곡쟁이’다. 곡쟁이는 상주를 대신해 상주보다 더 서럽게 울어주는 전문 울음꾼이다. 어쩌면 시인의 운명은 곡쟁이와 다를 바 없다. 권선희 시는 1998년 데뷔 이후 줄곧 저 경북 동해안 ‘구룡포’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아온 곡쟁이의 곡소리와도 같다. 구룡포는 “비린내 나는 포구에 붙어//퇴화를 꿈꾸는//종점”(‘종점다방’) 같은 곳이지만 시인은 그곳에서 사반세기 동안 평생 자신이 무슨 시 쓰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펄펄 살아있는 입말(口語)로 ‘구룡포 아리랑’을 썼다. 그렇게 시집 ‘구룡포로 간다’(2007년), ‘꽃마차는 울며 간다’(2017년),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2024년)을 출간했다. 시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가끔 받아 적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권선희의 시는 소리 내어 읽어야 제맛이다. 권선희는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에서 우리 시대 곡쟁이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시집은 시 쓰는 만신(萬神·무당)이 된 권선희가 쓴 살림의 굿판이라 할 수 있다. 당달봉사 앞에서 “무당보다 더한 팔자가 가엾어 디립다 징만 쳤지. 징에 기대 내가 펑펑 울었지.”(‘징’)라고 술회하는 모습에서 시인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바다에서 숨을 놓은 해녀를 살리기 위해 “가라앉는 삶”을 떠받치는 참돌고래가 그러하듯이 “살아래이/살 거래이”(‘물의 말’)라고 아우성치는 해녀들의 모습은 사람됨이란 무엇인가 깊이 숙고하게 한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처럼 감동적으로 역설한 작품을 나는 미처 알지 못한다. 곡쟁이로서 권선희가 눈길을 주는 대상은 갯마을에 사는 인간만은 아니었다. “목숨으로 목숨을 연명”(‘생흔화석’)하는 뭇 존재들을 껴안는다. 조풍진, 목포집 덩실이, 덕수씨, 김종팔, 방울이 같은 개 이름 작명을 보라. 또 해파리, 빵게, 북어, 미주꾸리, 고래, 군소, 물미역 등 ‘물것’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으며 인간중심주의를 간단히 넘는다. 그러므로 권선희의 시와 산문은 동해 경전(經典)에 바치는 지극한 헌사라고 봐야 옳다. 시인은 구룡포를 떠나 경기도 가평으로 이주했다. 권선희는 그곳이 바다든 육지든 간에 이곳에 살기 위해 공동체를 지키고 공동체의 파괴에 맞서는 곡쟁이로서의 상상력을 십분 발휘할 것이다. 저 참돌고래에게 배웠듯이 이 땅의 대지(大地)로부터 “고귀한 바닥의 권리”(‘밑줄’)를 배우며 계속 대신 울어줄 것이다. 저 화엄의 바다에서 그러했듯이.

‘겹눈’의 소유자 서성란, 진실과 대면하는 글쓰기를 보여주다 [경기작가를 해석하다]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예술지원’ 사업을 통해 지역 작가의 출간을 지원하고 있다. 경기일보는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경기예술지원 1, 2차’ 사업에 선정된 작가 10명에 대한 기획 평론 시리즈 ‘경기 작가를 해석하다’를 연재한다. 5명의 문학평론가가 작가들의 창작 세계를 조명해 지역 예술 담론을 확장해나갈 예정이다. 서성란은 ‘겹눈’을 가진 작가다. 그는 1996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데뷔한 이후 30년 동안 사실을 직시하되 쇠락과 노화의 풍경을 깊이 응시하며 공감과 상상 너머 진실과 대면하려는 글쓰기를 여일하게 보여줬다. 악성 치매노인(‘침대 없는 여자’), 죽음 앞의 인간(‘디그니타스로 가는 열차’), 이주여성·이주노동자(‘파프리카’ 및 ‘쓰엉’), 장애인(‘풍년식당 레시피’), 세월호 참사 희생자(‘유채’), 추방 입양인(‘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소설가 지망생(‘마살라’) 등 그가 소설로 형상화한 인물들은 그의 붓질을 통해 비로소 온전한 ‘개인’으로 호명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출세작인 ‘파프리카’(2007년) 속 베트남 여성 ‘수연/츄엔’은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는 파프리카 줄기처럼 낯선 땅에서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이주여성을 은유한다. 그리고 ‘파프리카’의 문제의식은 장편소설 ‘쓰엉’(2016년)에서 더욱 심화됐다. 서성란은 ‘쓰엉’의 ‘작가의 말’에서 “‘파프리카’의 츄엔, 그녀는 쓰엉이 되어 내게로 왔다”고 썼다. ‘쓰엉’은 베트남어로도 출간됐다. 이처럼 서성란은 부름에 응답하는 행위야말로 책임감과 연결되는 문학의 윤리라는 점을 예민하게 의식하며 소설을 쓴다. 2022년 경기문학작가 확장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된 소설집 ‘유채’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려는 글쓰기를 보여줬고 ‘쓰엉’에서는 ‘가일리’라는 공간을 통해 낯선 타자를 좀처럼 사회적 성원(成員)으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 안의 견고한 무의식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최근작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2024년)에서는 추방 입양인들의 ‘다중 소수자’로서의 존재를 오롯이 드러내고자 했다. 작품 제목 ‘이규호 노먼 테리어’는 ‘이규호’의 복잡한 고유성을 잘 드러내며 ‘당신의 존재는 죄가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하지만 서성란의 글쓰기는 당위적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장편소설 ‘풍년식당 레시피’에서 상투적인 글쓰기에서 탈정(脫井)하며 ‘음식’(팥죽)이라는 코드를 통해 조각보가족(patchwork family)의 가능성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서성란이 어느 작품에서 “작가란 타인의 상처에 고통을 느끼고 아파 하는 사람”이라고 한 말은 서성란 글쓰기의 특장(特長)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공감과 상상 너머 ‘진실’과 대면하고자 하는 서성란의 글쓰기가 한국문학의 영토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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